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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선전포고 8

오늘의 쉼터 2014. 12. 4. 14:00

제35장 선전포고 8

 

 

 

하루는 법민이 황룡사 본당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홀연 한 자락 광풍이 일더니

난데없이 백마 한 마리가 훌쩍 법당으로 뛰어들었다.

법민이 깜짝 놀라 보니

그 말은 전날 유신이 타고 다니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은 백설총이가 분명해 보였다.

“네가 여기는 어인 일이냐?”

법민이 안면 있는 백설총이를 보고 묻자

백설총이는 흰색 갈기에 유난히 기다란 주둥이를 두어 차례 털고 나서

그대로 불상을 뛰어넘어 자취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닷새쯤 지난 뒤에 당나라에 잡혀갔던 노사 구진천이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구진천은 당주의 명령으로 신라에서 가져온 목재를 가지고 다시 활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그가 만든 활은 고작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당주가 크게 노해 이유를 다그치자,

“신 또한 정확한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지나오는 동안에 습기를 머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당주는 구진천이 고의로 명궁을 만들지 않는다고 여겨 옥에 가두고 밥을 주지 않았고

그 바람에 구진천은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양도의 옥사에 이은 구진천의 옥사로 법민은 또 한번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었다.

“아아, 임금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제 땅의 신하들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구진천이 떠날 적에 반드시 그를 데려오겠노라 철석같이 약속하고 또 약속하였거늘!”

법민은 구진천의 비보를 듣자 크게 슬퍼하며 그의 유족들을 불러 친히 위로하고

평생 먹고 살 재물을 하사하였다.

비록 명공 구진천을 잃긴 했지만 법민은 재앙이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황룡사 법당을 찾아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전날 본 백설총이가

또다시 명촉(明燭)을 흔들며 나타났다.

백설총이의 잔등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한 장수가 앉아 있어 법민이 눈을 비비며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더니,

“나는 김유신을 따라다니던 음병(陰兵)의 장수인데 이제 소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오.”

말을 마치자 번개같이 말을 몰아 백설총이가 처음 나타났던 문으로 내달았다.

몽환 중에 본 듯한 이 일로 법민은 식음을 폐할 만큼 크게 괴로워했다.

기변은 또 있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장안에서는 군복을 입고 무기를 지닌 수십 명의 군사들이

유신의 집으로부터 나와 울며 가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소문을 전해들은 유신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그간 나를 몰래 보호하던 음병이 내 복이 다한 것을 알고 가버린 것이니

곧 내가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나 유신은 다시 풍병이 도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법민이 대궐에서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신하들을 앞세우고 유신의 집을 찾아오니

유신이 자리에 누운 채로,

“신은 수족이 되어 대왕을 끝까지 섬기려 하였사온데 그만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뒤로는 두 번 다시 용안을 우러러볼 수 없겠습니다.”

마치 죽을 것을 예감한 사람처럼 말했다. 법민이 신하들 앞에서 울며 말하기를,

“과인은 경이 있었기에 마치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았는데 이제 경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은 어찌하고 사직은 또한 어떻게 된단 말씀입니까?”

하자 유신이 기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렬하고 불초한 신이 어찌 나라에 큰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영명하신 임금께서 신을 거두시고 모든 일을 의심 없이 맡겨주셨기 때문에

대왕을 도울 수 있었고, 약간의 공을 이루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삼한은 한집이 되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니 비록 태평한 세상에는

이르지 못했사오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전고와 역대를 살펴보건대 왕실의 임금으로 시초에는 정사를 그르치는 분이 드물지만

나중에까지 잘하는 분도 적어서 누대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망쳐버리는 예가 허다히 있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이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소서. 또한 소인배를 멀리하시고 군자를 친근히 하시어 위로는 조정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시옵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돌보시어, 환난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업이 무궁하게 되면 신은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겠나이다.”

흡사 유언처럼 아뢰는 유신의 말에 법민은 미리부터 통곡을 금치 못했다.

유신은 신하들을 잠시 물리고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강수는 대왕을 도와 능히 삼한일통의 남은 위업을 이룰 만한 인물입니다.

오늘 이후로는 신을 대하듯이 강수를 대하옵소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법민이 울먹이며 대답하자 유신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좋은 날을 보실 것입니다. 미리 감축 드립니다.”

이 말을 끝으로 유신은 슬퍼하는 임금과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계유년(673년) 7월 1일,

계림의 큰 별이 사저의 정침에서 그만 빛을 잃으니 이때 유신의 나이 일흔 아홉이었다.

금관의 후예요 계림의 양장 용화 김유신의 최후가 그러했다.

