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4. 돌출되는 배후

오늘의 쉼터 2014. 12. 4. 01:04

  4. 돌출되는 배후

 

 

 

 

"두 놈 모두 목뼈가 부러져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형님."

고태석이 다가와 옆에 섰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코를 찔렀고 갑자기 구역질이 난
강만철은 이를 악물고 침을 삼켰다.

"소지품은 없었숨니다만 어떻게든 신원을 알아내겠습니다. "

고태석의 목소리는 낮았고 끝 부분이 떨려 나왔다.
그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강만철은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았다.
오덕수는 다섯 발의 총알을 맞고 현장에서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조웅남은 네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가슴에 박힌 총알이 0.5센티미터만 옆으로
 비꼈어도 현장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세 시간째 수술을 받고 있었다.
강만철이 머리를 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정환과 유혁근의 모습이 보였다.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빈 복도에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 왔다.

"이것, 유감입니다 "

인사고 뭐고 생략한 이정환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바깥의 찬바람이 그의 옷깃에서 뿜어졌다.

"놈들이 총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정말 야단이오, 망할 자식들."

투덜거리면서 이정환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들었다가
금연 표시를 보고는 도로 집어 넣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총번이 지워져 있는 것이 외국에서 들여온 총기류 같은데‥‥‥‥

강만철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도 언론에게 보도 금지를 요청할 생각이오?"

"아니, 아직 그런 지시는‥‥‥‥

그러다가 이정환이 말을 멈추고 입맛을 다셨다.

"당신의 상관, 그리고 그 상관의 상관,
도대체 어느 선까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거요?"

강만철이 다그치듯 묻자 이정환의 옆에 서 있던 유혁근이 초조한 눈을 깜박였다.

"그래, 당신들이 말하는 통치권자, 대통령은 요즘 밤의 세계가 정
체 모를 조직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폭발할지도 모르는데,
이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겁니까?"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 강 사장님."

이정환이 피로한 얼굴을 뒤로 젖히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는다.

강만철이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몇 년 동안은 밤과 낮의 밀월 기간이었지요.
우리의 보스는 밤의 세계를 낮으로 바러 놓았다고 믿었는지 지금은 섬에서 살고 있고,
당신들의 대통령은 우리 세계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

말을 멈춘 강만철이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런데 우린 오해했어. 당신들은 아직도 우리를 따로 구분하고 있어 ."

"나는 사실 그대로만을 보고합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윗사람들이오.
난 총경일 뿐이오, 저 친구는 경감이고."

"태평성대라고 위장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 알량한 감투들을 다만 몇 개월이라도 더 쓰고 싶어서 말이야."

"강 사장, 말씀 삼가시오."

이정환이 두툼한 턱을 세우고 눈살을 좁혔다.

"위에서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거요. 그걸 내가 가타부타할 수는 없어."

"시내 한복판에서 권총을 난사하고 있단 말이야.
유흥업소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어."

강만철이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잇사이로 말을 뱉었다.

"내 생각은 반정부 세력이 움직이고 있어. 현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세력이 배후에 있어."

"이봐요, 강 사장."

유혁근이 초조한 듯 상체를 움직였고 그에 따라 고태석도 몸을 굳혔다.
힐끗 이정환의 얼굴을 바라본 강만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부 내에서도 그놈들과 동조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당신일지도 모르지."

"이것 보십시오, 강 사장님."

유혁근이 한걸음 강만철 쪽으로 다가서자
그의 앞을 가로막듯이 고태석이 한걸음 다가왔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우린 삼갑시다. "

유혁근이 와락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태석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이윽고 제각기 다른 쪽으로 흘렸다.

"난 며칠 전에 어느 신문사 기자에게 정보를 주었어요.
특종감이 었는데 기사가 나가지를 않더구만."

강만철의 말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당신들은 우리 뒤만 쫓아다니고 있는데 그것이 놈들에게
우리 위치와 움직임을 알려 주는 수작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정환이 어깨를 한번 흔들더니 머리를 돌렸다.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만일 조웅남이가 어떻게 된다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만철이 말을 멈추고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그때에는 밤의 세계가 피바다가 될 거요. 우리는 놈들을 찾을 것
이고, 형벌은 우리가 내립니다. 당신들과의 밀월은 끝나게 됩니다. "

이정환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고태석이 긴장으로 어깨를 굳혔다.
 강만철은 수술실을 응시한 채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다.

"내가 다시 연락을 드리지요."

던지듯이 말한 이정환이 몸을 돌렸고 찌푸린 얼굴의 유혁근아 뒤를 따랐다.
강만철은 시선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수술실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병원의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멈추고내린 사람은 이재영 혼자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뒤쪽에서 닫히자 그녀 앞으로 정복 차림의 경찰관이 다가왔다

"이곳은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돌아가세요."

긴 복도에 드은드은 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관 제복을 입었거나 형사들처럼 보였다.
이재영의 재빠른 시선이 끝 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강만철에게 가서 닿았다.

"저는 저기 강 사장님을 찾아왔는데요. 가서 여쭈어 보셔도 좋아요. "

경찰은 강만철과 이재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머리를 』1덕였다.

"좋습니다. 여71서 기다리세요."

경찰이 복도의 끝 쪽으로 걸어가서 강만철에게 상반신을 숙이며 이야기를 했고
강만철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이윽고 경찰이 다가왔다.

"오시 랍니다. "

강만철의 곧은 시선이 한번도 깜박이거나 흔들리지도 않았으므로
다가간던 이재영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더욱 발길이 어지러워졌다.
그와의 거리가 10미터만 더 멀었더라도 이재영은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만 했을 것이다.

"기자가 글을 쓰지 못하면 그 짓을 그만둬야 돼. 실리지 못할 기사도 마찬가지야."

그의 앞에 멈추어 서자 강만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해 준 정보는 사실이야.
상대방에 대한 것은 싣지 않아도 되었어.
 난 우리가 어떻게 당하고 있는 것만이라도 기사화되기를 바랬어."

이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기사가 나가고 안 나가고는 제가 결정할 일인 아니었어요."

