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4

오늘의 쉼터 2014. 12. 4. 16:15

제36장 평양으로 4

 

 

약속한 열흘이 지나갔다.

“그래 떠날 준비는 다 마쳤소?”

인문이 부름을 받고 입조하자 당주가 온화한 낯으로 물었다.

“시일이 촉박하여 성의 없이 사람들을 만났으므로 신이 떠나고 나면 구설이 일까 두렵습니다.”

“경의 인품이야 이미 태산을 울릴 정도니 과히 염려하지 말라.

우상의 군사들이 출병을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네.”

그리고 이치는 유인궤와 장수들을 불러 출사를 명하려 했다.

머뭇거리던 인문이 다급하게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대사를 앞두고 택일을 하는 것은 조야가 다르지 않으니

이는 액운을 피하여 소망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섭니다.

향리에 우두머리를 뽑아 보내는 데에도 길일을 가리는 법인데

신은 이제 폐하의 조명을 받들어 일국의 왕으로 귀국하게 되었나이다.

하물며 그 여정이 평탄치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니

어찌 일진의 길흉을 가리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또한 신은 비록 역신을 엄벌하는 중책을 맡았다고는 하나 사사롭게는

본국의 형을 폐하고 보위에 올라야 할 형편입니다.

만일 폐하의 무릎 아래에서 책봉식을 거행하지 않고 간다면 불복하는 이들이 생기고

뒷말이 무성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신의 장래를 불쌍히 여기시어 길일을 받아 책봉식을 거행한 뒤에

만승의 위엄을 갖추고 귀국선에 오르도록 선처해주옵소서.”

이치가 들어보니 인문의 말이 모두 타당하였으나 자꾸만 시일이 지체되니 안타까웠다.

“짐은 넉넉히 생각하여 열흘의 말미를 주었는데 다시 날짜를 미루게 되면

일껏 끌어 모은 군사들의 사기가 흩어질까 두렵도다.”

“하오나 대묘에 고하지도 않고 어찌 충신의 도리를 다할 것이며,

천자께 책봉도 아니 받고 무슨 권위로 계림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나이까.”

이치는 한동안 번민에 잠겼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이 축일(丑日)이니 내일쯤 책봉식을 치르고

이틀 뒤인 진일(辰日)에 출병하면 대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되겠는가?”

“황은이 거듭 하해와 같습니다.”

이리하여 인문은 다시 사나흘을 더 낙양에 지체했다.

그는 당조의 백관들과 구름 같은 구경꾼이 운집한 자리에서 이치로부터

친히 책명문을 받고 용포와 가죽신을 얻어 입고서 대묘를 찾아가 참배하였다.

그리고는 진일에 이르러 유인궤가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낙양을 떠나 신라로 향했다.

그런데 인문이 떠나고 사나흘쯤 뒤에 무후가 돌연 인문의 출정 날짜가 대단히 잘못됐다며

시급히 사람을 보내 인문을 중로에서 막도록 했다.

군대가 떠난 월진과 일진이 서로 맞서 반드시 바다에서 수장(水葬)을 당하리란 것이 무후의 주장이었다. 당나라의 모든 군국사무는 무후의 수중에서 놀아난 지 이미 오래였다.

“군사를 내는 것은 내달 초순의 갑신일이 대길하고 인문은 그로부터 달포를 더 기다렸다가

병진일을 당하여 배를 타라 이르라.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당주의 칙령을 받은 전령이 황급히 말을 달려 대군을 쫓아갔다.

그가 대군의 후미를 만난 것은 등주만 남쪽, 전날 외백제(外百濟)의 한 고을인 성양(城陽) 땅이었다.

인문은 황제의 칙령을 받자 내심 회심의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유인궤를 보고 투덜거리기를,

“기왕 군사를 내어 신라를 치자면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이요,

그러자면 계림의 지리에 밝은 내가 우상과 동행하여야 유리할 터인데

각기 시일을 달리하여 가라니 이 노릇을 어찌하오?”

하니 유인궤가 도리어 인문을 달래며,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삼한의 지리에는 웬만큼 익숙하니

굳이 경과 작반하지 않더라도 크게 낭패를 당하는 일은 없지 싶소.”

