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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평양으로 9

오늘의 쉼터 2014. 12. 5. 00:26

제36장 평양으로 9

 

 

대반격(大反擊)

 

신라가 감히 평양성의 도호부까지 공격해 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당주 이치는

쫓겨 온 설인귀로부터 전황을 자세히 전해 듣자 눈알이 튀어나오고 먹은 것이 올라올 만치

크게 분개했다.

이는 웅진성이 함락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애당초 선제 이세민이 신라왕 김춘추와 동맹을 논의할 때 백제와 평양 이남의 토지는

신라에게 주기로 약정한 터였다.

이치는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비록 허락 없이 웅진을 아우른 신라가 괘씸은 할지언정

그 자체를 나무랄 형편은 아니었다.

백제의 일은 대국의 위신에 관련된 일일 뿐,

어차피 신라가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는 게 당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평양성은 도호부까지 설치해둔 엄연한 당나라 영토였다.

이전의 약속이야 어쨌거나 고구려는 중국의 오랜 근심이었고,

당조가 서고도 해마다 요동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꼽아보면 수십만이었다.

수나라가 망할 무렵 크게 유행했던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요동으로 가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는

아직도 대륙의 도처에 나돌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사 이래 고구려를 치기 위해 흘린 피가 무릇 몇 말이며,

그렇게 싸워온 세월은 장장 몇 해였던가!

이는 만천하가 이미 다 아는 일로서 고구려는 누가 뭐래도

누대에 걸친 중국의 숙적이며 천적이었다.

그것은 대륙의 수많은 인접국들과는 처음부터 격이 다른 나라였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게 된 것은 물론 대륙의 역사가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는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항상 그 배후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와 싸운 나라치고 온전하게 사직을 보전한 나라가 없었고,

요동으로 군사를 낸 황제치고 뒤에 후회하는 경구를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 이세민만 하더라도 번번이 대패하여

들개처럼 쫓겨 다니다가 안시성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성주의 화살에 한쪽 눈마저 잃지 않았던가.

그 이후 요동에서 시작돼 탁군과 낙양에까지 널리 유행한 노래가 있었으니

이는 실명(失明)한 이세민이 패배를 자인하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비단 1백 필을 주어 사죄했다는 치욕적인 사실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새야 새야 무당새야 안시성에 앉지 마라
샛바람 부는 깃이 눈동자를 가릴레라
친정살이 좋다더니 고생고생 말도 마라
비단 백 필 짜내다가 남 좋은 일 한단 말가

 

오죽하면 탕왕과 무왕 이후 최고의 성군이라 일컫던 이세민조차도

부디 요동 정벌만은 피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겼을 것인가.

이 같은 천신만고의 과정을 거쳐 천우신조로 공취한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고구려란

말만 들으면 진저리를 쳐댔고, 이치 자신조차 아직도 가끔은 제 살을 꼬집어가며,

“남생이 투항한 것은 선제의 음덕이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천년 동안 풀지 못한 숙원을 나의 세대에 이룰 수 있었으랴.”

하고 고구려 멸망을 꿈처럼 여길 때가 많았다.

그렇게 취한 고구려를 남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는 어떻게든 산산이 파괴하여 흔적도 없이 궤멸시켜야 할 위험천만한 무리들일 뿐이었다.

부여융을 도독으로 삼아 사직을 잇도록 한 백제의 경우와는 달리 고구려의 왕족들을

모조리 당나라로 끌고 간 것도, 20만이 넘는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일도 그런 인식 때문이었다.

평양도호부에 해마다 무수한 당인 관리들을 파견한 점은 고구려에 대한 당의 두려움과 집착이

얼마나 지대하고 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하물며 평양성 함락 이후 구토 각지에서 창궐한 다물군의 저항으로 아직도 골머리를 썩이던 이치였다.

명색 동맹국으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 어지러운 틈을 노려 웅진을 친 것만으로도

훗날 반드시 혼을 내리라 마음을 도슬러먹고 있던 판인데,

설상가상 평양성까지 치고 나오자 이치는 더 이상 어떤 이유로도 신라와 법민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쫓겨온 설인귀와 김인문, 박문준, 김한림 등 낙양의 신라 숙위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곧바로 신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소집했다.

그러나 천운이었을까.

하필이면 이 무렵 낙양에는 또 하나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서쪽의 토번이 침략을 해온 것이었다.