"어떤 경찰도 그러더군. 너희들은 모두 꼭두각시란 말인가?
그저 상급자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우리도 사장님 같은 조직이에요.
어쩌면 그쪽보다 더 체계와 질 서가 명확한‥‥‥‥

"개수작하지 말아라."

강만철의 얼굴이 쓰디쓴 한약을 삼킨 것처럼 찌푸려졌다.

"우리는 조직의 제일 말단에 있는 애들도 명령을 받으면 목숨을 버린다.
너희들은 양지에 있다고 뻐기면서도 책임질 일에는 모두 꽁무니를 빼지.
비열한 조직이다,
네가 속해 있는 곳이."

"사장님, 데스크에서는 이 사건이 사회에 불안한 분위기를 증폭시킬까 봐 우려했습니다.
단지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

"우리는 일이 터지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위에까지 보고가 된다.
판단을 하는 사람은 너희처럼 하나지만."

강만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중간에서 차단하고 있는 벽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것이 내 책임이야. 나는 그것에 목숨을 걸30다. "

이재영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만철이 머리를 들었다. 의외로 잔잔한 시선이었다.

"너희 대통령이 우리의 형님,
그렇지, 밤의 대통령인 우리 형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것이Tn지

조직을위해서 목숨을 바칠 나 같은 보스급이 없다는 것."

강만철이 입술 끝을 을리면서 웃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얼씬거리는 놈,
그놈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그 동안 너희 낮의 조직은 점점 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우리보다 더 "

고태석이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형님, 수술이 두어 시간 더 걸리겠다는데요.
그 동안 잠시 쉬시는 것이‥‥‥‥
그러던 그가 강만철의 시선을 한번 받고 나더니 몸을 굳히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무 의자는 길었고 강만철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고태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재영도 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쪽으로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원이 바쁘게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간호원 한 명이 미는 손수레 위에 도구들과 약품들이 놓여진 것이 보였다.
강만철은 어깨를 치켜올리면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병원의 약품 냄새가 폐에 차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 이었다.

복도 끝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춘 이정환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 보았다.
 폐에 남아 있던 공기를 뱉어내면서 넥타이의 매듭을 올리던
그의 시선이 문에 붙여진 팻말에 닿았다.
검정색 아크릴 판에 횐 글씨로 치안감 박동호라고 씌어진 팻말이다.
어깨를 올려 숨을 들이마신 이정환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이틀에 한번쯤은 이곳에 들르고 있지만 언제나 긴장이 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이정환은 벽에 붙여진 책상에서 머리를 드는 사내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국장님, 부르셔서 왔습니다. "

사내가 반백의 머리를 」1덕이며 턱으로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마른 얼굴에 비해 굵은 목청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와 관록이 들어차 있었는데 목소리만으로 서열을 매기라면
경찰청장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정환은 조심스럽게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박동호는 올해 말에 정년을 맞게 된다.
지금의 경찰청장인 하석재가 그와 고시 동기였는 데 지방에서 오래 근무해 온 때문인지
박동호의 승진은 언제나 느렸다.
그러나 소탈하고 담백한 성품의 박동호는 부하 직원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몇 명 안되는 고위직 중의 하나였다.

"조웅남이는 아직 중태인가?"

그가 묻자 이정환이 허리를 세웠다.

"네, 국장님. 수술은 끝났지만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어서 겨우‥‥‥‥

"조웅남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이 많을텐데. 그렇지 않나?"

이정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관료조직에서 이러한 긍정 요구형의 질문을 상사로부터 받았을 때
대답하는 요령은 이미 터폭하고 있다.

"물론 많겠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적이 아니면 동지니까요.
지금은 같은 동지이지만 전에는 적이었던 경우도」‥‥‥

"수사는 그쪽에 초점을 맞춰야겠군."

"그렇습니다, 국장님."

"하지만 총기가 문제야."

"경찰이나 군에서 유출된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머리를 끄덕인 박동호가 한 손으로 턱을 고였다.
입술 끝이 늘어졌고 입술 양쪽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 서류를 보면 오재식이와 최진우는 아무런 인적 교류가 없는 관계인데.
한 놈은 경기도가 고향이고 다른 놈은 충청도란 말이야."

박동호가 한쪽 손 끝으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서류를 가볍게 두드렸다.

"학교도 다르고, 살던 곳, 하던 일도 달라. 하다못해 군 복무도 말01야. "

이정환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오재식은 수원 출신으로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으로
춘천에서 군 생활을 했고 제대 후에는 고향에서 가구점의 점원 노릇을 하다가
두 달 전에 그만두었다.
주위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장사를 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최진우는 청주 출신이다.
그도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의정부에서 제대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파.
철물점의 점원이 되었던 최진우는 갑자기 총잡이로 변신했다가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이다.
"어쨌든 놈들이 고용된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놈들과 조웅남과는 인연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렇습니다, 국장님. 두 사람은 고용되었습니다.
제가 보고서에 썼다시피 그들을 조종한 배후가 있숨니다. "

그들의 배후는 폭력조직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데 그럴 만한 용의자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보고서의 내용도 앞으로 철저히 용의자를 색출해내겠다는 애매한 것이었다.

"내가 언론사에는 협조를 요청해 놓았어.
오늘 조간에 간단히 실렸더군. 자네도 보았지?"

"네, 국장님 ."

총기 난동 사건치고는 너무 작은 지면이었다.
 언론들은 조웅남과 원한치 있는 다른 폭력조직의 복수극이라고 규정짓듯이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엉뚱한 녀석들이 있어.
괜히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 보려고 이야기를 만드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위에서도 그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야."

이정환이 긍전하듯이 머리를 』1덕여 보였다.
그의 위라면 치안총감인 경찰청장과 내무부 장관 둥인데
더이상의 위쪽은 그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폭력조직간의 분쟁으로 정국이 흐트러지면 곤란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기가 꺾인 불만 세력이 분위기를 부채질할 수도 있어."

