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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평양으로 6

오늘의 쉼터 2014. 12. 4. 16:37

제36장 평양으로 6

 

 

뒷날 당나라로 떠날 채비를 마친 강수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잠깐 눈을 붙이고 났을 때였다.

돌연 바깥이 소란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니 누군가가 크게 언성을 높이며,

“강수는 어디 있는가! 이 육시랄 놈아, 썩 이리 나와 해명을 하지 못하겠느냐?

만일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목을 치리라!”

하고 자신을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누굴까 싶어 문을 밀치고 나왔더니

여러 사람의 만류하는 틈바구니에서 노장 천존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쿠, 서불한 어르신이 아니옵니까요!”

강수가 황급히 맨발로 내려서서 천존의 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천존이 흰 수염을 휘날리며,

“일전에 그만큼 신신당부를 하였건만 너는 어찌하여 나를 금성에 남겨두고 왔느냐?

내가 나이를 먹었다고 이젠 너마저 나를 무시하는 게냐?”

하고 땅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쳐댔다.

“제가 감히 서불한 어른을 무시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요!”

“하면 우정 나만 금성에 달랑 떨궈놓고 온 저의가 대체 무엇이냐?”

“보잘것없는 당군 4만을 대적하는 일에 어찌 대장군의 수고로움까지 동원을 하오리까.”

“터진 주둥아리로 말은 잘도 한다.

이눔아, 대왕께서도 나투시지 않았더냐? 그걸 대체 변명이라고 하느냐?”

강수가 어쩔 줄을 모르고 한동안 쩔쩔 매다가,

“어르신뿐 아니라 흠순 장군도 금성에 계십니다.”

하자,

“그래, 말 잘했다.

흠순도 네가 금성에 돌아오면 목을 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

하고서,

“흠순이야 본래 비영비영하는 약골이지만 나는 아직도 혼자 만군을 대적할 힘이 남은 사람이다!

이 힘을 뒀다가 어디다 써먹으라고 그러느냐? 죽을 때 고생이나 오지게 하라 그 소리냐?”

좀처럼 분을 가라앉히려 들지 않았다.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임생이 어디 딴마음이 있어 그랬겠습니까.

다 아버님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고자 한 일입니다.”

천존을 따라온 한림이 보다 못해 나섰다.

그러고서야 천존도 겨우 진정하는 눈치더니 이내,

“내 대왕께도 한번 따져야겠다!”

하고는 미처 만류할 겨를도 없이 임금의 처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림이 강수를 보고,
“내일 당에 입조를 하신다던데 과연 괜찮겠소?”

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글쎄올습니다. 신이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으나 대각간의 행차와

유인궤의 군사를 돌리는 것은 하늘과 신령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공은 당조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소?”

“신이야 삼한 이외의 땅으로는 한 번도 벗어나 본 일이 없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지요.”

“하면 나와 작반하여 가는 것이 어떠하오?”

한림이 묻자 강수가 희색이 만면하여 대답했다.

“아찬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신으로서야 더 바랄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강수는 이튿날 한림과 같이 배를 탔다.

이들은 당성항에서 방물과 인부를 실은 교관선을 내었다.

바리바리 방물을 실은 수레를 먼저 운하가 지나는 양주(楊州) 땅에서 풀고

자신들은 서해를 거슬러 인문이 묵고 있는 등주로 갔다. 한성을 떠나기에 앞서

법민이 인문을 만나보라고 말하며 친히 함봉 서신까지 건네주었기 때문이었다.

해질 무렵에 하선한 이들은 곧 인문이 묵고 있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러잖아도 내지의 일이 궁금해 병이 날판인데 잘들 오셨네!”

두 사람을 만난 인문은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인문을 만난 강수가 땅에 엎드려 공손히 큰절로 뵙자 한림이 곁에서,

“나리, 이 사람이 그 유명한 강수 선생입니다.”

하고 소개했다. 인문이 대뜸 강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임생의 소문은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소.

대왕을 도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니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임생이 하는구려.

우리 계림에는 백 년을 두고 나올까 말까한 천하의 영걸들이 다투어 일어나니

국운이 융성하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소! 참으로 지친을 본 듯이 반갑소!”

강수는 몇 번 인문을 먼발치에서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대면하여 말을 나누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원을 울리는 대각간의 명성을 신이 어찌 모르겠나이까.

