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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선전포고 6

오늘의 쉼터 2014. 12. 2. 16:52

제35장 선전포고 6

 

 

 

백사(百事)를 알아차린 장수들은 한결같이 분개하여 원천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며 설쳐댔다.

특히 총애하던 두 편장을 한꺼번에 잃은 죽지와 양신을 잃은 흠돌의 분노는 당석에서

원천의 배를 갈라 창자를 씹어도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시득이 칼을 뽑아든 두 사람을 붙잡고,

“당장 원천을 죽인다면 반분은 풀리겠지만 이는 나라에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원천과 같은 자는 목을 붙여 대궐로 데려가면 전하께서 틀림없이 따로 크게 쓰실 데가 있을 것이니

두 분 장군께서는 소인의 말을 믿어보소서.”

하며 극구 만류한 데다, 그러구러 생각하니 원천의 출신과 벗바리가 워낙 만만찮은지라

두 장수는 어금니를 깨물며 도로 칼을 거두고 말았다.

석문곡에서 잔뜩 기세를 올린 당군들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 역공을 펼쳤다.

이때부터 석문곡 벌판에서는 생사를 다투는 양측간의 치열한 교전이 장장 보름간이나 계속되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법민은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대아찬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을

잇달아 급파했지만 석문곡의 참변 이후 신라군들의 꺾인 기세는 좀처럼 되살아나지 못했다.

일설에는 당의 대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 침략해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대치전이 지속될수록 신라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웅진도독부를 멸하고 난 뒤 신라 내부의 당나라에 대한 불안감은 과거 어느 때보다 한층 고조되었고,

중신들 간의 분열과 갈등도 덩달아 증폭되고 있었다.

과연 당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불안감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백성들은 공포에 떨고 참전한 장졸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부터 먹었다.

보름간 대치한 석문벌의 균형이 깨어진 것은 무수 형제가 이끄는 백금서당과 장창 부대의 활약이

빛을 발하면서부터였다.

무수는 백제의 유민들로 구성된 백금당을 내어 적의 일패를 다시 석문 계곡으로 유인하였고,

아우 인수는 장창 부대를 이끌고 당군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계곡에서는 이내 승부를 알 수 없는 난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당군들은 장창 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사방은 수천의 군사들이 운집해 몸조차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협소한 계곡이었고,

앞서 당군들에게 죽은 신라군의 시체가 도처에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저 참혹한 아군의 주검을 보라! 어찌 한 놈의 적인들 살려 보낼 수가 있을 것인가!”

무수와 인수는 대열의 선봉에 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절도봉을 휘둘렀다.

이때 당군을 이끌던 장수는 내주사마 왕예(王藝)란 자였다.

그는 내주항(萊州港:산동반도)에서 수군을 징발하고 고간의 뱃길을 맡아 평양으로 왔다가

다시 그 선단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 해전에서는 탁월한 수완이 있는 자였지만

육지의 단병접전에서는 지휘가 서툴렀다.

당황한 왕예가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지둥하는 사이 장창 부대의 선두가 일제히 진격하며

당군 수십 명을 창끝에 꿰어 죽이자 당군의 대오는 일순간에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무수 형제는 갈팡질팡하는 적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적장 왕예를 사로잡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왕예가 사로잡히는 것을 본 당군들은 무기를 집어던지고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승을 거둔 무수와 인수는 왕예와 생포한 적병들을 줄로 묶어 석문벌의 본영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본영의 군사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장창 부대만 따로 있다가 성공했으니 반드시 후한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 곳에만 둔치고 있어서는 쓸데없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리고는 각각 군사를 나누어 여러 곳에 진을 쳤다.

맞은편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근행은 박수를 치며 고간에게 말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소.

어리석은 적군들이 많은 군사로 오히려 병영을 분산하였으니

우리가 진을 벌리고 쳐들어간다면 틀림없이 대파할 수 있소.

 내가 말갈의 마군을 앞세우고 먼저 진격할 테니 장군은 후군을 맡으시오.”

말을 마치자 재빨리 기병을 선두에 배치하고 학의 날개처럼 진을 벌려 신라군을 공격했다.

이근행의 작전은 과연 주효했다.

군사를 나누고 병영을 여러 곳에 설치했던 신라군들은 이근행이 만든 학익진(鶴翼陣)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바람에 신라군은 대패하여 달아나고 장군 효천과 의문, 일길찬 안나함(安那含) 등이

또다시 싸움터에서 죽었다.

