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5

오늘의 쉼터 2014. 12. 4. 16:27

제36장 평양으로 5

 

 

법민은 금성을 출발하기에 앞서 우수주와 내토군의 새로 조직한 신삼천당을 비롯,

각지 9군(九軍)의 군사들을 모두 칠중하로 모이라는 군령을 내렸다.

그는 한산주에 이르자 사방에서 모여든 군대를 중간 점검하도록 총관에게 지시했다.

이때 사직을 청한 용장의 뒤를 이어 한산주 총관을 맡고 있던 이는 유공(儒公)이라는 장수였다.

그런데 군사를 점검하던 유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사가 진중에 섞여 있음을 아뢰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사라니?”

법민은 유공에게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다.

“대략 2천은 되지 싶은데 다들 손에 든 무기가 농기구 이옵고,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자가 태반이오며, 말을 탄 장수가 서너 명이옵니다.”

“그들을 인솔하고 온 자의 이름이 있을 게 아니냐?”

“신이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아니 하고 그저 전하를 위해 싸우겠다는 소리만 되풀이하는데,

자신들이 온 것을 전하께 알리지 말라고 도리어 신신당부하니 더욱 수상합니다.”

법민은 당장 그 정체불명의 장수를 데려오라고 일렀다.

조금 뒤에 유공을 따라 온 자는 뜻밖에도 키가 훤칠하고 용모가 수려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법민이 위엄을 갖추고 묻자 그 청년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저는 얼마 전에 요동의 다물군을 따라 신라에 귀화한 안순(安舜)이라고 하는데,

고구려 왕실의 먼 외척입니다.

우리 임금인 보덕왕(報德王) 안승이 대왕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다며 근심하는 말을 듣고

금마저의 장수와 장정들을 이끌고 왔으니 대군의 뒷전에서 시석이나 나르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불과 반년쯤 전인 갑술년(674년) 9월,

법민은 안승에게 백성을 구제하도록 곡식과 재물을 보내며 ‘보덕’이란 칭호를 하사한 일이 있었다.

“안순이라고 하였던가?”

“그러하옵니다.”

법민은 그 수려한 청년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가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과인은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

망국의 백성으로 귀화한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뜻은 실로 착하고 아름다운 것이니

그 충절이 어찌 갸륵하지 않으랴. 그러나 연장과 베옷으로는 희생이 클까 두렵다.

무기와 갑옷을 제대로 갖추도록 하라.

군사의 숫자를 헤아려 오면 우리 진중의 여분을 지급할 것이며,

그대와 장수들은 우리 장군 천품의 휘하에서 그의 절도를 받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안순이 물러가고 나자 법민은 강수를 보고 말했다.

“보덕왕 안승이 비록 나이는 젊으나 사려가 깊고 처신하는 바가 남다르구려.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예까지 온 것은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요,

자신의 이름을 속인 것은 위신과 체통을 지키기 위함이니,

깊은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능히 그 인물됨을 짐작하고도 남겠소.

과연 천년 사직의 왕손다운 처신이오.”

법민이 안승을 칭찬하니 강수가 약간 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속삭였다.

“전하, 안승은 실로 약삭빠른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가 고구려를 친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온 것입니다.

만일 고구려를 쳐서 수중에 넣는다면 금마저로 돌아가지 않고 사직의 재건을 도모하려 할 것이요,

실패하면 공을 세워 은혜를 갚는 것이니 어느 쪽이건 밑질 것이 없는 장사가 아니겠나이까?”

그러자 법민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과인인들 어찌 안승의 속셈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멸망한 나라의 왕자로 사직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것은 당연한 욕심이요,

이를 다스려 진심으로 삼한의 유민들을 복종하게 만들자면 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법밖에 없소.

내가 알고 경이 알면 그만이니 우선은 그로 하여금 공을 세우도록 합시다.

칠중하를 건너 평양을 칠 때 안승의 군사를 향도(길잡이)로 삼는다면 여러 가지 이로움이 있을 것이오.”

강수는 모든 것을 알고도 너그럽게 대처하는 법민의 인품에 새삼 깊이 감동했다.

그는 임금의 앞을 물러나오며 몇 번이나,

“우리 대왕은 과연 삼한이 한집을 지어 살라고 하늘이 내신 분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한산주에 군기를 맞춰 모인 군사의 숫자는 대략 8만이었다.

법민은 이들을 이끌고 칠중성으로 가려 했으나 품일을 비롯한 장수들이 극구 만류하며,

“대왕께서 한성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군사들의 사기는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어찌 옥체를 피곤하게 하려 하십니까?

신 등이 계책에 따라 한 치의 차질 없이 임무를 마치겠사오니

전하께서는 이곳에 편안히 계시옵소서.”

하니 그 말을 들은 강수까지도,

“어차피 8만이나 되는 군사를 칠중성까지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한성을 거치지 않고 칠중성에 곧바로 당도할 우수주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사들이

더 있으므로 대왕께서는 후군을 맡아 이곳에 계시다가 유인궤의 군사가 물러가고 나서

움직이셔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법민도 마침내 그 말을 좇아 한성에 남기로 했다.

