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7

오늘의 쉼터 2014. 12. 4. 17:04

제36장 평양으로 7

 

 


강수가 아직 입조를 기다리는 사이에 소백이 무후를 찾아가서,

“제가 간밤에 선계 비경을 잠시 들여다보니 계림에 간 우리 군사들이 모조리 참변을 당하였고,

서방과 동방에서는 토번(吐蕃)과 요동의 반군이 거세게 일어나 전례 없는 국난을 당하였습니다.

금년의 육갑은 을해(乙亥)요, 을해의 간지는 오행으로 목수(木水)에 해당하는 것 이온데,

둘 다 양이 아니라 음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목수는 서로 맞서는 기운으로 특히 음의 수기(水氣)란 깊은 겨울밤에 감도는 죽음의 기운이올시다.

게다가 우리 군사가 등주에서 출발하였는데,

계림은 동남방에 있고 요동은 낙양의 동북간에 있습니다.

역(周易)에서 일컫기를 동남방은 건괘(乾卦)요,

동북간은 곤괘(坤卦)입니다. 건곤을 함께 상대하는 것은 천지와 싸우는 것으로

이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양쪽으로 군사를 낸다면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대저 이와 같은 때는 선행과 덕을 쌓고 내실을 기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지상책이요,

굳이 군사를 내자면 한 쪽을 택하도록 하옵소서.”

일대 장설을 늘어놓으니

소백의 말이라면 개가 범을 낳았다고 해도 믿던 무후가 홀연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러잖아도 토번과 요동이 시끄러워져서 걱정을 하던 터요!”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소백이 무후를 달래느라,

“하오나 금년을 지나면 마마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므로

반드시 연운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하며 환심을 산후에,

“아마 지금쯤 계림의 사신이 황제의 알현을 청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니

그가 사죄를 청하면 못이긴 척 가납하시고 계림에 보낸 군사를 시급히 거두는 것이 이롭습니다.

괘상의 기운을 보건대 동남방의 건괘가 특히 성성합니다.”

하고 권하였다. 소백이 미처 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무후가 좌우에 명하여

신라에서 온 사신이 있는지 알아보라 이르니 곧 내관이 와서 있다고 하므로,

“소백은 과연 앉아서 만리를 보는 사람이다!”

격절탄상하고서 더욱 소백을 신봉하게 되었다.

이에 강수가 순번에 구애됨이 없이 즉각 황제와 무후 앞에 이르렀다.

황제는 뒷전에 있고 무후가 나서서,

“너희 계림의 임금은 어찌하여 매번 죄를 짓고 사죄하기를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말썽을 일으키듯 하느냐?”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강수가 국궁재배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고구려의 유민을 거둬들인 죄가 있사오나

이는 황제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국을 돕기 위한 것이옵니다.”

하니 무후가,

“대체 그것이 무슨 되잖은 망발이더냐?”

하며 반문하였다.

“우리 임금은 요동의 반군들이 오랫동안 상국의 근심이 되어온 것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평소에도 군사를 내어 돕지 못함을 한탄해왔는데,

지난해에 그 반군의 일패가 서해로 도망 왔다는 말을 듣자

신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신이 판단하기에 요동의 반군들이라면 상국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흉악한 자들이요,

비록 형단영척(形單影隻)의 곤궁함에 처하여 바다로 나왔다고는 하나

원한을 품고 대국의 일부를 습격할라치면 어찌 폐하의 반나절 근심거리가 되지 않으오리까.

또한 대국의 동안(東岸)은 예로부터 외백제의 땅 이옵고,

아직도 오월(吳越)을 지나 서역의 남령(홍콩 부근)과 부남(扶南:캄보디아),

임읍(林邑:베트남)과 곤륜(崑崙:인도차이나)에까지 수많은 담로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소문을 듣자오니 고구려 유민 중에 배를 타고 그쪽으로 흘러들어간 무리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강수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계림의 속담에 천석꾼의 걱정은 천 가지요,

만석꾼의 걱정은 만 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비록 천하의 주인이오나

천하를 두루 살피시는 근심과 걱정 또한 얼마나 크고 깊겠나이까?

북으로는 거란과 말갈의 무리가 겉과 속이 다르고, 서돌궐이 그대로 있으며,

근래에는 서쪽의 토번이 자주 변경을 침범하고,

남역의 무리 또한 언제 반란을 도모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형세가 이러할 때 요동을 도망친 반군들이 사방 각지로 흩어졌다가 양적의 유민들을 규합하여

따로 한 세력을 형성한다면 이는 황제께 쉬 없애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될 공산이 큽니다.”

