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6장 평양으로 1

오늘의 쉼터 2014. 12. 4. 15:29

제36장 평양으로 1

 

 

법민(法敏)과 인문(仁問)

 

문무백관들의 정신적 의지 처였던 거목 김유신 마저 죽자 신라 내부에서는

당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동요하는 세력들이 적잖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유신의 부수 출신인 아찬 대토가 유신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식솔들을 데리고 당나라로 도망가려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법민은 유신이 생전에 총애하던 대토를 용서하고 불문에 부치려 했으나 강수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토와 같은 자가 당으로 도망가면 우리가 당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이 모두 알려지게 되고 맙니다.

또한 전하께 반감을 가진 수많은 신하들을 양성하게 될 것이며, 끝내는 그로 말미암아 계림은

당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마땅히 일벌백계로 다스려 성지의 굳건함과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유신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던 법민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임생의 말이 아니었으면 자칫 인정에 끌려 대사를 그르칠 뻔했소.”

법민은 대토를 처형하고 그 처자를 천민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8월에는 믿었던 중시 예원(禮元)마저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여 법민과 강수를 다같이 놀라게 하였다.

알천의 아들 예원은 누구보다 법민의 심중을 꿰뚫어보던 사람이었지만 조정의 내분이 격해진 터에

유신마저 세상을 뜨자 한동안 침식을 잊고 고민하다가 만사가 귀찮다며 절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예원을 뒤따라 이찬 진순(陳純)과 의복(義服), 춘장(春長), 심지어 9장수의 일원이던

각간 문충(文忠)과 진복(眞福)까지 줄줄이 사직을 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금성의 이름난 장수들이 다투어 사직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번에는 다시 한산주 총관 용장(龍長)과 소부리주 총관 진왕(眞王),

그리고 옹포의 수비를 맡고 있던 대아찬 진공(眞功)도 임지에서 표를 올려 사직할 뜻을 밝히고 나섰다.

예상은 하고 있었기로서니 막상 눈앞에 벌어진 결과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유신의 그늘이 그토록 넓고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당을 두려워하거나

친당의 뜻을 가진 신하들이 그리도 많았구나 싶어 법민으로선 새삼 모골이 송연하고

눈앞이 캄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비록 사직은 청하지 않았으나 소극적으로 친당파에 동조하는 세력들까지 합친다면

대당전을 반대하는 자들이 만조를 통틀어 무릇 얼마나 될지 알 도리가 없었다.

법민이 곰곰 생각하니 자신과 강수를 제외하면 천존과 천품, 죽지와 흠돌,

그리고 흠순 정도가 겨우 믿을 만할 뿐이었다.

“만조의 재상과 장수들이 일치단결하여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할 판국에 반쪽의 반쪽으로

결전을 치르게 생겼으니 어찌 천하의 강국이라 일컫는 당과 제대로 맞설 수 있겠소?

대당전은 아무래도 역부족인 듯하오.”

법민은 침통한 얼굴로 크게 탄식하였다.

책사 강수 또한 기운이 빠지기는 임금과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정신을 차렸다.

“이제 곧 성곽의 공역을 완료하고 새로운 사람들로 조정과 군대를 일신하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걸로 믿습니다.

우선 전하께서는 사직을 청한 자들부터 소원대로 물러나게 하여 성지의 칼날 같음을

만천하에 보여주십시오.”

강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법민 역시 차츰 오기가 생겼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김유신의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중신들의 동요와 일탈은

역설적이게도 임금 법민으로 하여금 비장한 결의를 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계림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는 오히려

그것을 국정 일신의 계기로 삼았다.

법민은 며칠 생각한 끝에 만조의 백관들을 일제히 소집했다.

“삼한은 본래 풍광이 명미하고 지기가 신성하여 예로부터

기재와 영걸이 돌밭에 자갈처럼 많은 곳이다.

내 어찌 임금에게 반대하여 물러나려는 자를 붙잡을 것인가!