품일과 죽지가 선봉장이 되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칠중성에 당도하자

우수주와 하슬라주 군사 1만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품일과 죽지는 칠중하 강변에 군사를 기백 명씩 횡렬로 늘여 세워 성까지 이르게 한 뒤,

성문 밖 공터에는 모래를 넣은 자루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알곡 몇 자루와 마른 풀을 뒤덮었다.

그러자 군량과 마초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두 장수는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이도록 황급히 가건물을 짓고 수백의 군사들로

이를 지키게 한 다음 성안의 군사들을 5천 명씩 여섯 패로 나누고 시석을 준비하며

당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유인궤의 당군이 서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동제인의 뱃길 안내를 받으며 칠중하로 들어선 당군의 배는 물살을 거스르며

강의 하구에 잇달아 정박하였고,

배가 육지에 닿자 선봉장인 이필과 이근행은 군사를 풀어 진격을 명하였다.

당군과 강변의 늘어선 신라군 사이에는 이내 창칼을 마주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당군은 배에 싣고 온 석포를 배치하고 강노(쇠뇌)를 실은 병거를 앞세워

매서운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양국 군사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친 강변은 금세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그렇게 반나절쯤 싸웠을까.

배를 타고 온 당군들이 웬만큼 몸이 풀렸다고 느낄 때쯤

신라군은 돌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긴 거의 하선을 끝낸 당군들에 비해 신라군은 워낙 숫자가 부족했다.

“뒤를 쫓아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이필과 이근행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달아나는 신라군을 맹렬히 쫓아갔다.

그렇게 얼마쯤을 추격하여 왔을 때였다.

시야에 문득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키던 기백의 신라군들이 가세하자

달아나던 신라군들은 다시 힘을 얻어 반격에 나섰다.

이필과 이근행이 보니 공터에는 창고가 있고 그 속에 쌓아놓은 군량과 마초가 산더미와 같았다.

“성밖에 따로 창고를 짓고 군량을 쌓아둘 정도니 신라군의 물자가 보통 넉넉한 게 아닌 성싶소.

만일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장기전을 편다면 이거야말로 낭패가 아니오?”

이필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자 이근행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시급히 성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소!”

양측 군사가 두 번째로 뒤엉킨 공터에서도 신라군은 얼마 싸우지 않고 황급히 달아났다.

산더미 같은 군량까지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본 당군들은 그것이 미리 계획된 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라군은 그렇게 하루에 일곱 번을 맥없이 패하며 칠중성까지 도망가서는

곧 성문을 닫아걸고 성루에서 어지럽게 시석을 날려댔다.

칠중성 북편에 진지를 구축한 당군들은 한동안 기세를 올리며 성을 향해 군사를 내었지만

성안에서 결사 항전하는 5천여 군사들의 시석을 견디지 못해 몇 번이나 물러서곤 했다.

후군을 이끌고 뒤늦게 진채에 당도한 유인궤는 이필과 이근행의 보고를 받자

견고한 칠중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의 숫자가 기껏 수천에 불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매일 성을 들이쳐서

기운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물며 노획한 군량과 마초가 산더미와 같으니 무엇을 조급하게 생각할 것인가?

그사이에 사방으로 척후병을 놓아 한산주로 들어갈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면밀히 알아봐야겠다.”

한편 칠중성이 대치전에 돌입하는 것을 본 강수는 한성으로 돌아가 법민에게 말하였다.

“대개 일은 계획한 대로 되었으니 신은 내일 날이 밝으면 낙양으로 떠날까 합니다.”

“정말 아무 일이 없겠소?”

“신의 걱정은 하지 마시옵고 전하께서는 유인궤가 물러가는 즉시 대군을 내어

부디 이번 기회에 평양을 수중에 넣으십시오.”

“경이 없을 때 위급한 일을 당하면 누구와 의논을 한단 말이오?”

법민이 묻자 강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크게 위급한 일은 없을 것이오나 만일 병법과 용병에 관해 하문할 일이 있거든

설수진(薛秀眞)을 청하여 물어보십시오.

지금 계림에서 설수진 만큼 병법에 밝은이는 없을 것입니다.”

“오, 설수진이 있었지!”

법민은 설수진의 이름을 듣자 크게 무릎을 쳤다.

아찬 설수진은 전대의 충신 문보(薛門普)의 후손으로,

그 역시 강수처럼 문장이 좋았으며, 1만 원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갔다가

전사한 설오유의 종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병법과 용병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들이 주로 쓰던 전법은 이세민 대의 명장인 위국공 이정(李靖)이 만든

육화진(六花陣)이었다.

육화진은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고안한 8진법(八陣法)을 변형한 것이었는데,

보병으로 구성된 6개의 방진이 중앙의 1개 기병부대인 원진을 마치 꽃잎처럼 감싸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를테면 보병 부대가 육방에서 적을 쳐 행동반경을 설정해놓으면 중앙의 기병들이

테두리 안에 들어온 적을 섬멸하는 전술이었다.

설수진은 이 육화진의 허를 공략하기 위해 육진병법(六陣兵法)이란 것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것은 기병 부대를 외곽에 배치하여 육화진을 분산시키고 중앙의 장창 부대 보병들로

적의 원진을 에워싼 뒤 궁척 부대를 동원하거나 넓은 그물을 던져 사로잡는 전술이었는데,

그 진법이 워낙 신통한 데가 있어 법민이 서형산의 영묘사 앞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대열(大閱)을 주관했을 때 몇 번이나 찬탄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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