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평양으로 2
당을 드나들거나 당에서 상주하던 수많은 신라인들이 그런 인문을 흠모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행여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할라치면 서둘러 찾는 곳이 인문의 거처였고,
그러면 인문은 하찮은 장사치들의 일까지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신라인들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주곤 하였던 것이다.
인간 세상의 간사함과 졸렬함은 고금이 한가지였던가.
인문의 명성이 당에서 높아질수록 외지의 신라인들 중에는
그를 법민과 비교해 말하는 자들이 늘어갔다.
특히 태평성세의 표본으로 일컫는 정관치세 이후 당의 국력은
각국의 문물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창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경도하여 걸음걸이까지 당인의 것을 모방하려던 일부 친당 세력들은
본국의 임금보다 인문을 더 높이 말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법민이 웅진을 무력으로 장악한 뒤 양국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면서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고, 본국을 들락거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법민이 대당전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면서는 아예 인문으로 하여금 본국의 임금을 삼아 환난을 막아야 한다는
불충의 소리까지 횡행하게 되었다.
당에 대적하려는 신라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쯤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존의 장자 한림도 그들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당에서 오래 숙위한 탓에 본국의 물정에 어두웠으며,
신라가 당과 대적하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로 굳게 믿고 있었다.
“태대각간께서 돌아가신 후에 간신배가 날뛰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대토와 같은 충신이 복주(伏誅)되고 수많은 충신들이 일제히 물러날 턱이 있습니까?
황제의 진노함이 그와 같았다면 금상으로는 사직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림은 차라리 황제의 명령을 따르자고 말하려다가 그쯤에서 말허리를 끊었다.
인문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왕께서는 사려가 깊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직관이 출중하신 분일세.
필경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네.
자네는 대왕께서 무슨 생각으로 당을 멀리하시려는지 그 까닭부터 알아보게.
만일 이곳의 사정을 하문하시거든 실정을 낱낱이 아뢰어 대책을 세우도록 하게.
두 달 뒤면 유인궤를 앞세운 대군이 출병할 것일세.”
한림은 그 길로 낙양을 떠나 귀국선에 올랐다.
여러 날 만에 본국에 도착한 한림은 금성에 이르자 제일 먼저 상중에 있던 삼광을 찾아갔다.
그는 대청에 차려놓은 유신의 빈소에 엎드려 한 차례 통곡한 뒤 아래채로 내려와 삼광과 우어하였다.
한림과 더불어 낙양에서 지내다가 부랴부랴 당주의 허락을 얻어 귀국했던 삼광은
그새 장례를 치르느라 얼굴이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어인 일이신가?”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채로 삼광이 묻자 한림은 자신이 금성에 온 사연을 대강 털어놓았다.
“소국의 임금으로 대국과 맞서려는 일은 온당치 않네.
재당(在唐) 신라인들은 이번 기회에 차리리 인수 어른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고
만구일담이네만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귀국한 지 반년, 삼광 역시 낙양에 있을 때는 금성의 사정에 어두웠지만
그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는 법민왕의 고충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집에는 들렀다가 오는 길인가?”
“태대각간의 빈소부터 뵈려고 이리루 곧장 왔네.”
“하면 자네는 대왕을 배알하기 전에 먼저 집에 들러 춘부장 어른부터 만나보게나.
본국의 일이 자네의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름세.”
“어찌 다르단 말인가?”
삼광은 잠시 침묵한 뒤에 입을 열었다.
“당에 있으면 천하가 당으로 보이지만 본국에 오면 당은 한낱 타관이요 객지일 뿐일세.
황하가 아무리 장대한들 어찌 고국의 개울물만 할 것이며,
태산이 제아무리 높은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금 당에 있는 사람들은 밤낮을 거꾸로 보고 일월(日月)이 뒤바뀌었네.
출세를 하려고 당에 갔다가 사지육신은 고사하고 혼백마저 당인이 되어버리니
어찌 그들을 계림의 백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림과 삼광은 비록 절친한 사이였지만 낙양에 있을 때부터 생각이 약간 달랐다.
한림은 신라의 7백 년 수난이 당을 만남으로써 일시에 없어졌으니
태평성세를 누리자면 당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쪽이었고,
삼광은 당과 선린을 유지하되 속국이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
삼한의 백성들로 한집 살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림은 그런 삼광을 천하 물정에 어둡다고 책망했고,
삼광은 한림에게 차라리 당나라 관복을 입고 다니라며 빈정거리곤 했다.
날이 저물어 삼광과 헤어진 한림은 이튿날 입궐하기로 하고 집으로 가서 천존과 식솔들을 만났다.
한 차례 반가운 인사가 끝나자 한림은 천존에게 자신이 귀국한 사정을 말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물었다.
“대토가 복주되고 충신들이 일제히 물러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팔순 노장 천존은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질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성지와 어의를 배반하고 당에 붙으려는 자가 무슨 충신이더냐?
그런 것들은 설사 새털만한 공이 있더라도 단칼에 목을 쳐 죽여야 하느니라.”
“만일 그랬다가 당에서 알고 대군을 낸다면 어찌하려구요?”
“대군을 낸다구? 그럼 싸워야지,
이 사람아! 싸울 때가 오면 싸워야 하는 게다. 싸움 없이 어찌 종묘와 사직을 지킬 수가 있느냐?”
“당은 대국입니다. 백제나 고구려 따위와는 유가 다릅니다.”
“대국이 아니라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의 천국이라도 사직을 노린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장수와 백성의 도리다.”