계림의 인물로 부족하다면 삼한을 통틀어 충신과 용장을 찾을 것인즉,

우선 백제의 옛 신하들을 불러 본조의 내, 외관을 주되 그 벼슬과 직함은

본국의 관함(官銜)에 준거토록 하고 지위의 고하에 따라 마땅히 새로운 품계를 정하여 내릴 것이다!”

약관의 젊은 나이로 일찍부터 군사를 통솔하며 전장을 누비던 법민이었다.

진덕 여왕 시절에는 당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아 기개를 떨쳤고,

무열 대왕 원년에는 병부령에 올라 일국의 군무(軍務)를 총괄했던 그였다.

선왕은 법민을 가리켜 양조(兩朝:신라와 금관국)의 음덕으로 얻은 귀자(貴子)라 자랑했으며,

유신 또한 천하의 인물을 말하는 자리에선 언제나 그를 첫손에 꼽았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가 공을 논하매 신라인으로 오직 두 사람을 꼽았으니

바로 유신과 법민이었다.

임금이기에 앞서 장수와 재상을 두루 거친 법민의 용인술이 실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백제인의 등용을 공식 선포하여 신라 관리들의 경각심을 일깨운 다음,

아찬에 불과하던 천광(天光)을 일거에 파진찬에 중시로 삼고 편전에서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차제에 조정의 면모를 일신코자 한다.

6정(六停)을 손보고 9군(九軍)을 정비하여 오직 믿을 만한 이들로만 장수를 삼을 것이며,

북방 우수주(춘천)와 내토군(奈吐郡:제천)에 신삼천당(新三千幢)을 조직해

삼한의 장정들로 정병을 만들도록 하라.

대궐에 이미 불복하는 자들이 수두룩한데 외관의 관리라고 모두 충절을 바칠 턱이 없다.

외사정(外司正)을 설치해 국토 전역의 현령과 태수가 다스리는 곳이면 빠짐없이

정찰(貞察)을 파견토록 하고, 만일 조금이라도 과인의 뜻에 반하는 자가 있거든

당석에서 벼슬과 관작을 삭탈토록 하되, 전날의 공과에 추호도 얽매이지 말라.

전날 유공한 자도 변화하는 시류를 따르지 못하면 쓸모가 없는 것이니

이는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만물을 양육할 수 없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랴!”

법민은 경향 각지에 감찰을 놓아 관리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하기에 이르렀는데,

내관의 감찰은 기왕에 있던 사정부에서 맡고, 외관은 별도로 외사정을 설치하여

그곳에서만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 왕명을 받고 전국의 주군으로 파견된 외사정의 감찰 인원이

주에는 2인, 군에는 1인으로 도합 133인이나 되었다.

또한 백제의 유민들을 어루만지고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백제에서 벼슬을 지낸 자들에게 일제히 문호를 개방하고 6두품까지 품계를 하사하여

내외관의 관리로 삼으니 달솔은 대내마, 은솔은 내마, 그 이하는 각기 본국의 관함에 따라

차등 있게 벼슬을 얻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가 단행한 관직의 개편과 관헌의 신설은 전고에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특히 악간(嶽干), 술간(述干), 고간(高干), 귀간(貴干) 등의 외위(外位) 관명을 따로 두고

6도(六徒)의 진골을 5경 9주에 나가 살도록 하였는데,

이는 금성에 편중된 세도를 지방으로 분산시켜 왕권을 강화함과 아울러 지방의 자치권을

외관 중심으로 가동시켜 장차 있을 전시에 유용하게 쓰기 위한 일거양득의 전략이었다.

법민은 유임되거나 새로 임명된 경향의 모든 관리들에게 동(銅)으로 친히 인장(印章)을 만들어

나눠줌으로써 거국적인 사정과 대대적인 관직 개편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석문에서 죽은 효천의 아우 철천(徹川)에게 병선 1백 척을 맡겨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강수의 건의에 따라 예작부(例作府)에 지시해둔 경향 각지의 토목공사도 이 무렵을 전후해

잇달아 완공되었다.

한산주 주장성을 비롯, 금성의 서형산성과 북형산성, 국원(충주)의 완장성과 사열산성(청원),

소문성(의성), 이산성(고령), 수약주(춘천)의 주양성, 주잠성, 거열주의 만흥사산성,

삽량주의 골쟁현성 등이 새로 축조되거나 증축되었다.