토번은 백제가 망한 이듬해(661년)에 당나라 서쪽 국경의 토욕혼을 침범함으로써

당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토번의 영향을 받은 북쪽의 돌궐과 거란까지 가세해

해가 갈수록 당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게다가 요동의 다물군까지 합세한 서력 670년경부터 이들 세 나라의 침략과 불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은 마침내 토번 정벌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서너 해가 지난 그때까지 당의 토번 정벌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정벌은커녕 오히려 당군이 대패하여 쫓겨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당나라 장수들이 미처 신라로 출발하기 전에 날아든 서쪽 병영의 급보에 우유부단한 이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고민에 잠겼다.

보다 못한 무후가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성밖에 도는 역질이지만 토번은 입안에 생긴 병입니다.

어찌 입에 생긴 병을 두고 바깥의 역질을 먼저 다스리겠습니까?”

이에 장문관(張文瓘)을 비롯한 당조의 중신들도 한목소리로 무후의 뜻에 동조하자

이치는 유인궤, 고간, 설방, 흑치상지 등에게 대군을 맡겨 서경(장안)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결국 옥에 가둔 설인귀를 불러

신라 토벌을 명하고 이근행에게도 사람을 보내 설인귀와 보조를 맞추도록 지시했다.

이치는 설인귀에게, 만일 계림을 토벌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오금을 박은 뒤에 어렵사리 끌어 모은 낙양의 정병 2만을 내주었다.

평양 이남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설인귀는 낙양을 출발하기 전에 향도(길잡이)로 삼을 만한

자를 구했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제 발로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풍훈(金風訓)이었다.

“신의 아비는 백제를 멸할 때 대공을 세워 그 명성이 한때 천하를 울렸으나

이를 시기한 신라왕 법민이 왕위에 오르자 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이고 말았으니

자식으로서 어찌 맺힌 원한이 없겠나이까?

법민은 신의 아비뿐 아니라 가까운 일족들을 무참히 도륙내고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에는 상국으로 오려던 먼 일가들까지 이 잡듯이 잡아 죽였다고 하니

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일구월심 법민이 사지가 찢겨져 처참히 죽는 것을

보기 위함이올시다.”

“그대의 아비는 누구인가?”

“병부령과 대당 장군을 지낸 김진주가 신의 아비옵고,

남천주 총관을 지낸 진흠은 신의 숙부입니다.”

풍훈의 말에 설인귀는 크게 놀랐다.

그는 대뜸 풍훈의 손을 그러잡고 흥분하여 소리쳤다.

“진주 장군의 명성은 나도 일찍이 귀가 따갑게 들었소!

오, 신라왕 법민은 신하의 도리도 모르는 자이지만

군왕의 자질도 없는 흉악무도한 위인이구려!

진주 장군과 같은 이를 죽였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오!”

설인귀가 짐짓 죽은 진주를 추켜세우자 풍훈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군께서 저를 의심치 않으시거든 향도로 삼아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내 어찌 그대를 의심하겠소!

마땅히 우리 군사를 이끌어 황제께 공을 세우고 사사롭게는 부친의 원한을 풀기 바라오.

만일 법민을 사로잡는다면 사지를 묶어 칼과 함께 그대에게 던져 주리다!”

그러자 풍훈은 미리 자신이 그려온 삼한의 지도를 꺼내놓고 말했다.

“강한 곳을 피하고 부실한 곳을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입니다.

지금 신라는 새로 얻은 평양에 군사를 집중 배치하여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을 것이므로

자연히 도성은 비었을 것이며 다른 지역의 방비도 허술할 게 틀림없습니다.

또한 한성 이남의 서안(西岸:서해안)은 옛 백제의 영토요,

그곳의 백성과 수군(水軍)들도 대개는 백제인들이라 법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합니다.

이근행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 배를 타고 당항성(경기도 화성) 해역으로 오게 하여 두 군사가

함께 7백 리 당은포 길을 따라 금성으로 진격해 들어간다면 대(竹)를 쪼갤 때와 같은 형세로

손쉽게 금성을 공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입항지로 추천한 곳은 매소홀(인천)의 소성(邵城)과 천성(泉城)이었다.

풍훈의 말은 그대로 당군의 진로가 되었다.