석문벌에서 쫓긴 신라군은 무이령(蕪荑嶺:김천으로 비정) 고개를 지나자

일패는 거열주로, 나머지 일패는 거타주로 퇴각하였다.

당군들은 고구려왕 안승과 의복, 춘장의 군사를 뒤쫓아 거열주까지 추격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다시 칠순의 거열주 대감 아진함(阿珍含)과 그 아들이 죽고 안승을 따라

참전한 다식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은 의복의 비장으로 석문 전투에 나갔다가

이근행에게 패하여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들고자 하였는데 부관 담릉(淡凌)이 앞을 가로막으며,

“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가려 죽는 것이 어려운 법입니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기를 쓰며 만류하였다.

원술이 담릉을 밀어내며,

“대장부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만일 이곳에서 패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는단 말이냐?”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려 하니

담릉은 그러쥔 말고삐를 붙잡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양자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형세가 급박해져서 싸울 기회를 잃게 되자

원술은 하는 수 없이 의복을 따라 거열주로 도망했다.

거열주에 이르자 대감 안나함이 의복과 춘장을 보고 말하기를,

“공들은 어서 달아나시오.

나는 나이가 이미 일흔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살면 얼마를 더 살겠소?

이때야말로 값지게 죽을 때요!”

하고는 창을 비껴들고 혼자 달려 나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고,

그 아들도 아버지를 뒤따랐다.

아진함 부자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법민은 크게 노하여 품일과 문영, 천품과 진복 등을

한꺼번에 파견하고, 다시 외주에 나가 있던 군관을 불러 거열주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거타주로 쫓겨 갔던 죽지와 흠돌도 군사를 이끌고 거열주로 달려오니

속칭 계림의 9장수가 거의 한자리에 모여 당군과 대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이령을 사이에 두고 벌인 양측의 대치전은 그해 초겨울까지 지리하게 이어졌다.

당군이 무이령 서쪽에 진을 치고 머무는 동안 신라의 국론은 심각할 정도로 크게 분열되었다.

강수는 한 발짝 물러서서 당을 구슬려야 할 때라고 왕에게 진언했다.

법민도 충격을 받기로는 강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당군이 제아무리 전략이 뛰어나고 군사가 용맹스럽다 해도 그 숫자가 고작 기천에 불과한데,

우리의 이름난 장수들이 7, 8만을 헤아리는 원군을 데려가서도 저토록 쩔쩔매고 있으니

대체 그 까닭이 무엇이오?

항차 금년에는 들에 풍년이 들어 식량을 넉넉히 지급하였음에도 굶주린 당군들보다

되레 기운을 쓰지 못하니 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문의 이치를 알 도리가 없소.”

그러자 강수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지금 우리가 1만에 가까운 당군에게 무주와 남원의 땅을 내어주고 있는 것은

첫째가 민심이 흉한 탓 이옵고,

둘째는 국론이 분열된 탓이며,

셋째는 요긴한 곳의 성곽이 부실한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본래 군사들의 사기와 성곽의 견고함에 의지하는 것인데,

민심과 국론이 새떼처럼 흩어지니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옵고,

성곽이 부실하니 백 가지 계책이 무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계림의 들에는 비록 풍년이 들었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까지 먹여 살리자니

곡식이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한일가를 찬성하는 군사들은 이를 걱정하여

곡식을 아끼느라 잘 먹지 못하옵고,

반대하는 군사들은 조정에 불만하여 싸움에 임해서도 힘을 다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원천과 같은 자가 어찌 비단 마읍성 한 군데에만 있겠습니까?

수세가 이미 반역을 꾀하였고, 얼마 전에는 내마 변산이 또 불충한 짓을 저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국록을 받는 신하들 중에도 이단의 무리가 속출하는 판에 백성들이야 오죽하겠나이까?

게다가 성을 쌓는 공사도 일만 잔뜩 벌여놓았을 뿐 아직 마무리가 덜 되었으니

신의 생각에는 여러 모로 보아 아직 대당전을 치를 시기가 아닌 듯하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당을 구슬릴 것이며, 설혹 그렇게 한다 해도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지가 의문이오.

과인이 만일 당에 굴복한다면 친당파는 오히려 기고만장할 것이며,

그러면 당과 대적해 싸우기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지 않겠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강수는 우선 법민의 우려에 공감을 표한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하오나 친당의 무리가 감히 성지를 거스르면서까지 당을 섬기려는 것은

진심으로 당을 받드는 게 아니라 당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당전을 치를 준비를 차근차근 착실히 해나간다면 두려움이 많이 소멸될 것 이옵고,

자연히 국론 또한 하나로 모아지게 될 것입니다.”

