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5. 내부 갈등

오늘의 쉼터 2014. 12. 5. 16:52

5. 내부 갈등


 

 

 

 

안기부장 이찬형이 상황실로 들어서자

제3차장인 고성섭과 서너 명의 간부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 이찬형은 원탁의 끝 부분에 앉았다.

고성섭과 간부들이 잠자코 따라 앉자 이찬형이 서두르듯 입을 열었다.


"고 차장, 시작하세요."
"Dl ."


고성섭이 앞에 놓인 서류를 펼쳤다.


"김원국의 조직은 이제 조직이라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4년 동안 그들 밤의 조직은 대부분이 기업체로 양성화되었고 조직원은

대부분이 월급에서 세금을 몌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


상황실은 20명이 한꺼번에 회의를 진행할수 있도록 스피커 장치에다가

각자의 의자 옆쪽에는 컴퓨터의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고성섭의 말소리가 다시 방을 울렸다.
"따라서 밤의 세계는 양성화되었고 정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극히 일부분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폭력배들의 금품 갈취나 조직간의

영역 다툼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김원국의 조직은 양성화 되었지만 자신들이 운영하는 업체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업체들을 보호해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
"잠간. "
이찬형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무보수로 보호해 주었단 말이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 다른 업체에 금품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김원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
이찬형이 계속해 보라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고성섭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김원국의 조직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다시 밤의 세계를 혼란 상태로 빠뜨려서 패권을 쥐겠다는 음모로 보입니다. "


고성섭이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다음 말읖 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김원국 세력의 중간 간부들을 공격했는데 지난 1월 초에 일제히 기습해서

미처 방비할 틈을주지 않았습니다.

1리고는 종적을 감추었지요."
상황실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들은 또 300여 개의 주요 유흥업소와 서비스 업체에게 그들 조직에게 세금을 내라는

통보를 했습니다.

시한은 제각기였습니다만 대부분이 일주일에서 열흘 안이었고 구좌번호도 모두 다릅니다.

체들이 말해 주지 않으면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


"그후로 콘티넨털 호텔의 오정문 사장 피습 사건, 조웅남 사장의 총격 사건 등으로

김원국의 조직은 극도로 혼란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직이 붕괴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상황 설명을 드렸습니다. "


머리를 끄덕인 이찬형이 서류를 넘겼다. 고성섭이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공격자의 정체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피해자의 증언을 듣거나 상황을 조사해 보면 공격자는 잘 훈련된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동료를 재빠르게 수송하고,증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조사해 본 결과로는 공격자는 조직 폭력배이거나 예전에 밤의 세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


"그 이철우라는 사람, 여기 적혀 있소?"


서류를 넘겨 보면서 이찬형이 묻자 고성섭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 부분은 사정상 구두로 말씀 드리Tf습니다.

이철우는 특공대 출신의 예비역 소령이었고 작년 초에 전역을 했는데

군에서의 인과관계는 기무사에서 조사하고 있습니다.

전역 동기는 개인 사업을 하Tf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군 생활에 희망이 없다고도 했다는군요."
이찬형이 서류에서 눈을 몌고는 잠자코 고성섭을 바라보았다.

들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고 곧 제각기 러리를 돌렸다.

가슴을 편 고성섭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경찰에서 그를 찾고 있고,김원국의 조직에서도 맹렬히 찾고 있습니다.

그를 잡으면 곧 드러나리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 적혀 있는 정기욱이라는 인물, 알리바이가 없습니까?-


고성섭이 러는 속도보다 빠르게 이찬형은 서류를 저은 모양이었다.

그가 서류의 아랫부분을 짚었다.

그것은 고성섭을 힘들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네, 부장님. 정기욱과 주변의 주요 인물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그들은 사건들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


"하필 이 상황에 역삼동에 전과자들을 모으다니, 그것도 200명씩. 01나."


"취업의 길이 막혀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전과자들에게 건전한 직장을 주겠다는 취지였습니다.

해당 기관의 좋은 선전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어학 테이프를 판매하는 유통회사란 말이오?"


"네, 테이프를 도매로 넘겨 받아 전화나 가정 방문을 통해 소매로 팝니다만 실적은 부진합니다. "


"언제든지 조직 집단으로 변할 수가 있는 놈들이군."


"약삭빠른 놈들입니다. 정부의 시책에 발을 맞추었고 사회적으로도 명분이 있는 입장이라

저희들은 감시만 하고 있습니다 "


입맛을 다신 이찬형이 서류에서 머리를 들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자 고성섭이 말을 이었다.
"저희들의 활동 계획과 대책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김원국의 조직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직 공격자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시점이어서 그것이 그들을 보호해 주는

역할도 될 것입니다. "


"둘째로 정기욱을 비롯한 범죄 예정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감시 시키겠습니다.

이것은 검경의 수사 방향과 같으므로 상호 공조 체제를 유지하겠습니다. "


머리를 』1덕인 이찬형이 서류를 덮었다.


"어젯밤에 내무부 장관이 각하께 이 사건을 보고했어요.

우선 경찰의 수사 상황만을 보고 드린다고 했는데‥‥‥‥


고성섭과시선이 마주친 이찬형이 입술끝을 올리며 얼굴에 읏음을 띄었다.
"내 생각은 우리보다 더 깊은 상황 보고는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각하께서 나까지 부르실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신 것 같고."


"부장님,죄송합니다만,각하께서는 생각지 않으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만."


고성섭이 똑바로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군 출신으로 정보부에 파견되었다가 눌러앉게 되었는데 업무 능력이 뛰어나

부장이 바필 때마다 승진을 거듭하여 지금은 국내 범죄를 담당하는 제3차장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비서관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안기부장으로 임명된 이찬형이 정치인의

기질이 있다면 그는 행정가 타입이었다.