그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대왕의 12대 손으로, 그 증조인 구해왕(仇亥王) 대에

신라와 나라를 합쳤는데, 구해의 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의 9장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벼슬이 각간에까지 올랐고, 무력의 아들 서현은 진지왕의 장남 용춘(龍春:김춘추의 아버지)과

평생을 벗하며 숙흘종(진흥왕의 아우)의 딸인 만명(萬明)과 혼인함으로써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서현은 만명과의 사이에 유신과 흠순을 낳고, 딸로는 보희(寶姬)와 문희(文姬)를 두었으니,

유신과 흠순은 통일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문희는 태종비가 되어 법민과 인문의 형제들을 낳았다.

친가는 멸망한 가락 왕실이요 외가는 신라 왕실인 기묘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유신은 일찍부터

두 왕실의 영향을 고루 받아 마침내 삼한의 백성들도 누군가가 나서서 한 나라를 이루면

능히 동족이 될 수 있다는 삼한일족(三韓一族)의 사상을 정립하게 되었으며,

이에 뜻을 함께한 태종무열왕(김춘추)과 그 아들인 문무왕(김법민)을 차례로

섬겨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는 데 으뜸 공신이 되었다.

신라에 병탄된 이래 망국의 설움을 씹고 있던 가야제국의 후손들이 근 1백 년 만에 벼슬을 얻고

다투어 요직에 나서게 된 것도 유신의 공이었다.

젊어서는 국선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며 산곡 간에 크게 이름과 용맹을 떨쳤고,

후에는 숱한 격전장을 누비며 말 위에서 침식하여 일흔이 넘도록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았다.

또한 신묘한 계책과 무궁한 지략으로 이르는 곳마다 대승을 거두었고,

출중한 무예와 탁월한 용병술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 단 한 번도 패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뒷사람 김부식(金富軾)은 그가 지은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신라가 김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았으며,

일을 도모함에는 그 말대로 들어주어 원망이 없게 하였으니,

가히 육오동몽(六五童蒙:군신의 단합)의 길(吉)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 까닭으로 김유신은 그 의지대로 일할 수 있었고,

당나라와 일을 도모해 삼국을 하나로 만들어 능히 공명으로써 그 평생을 마쳤다.

비록 을지문덕이 지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중국의 사서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사실이 알려지지 못할 뻔했는데,

김유신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여 그 명성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사대부에서 어린 초동에 이르기까지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이는 곧 그의 인물됨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의 죽음이 전해지자 신라인과 가야제국의 후손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통곡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까지도 눈물을 흘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법민은 서형산성(西兄山城:경주)을 증축하는 현장에 나왔다가 부고를 듣자

그 길로 눈물을 흘리며 유신의 집으로 달려가 상주들과 더불어 목을 놓아 울다가,

“태대각간의 살림이 워낙 청빈하여 장사치를 준비가 아니 된 듯합니다.”

하는 신하들의 귀띔을 듣고는 급히 대궐로 돌아왔다.

그는 환궁 즉시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지소부인에게 채백 1천 필, 벼 2천 석을 부의로 보내

장사 비용에 쓰게 하고, 군악대 1백 명을 내어 주악으로써 장례의 엄숙함을 더하게 하였으며,

금산원(金山原)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고, 유사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 공명을 낱낱이 기록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민호를 지정하여 사기(邪氣)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훗날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민은 부인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지금 나라 안팎이 다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아무런 근심 없이 살게 된 것은

모두가 태대각간의 덕택입니다.

생각하면 이는 부인이 집안일을 잘 다스려 이룩한 것이니 숨은 공이 실로 위대합니다.

과인은 그 음덕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을 하루도 잊은 일이 없습니다.

이에 남성(南城)의 벼 1천 석을 해마다 드립니다.”

하고는 곧 말대로 시행하였다.

더 훗날인 흥덕왕(興德王:신라 42대 임금) 재위 연간에는 김유신을 봉하여

흥무 대왕(興武大王)으로 삼으니 그 추존한 시호가 오늘에까지 이른다.

삼국이 서로 존망을 걸고 각축하던 시기에 하늘은 삼국에 골고루 불세출의 영웅 한 사람씩을

점지했으니 성충(扶餘成忠)과 연개소문, 그리고 김유신이다.

그러나 백제의 성충은 의자왕의 방탕함으로 그 뜻을 펴지 못했고,

연개소문은 비록 천하를 호령했으나 수명이 짧아 일찍 죽으니,

천명과 소임을 끝까지 마친 이는 오직 김유신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제아무리 뜻이 높아도 홀로 우뚝하면 꺾이기 쉽고, 당대의 형편과 시류를 벗어난 독선적인 기개는

설혹 뒷사람을 유혹할 수는 있을지언정 스스로는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걷게 마련이다.

누가 당대에 실패한 영웅을 진정한 영웅이라 할 것인가.

형편 가운데 뜻을 세우고 시류 속에 기개를 펼친 김유신과 같은 이가 진실로 참다운 영웅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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