중국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본 강수의 말에 이치와 무후는

일순 책망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강수가 다시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신의 소견에 흉포한 반군들을 계림에 끌어들여 박토라도 내어주고

별도로 관리한다면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여겨 우리 임금께 그렇게 아뢰었고,

우리 임금께서도 신의 진언을 가납하여 그렇게 한 죄밖에 없사옵니다.

비록 반군을 거두지 말라는 폐하의 지엄한 분부가 있었으나

자식이 허벅지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것을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나이까?

충신은 자신이 처한 곳에서 오직 신하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황제께서 이를 불충이라 여기시오면 신의 목을 치소서.

임금을 잘못 보필하여 폐하의 노여움을 산 죄는 신에게 있는 것이지 임금이 불충하여

그런 것은 결코 아니옵니다.

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임금의 누명을 벗겨야겠기에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와 아뢰나이다.”

강수의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였느냐?”

한참 만에 이치가 물었다.

“자두가 신의 이름이오나 대개는 강수라고 부릅니다.”

“강수라, 과연 두상이 강하게 생겼구나.”

이치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 조아린 강수의 머리를 유심히 살펴본 뒤에,

“네가 그렇게까지 앞질러 생각하였다니 일변 기특하다.

하나 너희 임금은 전에도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의 반중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거둬들인

전과가 있으니 짐의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웅진을 함부로 침범한 일도 아직 명쾌히 해명하지 아니하였고,

대국을 섬기는 수많은 충신들을 내쫓은 일 또한 짐은 그 진적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사정이 이와 같을 때는 의심받을 짓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이로울 터인즉,

너는 너희 임금에게 가서 짐의 뜻을 분명히 전하라.

다시 칙명을 어기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중벌로 다스릴 것이니라.”

하니 이미 강수를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돌아섰던 무후도,

“너를 살려주는 것은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하며 매섭게 오금을 박았다.

강수가 물러나자 이치는 유사에 말하여 법민왕의 관작을 종전대로 복구하고

인문을 임해군공으로 고쳐 중로에서 되돌리는 한편 유인궤에게도 사신을 보내 철군을 명하였는데,

위신이 실추될 것을 우려하여 말갈장수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고

설인귀와 더불어 평양에 머물며 신라를 주시하도록 일렀다.

이때 유인궤는 칠중성을 사이에 두고 신라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칠중성에서는 3만이 넘는 군사를 매일 5천 명씩 교대로 번을 세웠다.

이를 알 바 없던 유인궤는 한동안 4만의 군사로 매일 성을 공격하며 신라군이 지치기를 기다렸지만

어떻게 된 판인지 성안의 군사들은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저것들이 무슨 진귀한 보약을 삶아먹고 나왔기에 날마다 싸우고도 저토록 근력이 왕성하단 말이냐?

오히려 갈수록 기운이 더 좋아지는 것 같구나.”

게다가 성밖의 공터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군량과 마초도 실은 강변의 모래를

자루에 담아놓은 것임을 알게 되자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낙양의 사신이 와서 철군하라는 황제의 칙령을 전하니

유인궤는 그날로 당장 군사를 거두어 허겁지겁 배에 올랐다.

유인궤가 떠나고 나자 칠중성에는 당군의 철수를 알리는 봉화가 치솟았다.

그런데 한산주에 대기하고 있던 법민은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봉화를 보고도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를 궁금히 여긴 천존이 장수들을 대표하여,

“전하, 군사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진격을 명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법민이 뒷짐을 진 채로 서성거리며,

“과인도 처분을 받을 일이 있어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니 조금만 있어 보십시오.”

하고는 틈틈이 성문 밖을 살펴대기만 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이 지나고 났을 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나타나 임금을 뵙고자 청하였다.

총관 유공이 법민에게 아뢰자 법민이 대뜸 크게 반가워하며,

“드디어 기다리던 기별이 왔구나. 어서 안으로 들라 하라!”

하고 채근하였다. 유공을 따라 온 사람은 인문이 보낸 신라 숙위 박문준(朴文俊)이었다.

법민은 문준이 지니고 온 아우의 서신을 급히 펼쳐들었다.

신의 염려는 조금도 하지 마시고 뜻하시는 바를 결행하소서. 인문은 반드시 목숨을 보전하여

대왕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며 다만 수족이 되지 못함을 한탄할 따름입니다.

법민은 그제야 만 시름이 걷힌 듯 활짝 갠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즉시 장수들을 불러 비로소 미뤄왔던 진격 명령을 내렸다.

왕명이 떨어지자 10만에 가까운 신라군은 곧 대오와 행렬을 갖춰 맹렬한 기세로 북향하였다.