"부장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


고성섭의 말에 옆쪽에 앉은 과장급 간부들이 몸을 굳히며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이찬형이 눈꼬리를 내리면서 입술 끝을 올렸다.

입만 벌리지 않았을 뿐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고 차장은 이 문제를 정치적인 잣대로 재려고 하는데, 아직 상황도 막연하고 따라서

대책도 확실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분위기로 보고를 드릴 수가 없어요.

각하께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실 것이고."


"나는 고 차장을 믿어요. 전권을 맡길테니 수사해 주세요.

내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도와드릴테니까 수시로 보고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부장님 ."


고성섭이 앉은 채로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비슷한 나이였으나 이찬형은 갖은 곡절을 려은 사람이다.

곧고 맡은 일만 파고들었던 고성섭을 다루는 데 여유가 있었고

그것이 고성섭을 편안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든 고성섭의 얼굴은 풀려 있었다.
아파트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두어 번 두드려 보다가 슬쩍 밀어 보자소리없이 열렸는데 인기척도 없는 데다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불이 꺼져 있을 때보다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잠간, 내가 먼저,"


한수영이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어깨로 문을 밀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났고 어른들의 웃음 소리도 들렸다.

20평형의 서민 아파트인 것이다. .


"이것, 빈집 아냐? 쥐새끼 한마리 없구만 그래?"


한수영의 목소리가 아파트를 쩌렁 울렸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어. 이런 제기랄."


긴장이 풀린 탓도 있을 것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른 한 개는 비스듬히 걸쳐 매고 있는 그는 사진기자였다.

40대 중반으로 전쟁터를 수십 군데 거쳐 온 백전노장이었는데 안청준이 이재영에게

붙여 준 사람이었다.

이재영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손바닥만한 아파트여서 둘러보고 말 것도 없다.

구듯발인 채로 한수영은 안방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없어, 아무것도."


그의 말대로 빈 아파트였다.

응접실에 소파 세트만 놓여 있을 뿐 가구 하나 없는 깨끗하게 비어 있는 집이었다.


"돈만 몌였어, 200만 원. 이런, 젠장."


낡은 가죽 소파에 털쌕 앉으면서 한수영이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밝은 얼굴이어서 이재영이 눈을 껌벅이며 그의 시선을 받았다.


"내 돈 떼인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스릴은 있구만, 오랜만에."


아랫입술을 깨문 이재영은 응접실을 건너 닫혀진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었다.

겨울밤의 찬바람이 응접실로 몰려 들어왔다.

백동혁에게 한세라의 납치 사실을 아느냐고 대뜸 묻자

그는 와락 덤벼들 듯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아예 문을 가로막고는 그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오히려 이쪽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던 이재영은 전화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무래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 낫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세라는 집에도 없었고 친정에도 없었다.
친정 어머니는 한세라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재영에게 홍콩에 갑자기 가더니

전화 한통 없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던 것이다.
백동혁은 결국 한세라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김칠성이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해서

괴롭다고까지 했다.

그는 전화의 내용을 듣고는 자신도 오겠다는 것을 겨우 진정시켜 놓았다.

전화에서 김칠성의 일당이 시끄럽게 굴면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는 말을 전해 준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집에 감금시켜 놓았다면 무슨 흔적이 있을텐데."


뒤쪽에서 한수영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건 뭐야?"


튀는 듯한 그의 말소리에 이재영이 몸을 돌렸다.

한수영이 한손에 구겨진 노란색 봉투를 쥐고 있었다.

응접실의 구석에 팽개친 듯 놓여진 봉투였고 이재영도 지나치며 보았던 것이었다
한수영은 봉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선뜻 시선을 떼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재영이 두어 걸음 그에게로 다가가자 한수영은 봉투를 거꾸로 들었다.

그러자 봉투 속에 든 내용물이 응접실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재영의 눈에 선뜻하게 띈 것은 길고 검은 한움큼의 머리카락이었다.

가슴이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느낌이 든 이재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카락은 여자의 것이었다.

머리카락과 함께 서너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떨어져 내렸고 횐 종이가 맨 나중에 떨어져 내렸다.
한수영이 응접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 여자인 모양이군."


걸음을 떼어 그의 어깨 뒤로 다가선 이재영은 한세라의 모습을 보았다.

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지친 듯한눈이 이쪽을보고 있었으나 미인이었다.


"여기에 있었던 거야, 이 여자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한수영이 말했다.


"여기서 찍은 거야. 한 장은 안방에서, 그렇지, 이것은 저기 응접실의 구석에 앉혀 놓고 찔었군."


이재영은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무엇인가가 적혀있다.

흘려 쓴 글씨였는데 첫눈에도 꾸며 쓴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사진과 머리칼을 놓고 간다.

김칠성과의 계약 이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자를 돌려줄 수는 없다. "


몸을 틀어 그녀가 쥔 편지지를 들여다본 한수영이 머리를 』1덕였다.


"어쨌든 특종감이야. 사진과 머리카락, 그리고 편지까지 증거는 확실하게 확보되었어."


"그 사람은 우리를 속였어요. 이곳에 한세라씨가 있다고 했는데."


김칠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한세라는

순간에 죽은 시체가 될 것이라고 그 사내는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재영씨는 아직 순진하군."


자리에서 일어선 한수영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두드려 털었다.


"놈들의 의도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 우리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면 수십 개의 신문사가

몰려왔을 것이고 김칠성씨한테 알렸다면 아마 우리가 찾은 이것들을 가로채고는

보도하지 못하게 했을 거야.

늘은 우리의 날이야. 대한일보가 특종을 때리고 이재영씨가 이름을 날리는 날이야."


아파트에는 더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한수영이 현관 쪽으로 발을 들었다.
그의 됫모습을 보자 등이 으스스해진 이재영이 뒤를 따랐다.