이같은 신라의 분위기는 곧 당나라 조정에 전해졌다. 당주와 무후는 법민왕이 전쟁에 대비해

인재를 새로 뽑고 성곽을 수리한다는 소문을 듣자 마음에 늘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신라인 가운데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친당파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잘 이용하면 눈엣가시와도 같은 법민을 내쫓고 쉽게 신라를 무너뜨릴 수 있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계책이 법민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대신 낙양에 머물던 왕제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갑술년(674년) 초봄, 이치는 조서로써 법민왕에게 내린 당나라의 관작을 삭탈한 뒤

우상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이필(李弼)과 이근행, 조헌과 설방 등을 장수로 삼고,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여 귀국을 명하였다.

당조로부터 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의 직함을 받고

당경에 머물던 인문은 당주의 칙명을 받자 홀연 눈앞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졌다.

“폐하, 어찌 아우로 하여금 형을 치라고 하십니까?”

인문의 물음에 이치는 무후한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아우가 형을 치는 것이 아니라 충신이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오.

신라왕 법민이 짐에게 저지른 죄상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인즉,

그가 웅진의 도독부를 허락 없이 멸하고 고구려의 반중(叛衆)을 거둬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근자에는 짐과 상국을 섬기려는 충신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내쫓고,

불충한 무리들과 어울려 반역을 꾀하며, 방방곡곡에 돌을 쌓고 쥐새끼처럼 숨어

군사를 훈련시킨다고 하니 이런 자를 토벌하지 않고서는 어찌 천하의 일을 제대로 살핀다고

할 수 있겠소?

그대는 오상(五常)과 육덕(六德)을 아는 사람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짐에게 법민을 두호하여

말하였으나 그 작태가 갈수록 가관이니 이는 고구려의 개소문이나 백제의 의자가 한 짓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형제의 우애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신하의 도리를 말함이 옳지 않겠소?”

이치는 인문의 학문과 인품에 반한 지 오래였다.

그는 과거에 법민이 대부경의 벼슬을 지내며 당나라에 숙위할 때

더러 고분고분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수시로 인문을 보며,

“세상에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들 하지만 경의 형제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소.

인수(김인문의 字)야말로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 손색이 없는 지덕을 갖추었으니

비유하자면 선제(이세민)의 일과 유사하오.”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이치가 자신을 극히 신뢰하는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적절히 외교에 활용하던 인문으로서는 그가 법민의 불충을 노한 언성으로 꾸짖자

무턱대고 두둔만 할 수도 없었다.

“신인들 귀가 있사온데 어찌 계림의 일을 듣지 않았겠나이까.

하오나 웅진의 일은 먼저 맹약을 깨뜨린 쪽이 부여융과 흑치상지였고,

고구려의 반중을 거둬들인 것도 신라왕이 천하의 백성을 골고루 애호하시는

황제의 은혜와 인덕을 받들기 위함이지 따로 불손한 저의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닌 줄 아옵니다.

하물며 그는 웅진의 일로 고간과 이근행의 책망을 받고 사죄사를 보내어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이미 이를 가납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어찌 한 번 용서한 일을 다시 꾸짖으오리까.

다만 충신들을 내쫓고 불충한 무리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은 신도 들은 바가 있으니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신이 소상히 알아보겠습니다.

아직 주필산(요동)이 폐하의 땅이 되지 않았고, 요하의 풍파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만에 하나 공연한 오해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 손실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에게 사정을 알아볼 약간의 말미를 주소서.

군사는 그 후에 일으켜도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인문이 간청하자 이치는 마지못해 두어 달의 말미를 주었다.

인문은 거처로 돌아온 즉시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이 일을 상의했다.

“근자 본국의 동향이 아무래도 심상찮네.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급히 본국을 좀 다녀와야겠네.”

유신의 장자 삼광과는 달리 한림은 법민보다 인문을 더 존경하고 따랐다.

