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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평양으로 8

오늘의 쉼터 2014. 12. 4. 17:19

제36장 평양으로 8

 

 

황주 벌판에서 만난 설인귀의 군대가 육화진을 만들어 달려 나오자

신라군의 선두에 섰던 설수진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비명에 간 내 아우의 원수를 갚겠구나.

나는 오늘과 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저따위 낡은 전법으로 감히 누구를 상대한단 말인가!”

그는 곧 선군의 군사들을 사열하고 금성에서 훈련시킨 육진병법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중간에 보병들로 장창 부대를 만들어 세우고 측면에는 도검 부대를 배치하여

원진(圓陣)을 구성하는 한편, 육방으로 말을 탄 마군들을 내세워 적의 대오를 흐트러뜨리게 하였다.

나팔소리에 따라 마군들이 육방으로 쏜살같이 치고 나가며 꽃잎(보병)을 따면 곧바로

적의 마군들이 드러나게 마련이었고, 그 한복판을 장창 부대가 벌침을 쏘듯이 공략하고

동시에 측면의 도검 부대가 양쪽으로 흩어지며 보군의 후미를 끊어놓으면 육화진은

저절로 형세를 잃게 마련이었다.

그때 북소리에 맞춰 넓은 그물을 던져놓고 창부대와 검부대가 일시에 빠져나오면

후미의 궁척 부대가 화살을 날려 그물에 갇힌 적들을 궤멸시키는 것이 육화진에 대항하는

육진병법의 틀이었다.

병법과 병법, 용병술과 용병술이 맞붙은 황주벌의 일전이었다.

양측의 군사들은 저마다 천지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나팔소리와 북소리에 맞춰

거세게 마주쳤고, 뒤이어 어지러운 교전이 시작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격고명금과 사방의 쇳 날 부딪치는 소리만 갱연할 뿐

좀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접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체 저것이 무슨 전법이오?”

선두의 보병 부대가 맥없이 허물어져 사방으로 달아나는 것을 본 설인귀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묻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이근행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 또한 아직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진형이오!”

설인귀는 보다 못 해 말배를 걷어차고 나가 장수와 군사들을 독려했다.

“각 부대는 들으라! 어떤 경우에도 대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떨어져 있어도 대형을 떠나지 말고, 진격하거나 퇴각하더라도 절대로 대오를 허물지 말라!”

하지만 설인귀의 그 말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이미 신라의 마군에 예기를 꺾인 보병들이 광풍에 흩어지는 꽃잎처럼 진형에서 떨어져나가자

전대의 기병들은 졸지에 우왕좌왕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창 부대가 일제히 에워싸며 포위망을 압박하자

말을 탄 군사들은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저희들끼리 좌충우돌하였다.

장창에 찔려 말 한 마리가 쓰러지면 주변의 여러 말들이 동시에 나뒹굴었고,

말 잔등의 사람들도 사정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대오를 이탈한 보병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장수들의 독려에 못 이겨 황급히 본대로 돌아오려 했으나 기다리는 것은

어느 틈에 앞을 가로막고 무섭게 칼을 휘둘러대는 신라의 도검 부대였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떨어진 육화진은 조금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써 짜놓은 진형은 금세 풍비박산이 났고,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당군의 목이 그야말로 추풍낙엽과 같았다.

“징을 쳐라, 징을! 어서 징을 쳐 군사를 거두어라!”

패색이 짙은 것을 알아차린 설인귀가 목이 터져라 외치며 퇴각을 명했다.

그러나 정작 끔찍한 일은 금고(金鼓) 부대가 징을 치는 순간에 일어났다.

징소리를 들은 신라군이 쏜살같이 전장을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홀연 어디선가 천라지망(天羅地網)과 같은 넓은 그물이 날아들어 당군들의 머리를 뒤덮었다.

그리곤 이내 활을 든 궁척 부대가 일어나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었다.

신라 궁척 부대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다.

당주도 탐낸 명공 구진천이 일생을 두고 만든 활이 아니던가.

억울하게 죽은 노사(弩師)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가 생전에 만들어놓은 활들은 사방에서 시위를 떨며 귀신처럼 울어댔다.