그러자 문득 안청준이 이번 기사를 보도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방으로 들어서는 김칠성의 얼굴에 시선을 준 채로 강만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각이 진 얼굴이 더욱 두드러져 털였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강만철의 옆쪽에 앉아 있던 고태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면서 상체를 반쯤 세웠다.
다가온 김칠성이 온몸을 던지듯이 소파에 앉자 uul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만철이 턱을 들었다.


"얼마나 되었어?"


억눌린 듯한 음성이었다.

김칠성이 머리를 돌려 옆쪽의 책상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오늘까지 열흘째요."


그의 말소리는 허공에 떠 있는 것처림 들렸다.

고태석이 침을 끌어 모아 삼켰다.


"왜 우리한태, 아니 나한테만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이야기해서 윌 해요?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당해 보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긁어 넘기면서 김칠성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까짓 놈들, 날 잘못 생각한 거지."


"이 신문 좀 봐라."


강만철of 탁자 위에 펼쳐진 신문을 턱으로 가리키자

김칠성이 다시 머리를 다른 쪽으로 틀었다.


"읽었수."


"네가 계약 이행할 것이 남아 있어서 풀어 주지 못한다는데 "


"개소리요, 계약은 무슨 "


"놈들이 연락은 해왔겠지?"


"한번 왔는데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끊었어요."


그러던 김칠성이 머리를 들었다.

광대뼈의 튀어 나온 부분에 검은 빛이 돌고 두 눈의 흰자위가 붉은 실핏줄로 덮여 있었다.


"형님,더이상 묻지 마시오.

이 개같은 신문기자년이 특종이랍시고 무작정 신문에 낸 거요.

내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강만철을 쏘아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놈들의 모략이오. 그래서 우리 조직을 내부에서 흔들어 보려는."


"물론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되었습니다 "


"신문사와 인터뷰를 해라, 거절하지 말고."


"못합리다. "


김칠성이 머리를 전었다.


"할말도 없고."


"네가 그럴수록 그놈들이 좋아할 거다. 언론도 마찬가지고.

넌 놈들과 계속 연락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신문에."


강만철이 상체를 세우고는 손가락으로 신문의 한 귀퉁이를 짚었다.

한세라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는 옆 부분이다.


"추측 기사라고는 하지만 넌 이제까지 놈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단 말이다. "


"』충에 있던 년이오. 찾았더니 없어졌던데 잡으면 두 손을 잘라 버릴테요."


"부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 "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형님."


김칠성이 머리를 들고 똑바로 강만철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오해하지 않습니다 "


어깨를 늘어뜨린 강만철이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정기욱인가 하는 그놈, 그놈이 한 짓일까?"


"한 놈을 잡아 족쳐 보았는데 그놈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됩니다. "


"그놈들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어설프게 건드리지는 마라.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


갑자기 김칠성이 주먹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쳤으므로 강만철과 고태석이 눈을 치켜떴다.


"그놈의 자식들은 우리들 뒤만 쫓아다니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단 말이오?

신문사도 그렇고, 도대체 우리는 그것들 눈치만 살피다가 볼장을 다 보겠구만."


김칠성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눈을 부릅뜬 김칠성이 강만철과 고태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가차없이 잡아서 족칠 겁니다.

수상한 놈들이 있다면 말이오.

웅남 형도 병원에 누워 있고부하들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단 말입니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김칠성의 얼굴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거친 동작으로 방을 가로질러 걷자 고태석이 힐끗 강만철을 바라보았다.

강만철은 눈을 치켜뜬 채 그의 됫모습을 바라볼 뿐 입을 열지는

"너, 칠성이를 따라다녀."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하자 고태석이 허리를 번쩍 세웠다.


"네, 형님 , "


"눈에 띄지 않게 감시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형님 ."


"보호하려는 것이니까,"


강만철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


앞쪽으로 '옷룬'이라고 한자로 커다랗게 쓰여진 대형 아크릴 간판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된 바탕에 붉은색 글씨였으나 바탕의 횐색이 너무 환해서 어둠 속에 선뜻한 느낌이 들었다.

간판의 불빛이 30미터쯤 떨어진 이곳 주차장까지 흘러 들어와차량들의 철판에 희미한 빛살을

던져 주고 있었다.

200평쯤 되는 넓은 주차장이었고 빈 차량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주차장의 담 너머로 차도가 있었으므로 차량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이철우는 점퍼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는 두어 걸음 옆쪽의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갈비집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러나 차에서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에 피부는 금방 딱딱하게

굳어졌다.
옆에 서 있던 서대식이 두 발로 번갈아서 땅을 밟다가 힐끗그를 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상사 출신으로 육박전 교관을 하던 사내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기 복무를 지원해서 십년 동안 군대 생활을 하다가 작년 여름에 제대한

서대식은 아직도 군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철우와는 』년 가잠게 같은 특공단 밥을 먹은 사이였다.
주차장의 어두운 그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이철우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담 그늘에 서 있던 두어 명의 사내들이 일시에 몸을 굳히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오자 추위를 참기 힘든 것 같았다.
이철우는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음식점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따위 추위에도 견디어내지 못하는 놈이라면 쓸모가 없다.

군대 시절처럼 철저한 훈련과 통제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규율은 다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점에서 사내 한 명이 나와서 곧장 다가오고 있다.

부하였다.


"형님, 놈들이 나옵니다. "


다가온 그의 입에서 하알게 입김이 뿜어 나왔다.


"모두 다섯 놈인데 그중 한 놈은 제가 안면이 있습니다. 신설동에서 닭장수를 하던 놈입니다. "


이철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닭장수도 있고 특수 절도를 한 놈도 있고,

폭력과 사기 등 전과자들의 집단인 것이다.

10시밖에 안되어서인지 바쁜 듯 오가는 종업원들의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이윽고 둘씩 셋씩 무리를 지은 사내들의 일행이 현관문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떠들색한 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사내 두어 명이 소리내어 웃었다.


"형님 ."


옆에 서 있던 서대식이 한걸음 다가왔다.