천존의 단호한 말에 한림은 벽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본국의 기운이 부쩍 이상한 쪽으로 기울었다는 낌새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이튿날 날이 밝자 대궐에 들어가 법민을 알현하고 인문의 걱정하는 바를 전하였다.
“대각간은 행여라도 대왕께서 당의 노여움을 사 계림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될까
노심초사하여 신을 보냈습니다.
당주가 대군을 소집하고 군령을 내리기 직전에 죽기를 불사하고 극간하여
약간의 말미를 얻어낸 줄 압니다.”
법민은 한림의 말을 듣자 역시 천존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언제 싸우더라도 어차피 한 번은 싸워야 할 나라가 당이 아니냐?
가거든 인수에게 전하라.
과인의 뜻은 복종에 있지 않고 선왕께서 남긴 유업을 받드는 데 있을 뿐이다.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인수가 나와 함께 선왕을 모시고 잠시 긴한 말을 나눈 적이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 능히 과인의 심정을 알아차릴 것이다.”
한림은 왕을 배알하고 물러나서 진작에 돌아가지 않고 하루를 더 금성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동문수학한 국서 김의관의 집에를 찾아가니
의관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반갑게 얼싸안으며,
“그러잖아도 자네가 왔다는 말을 듣고 지금 막 작당하여 쳐들어가려는 중일세!”
하고는 곧 팔을 이끌어 안채로 데려갔다.
의관의 안채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가 들어서는 한림을 보자,
“여어, 낙양의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일세. 자네 신수가 개자하이!”
“이 사람아, 골치 아픈 금성에는 뭣 하러 오셨나!”
“대각간 인수 어른께서는 무양하시지요?”
모두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었다.
한림이 보니 방안 가득히 사람들이 어지러울 만큼 진을 치고 앉았는데,
중신과 춘장, 진공과 용장 등은 동년배였고,
흥원과 의복은 10여 년 연상이었으며, 달관을 비롯한 몇은 서너 해 아래였다.
한림이 웃으며,
“대충 보아하니 공성신퇴한 분들이 예 다 모였소.”
하고는 한구석을 차지하여 앉아,
“어찌 죄 그토록 한집 잔칫날에 쓸 가축 꼴들이 되었소?”
하니 성질 급한 달관이 볼강스레 나서서,
“형님, 말도 마오!
이게 죄 그놈의 강수인지 뭔지 하는 대가리 기묘하게 생긴 놈이 벌이는 수작이오!
모진 종놈 하나가 들어 광문거족을 거덜 낸다더니
난데없는 강수놈 하나에 만조의 충신들이 복날 엿가락 녹듯이 녹아내렸지 뭐요?
이제 두고 보오. 강수놈 바람에 계림의 사직도 문 닫고 징 칠 날이 머잖았소!”
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래 시작한 강수의 험담이 그 뒤로 여러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기 오지는 않았지만 오죽하면 중시 예원과 각간 문충 어른까지도 물러나고
맹장 진복마저 물외한인을 자청하였겠는가?
그리하면 임금이 깜짝 놀라 마음을 달리 잡숫고 으레 불윤비답(不允批答)으로
성지를 거두실 줄 알았더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일거에 내어 쫓고는
백제 떨거지들을 불러들여 조정의 빈곳을 채우고 말았다네.
좀 과장해 말하자면 지금 이 나라에 벼슬살이 다니는 자가 절반은 백제 것들일세.
대관절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자는 건지 아무래도 나는 알 도리가 없으이.”
의복이 차탄하는 소리를 듣고 한림은 크게 놀랐다.
“백제인 에게도 벼슬을 준다는 말입니까?”
“주는 정도가 아닐세. 아예 궐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마구 끌어들이다시피 했네.
그러고는 성곽을 짓고 군사를 새로 뽑아 대국과 일전불사를 외치니
달관의 말처럼 이제 계림의 사직이 망하는 것은 비조즉석이 아닌가 싶네.”
한림은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귀국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임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당주가 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여
귀국시키려 한다는 얘기까지 전하고는,
“대감들의 의향은 어떠하오?”
하니 거기 모인 자들이야 죄 법민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터라,
“그래 가지고 망국지변을 막을 수만 있다면 천행일세.”
“기실 인품으로 보나 자질로 보나 아우가 낫지.”
“자네가 제발 얘기를 잘 좀 전해주게나.
계림에서 당에 불복하는 무리는 극히 소수일세.
다만 그 소수의 뜻에 임금이 휘둘리고 있다는 게 문제야.”
하고들 말하였다. 한림이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란다고 말하고,
“만일 당군이 인수 어른을 호위하여 귀국하면 여기 모인 대감들만이라도 내응을 할 테요?”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물으니 달관을 비롯한 젊은 축들은,
“여부가 있소! 말이 돌면 동참할 사람들이 줄을 설게요!”
대번 희색들이 만면하여 대환영을 하였고,
나머지도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마음이 없지 않음을 내비쳤다.
한림은 낙양으로 돌아가는 즉시 인문을 찾아가 법민왕의 뜻을 전하고
잠시 사이를 두며 기색을 살피다가,
“그런데 신이 조정에서 사직한 충신들을 만나보았더니 그들의 뜻이 이러합디다.”
하며 운을 뗐다.
그리고는 강수의 득세와 백제인들이 대거 벼슬길에 나선 내지의 사정을 빠짐없이 전한 뒤에,
“아뢰기 송구하오나 그들이 여출일구로 하는 말이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나리를 임금으로 옹립하여 계림의 우환을 뿌리째 없앴으면 합디다.”
하고 언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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