박동호가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는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위에서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어. 불만 세력은 여론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지만
불씨만 있으면 얼마든지 세력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을으신 말씀입니다, 국장님,"

이정환이 머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 불만 세력이라는 것이 애매하지만 심상치가 않습니다.
저는 이번 일의 원인과 배경에 수사력을 집중시키려고‥‥‥‥

"폭력조직간의 싸움이야."

선뜻 그의 말을 자르면서 박동호가 찬찬히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조웅남과 강만철, 그리고 최충식이나 김칠성, 이 사람들이 놈들의 목표 아닌가?
원인은 확실하네. 밤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지."

"이제까지 그들은 저희들에게 협조적이었습니다.
김원국이 장악하고 나서부터 밤의 조직은 대부분 양성화되었지요.
그들은 세금을 내는 시민이 되었습니다. "

박동호는 턱을 내민 자세로 이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환이 말을 이었다.

"국장님, =1들은 습격하는 놈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는 것에 대 해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들개가 집안에 들어왔다고 집개가 될 수는 없어."

"강만철씨는 우리가 오히려 놈들을 돕고 있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되는 소리 ."

박동호가 온 얼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그나마 보호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 친구도 지금쯤 조웅남 같은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라."

"어쨌든 놈들의 배후를 캐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국장님."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가 그것이야."

손바닥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박동호는 말을 이었다.

"배후를 조사하게. 하지만
첫째, 앞으로 사건이 일어나면 조직간의 싸움인 것으로
언론이나 관계자들한테 알려 주도록.
둘째, 이 일은 비밀리에 진행할 것.
사건의 진상은 나에게만 직접 보고해 주도록하고 자네도 직속 부하만을 쓰게.
나는 자네에게 수사와 집행에 대한전권을 주겠네. 이건 윗사람과 합의한 거야."

눈썹 사이를 모으고 거기에다 눈을 치켜뜬 얼굴로 이정환이 그를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맡았는가를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이 일은 목표를 달성했더라도 얼마만큼 공적을 평가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패했을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매장당하게 된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박동호가 서류를 덮으며 머리를 끄덕여 보였으므로 이정환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배어 있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은 김칠성은 귀와 어깨 사이에 끼워 넣은
수화기를 쥐었다.
아직도 위잉 하는 소리만 들릴 뿐 저쪽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침을 끌어 모아 삼킨 그는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의외로 크게 들리자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어내 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형님, 접니다. 김칠성입니다. "

,버럭 소리치듯 말하던 김칠성이 어깨를 올렸다.
자신의 사무실에 흔자 앉아 있어서 듣는 사람은 없다.

"아아, 네가 웬일이냐?"

김원국의 목소리는 반가운 듯 밝았다.
그에게 직접 통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는 오함마를 통해 중요한 일을 보고해 왔던 것이다.

"형님, 서울에 일이 생겼습니다. "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김칠성이 문 쪽을 노려보았다.
김원국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

"형님, 웅남 형님이 총에 맞았습니다. 지금 병원에 계시는데 중태 입니다. "

김칠성이 한쪽 팔을 들어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놈들의 배후는 아직 모릅니다. 웅남 형님이 총을 쏜 두 놈을 현장에서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런데 언론은 그것이 폭력조직간의 싸움 이라고‥‥‥‥

"만철이는 어디 있는 거냐?"

이제 김원국의 목소리는 딱딱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린 김칠성이 상체를 반듯하게 세웠다.

"형님은 지금 백화점의 사장실에 계십니다.
제가 조금 전에 통화를‥‥‥‥

"그놈은 지금 윌 하고 있어?"

튕겨 나오는 듯한 김원국의 목소리에 김칠성은 몸을 굳혔다.

"네, 형님. 만철 형님은 형님한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그런데 저는‥‥‥‥

"그 자식, 건방지게."

눈을 치켜뜬 김원국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김칠성은 눈을 깜박여 눈에 들어간 땀방울을 떨어내었다.

"웅남이가 어떻다고? 자세히 말해라."
한층 가라앉힌 말투로 김원국이 물어 왔으므로 김칠성이 어깨를 내렸다.

"네, 총을 네 방 맞았습니다.
같이 있던 오덕수는 웅남 형님을 보호하다가 다섯 방을 맞고 죽었습니다. "

"형님,놈들은 폭력조직이 아닙니다.
이번에 웅남 형님한테 죽은 놈들도 엉뚱한 놈들입니다.
전과도 없고, 철물점과 가구공장에서 일하던‥‥‥‥

"함마한테서 들었는데, 이 뭐라고 하는 놈은 잡았냐?"

"아닙니다, 아직. 경찰도 찾고 있습니다만 어디로 숨었는지 가쪽들도‥‥‥‥

"형님, 언론에서도 폭력조직간의 싸움으로만 보도가 되어서
오히려 저희들만 압박을 받습니다. 경찰들이 따라다니고."

"몇 개 업체에서는 저회들 모르게 놈들이 지시한 구좌로 세금을 내었습니다. "

"이 뭐라고 하는 놈이 예비역 소령이었다고 했지? 특옹대 출신이고?"

김원국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 오자 김칠성이 머리를 」1덕였다.

"네, 형님, 작년 초에 제대를 했습니다. 그후로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데 ‥‥‥‥

"그놈의 가족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네, 형님."

한동안 잠자코 있던 김원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가족들을 조심해라. 애들을 풀어서 철저하게 보호시켜."

"01, 형님 ."

다시 소매를 들어올린 김칠성이 이마와 눈부분을 한어번에 닦아내었다.

"내가 곧 가겠다. "

"네, 형님 "

"이건 너만 알고 있도록 해라 "

"네, 형님 ."

김칠성은 소매로 다시 한번 얼굴을 닦았다.
김칠성이 방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백동혁이 일어섰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소스라치듯 놀라 따라 일어섰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조직에서 운영하고 있는 업체 중의 하나인 맨해턴 끌렇의 밀실이었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자리에 앉으면서 김칠성이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우선, 거기들 앉아."