"저쪽,오른쪽을 보십시오. 옆문으로 사람들이 나옵니다. "


시선을 돌린 이철우는 '대군'의 옆쪽 문으로 나오는 세 명의 사내들을 보았다.

그들은 문 앞에 멈춰서서 승용차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철우가 머리를 돌려 음식점에서 나온 부하를 바라보았다.
"저놈들은 일행이 아닙니다. 구석에서 고기를 먹고 있었는데."
다섯 명의 사내들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서대식이 힐끗 =I를 바라보았다.


"모두 차에 타라. 기다려, 내가 나갈 때까지."


짧게 말한 이철우는 몸을 돌려 재빠르게 승용차로 다가갔다.

이쪽은 어두워서 저쪽의 시선에 잡힐 염려는 없다 부하들이 뛰듯이 움직였고

이철우가 승용차에 올라 문을 닫자마자 사내들이 주차장의 입구로 들어섰다.
사내들이 떠득색하게 지껄이는 소리가 닫힌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철우는 머리를 들어 '대군'의 옆문을 바라보았다.

차를 기다리는 것같이 옆쪽을 바라보던 사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은 아닙니다, 형님 "


됫자리에 올라탄 부하가 머리를 내밀고 소근거려 말했다.

그의 몸에서 심하게 고기 냄새가 풍겨 왔다.

당황한 모양이었다.


"경찰 같지도 않은데요."


서대식이 흔잣소리처림 말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강만철이나 김칠성의 부하인 것이다.

놈들의 조직원은 방대해서 두목급들 외에는 얼굴을 외울 재주가 없다.

부산의 최충식이 백 명이 넘는 졸개들을 보냈으므로 부산 똘마니들인지도 몰랐다.

다섯 명은 이제 모두 승용차에 탔고 후진등이 켜졌다.
세 명의 사내는 추위에 쫓기듯 서두르며 주차장의 출구 근처에 있는 승용차에 오르고 있었다.

출구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하면 세 명의 차, 다음에 다섯 명, 그리고 이쪽의 순서였다.


"형님."


서대식이 =I를 바라보았다.


"따라가, 저놈들을."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으ㄴ1 그 턱 앞에는 승용차가 두 종류가 있다.

운전석에 앉은 부하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세 놈이 탄 차 말이다. "


"네, 형님 ."


후진했던 승용차가 핸들을 쩐더니 주차장의 출입구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차가 출입구를 빠져 나가자 세 명이 탄 차의 미둥이 켜졌다.

그러자 이쪽의 차에도 시동이 걸렸다.

이철우가 머리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덩달아서 둘러보는 서대식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풀썩 웃었다.


"설마 우리를 따라오는 놈들은 없겠지?"


"여기는 없습니다. 모두 확인했으니까요."


승용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철우는 입을 다물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세 명이 강만철의 부하들이라면 그들도 정기욱의 조직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떠들쌕하게 전과자들을 모아 유통회사를 차리고 그들이 유흥업소를 돌아다니는 판이니

긴장을 안할 리가 없을 것이다.


"흥. "


어깨를 불쑥 추켜 올리면서 이철우가 풀색 웃었다.

오늘밤에는 정기욱의 일당 몇 놈을 쳐서 그것을 강만철이나 김칠성의 부하들이

것처럼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재영이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것은 밤 1 1시가 되었을 때였다.
눈발이 흩날리는 차가운 날씨여서 코트 깃을 올린 이재영은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의 현관으로 다가갔다.

아파트 단지 안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현관 입구의 희미한 불빛 주변으로

눈발이 여름철의 벌레떼처럼 맴돌고 있었다.

언 땅바닥에 부딪치는 자신의 구듯발 소리가 정적을 깼다.

늦은 시간이어서 주위에는 인적이 없다.

현관 근처의 놀이터를 지나던 이재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머리를 들었다

놀이터의 어두운 그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선 사래를 보았던 것이다.


"누구세요?"


이렇게 물었으나 한걸음 밖으로 나선 사내의 얼굴을 바라본 이재영이 숨을 들이마셨다.

백동혁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시더구만 연락도 안하시고."


그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 나왔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소. 나하고 잠깐 갑시다. 이쪽에 차가 있으니까."


그가 턱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머리를 돌린 이재영은 담 가에 주차시킨 차량들 사이에

서 있는 서너 명의 사내들을 보았다.


"이것 보세요, 늦은 시간이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내일 하세요."


이재영이 백동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난 댁들을 따라갈 수 없어요."


한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으나 가로막고 선 백동혁의 몸 때문에 금방 반걸음쯤 뒤로 물러섰다.


"비키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이재영의 목소리가 밤 공기를 울렸다.


"경찰?"


어둠 속에서 백동혁의 횐 이가 드러났다.


"아마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오게 될 거요, 이 기자."


백동혁이 바짝 다가섰으므로 그의 늘어진 눈시울이 보였다.

바람에 섞여 그에게서 담배 냄새가 풍겨 왔다.


"난 명령을 받았어. 당신을 모셔 오라고.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모셔 가야 돼,"


이재영은 뒤쪽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들을 들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김칠성씨? 당신들은 날‥‥‥‥


목소리가 제법 컸으므로 이재영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아파트 안의 사람들이

나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름날이면 몰라도 꽁꽁 닫혀진 유리창을 뚱고 집안으로 소리가 전달되지는 않았다.


"갑시다. 돌아을 수는 있을 거요. 당신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백동혁이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어깨를 흔들어 그의 팔을 뿌리친 이재영은 몸을 돌렸다.


"좋아요, 가요. 나도 그 사람한테 따져야겠어요, 이렇게 해도 좋은 fl , "


"시원시원해서 좋군. 과연 특종을 뽐아낸 기자다우셔."


백동혁이 던지듯 말했으나 빈정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놀이터 옆에 주차해 있던 차량 한 대가 갑자기 라이트를 켜더니 이쪽으로 다가 왔다.