법민은 한참 침사에 잠겼다가 크게 한숨을 토했다.

“북방 요동이 아직 어지러운 판에 군사를 빼내어 우리를 친 것을 보면

당주와 무후가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소.

과연 과인이 친히 입조를 하지 않고도 달랠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소.”

“이제 절기는 혹독한 겨울로 치닫고 있습니다. 요동에서도 지금쯤은

서로 군사를 물리고 강물의 살얼음을 깨뜨려 무기를 씻을 때입니다.

당주는 무후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이옵고,

이번에 군사를 낸 것도 필경은 무후의 뜻입니다.

약간의 호의와 간곡한 사죄의 말 몇 마디로 실추된 위신만 세워준다면

무후는 틀림없이 철군의 영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신통치 않으나 무후를 설득할 글을 밤새 지어보도록 하겠나이다.”

강수는 법민의 승낙을 얻어 다음과 같은 사죄문을 지었다.

삼가 나의 죄지은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난날 우리의 형세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위급하였을 때 멀리로부터 구원을 입어

멸망을 면하였음은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스러져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고,

머리를 갈아 재와 먼지가 된다 하더라도 그 자비로움을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는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고 그것도 모자라

황제께 군사를 청하여 다시 우리를 치려하므로 파멸의 지경에서 스스로 생존하고자

대응을 하였던 것인데, 그로 말미암아 흉악한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용서받기 어려운 죄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 어찌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저간의 상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하면 살아서는 명을 거역한 역신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신한 귀신이 될 것이므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을 기록하여 아뢰는 것이니,

원컨대 귀를 기울여 그 원인을 밝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신라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결한 일이 없으나 최근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못하게 되어

드디어는 황제의 조정으로 하여금 책망의 소리를 내게 하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성토하기에 이르니,

남산의 대나무로도 나의 죄를 모두 기록할 수 없겠고, 포야산(褒斜山:종남산)의 수목도 나의 형틀을

만들기에는 오히려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나의 몸을 죽여 찢어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 나서

잘 헤아려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달게 받으오리다.

나는 관을 앞에 놓고 머리를 땅에 조아려 황제의 처벌을 기다립니다.

생각하면 황제 폐하의 성총은 밝기가 일월(日月)과 같아서 그 광명한 빛은 천하를 고루 비추고,

덕망은 천지와 화합하여 만물을 기르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벌레와 곤충에까지 이르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새와 물고기에게도 퍼져가니,

만일 허물을 용서하고 다시 복종할 수 있는 대은을 내린다면 나의 죽을 날이 오히려

새로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바라기 어려우나 감히 소회를 아뢰자니 황공한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파견하여 글월을 올려 사죄하고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이마를 땅에 대고 사죄하고 또 사죄합니다.

법민은 강수가 지어온 사죄문을 석문에서 죄를 지은 원천과 전날 가림성에서 반역한

내마 변산에게 맡기며,

“너희에게 장공속죄할 길을 열어줄 것이니 처자와 가솔들을 죽이지 않으려거든

낙양에 입조하여 당주와 무후의 마음을 돌려보도록 하라.”

하고서 아울러 사로잡힌 낭장 겸이대후와 내주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의 사마 녜군, 증산사마 법총,

그리고 170여 명에 달하는 당군 포로 모두를 석방하여 딸려 보냈다.

또한 은과 동 각각 3만 3천여 푼과 침(針) 4백 개, 우황 120푼과 금 120푼,

40승포 6필과 30승포 60필 등을 공물로 바쳤다.

조공사와 사죄사를 겸한 원천과 변산이 당군 포로들을 데리고 금성을 떠난 지 달 반쯤 지나자

무이령 서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간과 이근행이 어느 날 갑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웅진을 쳐서 멸한 법민은 과연 그것으로 당군이 물러갈지 내심 의심스러웠지만

결과는 강수가 말한 대로였다.

어쨌거나 당군이 스스로 퇴각했다는 것은 법민이 무력으로 장악한 웅진에 대해

당으로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뜻이요, 

명실 공히 백제의 구토에서 신라의 기득권을 승인한다는 외교적 인준의 의미여서

웅진을 멸한 뒤 노심초사하던 법민의 마음은 실로 날아갈 듯 가볍고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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