백동혁이 자리에 앉자사내가주춤거리며 옆자리에 앉았다.
밤 1 1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종일 업체를 돌아다닌 터라 김칠성은 피곤하기도 했다.
더욱이 김원국에게 보고를 마치고는 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아직도 은몸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백동혁이 입을 열었다.

"형님, 얘는 장안동의 차이나 살롱이라는 데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사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 허리를 기역자로 꺾었다.
스물일곱이나 여덟쯤으로 보이는 좁은 어깨에 허리가 긴 체격이었다.
얼굴은 몸에 비해 조그마했는데 눈이 작은 데다가 입술과 코가 두툼했다.
나이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체형이었다.

"저는 이성용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저는 영광입니다. "

사내가 긴장한 탓인지 더듬거렸고 어깨를 굳힌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입맛을 다신 김칠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자리에 앉아라. 앉아서 나한테만 하겠다는 이야기를 해봐,"

"예, 형님."

자궈에 앉은 이성용이 허리를 세우고는 침을 삼켰다.
그는 안면이 있는 백동혁을 찾아와 깁칠성에게만 말해 줄 정보가 있다고 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정보를 가져왔다고도 하였으므로 할수없이 백동혁은 김칠성에게 연락을 했다.

이성용은 조직에 소속된 부하가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 제가 이번 사건의 주토자를 압니다. "

김칠성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저, 정기욱이라고, 전에 북창동에서 놀았다는

"정기욱?"


이맛살을 찌푸린 김칠성의 시선이 그에게서 백동혁 쪽으로 옮겨졌다.
백동혁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마주 보았다.

"저, 옛날에는 조웅남 형님도 동생으로 데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

"그래? 그런데?"

"그 정기욱씨가 이번 일을 저질렀습니다. "

이성용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제 귀로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

"누구한테 말이냐? 그 정기욱이라는 사람한테 말이냐?"

"아닙니다. 김동천이라고, 정기욱씨의 직속한테 들었습니다.
김동천씨는 제 선배의 선배가 됩니다. 그래서‥‥‥‥

백동혁이 입맛을 다시면서 힐끗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조웅남 형님이 습격당하시기 전날 밤에,
동천이 형님이 술마시다가 지나가는 말로 그랬습니다.
내일 조웅남 형님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

이성용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조그만 눈은 번들거렸는데
김칠성의 얼굴에서 그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치켜뜬 김칠성이 그를 쏘아보았다.

"전날 밤에 말이냐?"

"01, 형님 "

"그 동찬인가 하는 놈이 일을 한다고 그랬어?"

"동천입니다,형님 아니,그 동천 형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그것은 저도 잘‥‥‥‥

"저희들은 역삼동 대양 빌딩에 백 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놓고 있습니다.
자금이 잘 빠져서 갔다 온 사람들한테 인기가 좋습니다,
형님. 벌써 조직원만 200명 가깝게 되었습니다, 형님 ,"

굳어진 얼굴로 김칠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기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무실을 얻어 놓고 전과자들을 백몇 명이나 모아 놓았다
면 예삿일은 아니다.
더욱이 조웅남의 습격을 전날에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습격 사건, 콘티넨털 호텔의 오 사장이나
또 클럽의 영업부장들도 정기욱이가 한 일이란 말이냐?"

답답했는지 상체를 부스럭거리던 백동혁이 불쑥 물었다.

"네, 형님."

백동혁과 김칠성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너도 조직원이지? 너도 그 일을 했어?"

다그치듯 백동혁이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을 하는 조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닙니다. "

"누구야? 전과자 집단인가?"

"그건 모.릅니다. 정기욱 형님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네가 나한테 털어놓는 이유는 뭐냐?"

문득 김칠성이 머리를 들며 물었다.

"네 조직을 배신하는 이유를 대라."

"전과자들만 대접하고 저 같은 사람은 무시합니다.
이번에도 활동비를 나눠 주었는데 저한테는 30만 원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전과자 놈들은 100만 원에서 200만 원 받은 놈도 있습니다. "

"저는 이제까지 동천 형님 모시고 궂은 일은 다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더이상 동천 형님하고 같이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

"역삼동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뭐냐?"

"업체들의 인수 준비를 합니다.
저는 그곳에 가보지 않았지만 구역별로 책임자를 정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

"수고했다. "

머리를 끄덕인 김칠성이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얘한테 500만 원만 줘 보내라.
그건 내가 주는 활동비다. 무슨 일이 있으면' 동혁이 네가 연락을 받고."

백동혁이 머리를 」1덕이자
자리에서 일어선 김칠성이 이성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이성용이 황급히 일어나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 다소 착오는 있었지만 말이야. "

이무섭이 앞에 앉은 이철우를 향해 말했다.
이천의 산속에 있는 이무섭의 별장 안이다.
그들 옆쪽의 페치캬에서는 장작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김칠성이와 고태석이가 발광을 하고 있지만 곧 정리가 될 거야."

훈혼한 열기를 쏘인 이무섭의 얼굴은 반들거렸다.
본래가 검은 얼굴에 열기가 섞여 더욱 검게 나고 있다.

"조웅남이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말을 하지는 못한다 는데요."

이철우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3개월은 지나야 움직일 수 있다고 합니다. "

"멍청한 놈."

불쑥 던져진 이무섭의 말에 이철우의 눈이 분주히 깜박였다.

"자네더러 한 소리는 아냐. 조웅남이한테야."

이무섭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면서 웃었다.

"우리 일을 덜어 주었지만 곰 같은 놈이야.
총을 그렇게 맞고도 두 명의 목뼈를 부러뜨려 죽이다니."

"도무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도관 수리공으로 위장시켜서 빌라호 보냈는데 ‥‥‥‥
이철우가 손을 들어 됫머리를 어루만졌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조웅남이를 제거하지 못했으니."

"운이 좋은 거야.
아무리 기회가 좋다고 하더라도 운이 나쁘면 안돼.
우린 놈을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는 두 녀석이 그놈에게 죽었어.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어 가고 있는 거야, 이 소령."

"어제까지 스물일곱 군데의 업체가 세금을 냈습니다
조웅남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효과를 본 것이지요."