사내들이 이재영을 둘러싸듯이 하고는 차 쪽으로 안내했고 됫 자리에 그녀가 오르자

승용차는 아파트를 천천히 빠져 나갔다.


"미안하지만 눈을 좀 가궈셔야 겠는데."


차가 대로로 나가자 옆에 앉은 백동혁이 손에 든 헝겊을 들어 보였다.


"또 특종 기사를 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오. 조금 감갑하시겠지만 이걸 둘러쓰고 계시지요."


이재영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헝겊을 받아 쥐었다.

가벼운 천으로 만든 자루였으므로 머리에 덮어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영은 눈을 감고 의자의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의 엔진 소리와 부드러운 진동이 느껴질 뿐으로 차 안에 탄 사내들은 이제 입을 열지 않았다.

차는 아직도 직진하고 있었으므로 종합운동장 쪽으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재영은 온몸으로 나른하게 번져 나가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들에게 강제로 끌려 가는 상황이었지만 조금 가슴이 두근거릴 뿐 불안 하지는 않았다.

 아마 김칠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제의 기사로 단번에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므로 화가 치밀어 을랐을 것이다.

더욱이 신문에 실린 납치범들의 메모는 그가 납치범들과 협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흑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이재영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가늘게 긴 한숨을 뱉어냈다.

언젠가는 그와 만나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보다조금 빨리 닥쳐 온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했을 뿐인 것이다.
한 시간이 아니면 한 시간 반쯤'지났을 때 승용차는 언덕길을

르는 것 같더니 속력을 떨어뜨리며 멈추었다.

30분쯤 아니면 한 시간 가량 잠이 들었던 이재영은 문아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승용차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다시 멈추었다.


"자, 이제 내림시다 "


백동혁이 자루를 벗겨 내리면서 말했다.


"배짱이 대단하신 분이야. 코를 골면서 주무시더구만."


차에서 내린 이재영은 어둠 속에 짙게 파묻혀 있는 것같이 보이는 회색빛 건물을 보았다.
이층 양옥이었는데 괴튼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몸을 돌리자 횐 눈에 덮인 넓은 뜰과 나무 그늘에 가려진 대문의 윤곽이 보였다.

대문의 건너편은 마냥 새까만 어둠 속이었는데 아무래도 산 같았다.

아직도 눈바람이 휘날렸고 바람결에 혼과 나무의 냄새가 풍겨 왔다.


"자, 이쪽으로."


백동혁이 앞장을 서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재영은 코트 자락을 펴면서 뒤를 따랐다.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이재영은 자은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흘이 눈앞에 보였다.

흘 안은 난방 장치가 잘되어 있어서 훈훈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홀의 중앙에는 벽의 색깔과 같은 흙색의 소파가 놓여 있었지만 다른 장식물이 없었으므로

30평쫌 되는 흘은 더욱 커 보였다.


"앉아 계세요,곧 나오실테니까."


백동혁이 턱으로 소파를 가리켜 보이고는 옆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이재영은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난 것이다. 벽과 마루는 반들반들하게 니스 칠을 한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나무 냄새가 심하게 났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한일보 기자이신가?"


갑자기 뒤쪽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이재영은 소스라쳐 머리를 돌렸다.
장신의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짙은 눈샙 밑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단정한 입술의 끝은

약간 치켜 올려져 있다.

 베이지 색의 가디건에 같은 색깔의 바지를 입고 있었는 데 햇볕에 그으른 얼굴과 잘 어울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재영은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다가온 사내는 그녀의 앞에 섰다


"난 김원국이라고 해요."


"OtOt. "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 이재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김원국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다.


"날 모르시지는 않을텐데."


그의 말투는 낮았고 곧은 시선은 이쪽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깜박이지도 않는 뱀의 눈이었다.
온몸을 굳힌 이재영이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조직과 손을 끊고 인도네시아의 어느 섬에 살고 있다는 그가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고 생각은 했었다.

잔인하고 냉혹하며 그의 적이 되어서 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들어 왔다.

"거기 앉아요."


소파에 앉은 김원국이 손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내가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모셔 오라고 했는데."


끌리듯 자리에 앉은 이재영이 눈을 깜박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제 조금 진정은 되었으나 가슴의 고동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엄청난 특종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아 나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우선 당신이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가를 말해. 하나도 빼놓지 말고.
김원국의 표정은 들어설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려 오는 것 같았으므로 이재영은 어금니를 물었다.

허리를 펴고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움켜쥐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김원국은 시선 안에 그녀를 넣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놓쳤다. "


유혁근이 주먹으로 캐비닛 윗부분을 두드렸다.

승용차는 노란색 신호였는데도 사거리를 직진해 나갔으나 밀려 있는 차 때문에

금방 멈추어 섰다.


"개자식, 우리가 따라가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구만."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던 유혁근이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계장님. 차가 밀려 있어서‥‥‥‥


챈들을 움켜쥔 강 형사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할수없어. 차로 미행한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든 유혁근이 찌푸린 얼굴로 다이얼을 눌렀다.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지 모르TR군."


"고속도로로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


그들은 강남대로의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는데 직진하면 한남대로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코스였고 오른쪽으로 틀면 중부 고속도로 였다.

그저나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회전해 나간다면 김포로 가는 을림픽 도로였다.

입맛을 다신 유혁근은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이정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접니다. "


승용차는 꾸물대면서 움직였다가 다시 멈추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온 차량들이 우측 깜박이를 켜고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지금 한남대교 근처에 있는데요.놓쳤습니다. 차가 밀려 있어서요. "


"할수없지. 별일은 아니겠지만 신경이 쓰이는군, 아침부터 나들이 하는 것이."


"김칠성이하고 고태석이는 사무실에 있습니다. "


전화기의 스위치를 끄자 강 형사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로 돌아가겠습니다. "


"어차피 돌아을테니까."