풍뢰소리를 방불케 하는 섬뜩한 곡소리에 실어 보낸 화살들은

그물에 갇혀 허우적대는 사람과 말을 순식간에 모조리 고슴도치로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설인귀는 휘하의 군사 2만이 자신의 눈앞에서 완전히 녹아내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거푸 몸서리를 쳐댔다.

지리멸렬과 일패도지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일컫는 말이리라.

그는 너무도 기가 막혀 달아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어서 피해야지 뭘 하고 있소?”

나무라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이근행이었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진중에 이르자 급히 설인귀의 팔을 낚아챘다.

“우선 북방으로 가서 목숨부터 건지고 봅시다!”

칠중성의 오랜 대치전에 지쳐 피곤한 심신을 쉬러 왔던 이근행 이었다.

그는 설인귀가 알아서 잘하려니 싶어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섰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비로소 말을 몰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살아 있는 군사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이근행은 넋을 잃은 설인귀를 대신해 칼을 뽑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평양성에 이르러 살아남은 인원을 헤아려보니 1천 명이 조금 넘었다.

이근행은 그들로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설인귀에게 말했다.

“평양성을 잠시 비워두고 압록수를 건너갑시다.

말갈과 거란은 우리의 번병이니 우선 급한 대로 원군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설인귀는 새파랗게 이를 갈았다.

“장군께서는 그렇게 하시오.

나는 배를 타고 본국에 가서 황제께 이 사실을 낱낱이 고해 바쳐야겠소!”

그는 분에 차서 못 견디겠다는 듯 사지를 부들부들 떨어댔다.

“요동이 중한 게 아닙니다!

황제의 허락을 얻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를 모두 동원해 신라부터 쳐야 하오!

아, 내 어찌 저 간악한 계림의 족속들을 용납할 수 있겠소!”

한동안 의논 끝에 이근행은 거란과 말갈 군을 소집하러 북방으로 갔고

설인귀는 황제에게 사실을 고변하기 위해 낙양으로 향했다.

이로써 신라는 웅진에 이어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까지 수중에 넣고

사실상 삼한일통의 위업을 달성했으니 이때가 을해년(675년) 늦봄,

백제를 멸한 지 15년 만이요 고구려를 멸하고는 7년 만의 일이었다.

평양을 점령한 법민은 평양성에 달반 가량 머무르며 북으로는 남살수(南薩水:청천강),

동으로는 안북하(安北河:함경남도 갈마반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해

신라의 주와 군으로 삼고, 관성(關城), 철관성(鐵關城:함남 덕원 일대) 등을 쌓는 역사를 일으켜

국경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군을 따라 고향으로 갔던 고구려 장수와 유민들의 공로는 가히 지대한 것이었다.

안승이 나서서 직접 민심을 달래는 한편 다른 장수와 유민들도 당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유민들을 적극 포용해온 법민왕의 인품과 정책을 선전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했다.

당나라 관리의 학정에 시달려온 구토의 백성들에게 안승의 출현은 그 자체로써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특히 평양 이남의 백성들 중에는 당나라 관리를 죽이고 강서향 주민들을 구출해 달아난 검모잠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내지에서 다물군을 이끌며 한때 명성이 높았던 고연무와 백포정도

전설 같은 인물로 회자되던 터였다.

설인귀는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온 마당이라 백성들의 놀라움과 반가움은 더했다.

“나라가 망하고 나니 별놈의 일이 다 있구먼. 안승 왕자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갔다더니

죽은 사람이 죽인 사람을 호위하여 나타났네그랴.”

“그 소리를 믿었다면 자네가 어리석은 게지.

어디 검모잠뿐이야? 설인귀 말로는 고연무와 백포정이도 벌써 옛적에 죽은 사람들 아닌가.”

“만절필동(萬折必東)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네.

삼한이 하나라는 소리를 다 믿을 건 없지만 당나라 치하보다는 나을 테지.”

“낫건 못하건 그거야 둘째 치고 우선은 당나라 만무방이 들을 안 보고 살게 생겼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살맛나는 일이 틀림없네.”

