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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선전포고 4

오늘의 쉼터 2014. 12. 2. 15:59

제35장 선전포고 4

 

 

 

그해 4월,

신라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세 갈래 방향으로 웅진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다.

북쪽에서는 죽지와 흠돌이 직산(稷山:천안)을 거쳐 대흥(大興:예산)으로 향하고

동쪽에서는 유돈과 무수 형제가 백금서당과 장창당을 거느리고 웅진성을 쳤다.

동시에 남쪽에 주둔하던 군관과 천품, 진복의 5천 군사도 가림성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웅진성의 장귀는 뒤로 몰래 성문을 열어놓고 앞에서는 싸우는 척하다가 유돈과 무수의 군사가

들이닥치자 무기를 버리고 포로가 되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웅진성을 취한 신라군은 그대로 진격하여 두릉윤성을 공취하고

두솔성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죽지와 흠돌의 한산주 군사들도 난공불락의 임존성과 주류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미리 두솔성 앞에 안착해 있었다.

양식이 궁한 백제의 군사들은 대부분 기력이 없어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이는 한 해 전에 곡향 가림성의 벼를 짓밟아버린 죽지의 공이었다.

제성들이 일제히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곧 부성의 부여융에게 전해졌고,

부여융은 흑치상지가 있는 가림성으로 달아나 함께 살아날 방법을 도모 했다.

“힘과 궁리가 다하여 더는 버틸 재간이 없으니 어찌 하오?”

겁에 질린 부여융이 새파랗게 입술을 떨며 탄식하자 천하의 흑치상지도 드디어 손에 쥔 칼자루를

내려놓고 말했다.

“신라왕 법민은 삼한의 백성들을 두루 포섭하여 날로 인심과 덕망을 쌓고 있으니

그와 대적하기란 이제 역부족입니다.

이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신이 해안에 배 한 척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전하께서 낙양으로 가실 마음이 있다면 신이 뫼시겠나이다.”

흑치상지의 말에 부여융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리 되면 사직의 재건은 영영 물거품인가!”

“……망극합니다.”

“오, 어찌할거나. 7백 년 옛 영화가 새삼 서럽도다!

내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어 하필 나의 세대에 이처럼 참혹한 일을 거푸 당한단 말인가!”

융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으며 고개를 들어 멀리 서산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가림 성변 야산 마루에는 붉은 해가 처연히 내걸렸고,

서천 가득 노을이 결 고운 잔 구름에 무늬를 아로새기며 피처럼 번져나고 있었다.

“고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저토록 곱게 저무는가!

아아, 이 정든 산천과 저 꿈같은 산마루의 황혼을 두고 가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융이 계속 혼잣말로 울부짖자 보다 못한 흑치상지가 어투에 힘을 실어 결연히 아뢰었다.

“부디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전날 비류백제의 응신 대왕은 담덕왕(광개토 대왕)에게 쫓겨 바다를 건너갔으나

왜국 천황의 시조가 되셨고, 문주 대왕의 아우 곤지(扶餘昆支)는 왜국에 볼모로 붙잡혀갔지만

그의 두 아드님이신 모대(牟大:동성 대왕)와 사마(斯麻:무령 대왕)는 아우와 형이

차례로 환국하여 백제 최고의 성기를 여셨습니다.

흥성하고 쇠잔하는 일은 일국의 역사에 매양 있는 일이요,

저무는 일과 이루는 것도 종래는 사람의 힘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모대왕에 뒤지지 않는

출중한 인품과 사마왕에 견줄 만한 훌륭한 자질을 갖춘 분이시고,

중국에는 우리 담로 지들이 많이 있으니 훗날 사비로 돌아와 보란 듯이

사직을 일으켜 세울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흑치상지는 간곡한 말로 융을 위로하고 나서,

“사방에 적이 깔려 있어 서해로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서두르셔야 할 줄 압니다.”

하며 재촉했다.

그는 융을 수레에 태우고 자신은 홀로 장창 하나를 꼬나 잡은 뒤에 담가라를 몰아

급히 가림성 서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배를 준비해둔 해안까지 가는 도중에 불행히도 한 떼의 군마를 만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유돈의 군사였다.

“거기 가는 자는 흑치 장군이 아닌가?”

백제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던 유돈은 혹시 부여융과 흑치상지가

해안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 싶어 미리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있던 터였다.

담가라를 타고 앉은 흑치상지가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유돈을 노려보았다.

“이놈, 유돈아! 우리는 너를 믿고 그간 잠시도 홀대한 일이 없거늘

네 어찌 군사를 이끌고 나와 무엄하게도 대왕의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가?”

그러자 유돈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너희가 나를 믿은 것은 계책에 속았기 때문이요,

이제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왔다.

부여융과 흑치상지는 어서 수레와 말에서 내려 결박을 받으라!

내 너희의 보살펴준 은공을 고려해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흑치상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들고 있던 장창을 휘두르며 번개같이 유돈에게 달려들었다.

유돈과 그의 주위에 둘러서 있던 신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흑치상지의 예봉을 막았지만

한 번 창질에 신라군 두어 명의 목이 댕강 떨어졌다.