강 형사가 좌측의 깜박이를 켜고 유턴 차선으로 들어섰다.

유혁근은 강만철의 감시를 맡고 있첬는데 아침부터 외출하는 그를 따라나 섰다가 놓친 것이다.
이정환이 그렇게는 말해 주었으나 꺼림칙한 마음이 풀리지가 않은 유혁근은 창 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며칠 동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밤의 세계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강만철 흔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그것은 신문 보도 이후로 김칠성의 행동이

눈에 띄게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외출도 하지 않았다.

유혁근이 강 형사를 바라보았다.


"정기욱이의 유통회사는 매출 실적이 하루 10만 원 정도야.

어학 교재를 판다고 하지만 그런 놈들한테 누가 사겠어?"


"사무실 인원만 100명이 넘습니다.

고 형사가 대충 헤아려 봤는데 들락거리는 놈들까지 합하면 200명 가깜게 되겠다고 하던데요."


반대 차선은 훤하게 뚫려 있었으므로 강 형사가 속력을 내면서 말했다.


"전과자 놈들만 모아 놓아서 그곳은 가치 교도소 같다고 합니다. "


"정기욱이가 그 돈을 어디서 만들었을까? 모아 둔 돈도 없을텐데 말이야."


"해결사 노룻을 하면서 모았는지 모릅니다. "


유혁근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저었다.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놈들이 이번 사건에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 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찜찜해.

그놈들이 업소들을 들락거리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김칠성이의 부하들도 놈들을 곱지 않게 보는 모양입니다. "


"우리들이 감시하지 않고 있었으면 아마 몇 놈 병신이 되었을 거야."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으므로 강 형사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기욱의 세력이 이번 일을 일으킨 줄 알고 있는 업체들도 있다.

30퍼센트 정도의 업체들이 지시받은 구좌에 돈을 입금시켰고 그 비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정기욱이가 조종하고 있는지

어쩐지간에 놈의 위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계장님,"
강 형사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유혁근이 입술을 찌그리며 얼굴을 돌렸다.

정기욱은 때맞추어 전과자들로 구성된 유통회사를 차린 셈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익명의 전화제보가 없었다면 경찰청에서는 아직도 정기욱의 유통회사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차에 장치된 경비 전화가 울렸으므로 유혁근이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계장님, 접니다. 오 형사입니다. "


다급한 목소리였다.


"천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철우의 가족을 찾았답니다. "


"뭐라고? 이철우의 가족을?"


유혁근이 의자에서 등을 었다.


"네, 계장님 . 천안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입니다.

그곳 지서에서 이철우의 가족이 있다고 보고해 왔답니다. "


"이철우는?"


"부인과 아이들만 있숩니다

그 마을에 이철우의 부인 친구가살고 있더군요.

지서 순경이 찾아냈습니다. "

"잘했어. 그쪽이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시를 빨리 내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오 형사, 네가 그쪽으로 출발해, 지금 당장. 지서나 천안 경찰서

이 일에서 손을 몌라고 할테니까, 이건 우리가 맡는다. "


"알겠습니다. "


"서너 명 데리고 가서 감시만 해. 이철우가 올지도 모른다. "


"알겠습니다. "


스위치를 끈 유혁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밤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래의 일을 사건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낮 세계의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 비슷한 대업이다.

오히려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어 나가는 처참한 싸움과 거대한 음모가 난무해서

낮의 세계보다도 더욱 치열한 숭부를 』룬다.
유혁근은 다시 전화기의 스위치를 켰다.

이정환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이얼을 누르면서 유혁근은 어금니를 물었다.

이번 일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정환과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부로 올라갈수록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덮어 두려는 분위기가 보였다.

문민시대였고, 정권은 경제의 부흥에 전력투구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선 당장에 노출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는데 고위층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거나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충정일 것이다.


"여보세요."

 

이정환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으므로 그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과장님, 이철우의 가족을 찾았습니다.

천안 근처의 마을에 있는 데, 제가 부하를 미리 보냈습니다. "


빠르게 보고를 해가는 유혁근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과장님,천안에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저희들이 독자적으로 수사하고 싶습니다. "


"그래야지, 찾아냈다니 용하군."


이정환이 대뜸 말을 받았다. 그와는 호흡이 맞는 것이다.


"내가 언론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겠어. 단단히 감시해. 이철우가 사건의 열쇠야."


"물론입니다, 과장님."


숨을 들이마시며 유혁근은 스위치를 껐다.
하늘이 흐려 있어서 금방이라도 눈발이 흩날릴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고 아래쪽의 바다는

은 물살 끝을 하알게 뒤집으며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화물선 한 척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는데 부근에서 어른거리던 어선과 안내선,

크레인 선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김원국은 창에서 머리를 돌렸다. 갈색의 스웨터를 걸치고 같은 색깔의 바지 차림이었다.


"날씨만큼이나 이곳 분위기도 살벌합니다.

형님도 저런 바다는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으시겠지요."


앞에 있는 강만철이 말하자 김원국이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바다 색깔아 어떻든 이곳은 버릴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는 곳이다. "


"형님은 우리가 이 나라에 무슨 큰 부채라도 지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우리는 죄지은 것도 갚아야 할 신세를 진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나라에서 상을 주어야 됩니다. "


김원국이 다시 머리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웅남이가 나아 간다니 다행이다. "


"칠성이는 제수씨에 대한 신문 보도가 나오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기력을 잃고

사무실에만 박혀 있습니다. "


"제수씨한테 무슨 일이 없어야 할텐데 입맛을 다신 강만철이 상체를 세웠다.

"경찰이나 언론은 칠성이가 납치범들하고 무슨 흥정을 하다가 만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제수씨를 찾을 생각보다도 칠성이를 다그치는 게 낫다고들 믿는 모양이오."