그해 9월, 설인귀는 2만 군사를 3백여 선단에 나누어 태우고 신라의 매소홀을 향해 진격하였고,

북방으로 달아났던 이근행도 이와 때를 맞춰 거란과 말갈, 유주와 병주의 장정들을 동원해

역시 뱃길을 따라 남향하였다.

그런데 설인귀의 군사 2만 중에는 오초(吳楚:과거 오나라와 초나라)의 수부가 포함돼 있었으며,

이들이 탄 배도 해전(海戰)이 가능한 병선(兵船)들이었지만,

이근행의 배는 그저 운반만을 위해 급조한 초라한 목선들이었다.

더구나 말갈과 거란에서는 당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아 군역 동원에 한동안 애를 먹었다.

이근행은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나이가 어린 성동(成童)들까지 끌어 모으느라

보름이나 뒤늦게 배를 띄웠다.

그 바람에 당초 군기(軍期)를 약정하고 시일을 맞춰 해상에서 만나기로 한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동제인의 도움을 받아 등주를 출발한 설인귀의 군대가 매소홀 해역에 당도한 것은 음력 9월 중순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늦가을,

낮에는 내리쬐는 가을볕이 제법 따갑기도 했지만 밤이 되면 해풍은 군사들의 옷과 골육을 파고들었다.

설인귀는 바다 한복판에서 이근행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사나흘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데다 항차 잔잔하던 바다에 풍랑이 일 기미마저 보이자

하는 수 없이 먼저 천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서해안의 방비를 맡은 이는 대아찬 철천(徹川)이었고,

천성 성주는 급찬 모진(募眞)이었다. 효천의 아우 철천은,

“오늘이야말로 석문에서 억울하게 죽은 내 형의 원수를 갚는 날이다!”

하고 곧 해역의 선박 1백여 척을 동원해 대항에 나섰으나 미처 선단을 정렬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당군의 습격으로 반나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설인귀는 철천이 이끌고 나온 신라 배를 사방으로 에워싸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든 다음

갑판에 배치한 포와 쇠뇌를 퍼부어 일시에 난파선을 만들었다.

철천은 허겁지겁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한껏 기세를 올린 당군들은 쏜살같이 해안에 배를 대고 그대로 천성을 향해 돌진했다.

철천이 죽고 수군들이 몰살당했다는 비보에 접한 성주 모진은 급히 성문을 닫아걸고

한산과 국원 소경에 두루 원군을 요청했다.

천성은 지리상 한산에 인접한 곳이었으나 국원의 속현이었다.

하지만 원군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성은 함락되고

끝내는 모진마저 당군 졸개들의 칼날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손쉽게 천성을 공취한 설인귀는 그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이근행의 군대가 소성에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한편 한산주 총관 유공과 국원 소경 총관으로 있던 당천은 급히 주군(州軍)을 이끌고

매소홀로 달려갔지만 천성에 주둔한 당군의 숫자가 2만이나 되자 쉽게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주(兩州)의 군사들 대부분은 이미 평양성을 칠 때 북방에 동원되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머지 군사는 다 합해야 겨우 1만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유공과 당천은 천성 주변에 깃발을 늘여 세워 군사를 포진시키고 금성으로 사람을 보내

사태의 긴박함을 알렸다.

봉화를 통해 당군의 침략 사실을 알고 있던 법민은 전령이 당도하여 천성의 전황을 소상히 아뢰자

곧 강수와 자신의 두 아우를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숫자로 치면 야 신라 군사의 절반가량이 아직 남쪽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장수와 맹졸들은 모두 북방으로 보낸 터였고,

지방의 향군들은 그다지 용맹하지도 않을뿐더러 무기와 물자도 부족하였는데,

그렇다고 북방의 군사를 남쪽으로 되돌릴 형편도 아니어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믿을 것은 도성과 대궐의 방비를 맡은 군관(軍官)의 3만 정병이 있을 뿐이니

급한 대로 그들을 파견하는 게 어떻겠소?”

법민의 제안에 왕제 노차(老且)와 개원(愷元)이 펄쩍 뛰었다.

“그러잖아도 대왕께 불충하는 무리가 있어 걱정이온데 어찌 도성의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군관의 군사는 반보도 움직일 수 없으니 부디 그런 말씀일랑 마옵소서!”

연로한 천존과 흠순을 제외하면 이때 도성에 남아 있던 믿을 만한 장수로는 오직 군관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차마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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