이무섭의 불위기가 좋았기 때문인지 이철우는 저도 모르게
자화자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누가 힘이 있는가를 금방 알아내지 a_. "

"박 사장을 잘 받들어, 이 소령 , "

선뜻 말을 바꾼 이무섭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이철우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자네한테는 그가 보스야. 그가 자네를 의식하게 하면 안래.
나와의 접촉은 절대 비밀로 하고."

"그건 철저하게 지켜 오고 있습니다. "

"박 사장이 흥이 나서 움직여야 된단 말이야."

"염려 마십시오, 단장님."

이철우의 자세는 각듯했고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끔씩 이무섭을 단장이라고 군대 시절의 직함을 부르는 것도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무섭은 특공 단장으로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들은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밖은 짙은 어둠에 싸인 밤이었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 왔다.

"경찰과 놈들의 조직에서 자네를 찾고 있는데."

정적을깨고 이무섭의 말소리가응접실을울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치고 지났다.
"특히 김칠성이가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어 놈을 얕볼 수가 없어.
생각보다 조직의 기반이 넓어."

"제 가족까지 찾고 다닙니다. "

이철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웃음을 띄워 보였다.

"제 어머니를 찾으러 고향으로 똘마니를 보냈더군요."

"그놈 마누라는 어떻게 되었나?"

"아직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

"김칠성이는 마누라가 죽은 줄 알겠군."

"아마 그렇겠지요."

머리를 끄덕인 이무섭이 한동안 불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놈의 마누라를 미끼로 놈들의 지휘 체제를 흔들어 보려고 했던 방법도 잘못 생각한 거였어.

놈들의 정신력은 보기보다 강하더구만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입니다. "

이철우가 뱉듯이 말했다.

"놈은 제 마누라가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다못해 언론에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

"그야도움될 일이 없으니까.언론이야시끄럽게 보도만 해줄 뿐이지,
그런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아."

"박 사장한테는 그 여자를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고 했습니다만."

"박 사장은 너무 과격하기만 해서 후유증이 염려가 돼.
그건 내가 잘 보완을 하고 있기는 한데‥‥‥‥

이무섭이 머리를 들고는 이철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김칠성이 이제는 조웅남을 대신해서 힘을 쥐겠구만. 그렇지?"

"그야, 조웅남이 병원에 있으니까요."

"그놈한테는 굴러 들어온 자리지,"

이철우가 눈을 껄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들 세계에서는 형님이 죽거나 없어져야 형님 자리에 올라서게 되지.
형님은 끝까지 형님이니까. 우리처럼 능력이나 수단으로 진급하지 않는단 말이야."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난 이무섭이 어깨를 치켜올렸다.

"우리는 군대에서 작전을 배웠고 갖가지의 전투 방식을 익혀 놓았어.
우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과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법도 배웠어.
전쟁은 우리의 일이었어."

시선이 마주치자 이무섭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요즘처럼 피가 끓어 오르는 나날이 없었어, 이 소령, 내 일생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혀 서 있던 이재영은 왼쪽의 계단으로 몰려가
한무리의 사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는 사내는 김칠성이었다.
조웅남만큼은 못되지만 1미터 80센티미터가훨씬 넘는신장에 체중도 100킬로그램 이
상이 될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턱을 치켜든 그의 표정은 살벌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뒤를 따르는 십여 명의 사내들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으므로 이재영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쪽에 몰려 서 있던 외국인 투숙객들이 뒤를 따랐다.
조웅남이 습격을 받아 병원에 누워 있으니 이인자인 김칠성이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의식중에 머리를 든 이재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는 어느덧 5층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4층의 단추를 누른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선 이재영이 가방을 의자 위에 집어 던지고는 발을 흔들어 구두도 벗꺼 던졌다.
호텔 생활을 일주일째 하고 있어서 잠자리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2, 3일 더 머물고
체크 아웃 할 작정이었다.
기사화되지 않는 취재를 백 번 해보아야 소용없는 일이었고 .

부장인 안청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재킷의 단추를 끄르던 이재영은 전화벨 소리에 몸을 돌렸다.
탁자 위에 놓인 횐색의 전화기에서 램프가깝박이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젖가슴을 반쯤 내놓은 모습으로 이재영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대한일보 기자인 이재영씨 맞습니까?"

대뜸 사내가 물어 왔다.

"네, 그런데요."

이런 전화에 익숙한 그녀였지만 이제까지 호텔로 이런 식의 전화가 온 적은 없다.
이재영은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수고하시는군요. 그런데 정보를 드릴 것이 있어서요."

사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번 조직간의 전쟁에 관한 정보입니다. 흥미 있으십니까?"

"댁이 누군지를 말씀해 주시면 그 정보의 신빙성이 더 있겠는데요,
무슨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생각 같아서는 그냥 듣기만 하고 싶었으나 이재영은
요즘 들어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정보,특종의 기사라도 기사화되지 않으면 쓰레기인 것이다.
사내의 가볍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렇다고 김원국의 조직도, 그 반대의 세력도 아닙니다.
요즘의 전쟁을 방관하고 있는 조직이지요. 그러면 됐습니까?"

"말씀 계속해 보세요."

짜증이 난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이재영은 한 손으로 나머지 재킷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는 재킷을 벌렸다.

"김칠성씨의 부인이 일주일 전에 납치당했어요.
그것을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

재킷은 양쪽 어깨 밑으로 벌어진 참이었는데 이재영이 몸을 움츠리면서 수화기를 쥐자
다시 입혀졌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저쪽 조직에서는 김칠성을 협박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지요?
 김칠성씨의 부인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말예요."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이재영이 물었다.

"김칠성씨의 집에 연락을 해보시고, 그 다음에 김칠성씨의 주변을 조사해 보세요.
아마 그쪽은 철저히 감추려고 들겠지만 이재영씨는 기자 아닙니까?
사실을 알아내실 수 있겠지요."

"왜 나한테 연락하셨지요?"

"당연하죠. 돈입니다. "

"얼마나?"