"그 빌어먹을 기자년은 오늘 아침에는 신문사에도 나오지 않았더
군요. 잡으면 요절을 내려고 했는데."


김원국이 잠자코 허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예감이 이상합니다,형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롭지 않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우리도 너무 안일했다. 그래서 허점을 많이 보인 거야."


"안일했다니요?"


강만철이 눈을 치켜떴다.


"우리는 밤의 세계를 양지로 돌려 놓았어요.지금은 어쩐지 아십니까?

이건 벌거벗겨져서 대낮에 거리로 쫓겨난 기분입니다. "


"형님이 오셔서 든든합니다만 이건 도무지 상대를 알 수가 없으니


"마지막에 나타나는 놈이야."


"그건 압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들이 남아 있을지가 걱정됩니다. "


김원국은 잠자코 바다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은 인천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벽돌로 지은 이충 저택이었다.
바로 아래쪽에 조그만 모래사장이 있고 좌우에 야산이 있는 경치 좋은 곳이어서

어느 호사가가 농가를 개조하여 저택을 지은 것이다.


"여기 오려고 경찰놈들 따돌리는데 진땀을 뺐어요. 도중에서 차를 갈아타고.

죄짓고 도망치는 기분이었습니다. "


강만철이 말 끝에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경찰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인데 오히려 그것이 우리 행동을 몬두 선전하는 것이 됩니다.

놈들은 앉아서 이쪽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어요."


"형님, 차라리 한국의 사업을 정리해서 외국으로 떠납시다.

난 아주 진절머리가 납니다. 나갔다가 돌아옵시다. "


번들거리는 눈으로 강만철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몇 년 있으면 아니,몇 년일 것도 없지요.우리가 떠나자마자놈들이 정체를 나타낼테니까,

그때 돌아와서 놈들을 한놈씩 쳐죽입시다. "


"사업체를 버리고 떠난단 말이냐? 그리고 처자식이 딸린 부하들은 어떻게 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김원국이 강만철을 바라보았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 일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01야. "


"글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라니까요.

형님은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십니다. "


강만철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저 우리들은 표적이 되어 있는데 우리는 상대방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


"난 당분간 이곳에서 함마와 함께 있을 거다.

나도 놈들처럼 몸을 드러내지 않고 표적을 찾을테니까.

인도네시아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여권을 쌨으니까 이쪽 기관에서도 모르고 있을 게다. "


강만철이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늘어뜨리자 김원국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연락은 백동혁이가 맡을 것이다. 칠성이한테 움직이지 말라고 한
사람은 나니까 다그치지 마라.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너, 웅남이, 칠성이, 그리고 백동혁이 선에서만 아는 것으로 끝내라.
참, 또 하나가 있구만."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음을 띄운 김원국이 탁자 옆의 벨을 눌렀다.

금방 옆쪽의 방문이 열리더니 오함마의 검붉은 얼굴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음, 그 사람을 이리 데려와라."


오함마가 말없이 사라졌고 잠시 후에 문이 다시 열리더니 오함마가 들어섰다.

그를 바라보던 강만철이 번쩍 턱을 치켜들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함마의 뒤를 따라들어선 것이 이제까지 이를 갈던 이재영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뜻밖이었으므로 강만철이 그 표정 그대로 김원국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_5., 강 사장님?"


다가온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낮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으나 강만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데려왔다,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의 시선을 받으며 김원국이 말했다.


"네가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리도록 해라."


"그거야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만."


강만철이 몸을 돌려 이재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형님, 물론 이 여자가 어떤 의도로 그런 기사를 썼는가는 물어 보셨겠지요?"


"물론이지."


"내가 다시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


"괴롭혀 드릴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기사를 낸 것을 후회하고 있지는 쟈아요."


이재영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옆쪽의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강만철을 마주 보았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기자들이 보도했을 거예요.

난 그 일로 죄인 취급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


"사전에 김칠성이나 나한테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어.

넌 그놈들과 짰거나 그놈들에게 놀아난 거야."


강만철이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들지 마라.형님 앞이어서 언성을 높이지 못하겠는데

널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아 둬."


"놈들이 이 여자를 이용한 것이지 다른 건 없다. "


김원국이 입을 열자 1들은 제각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그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더 이상 그 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볼 기분이 아닌 듯 강만철은 찌푸린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나는 인자 총을 갖고 댕길 거여. 주먹질허고 힘자랑 허는 것이 촌놈들이 허는 짓이드만.

이기는 놈이 장땡이여."


조웅남이 주먹으로 침대의 가장자리를 치자 매트가 출렁거렸다.
상반신이 온통 횐 붕대로 감겨쳐 있었는데 수염을 깎지 않아서

털투성이가 된 얼굴에 부릅뜬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그 뭣이냐, 방탄 조끼라고 허는 거, 그것도 한 개 사서 입어야겄 il. "


그의 번들거리던 두 눈이 두어 번 깜박였다.


"거시기, 제수씨는 아직 소식 없냐?"


"fl , otal ."


"걱정허지 마라, 내가 나가서 잡아 윅일텡게, "


언뜻 들으면 제순씨를 잡아 죽인다는 말로도 들렸으나 김칠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기욱인가 뭔가 허는 시러베아들 놈이 날치는 모양인디, 허어 참,족보도 없는 똥개새끼가,"


조웅남이 수염 사이로 검붉은 입을 벌리며 풀색 웃었다.


"고태석이헌티서 들었는디 왕년에 내가 형님으로 모셨다구 헌다 면서?

그 씨발놈을 내가 만나 봐야 헌다. "


"형님,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까짓것들한테 신경쓸 시간도 없어요. "


"야,이 자식아,쫄대기 한명 잡어 족쳐서 무신 소웅이 있단말이여? 정기욱이 그놈을 잡어야 혀 "


"어디 그런 놈이 한둘이었습니까?

그놈들도 곧 회사 문을 닫을 겁니다. "


"허어 답답하고만."