한낱 미천한 신분으로 천하의 영웅을 가까이서 뵈오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여 말을 잇지 못하겠나이다.”

한차례 인사가 끝나자 강수는 품안에 지니고 온 법민의 서신을 꺼내 인문에게 전했다.

인문이 두 번 절하고 함봉 서신을 꺼내 펼쳐드니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과인은 차제에 선왕의 유업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아우를 잃는다면 설사 당을 멸한들 과인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만일 계림에서 남경(평양)을 수중에 넣더라도 아우가 살아날 방법은 있는가?

과인은 군사를 이끌고 한성에 나와 있으나 아우의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움직일 것이다.

법민의 친숙한 글씨를 대한 인문의 눈에서는 홀연 주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한참 동안 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이윽고 한림이 조심스레 입을 열고,

“무슨 긴한 말씀이라도 계시 온지요?”

하니 그제야 인문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아닐세. 형제간의 사사로운 안부 편지일세.”

하고는,

“본국의 사정이 어떠한가?”

말을 돌려 물었다.

이에 강수가 본국의 내홍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를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삼한의 백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말하며,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의 유민들까지도 스스로 무기를 들고 찾아와 싸우기를 간청하였으니

오늘 삼한의 일은 전날 가야국의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야제국의 유민들은 신라에 병탄된 후로 오랫동안 배척을 당하였으나

이제 계림에서 신라인과 가야인을 구분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올시다.

신도 본래는 대야주 임나가량(任那加良:대가야. 지금의 고령)의 사람이지만

전란이 아니면 어찌 오늘과 같은 지위에 이르렀겠습니까?”

하니 그때까지 강수가 가야인인 줄을 모르고 있던 한림은,

“공도 가야 사람이오?”

하며 놀란 표정을 짓고 인문은 껄껄 웃으며,

“시류를 꿰뚫는 경의 혜안이 실로 놀랍소.

그러고 보니 가야국 망민 셋이 모여 계림의 일을 걱정하고 있구먼!”

하였다. 인문이 낙양에 사죄사로 간다는 강수의 말을 듣고서,

“내가 등주에 나와 있으니 낙양의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나

예년의 경우를 보면 요동에 파병하느라 군역 동원령이 내릴 때가 되었소.”

하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자네가 소백의 집을 알지?”

한림을 보고 물었다. 한림이,

“황노학하는 늙은이 말씀입니까?”

하니 인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임생이 입조하거든 자네는 소백을 찾아가게.

그에게 재물을 넉넉히 주고 부탁을 해두면 큰 도움을 얻을 걸세.”

하는 언질과 함께 족히 서 말이나 되는 금과 은을 내어놓았다.

인문과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강수와 한림이 낙양으로 떠나 운하를 따라온

방물짐을 만난 뒤에 강수는 입조를 청하고 한림은 소백을 찾아갔다.

그런데 천자를 만나는 일은 줄을 지어 순번을 기다려야 하고,

소백은 그럴 일이 없어 강수가 입조하기 전에 한림이 소백을 먼저 만났다.

소백은 한림이 들어서서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계림의 일로 왔지?”

하고서,

“보아하니 우리 군사를 되돌리라는 부탁을 하러 온 모양 이다만 그건 어려운 일이다.

계림의 운명은 다하였으니 내가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매몰차게 말끝을 분질렀다. 한림이 신통한 중에도 소백의 눈치를 살피며 그 앞에 앉아,

“천하의 도인께서 계림과 같은 번국 하나를 살리고 죽이는 일쯤 마음대로 하지 못할 턱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우리 인수 어른이나 좀 구해주시오.”

하고는 소백의 하인에게 자신이 싣고 온 자루를 가져오라 일렀다.

소백의 하인이 서 말이나 되는 금과 은을 낑낑대며 들고 와서 방에 풀어놓으니

소백이 홀연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서,

“허, 이런 고약한 일이……”

종잡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한림이 그런 소백에게 재물이 모두 인문의 수중에서 나왔음을 말하며,

“도인께서도 생각을 해보오.

인수 어른이 만일 계림에 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여 불귀의 객이 된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을 텐데 이는 도인께서도 바라는 일이 아니지 않겠소?”

하자 소백이 대뜸,

“아무렴, 바라는 일이 아니고말고!”

하고는,

“그래, 내가 무엇을 어찌 도우면 되겠는가?”

하며 왈칵 무릎을 당겨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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