하고서 장차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샅샅이 일러주고

한성 북방 매성현(買省縣:임진강역 파주, 양주 일대) 쪽으로 올 것을 말하였다.

인문이 유인궤의 용병술과 병법을 듣고 또 실제로 군사들을 나누어 계책 세우는 것을 보니

가히 정교하고 세밀하여 빈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오자 낙양에서부터 데리고 온 하인을 불러 가만히 말했다.

“너는 어서 등주만으로 가서 동제인(東濟人)의 배를 얻어 타고 내가 전하는 서찰을

반드시 신라 임금께 전하라.

만일 임금을 뵙기 어렵거든 천존 장군의 집을 찾아가 한림에게 전할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된다.”

인문의 하인은 상전의 서찰을 품에 감추고 해안으로 나갔다.

요동과 금주만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양국을 내왕하는 무역선들은 주로 등주나

내주(산동반도)의 뱃길을 이용했고, 따라서 등주만 일대는 오가는 장사치들로 늘 북적거렸다.

하인은 마침 신라로 떠나는 동제인의 배를 만났다.

상인들 틈에 묻혀 신라에 도착한 인문의 하인은 임금을 뵙고자 하였으나

경비가 삼엄하고 절차가 복잡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천존 장군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 한림은 임무를 끝내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인문의 일을 궁금해 하던 차였다.

황급히 하인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인문이 보낸 두툼한 서신을 받아 펼쳐보니

4만 당군이 향하려는 곳과 출항 날짜,

그리고 군사의 배치도가 일목요연하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 이것만 있으면 당군 4만은 졸지에 물고기 밥이 되고 말겠구나!”

이미 마음을 돌려먹은 한림이었다.

그는 촌각도 지체 없이 부리나케 입궐해 임금을 알현했다.

마침내 평양(平壤)으로

인문의 서신을 받아본 법민은 좋아하기보다 곧 깊은 수심에 잠겼다.

“대각간께서 이토록 소상히 적진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보냈으니

당군을 궤멸시키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요?”

보다못한 강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법민은 깊은 한숨에 섞어 입을 열었다.

“유인궤의 군사를 물리치더라도 당주의 칙명을 받은 인문으로서는

귀국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인문이 이미 신라왕에 책봉이 되었는데

내 어찌 그를 용납할 수 있겠소?

인문은 낙양으로 돌아가면 당주의 벌을 받을 것이요,

계림에 오면 과인의 손에 죽어야 할 기구한 운명에 처하였으니

그를 살리는 길은 과인이 유인궤의 손에 죽는 길밖에 없소.

인문인들 어찌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르겠소?

그는 살기를 포기하고 내게 진중의 기밀을 적어 보냈거니와,

형제의 생사가 이로써 엇갈리게 되었으니 천하의 몹쓸 일이 아닌가.”

법민의 말을 듣자 강수의 입에서도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나라 안에 임금을 반대하는 친당 세력들이 우글거리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당주의 책봉을 받고 귀국하는 인문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임금과 더불어 고민에 빠졌던 강수가 한참 만에 생각해 낸 계책은

실로 절묘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강수는 뜻밖의 말로 입을 열었다.

“대각간께서 보낸 서신을 살펴보면 유인궤는 우리의 칠중하(七重河:임진강) 하류에

배를 정박하고 매성현으로 쳐들어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칠중하 강변에는 칠중성(七重城)이 있고,

칠중성은 예로부터 아녀자의 속곳과 같다는 겹겹의 웅성이라

조금씩 땅을 물려가며 시일을 끌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대각간께서 귀국하는 시기는 유인궤의 군사가 도착하는 것과 한 달의 차이가 있습니다.

칠중성에 그동안 훈련시킨 우리 군사를 모두 결집시켜 일부러 패책을 쓰며 시일을 끌고

일변으론 대왕께서 낙양에 사죄사를 파견해 다시 한 번 당주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 유인궤의 군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칠중성에 결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벼락같이 평양을 급습한다면 대각간의 목숨도 구하고 평양성도 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옛날부터 신이 아뢴 화전 양책의 진수입니다.”

법민은 강수의 계책에 귀가 번쩍 열렸으나 누구를 낙양에 사죄사로 보낼지,

또한 그렇게 한다고 당주가 분노를 거두고 일껏 파병한 군사를 되돌리려 할지 의심스러웠다.