이맛살을 찌푸린 조웅남이 혀를 찼으나 더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정기욱의 유통회사는 도전 세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했고 기반이 약했다.

우선 당장에 표면에 드러난 것이 정기욱이었지만 도전 세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답답 하기는 오히려 이쪽이 더했으므로 김칠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다시 오겠습니다 그 동안 몸조리 잘 하시고‥‥‥‥


"내 걱정은 말어. 그러고 형님도 와 계신디 너도 조급허게 맘먹지 말고. "


정색을 한 조웅남이 김칠성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얼굴과 대조되는 맑은 눈이었다.
병실을 나온 김칠성이 문 앞을 지키고 선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늦추었다.

복도 끝의 창가에서 있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사내를 보았기 때문이다.

앞장 선 사내는 유혁근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유혁근이 긴 얼굴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찌푸린 얼굴로 김칠성이 묻자뒤쪽에서 따르던 이강일과두어 명의 부하들이 앞으로 나섰다.


"말씀 드릴 것이 있는데, 부사장님과 단둘이서만 말입니다. "


유혁근이 앞을 가로막는 사내들을 훌어보며 말했다.


"이거 우리까지 이렇게 경계하셔야 합니까?"


"당신들은 우리 꽁무니만 따라다니고 있어. 오히럭 놈들을 돕고 있는 것이야."


이강일이 몰아치듯 말하자 김칠성이 그를 젖히고 앞으로 나섰다.


"좋습니다, 갑시다. "


"저기, 복도 끝 쪽에 비어 있는 입원실이 일더군요. 거기로 가실까 요낏


김칠성이 말없이 앞장을 섰고 유혁근이 그의 옆을 따랐다.

그의 말대로 입원실은 침대 두 개가 양쪽 벽에 붙여져 있을뿐 비어 있었다.

방문을 닫고 단둘이 되자 유혁근이 어깨를 내려뜨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러가지로 심란하실텐데 도움이 못되어 드려서 미안합니다. "


침대 끝에 걸터앉은 김칠성이 잠자코 있자 그는 앞쪽 침대에 엉덩이를 내렸다.

"실은 이철우의 가족들을 천안 근처에서 찾았습니다.

천안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인데‥‥‥‥


김칠성이 눈을 치켜떴으나 그는 말을 이었다.


"이철우의 부인 친구가 사는 곳인데, 그곳에 부인하고 어머니, 애들 둘이 함께 있습니다. "


"어머니까지 말이오?"


갈라진 목소리로 김칠성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지서 순경이 어머니까지 있는 것은 몰랐더군요.우리가가서 확인했습니다. "


"우리가 내려 보낸 수사팀이 잠복은 하고 있지만 이철우가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부사장님 부인의 행방도 그놈을 잡아야 실마리가 풀리겠는데."


"잘 모르시고 있는 모양이구만."


김칠성이 머리를 들었다.


"지금 밤의 세계가 30년 전의 혼란기로 되돌아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내 마누라가 문제가 아니오. 머지 않아 전쟁보다 더 지독한 일이 일어날 거요."

 

김칠성의 시선과 마주친 유혁근이 머리를 돌렸다. f


"당신들은 우리의 집안 싸움이네 뭐네 하다가 이제는 우리 뒤만 f
쫓아다니고 있는데, 그러다가 세상 뒤집어지는 꼴을 보게 될 거요."


"그건 심한 말씀이오."


유혁근이 입술 끝을 비틀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우리야 증거나 근거가 있어야 수사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사회 분위기는 우리 같은 말단 소관이 아닙니다. "


"밤의 세계를 장악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계시겠 fl . "


그러자 입맛을 다신 유혁근이 머리를 들었다.


"나도 할 만큼은 하고 있습니다. 세상 보는 눈도 부사장님만큼은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공무원이오. 조직사회의 당신 위치만큼 내 계급이 높지 못해요."


그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어 갔다.


"나는, 그렇지, 나하고 우리 이 과장은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그대로 상부에

보고를 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책적인 결정은 우리 소관이 아니오."


"공무원이시니까."


머리를 끄덕인 김칠성이 말했다.


"보고만 하면 맡은 일은 다 한 것이 되는군."


한동안 김칠성을 쏘아보던 유혁근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경제 부흥에 전념을 해야 하는 시기라 사회 분위기가

세계의 혼란으로 흐트러지면 안됩니다.

이것은 국가 통치자의 입장이오."


‥‥‥


"사소한 사건을 확대시켜 언론에 보도해서도 안되고

또 통치 그룹의 집중력을흐트리게 해서도 안되지요.

적당한선에서 해결해야됩니다. "


김칠성이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이 사건들을 몇 단계 뛰어넘어 보고할 생각도 배짱도 없어요.

그리고 이건 아직도 증거가 애매한 것이어서‥‥‥‥


"물론 그러시 겠지 ."


"그렇게 비꼬지 마시오.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나름대로 말입니다. "


"당신들은 정기욱인가 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 회사를 차려서는

흥업체나 일반업소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거요.

당신들 정부에서 후원해 주고 있다고 소문이 났던데."


"난 그런 말 못 들었습니다. 하지만 법에 어긋난 일은 아니어서."


"놈들은 우리가 곧 망할 것이라고, 그때면 우리 업체들을 인수할 것이라고 합디다."


유혁근이 입술 끝을 올리면서 웃었다.


"말 같지도 않은 그 따위 허풍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때에 그런 놈이 나타난 것도 신경이 쓰인단 말이오."


"정기욱이나 그 주변에 있는 놈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있어요.

저 이런 상황에서 뭔가 챙기겠다는 생각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을 그친 유혁근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철우 가족이 숨어 있는 주소요.

내일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는 수사관들의 회의가 있어서 모두 지서에 모이게 됩니다.

가족들이 그 시간에 어디로 도망치지는 않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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