신라군이 평양성을 점령한 지 불과 한두 달 만에 민심을 진무한 데는

이렇듯 당인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옛 왕자 안승의 출현이 무엇보다 큰 구실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살수 북방의 사정은 남쪽과는 약간 달랐다.

고구려가 망한 뒤 내지에서 활약한 다물군의 거점이 주로 백산(백두산) 일대와 국내성 주변이어서

민심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당은 다물군을 제압하려고 해마다 이근행의 말갈 군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살수 이북은 어느덧 말갈의 권역에 편입돼 있었다.

고구려의 오랜 우방이자 번국이었던 말갈은 당의 위세에 눌려 파병 요청을 마다할 수 없는 처지였고,

그 바람에 당이 신라나 고구려 다물군과 벌인 싸움에서 언제나 당군을 대신해 방패막이가 되곤 했다.

말갈 내부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차츰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매번 수천, 수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는 싸움에 동원되는 것을 좋아할 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은 고구려 북토의 일부를 말갈에게 나눠주고 당인 관리와 말갈의 장수로 하여금

공동으로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말갈의 반발을 간신히 무마하고 있던 터였다.

법민은 거느리고 갔던 장수들과 10만에 달하는 9군을 모두 국경에 배치해 당병과 말갈,

거란의 반격에 대비토록 한 뒤 그해 5월,

당에서 돌아온 강수와 연로한 천존만을 데리고 금성으로 돌아왔다.

생각 같아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기회를 노렸다가 압록수 북방과 동북의 백산까지 도모해보고 싶었지만 반목과 내분에 휩싸인 도성을 너무 오래 비운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법민이 돌아올 때 신라 장수들은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 장수들을 평양성에 그대로 남겨둘 경우

반드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거라며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그러자 법민은 웃으며 말하기를,

“안승이 자신의 이름을 속이면서까지 과인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평양을 공취하여 백성들을 진무하는 데도 적잖은 공로가 있었는데

과인이 어찌 그를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강수와 흠돌을 불렀다.

“경들은 지금 곧 안승의 거소로 찾아가 과인이 아무 날 아무 시에 환도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오.

임생은 안승을 만나고 사돈은 전날 사비내에서 신세를 입은 검모잠을 따로 만나되,

특히 사돈은 검모잠에게 우리 9군이 모두 평양에 그대로 남을 것임도 아울러 귀띔해주도록 하오.”

이때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 장수들은 법민이 군사들을 이끌고 환궁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법민이 돌아가고 나면 꿈에도 그리던 평양에서 몰래 여중을 끌어 모아 드디어 사직의 재건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겠거니 한껏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법민이 보낸 강수가 안승을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무 날 아무 시에 환도를 하실 거라고 특별히 안순 장군을 찾아뵙고

말씀을 여쭈라고 하셨소.”

하니 안승 으로선 돌연 가슴이 철렁했다.

강수가 돌아가고 나자 그는 급히 휘하의 장수들을 불렀다.

“법민왕이 과인에게 환도할 날짜를 일러준 것은

벌써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음이 아니겠소?”

안승의 말을 들은 고연무와 백포정도 당장 안색이 달라졌다.

그들이 한창 머리를 맞대고 법민의 진의를 헤아리느라

골몰할 무렵 검모잠이 뒤늦게 나타났다.

“전하, 모든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시급히 금마저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검모잠은 안승이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앞질러 소리쳤다.

그리곤 궁금해 하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흠돌이 자신을 찾아온 것과

신라의 9군이 그대로 평양성에 주둔할 것임을 아울러 말하였다.

“이는 법민왕이 우리의 속셈을 알고 사전에 불미스런 일을 막고자 함이 틀림없습니다.”

검모잠의 말에 고연무와 백포정도 쉽게 동의했다.

안승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낭패감을 느꼈지만 일변으론

법민의 세심한 배려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신라왕 법민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구려.

아아, 이제 떠난다면 몽매간에 그리던 고국산천을 언제 다시 되밟는단 말 이오……”

그들은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지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안승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법민을 찾아와서,

“신 등은 소임을 마쳤으니 이만 금마저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니 법민은 이들의 노고를 크게 치하한 뒤 후한 상급을 주고

조만간 필히 금성으로 부를 것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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