"200만 원. 이런 정보 값으로는 헐값이오. 특종이거든. 당신의 이름이 날릴 거요."

이재영이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나를 선택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다른 신문사도 많은 데 말예요."

"당신이 김칠성씨와 제일 가깜게 있지 않습니까?위아래 충에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당신만큼 이번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자도 없고,
특종 한번 못내는 당신이 안돼 보이기도 해서."

모조리 맞는 말이었으므로 이재영은 아랫입술을깨물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어서 확인해 봐요, 시간이 없으니까.
하지만 은밀히 진행해야 할거요.
난 패거리들이 몰려오는 것을 바라지 않아. 오직 당신한테만,
그렇지, 기자한테만 정보를 주고 싶어.
김칠성이가 제 마누라를 구하러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왜냐하면 나는 중립이니까."

"시간을 주세요, 생각할 시간을."

손목시계는 저녁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청준은 아직 신문사에 있을 것이다.

"한 시간을 주ft소, 딱 한 시간. "

사내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딱딱하게 들렸다.

"확인이 끝나면 현금 200만 원을 준비해 놓아요.
그러면 그 여자가 감금당하고 있는 곳을 알려 줄테니까."

"그건 어떻게 믿죠? 당신이 돈만 가져가고."

"못 믿으면 할수없어 "

사내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 따위로 망설이다가 늙어 자빠지겠다. 서둘러, 할테면 말이야."

전화가 끊겼으나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다본 채 이재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아래층에서 보았던 김칠성의 험악한 얼굴이 떠을랐다.
그들의 조직 내부에서는 그의 부인이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은 그의 부인을 납치해서 협박하고 있는 중이다.
이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재킷의 단추를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흘에는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2에평이 넘는 대형 클럽이 었고 밤 10시여서 11장 손님이 들끓는 시간이었다.
김칠성은 흘의 통로 쪽 구석 자리에 앉아 플로어 쪽을 바라보았다.
빈 탁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흘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대 위의 밴드는 미국식 컨트리송을 연주하고 있는 중이었고 플로어에는
대여섯 쌍의 남녀가 흐린 조명 밑에서 흐느적거리듯 춤을 추고 있다.
위스키를 대여섯 잔 마시고 난 참이라 얼굴에 열기를 느긴 김칠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는 30대의 사내에게서 엷은 향수 냄새가 났다.
1를 따라 플로어로 나가는 여자의 정장 차림에서 장신구가 번쩍였다.
영동에 있는 블루힐 클럽은 이제 30,40대 장년층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나이트 클럽의 열기에 위축되고 카바레의 혼탁함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양쪽의 장점을 갖춘 데다가 고급스런 분위기로 꾸며진 새로운 형태의 글럽이었다.
옆쪽의 통로에서 백동혁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는 말없이 김칠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형님, 별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바깥에 애들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만."

그는 물점을 들어 한모금을 삼켰다.

"저놈들은 클져을 둘러보려고 온 모양인데요."

백동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무대 옆쪽의 탁자였다.
사내 네 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이미 술병과 안주가 가득했다.
"여기야 저희들이 직접 운영하니까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는 아마 '말을 멈춘 백동혁이 힐끗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다른 업소에서는 공짜로 술을 마시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성용인가 그놈은 아직도 장안동에 있는 거냐?"

흘 안을 둘러보며 김칠성이 물었다.

"예, 형님. 그놈은 이쪽 역삼동의 조직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정확하지 못합니다. "

"돈에 매수되는 놈은 믿을 수가 없어. 언젠가는 또 배신하게 돼."

"예, 형님 ."

김칠성은 그의 스승이자 형님이기도 했다.
백동혁은 그의 언행을 교과서처럼 따르고 있었는데
운동신경이 뛰어난 데다가 머리 회전도 빨랐으므로 이제는
김칠성의 얼굴 표정만 보아도 그의 기분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쓸모가 많습니다, 형님, 어제도 열 명 정도의 전과자들을
조직에 가입시켰다고 하더군요. 이성용이가 있는 클럽에서 술을 마셨답니다. "

백동혁이 낮게 말하자 김칠성은 머리를 」1덕였다.
정기욱이란 존재는 그야말로 뜻밖의 인물이었다.
정기욱에 대해서 신경을 쓴 지 며칠 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언제부터
이쪽의 업소를 들락거렸는지 알 수가 없다.
정기욱의 부하들이 블루힐에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으나
김칠성은 어쩐지 맥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알아 보았지만 정기욱은 독불장군이었다.
성격이 독하고 차가워서 후배들도 없었고 겨우 따른다는 것이 김동천과 차우석이라는
폭력 사기 출신들 두어 명밖에 없다.
그가 조직을 이끌어 이쪽을 넘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칠성은 술잔을 내려놓고 머리를 들었다.

"저것들이 영동 바닥을 언제부터 휘젓고 다녔는지를 알아보아야 fa다. "

"알아보지요, 형님."

백동혁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데리고 나갈까요?"

"술마시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또 물어 볼 것이 있는데."

"제가 물어 보지요, 형님."

두 눈을 갭벅이며 김칠성이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저놈들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다뤄 ."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제정신이 박힌 놈 같으면 부하들을 저렇게 풀어 놓지 않는다. "

사내들을 바라보던 백동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잘 알겠습니다, 형님."

"배후에 누군가가 있어. 하다못해 자금을 대는 놈이라도."

김칠성이 턱으로 사내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은 미끼인지도 모른다. "

사내들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모양이었다.
미끼치고는 왜 팔팔하다는 생각이 든 백동혁이 머리를 돌렸다.
박한일은 연려주택의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였고 회초리로 때리는 것 같은 바람이 얼굴에 부딪쳐 왔다.
짙은 어둠에 싸인 상가 건물과 골목길이보였다.
이태원의 해방촌이라고 하는 산등성이의 주택가였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추위가 심한 때문인지 인적은 없다.
어깨를 움츠린 박한일은 점퍼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는 연립주택의 현관으로 다가갔다.
현관의 유리문이 바람에 떨어져 나갈 듯이 덜컹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선 박한일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그의 집은 연립주택의 지하였다.
서너 걸음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드는데 뒤쪽의 계단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내 한 명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박한일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상황이었으나 내려오는 사내는 왜소한 데다가
한걸음씩 내려을 때마다 허리가 앞뒤로 건들거렸다.
그의 뒤쪽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누구요?"