부하가 죽는 것을 본 유돈은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라고 흑치상지의 명성을 모를 턱이 없었건만 한편으론 그럴수록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앞서

전후불계하고 칼날을 세워 덤볐다.

두 장수가 말머리를 어우르며 겨룬 지 불과 3합. 갈 길이 바쁜 흑치상지는 촌각도 아깝다는 듯

서둘러 창날을 휘둘렀고, 그 서슬에 그만 유돈의 목이 맥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장수가 어처구니없이 죽는 것을 본 신라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흑치상지는 고함만 질렀을 뿐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수레를 인도하여 다시 얼마만큼 왔을 때였다.

“흑치상지는 잠시 길을 멈추라!”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또 다른 장수 하나가 쫓아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시면 신의 충복들이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혹 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들 물이 되어 배가 뜨면 먼저 가십시오.”

흑치상지는 융에게 재빨리 말한 다음 수레를 끄는 군사에게 어서 해안으로 달아날 것을 명했다.

그리고 홀로 장창을 그러쥔 채 쫓아오는 장수와 맞섰다.

“너는 감히 우리 장수를 해치고도 무사히 달아날 줄 알았더냐?

우정 가려거든 너 또한 목을 내놓고 가라!”

10여 보를 격하고 선장수가 마상에서 제법 늠름하게 꾸짖었다.

흑치상지가 보니 멋들어진 백수를 휘날리며 나타난 장수는 꽤나 나이가 들어 보였고

어딘지 얼굴도 눈에 익은 듯했지만 그렇고 그런 장수 중에 하나일 거라 쉽게 여겼다.

곧 대꾸 없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한 덩이가 되어 싸운 지 30여 합,

그러나 의외로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일몰의 잔광 아래 사위가 꺼뭇꺼뭇해질 때부터

시작한 싸움이 어느덧 밤이 되어 두 사람은 희미한 달빛과 물체의 윤곽만으로 싸우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20합 이상을 겨루었지만 기운만 뺐을 뿐 승패는 여전히 갈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진 쪽은 흑치상지였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한 차례 치열한 공방 끝에 잠시 말머리가 떨어졌을 때 흑치상지가 이름이나 알자 싶어 묻자

백수풍신의 신라 장수가,

“싸우는 것을 보니 내 이름을 물을 만한 자격은 있다.”

하고서 곧 죽지라고 대답했다.

죽지의 이름을 듣는 순간 흑치상지는 돌연 사지에 힘이 빠졌다.

“장군이 과연 죽지라면 궁한 적을 쫓지 않는 싸움터의 예도를 모르지 아니할 터인데

어찌하여 고향까지 버리고 도망가는 불쌍한 사람을 끝까지 쫓아오시오?”

죽지는 흑치상지가 예를 갖추어 묻자 역시 반공대로 화답했다.

“아무리 달아나는 적이지만 천하의 흑치상지가 지척을 지나간다는데

그 이름난 창 솜씨를 아니 볼 수야 있는가?

항차 우리 장수가 봉변을 당했으니 쫓는 거야 당연지사일세.”

“유돈을 죽인 것은 그가 나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지 특별히 해칠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오.

청하거니와 장군께서는 부디 우리를 이대로 보내주시오.”

흑치상지는 의연함을 잃지 않으면서 자비를 호소했다.

그런 즈음에 이르러선 죽지도 굳이 더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

“낙양으로 갈까 하오.”

“그대는 젊고 출중한 장수일세.

우리 임금께서는 이미 삼한이 하나임을 만천하에 공포하시고

삼한의 백성들을 한결같이 자식처럼 애호하시니

그대도 우리에게 와서 함께 힘을 합쳐 성군의 왕업을 보필함이 어떠한가?

그대와 같이 훌륭한 영걸이 당을 섬기다니 안타깝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내가 우리 임금께 간하여 높은 벼슬과 평생 걱정하지 않을

재물을 내리도록 하겠네.”

죽지의 제안에 흑치상지가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나도 귀가 있어 법민 대왕의 성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어찌 마음에 여러 가지 번뇌가 없었겠소?

하나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장군과 나의 차이는 임금을 잘 만나고 못 만난 차이외다.

나는 오로지 백제를 섬길 뿐 당을 섬긴 일은 없거니와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성군의 왕업을 보필해 만대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은

장부마다 한가지이나 지금껏 내가 섬기던 이는 사직과 백성을 잃고 홀로 일엽편주에 의지해

남의 땅으로 도망가려 하오.

이런 판에 어찌 그이를 버릴 수 있겠소?”

그리고 흑치상지는 애석해하는 죽지를 향해 이렇게 덧붙였다.

“모쪼록 대왕께 말씀드려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나라의 가련한 백성들을 잘 거두어주시오.

그것이 백제 땅에 두고 가는 이 흑치상지의 마지막 소망이외다.”

장부의 충절을 아는 죽지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원로에 조심해 가시게나.”

“장군께서도 성군을 도와 바라던 삼한일가의 위업을 반드시 이루시오.”

흑치상지는 마상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에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해안으로 사라졌다.

“과연 계백에 못지않은 명장이로다.”

죽지가 흑치상지의 절륜한 무예와 장부다운 풍모를 아까워하며 혀를 차고 섰다가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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