강수가 법민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요동에서 패하여 도망 온 다물군들의 말을 들어보면 근자에 압록수 북방에는

칭제건원(稱帝建元:황제라 칭하고 나라의 연호를 정함)하는 무리까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요동은 봄이 늦게 시작되므로 아직은 창칼을 들고 다툴 시기가 아니지만

2월이 지나가면 사정은 달라질 것입니다.

신이 사죄사로 가서 당주의 노여움을 달래고 필히 군사를 거두도록 하겠나이다.”

“경이 직접 낙양에 가겠다고?”

법민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만일 경에게 무슨 화가 생기면 과인은 혼자 대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그것만은 안 될 말이다!”

법민이 크게 고개를 가로젓자 강수가 웃으며 아뢰었다.

“비록 낙양에 가더라도 무사히 빠져나올 만 가지 계책이 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재주를 너무 과신하지 말라. 경은 당나라의 신하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닌가?”

“유인궤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전날 고간과 이근행이 습격한 무주로 내려왔다면

신은 당군을 결코 우습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평양에서 가까운 칠중하로 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군사들이 북방으로 모이는 것은 뻔한 이치이므로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평양에서 지금껏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로 미루어 설인귀는

아직 남쪽의 일에 한눈을 팔 여력이 없는 게 확실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신이 당나라 신하들을 우습게보지 않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적당한 말로 당주를 구슬려 실추된 위신만 세워준다면

당은 유인궤의 군사들을 빼내어 요동으로 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강수가 워낙 호언장담하자 법민도 마침내 그의 말을 좇기로 마음을 정했다.

인문을 살리자면 어떻게든 그의 귀국을 사전에 막아야 했고,

그러자면 강수의 계책을 따를 수밖에 달리 묘안이 없었다.

법민은 태자 정명을 불러 대궐의 정사를 맡기고 중시 천광과 군관에게

정명을 호위토록 한 뒤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여 북방으로 달려갔다.

임금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신라의 내분은 정점에 이르러 있었다.

일설에는 장군 품일과 문영마저 꾀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할 거라는 말이 돌았다.

법민은 출병에 앞서 미복잠행으로 품일과 문영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명장 품일은 아프다는 소문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으로 법민을 맞이하고서

이마를 땅에 조아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아뢰었다.

“신이 사방에 의원을 청한 것은 사실이오나 이는 노모가 병이 났기 때문입니다.

신에 관한 구설은 누군가가 불순한 저의를 품고 신의 충심을 모함하고자 지어 퍼뜨린 것입니다.

자식(관창)까지 나라에 바친 몸으로 제 어찌 전하의 성지를 받들지 않겠나이까.”

이어 찾아간 김문영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영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신을 죽이려던 당장 소정방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또렷합니다.

돌아가신 김유신 장군께서 그때 소정방의 기세를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목숨입니다.

신의 오랜 벗인 대토가 비록 불충한 짓을 저질렀으나 신은 이를 부끄럽게 여길 뿐

털끝만큼도 그의 소행을 두둔할 마음이 없습니다.

신에 관한 낭설은 복주된 대토의 일을 근거로 세간에서 추측하여 지어낸 것일 뿐

본뜻과는 하등 무관한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마소서!”

법민은 이런 헛소문들이 만연하는 까닭을 깊이 생각한 끝에 드디어

자신이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출정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는 강수를 군사(軍師)로 삼고 말했다.

“천존 장군과 흠순 장군을 위시해 품일, 죽지, 문영, 흠돌, 군관, 천품,

그리고 강수를 새로이 과인의 9신(九臣)으로 삼으니

이들 아홉 사람은 과인의 품의를 받지 않고도 싸움터에서 절도와 군령을

마음대로 행사하여 진퇴를 자유롭게 결정토록 하고,

대궐에서도 칼을 차고 다니게 하며, 만일 이들의 영을 어기는 자는 왕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여 필히 엄벌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 중 천존과 흠순, 군관을 제외한 모든 장수들을 거느리고 칠중하로 향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6장 평양으로 6  (0) 2014.12.04
제36장 평양으로 5  (0) 2014.12.04
제36장 평양으로 3  (0) 2014.12.04
제36장 평양으로 2  (0) 2014.12.04
제36장 평양으로 1  (0) 2014.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