군대의 편성은 병법의 대가인 설수진이 맡았고, 지리에 밝은 고구려 장수 검모잠과 고연무는

향도가 되어 설수진을 도왔다. 미리 칠중성에 나와 있던 품일과 죽지는 양쪽으로

동수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이 되었으며, 흠돌과 문영, 천품과 유공이

각각 1만의 보기병을 거느리고 안행진을 만들어 중군을 형성하였다.

후군은 법민이 직접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말에 올라 좌우로 천존과 안승, 백포정 등을 거느린 채

진군하니 그 위세는 가히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덮을 정도였다.

선군이 처음 적을 맞닥뜨린 곳은 칠중하 북변의 부소갑(扶蘇岬:개성)이었다.

그러나 선군이 적과 마주쳐 동삼홀(冬삑忽:연백)의 평원까지 밀어붙이자 넓게 벌린

중군의 측면 날개가 격전지를 우회하여 적을 에워쌌고,

중간에 갇히게 된 소수의 군사를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들이치니

도호부의 군사들로선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었다.

굳이 후군의 차례까지 올 것도 없이 선군과 중군만으로도 적은 순식간에 모조리 궤멸되었다.

동삼홀 평원의 한 차례 격전이 일방적인 패배로 끝나자 부근의 당인 관리들은 저마다

뿔뿔이 평양으로 달아났고, 신라군은 불과 반나절 사이에 별다른 저항 없이

대곡(大谷:평산)까지 진격하였다.

평양의 설인귀는 오랜만에 진무대사로 부임한 이근행과 술상을 받고 앉았다가

느닷없는 신라군의 습격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라가 감히 평양을 공격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시초만 하더라도 그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헐레벌떡 평양으로 달려온 지방 현령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황의 위급함과

신라군의 규모를 말하자,

“이놈들이 죽으려구 환장들을 했구나!”

하고는 즉각 영을 내려 휘하의 군사 2만을 모두 평양에 집결시켰다.

이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신라군과 맞닥뜨린 곳은 강서향 북방의 황주(黃州:동홀) 땅이었다.

소수의 군사로 네댓 갑절이나 되는 대군을 상대하자면 성곽이나 계곡에 의지하여 싸우는 것이

유리할 터인데 설인귀는 오히려 황주 벌판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적의 숫자가 비록 우리보다 많지만 위국공(이정)이 만든 육화진을 쓴다면 능히 물리칠 수 있소.

전에 영국공(이적)도 압록수를 넘어와서는 모두 육화진으로 고구려군 을 박멸하였고,

설하수와 욕이성에서 거둔 대승도 마찬가지였소.”

그러자 신라군을 한없이 얕잡아보고 있던 이근행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전날 고간과 내가 남쪽의 석문에서 싸울 때도 불과 2만의 군사로

10만이 넘는 적을 벼이삭처럼 짓밟았는데, 그때 우리가 썼던 진법도 육화진이었소.”

설인귀와 이근행은 군사를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으로 구분해 여러 개의 방진과 원진으로 구성하고,

마군 원진 하나에 보군으로 구성된 방진 6개를 배당하여 육화진을 만들었다.

방진의 범위는 땅을 흉내 낸 네모꼴이었고 원진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편성하였으니

이는 마군의 회전 활동을 넓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사들은 절대로 대형을 떠나거나 허물지 말도록 하며,

각각의 대오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어떤 경우에도 꽃잎 모양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각 부대의 간격은 10보로 하고, 후미인 주대(駐隊)와 주력부대인 사대(師隊)의 간격은 20보로 하였으며, 마군들로 구성된 전대(戰隊)가 각 부대의 사이에 포진했다.

이들은 50보를 한 단위로 하여 선군이 50보를 전진하면 나팔을 불었다.

그러면 모든 부대는 그 자리에서 흩어져 서게 되는데,

이때도 모두 10보 이내로 거리를 유지하도록 제한했다.

그렇게 네 번째 나팔을 불면 군사들은 일제히 창을 든 채 무릎을 꿇었고,

이때 북이 울리면 세 번 함성을 지르며 세 차례 공격하고 멈추었다.

이와 같은 형태로 30보에서 50보까지 전진하고 나서는 비로소

뒷줄의 마군이 말을 타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데, 이들도 50보를 가서는 멈추도록 했다.

처음에는 보군 척후병을 앞에 세우고 마군을 뒤에 머물게 하여 적정을 살피다가

두 번째 북이 울리면 앞에는 마군, 뒤에는 보군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그런 다음 적이 반격해 오도록 유인하면서 허점을 발견하는 즉시

재빨리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육화진의 대체적인 운용법 이었다.

당나라 군사들로선 수십 년간 훈련해온 익숙한 전법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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