어찌 한림뿐이었으랴. 국학에 유학하던 숙위 학생이든,

조정의 숙위사든, 혹은 불법을 구하러 온 승려든,

심지어 상선을 타고 드나들던 장사치들까지도 한번 당나라에 왔거나 거쳐 갔던 신라인들은

장안과 낙양을 두루 울리던 인문의 자자한 명성을 모를 턱이 없었고,

오만불손하고 거만무례하기로 조명 높은 당조의 신하들도 유독 인문에게만은

깍듯하고 공손하기가 대인 앞의 아녀자와 같다는 풍문을 듣게 되면

그 마음에 뿌듯한 자부심과 숭모의 느낌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장안과 낙양은 융성하던 당제국의 도성답게 사방팔방의 문물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요,

구산팔해(九山八海)의 학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었으며,

오방 번국의 사신과 상수들이 교류하느라 대궐 주변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비록 방물을 들고 조공사로 왔어도 천자를 알현하려면 며칠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고,

수레에 바리바리 실은 짐과 인부의 행렬은 매일 그 끝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사정이 이러니 조공사로 왔다가도 짐만 두고 돌아가는 사신도 없지 않았고,

조정의 영객부는 항상 만원이어서 사신을 재우고 먹이는 궐문 밖의 객관과 주막조차

사시장철 불황을 몰랐다.

당나라 관리들은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번국의 사신들에게는 상전 중의 상전이었다.

뒤로 뇌물을 받고 황제를 알현하는 순서를 바꾸는 일은 상식이요,

심지어는 진상품 가운데 일부를 취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사신으로 올 정도면 그래도 제 나라에서는 문벌깨나 높은 사람일 터인데

당의 관복만 비쳤다 하면 궐문을 지키는 수문졸에게까지도 어마지두 어깨를 옹송그리며

아양을 떠느라 순번을 다투게 마련이었다.

이런 판에 궐문은 고사하고 황제와 무후가 거처하는 내전에까지도 무상으로 출입한다는 것은

여간한 특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당나라 신하들 중에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몇몇 재상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고,

외국의 관리 가운데는 오직 인문만이 여기에 해당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예우는 인문과 이치의 오랜 교분에서 나왔다.

인문은 약관 23세에 진덕 여왕의 명을 받고 처음 당나라에 숙위로 들어갔는데,

이때는 이치가 황제에 등극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인문은 어려서부터 유가의 책을 두루 섭렵하고 장노부도(도교와 불교)의 학설에까지

달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서(隸書)에 능하고, 향악과 예능에도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흔히 이런 부류들이 유약한 것과는 달리 그는 활쏘기며 말 타기에도

천부적인 재주를 지녀 이를 본 당조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인문을 만나본 이치는 대번 그의 자질과 인품에 반하여,

“유장(儒將)이 따로 없구려.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현묘함을 갖춘 인재란 바로 공과 같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오.”

하고는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때부터 인문은 평생을 주로 당에 숙위하며 이치와 더불어 천하의 일을 논하였고,

대사가 있을 때마다 신라를 드나들며 양국의 가교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고구려를 멸할 때는 스스로 당나라 장수가 되어 출정한 일도 여러 번이었는데,

나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공을 세우고 돌아와 이치를 기쁘게 하였다.

또한 건봉 원년(666년)에 인문은 이치를 따라 태산에 올라가 흙으로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는 봉선(封禪) 의식에 참례한 일이 있었다.

이치는 그 공로가 가상하다며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의 벼슬을 더하고 겸하여

식읍 4백 호를 상으로 주었다. 고구려를 멸한 뒤 당나라 장수들의 전공을 논할 때도

이적 다음으로 인문을 꼽으며,

“조아(爪牙)의 양장(良將)이요 문무의 영재다.

관작을 내리고 봉토를 나눠주어야 할 것이되 특별히 대접함이 마땅하다.”

하고는 다시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하사했다.

그 뒤로 인문은 줄곧 낙양의 궁궐에서 당주를 시위하며 여러 해를 지내오고 있었던 터라,

신라의 신하라기보다는 당의 중신으로 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어쩌면 그 아버지 김춘추가 걸었던 길을 고스란히 답습했던 이가 바로 인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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