박한일이 거칠게 물었다.
우선 머리에 짚이는 것은 강만철이나 김칠성의 조직이었으나 아무래도 이놈은 낯이 설다
사내는 계단 중간에서 멈추어 섰는데 둘 사이의 거리는 2미터쯤 되었다.

"흔자 살고 있으면 같이 들어가는 것이 낫겠는데. 왜 춥구만."

사내가 찌그러진 눈시울을 더욱 굽히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이런 빌어먹을, 넌 누구야?"

박한일이 어깨를 폈다. 계단의 입구를 막고 선 바람에 갈 곳은 문이 닫혀진 집안으로
들어가거나 놈을 치고 나가야 한다.
그는 계단 쪽으로 발을 내디다.

"널 잡으려고 두 시간을 떨었어, 클럽에서부터 네놈들 중에서 네가 제일 센 놈같이 보이더군."

오히려 위쪽에서 한 계단을 내려왔으므로 박한일은 내밀었던 발을 거두어 들였다.

"자4t, 여기."

갑자기 한 손을 둥뒤로 카져가더니
50센티쯤 되어 보이는 경찰봉과 비슷한 것을 꺼내어 들었다.

"네가 순순히 따를 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맨손으로 싸울 놈도 아니겠고."

사내가 한 계단을 더 내려오자 박한일은 선뜻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횐 날이 선뜻하게 보였다.

"그까짓 나무 토막으로 뭘 어떻게, 자식아. 내가 회를 쳐주마."

박한일은 우선 단검을 좌우로 휘둘러 사내와의 간격을 만들고 난 다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만철이의 똘마니로군.사람 잘못 찾아왔다. "

입으로는 지껄이면서도 단검의 흰 날이 좌우로 전후로 휘둘려져 왔으므로 백동혁은
서너 계단을 뒤로 물러났다.
칼날이 시멘트 벽에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박한일은 필사적이었다.
계단을 을라가 연러주택의 밖으로 뛰쳐 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곧장 다가f다.
곤봉쯤으로는 한두 대 맞더라도 이쪽에서 찌르고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좌우로 휘두르던 칼의 방향을 선뜻 바꾸면서 박한일이 그의 배를 향해 깊게 팔을 뻗자
휘청 몸을 비꼈던 백동혁이 쥐고 있던 곤봉으로 박한일의 정수리를 쳤다.
'따악!'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그 순간 박한일은 머리를 흔들거리며 멈추어 섰다.

초점이 없는 멍한 시선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는데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다시 백동혁의 곤봉이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올라가 턱을 찔자
박한일의 몸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백동혁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에 구겨지듯 널브러져 있는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들었 f.


"형님, 거들어 드릴까요?"

계단 위쪽에서 이강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은 약을 먹은 놈 같군요. 머리만 건들거리고 있는 걸 보니,"

계단을 내려온 이강일이 박한일의 겨드랑이를 뒤쪽에서 꼈다.
백동혁은 문의 손잡이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백동혁이 계단을 오르는데 뒤쪽에서 따르던 이강일이 투덜거렸다.

"지기미,저 여우 같은 년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여?이거 신경 쓰여서 정말."

머리를 돌린 백동혁은 엘리베이터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재영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머리를 돌렸는데 그녀도 이쪽 계단을 이용할 모양이었다.
서너 걸음을 더 올라 2층으로 향하는 꼬부라진 계단으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부르는 그녀의 소리가 들렸다.

"저 좀 보세요, 잠간만요."

"T)11ㅁ1. "

투덜거리며 이강일이 돌아섰고 백동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 말씀 드릴 것이 있는데요, 저분한테. "

뒤쪽에서 이재영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가 대한일보의 사회부 기자이고 강만철과 조웅남의 허락 하에
사건을 취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일 눈앞 에서 어른거리는 그녀를 어털게든 몰아내었을 것이다.
몸을 돌린 백동혁이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마치 들풀처럼 어지럽고 풍성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횐 얼굴에서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이쪽으로 향해져 있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이에 그녀는 이강일의 옆을 지나 계단을 올라왔다.
이제는 그녀의 입가에 있는 조그만 점까지도 보였다.

"중요한 일이에요. 선생님한테만 여쭈어 볼 일인데요."

"이런 rl기미 ."

따라 올라온 이강일이 다부져 보이는 머리를 치켜들었다.
눈을 잔뜩 치켜뜬 표정이었다.

"어이, 기자. 우리 형님은 바빠. 할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라구."

"까불지 말어 ."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분위기에 백동혁이
늘어진 눈시울을 치켜뜨고 있었다.
이강일은 입을 따악 벌리고 있다.

"난 당신들 형님의 형님을 직접 만나서 허락을 받은 사람이야.
내가 중요한 일로 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판에 ."

이재영의 시선이 백동혁에게 곧장 쏟아져 왔다.

"백동혁씨, 시간이 없어요.

무언가를 확인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에요.

그것이 당신의 형님에 관한 일이란 말예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던 백동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시다, 저리로 갑시다. "

그가 턱으로 가리킨 곳은 2층의 복도 끝 쪽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전에는 여행사의 사무실이었는데 옮겨 가는 바람에 잠시 비어 있는 곳이다.
 이강일이 찌푸린 얼굴로 문 앞에 지켜 섰고 백동혁과 이재영은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앉았다.

"뭡니까? 중요한 일이란?"

턱을 들며 백동혁이 묻자 이재영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저, 김칠성 부사장님의 집안 문제인데요,사모님이 흥종에 계세요?"

백동혁의 얼굴에서 시선을 톄지 않고 이재영이 물었다.
백동혁이 늘어진 눈시울을 치켜뜨는 대신 턱을 들었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댁에 연락을 해보니까 전화를 받는 사람이 얼고,
혹시나 해서 친정집에 해보았더니 갑자기 흥콩에 가셨다고 해서요."

"그럼 홍콩에 가신 모양이구만."

백동혁이 그녀의 시선을 맞받으며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모님이 연락이 없으셨구만."

"회사 일로 가셨다던데."

"그래요?그럼 그러신 모양이구만."

눈샙 사이를 좁힌 이재영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회사 일로 가셨는데도 모르고 계셨단 말예요?"

"01. "

"백동혁씨가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 제 마음대로 기사를 쓰겠어요.

그래도 좋아요?"

백동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거야 오야 마음이지요. 하지만 엉뚱한 이야기 쓰셨다가는 큰일을 당하실텐데. "

"엉뚱한 이야기가 아녜요. 근거가 있는 이야기니까."

이재영이 의자를 끌어당겨 다가앉았으므로 백동혁은 상체를 뒤로 젖혔다.

"제보가 들어온 일이니까 그저 사실만 말씀해 주세요.

 다행히 제가 받게 되었으니까 이렇게 확인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보도부터 하고 볼 거예요."

"제보라니, 무슨 제보란 말이오?"

백동혁의 목소리는 억양은 변함이 없었으나 조금 느렸다.

"김 부사장님의 부인이 납치당했다는 제보예요."

"누구한테서 그 말을 들었습니까?"

"그건 모르겠어요.그 말만 하고 전화가 끊겼으니까."

"어떤 미친 놈인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이쪽도 분명한 것이 없어요. 흥콩에 갔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고."

"더럽군."

문득 백동혁이 입술을 비틀면서 머리를 한쪽으로 돌렸다.

"기사거리 찾으려고 하는 수작이. 이건 아주 재미있는 모양이야."

"말씀해 주시면 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그건 약속할게요. "

이재영이 눈을 치켜뜨고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얼굴이었다.

"백동혁씨는 사실을 알고 계시다고 믿어요.

그러니까 사실만 말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추측 기사를 쓸 수밖에 없어요.

백동혁씨 말대로 책임 없는 기사를 말예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약속할게요."

이재영이 다시 바짝 다가앉았다.
강한석 장관은 승용차의 됫자리에 등을 묻고는 무심한 시선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신선한 가죽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고 대형 승용차는 약간의 진동만 느껴질 뿐
 엔진 소리도 들려 오지 알았다.
차는 한남대교를 건너가고 있는 중이었다.
강변을 따라 번쩍이는 등불을 보고 외국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강한석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도 이제는 선진국의 문턱 안으로 들어섰다.
20년 전의 한강은 오물과 쓰레기가 떠다니던 하수구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 문제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선진국인 것이다.
불덩이 하나가 강심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람선이었다.

강한석은 허리를 세우고는 조그맣게 트림을 했다.
대통령과의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긴장해 있기 때문인데 어떤 때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목을 세운 강한석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대통령과 독대한 만찬이었다.
 비공식으로 이루어진 자리였지만 이 소문은 이미 주요 관료들과 집권 여당의 주요 당직자들,

군의 고위 장성들과 정부 기관의 고위급 임원들에게 알려져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일 오전이면 지방의 관리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까지도 알게 된다.
그것이 어떤 내용인 것은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독대하여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 강한석은 다시 한번 단단히 기반을 굳힌 셈이 되었다.
가죽 등받이에서 머리를 뗀 강한석은 앞쪽에 꽃혀 있는 카폰을 빼내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면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자
 밤 9시 반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석재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화가오지 않았을 때가 더 불안한 밤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강한석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두 번쯤 울렸을 때 대뜸 하석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 청장, 납니다 "

"아, 장관님. 기다리고 있었숩니다. "

하석재의 굳어진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으므로 강한석은 턱을 들었다.

"잘 끝나셨습니까?"

"잘 끝나고 말고가 없지요. 그저 말씀만 듣고 나온 참이니까."

"0101, 너1."

그 말씀이 무엇이었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그러나 하석재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의 폭력배 사건, 보고를 드렸습니다.
각하께서는 대단히 걱정하고 계셨어요.
 더욱이 올해가 관광 진흥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해이고
경제 부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기에."

"아아, 네. 그렇습니다. 제가 보고 드린 것도 그것이‥‥‥‥

강한석는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승용차는 쭉 뻗은
강남대로를 내려가고 있는 참이다.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검정색 승용차는 경찰청 소속의 경호차이다.
거기에서 무전으로 지시를 하는 모양이라고 강한석은 짐작하고 있었다.
승용차는 몇 개의 사거리를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통과하고 있었다.
강한석이 말을 이얼다

"총기 사건은 밀수해 들어온 것 같다고 말씀 드렸어요,"

"밀수업자를 단속하겠습니다. 항구와 공항을 철저하게 검문 검색 하겠습니다. "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 뿐입니다. "

"물론입니다, 장관님."

하석재의 말투는 한숨 돌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밝은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 경찰럭을 동원해서라도 조직 폭력배들이
더이상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습니다. "

수화기를 내려놓은 강한석은 다시 어깨를 등받이에 대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대통령과는 학교의 선후배간이었고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이쪽은
학자의 길을 걸어 왔다. 강한석은 이중섭 대통령이 사심이 없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릴 사람으로 믿고 존경해 왔던 것이다.
작년 말에 값자기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내무부 장관으로 일해 줄 것을 부탁받았을 때
강한석은 서슴지 않고 한국대학의 사회학과 주임교수 자리를 던졌다.
그도 이중섭의 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중섭이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할 때부터 도와 왔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사회문제연구소를 차려 그에게 자문을 해주었다.
강한석은 자신의 꿈을 이중섭이 뚜련하게 읽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통일과 번영, 그리고 안정의 영광을 모두 이중섭에게 증정하고 싶다는 것이다.
승용차는 강남대로를 직진하고 나가더니 과천_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뒤쪽을 갖가지 형태의 승용차들이 속력을 내며 따촉붙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잘 뚫리는 길에 모두 신바람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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