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5장 선전포고 3

오늘의 쉼터 2014. 12. 2. 15:45

제35장 선전포고 3

 

 

 

웅진(熊津)을 멸하다

답서를 받아본 설인귀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글귀에 우쭐한 마음이 생긴 데다

또 일변 수긍하는 대목도 없지는 않은 터라 북방의 일에만 전념하려 하였는데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인 신미년(671년) 9월에 당주의 명을 받은 고간이 설방(薛邦), 조헌(趙憲) 등의

장수와 더불어 탁군(涿郡:북경) 부근의 번병 4만을 소집하고 등주만(산동반도)을 출발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고구려의 사정은 잠시 숙지근하던 압록수 이남의 다물군들이 묘향산 일대에서

다시 창성하여 평양을 위협하였고, 요동에서는 우상 유인궤를 비롯해 고간, 이근행, 학처준, 방동선,

설필 하력 등 당나라의 거의 모든 장수들이 동원되어 끝까지 저항하는 장성(천리장성) 변의 제성들과

사력을 다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자면 당은 아직 신라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국경과 접한 요동의 저항은 반드시 평정해야 하는 절박한 것이었지만 신라와는 적어도

그런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병법과 외교의 기본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법칙이었다.

그럼에도 당이 굳이 고간 등을 파병하여 신라를 힘으로 억누르려 한 저변에는

천자의 나라라는 체면과 위신 문제가 걸려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 당은 곧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던 거란과 말갈까지 번병으로 삼아

상국의 권위를 칼날같이 세우려던 터였고, 앞서 멸한 고창국(高昌國)의 안서도호부나

금구현(金溝縣)의 요지도독부, 서쪽의 토번(吐藩:당송시대의 서장족을 이름. 티벳)과

남쪽의 임읍(林邑) 지역에 이르기까지 사방 제후국들의 조공과 복종을 변함없이 이끌어내자면

무리를 해서라도 저항하는 신라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간은 웅진을 구원하라는 당주의 칙명이 추상과 같았음을 말하고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분산하여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한성 북방을 침범했다.

웅진을 멸하러 한산주로 갔던 강수는 남으로 준비했던 군사를 돌려 북쪽의 당군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뱃길에 밝은 흠돌의 부장 당천에게 1백여 척의 선박을 주어 당나라 수군을

매소홀(買召忽:인천)로 유인토록 한 다음 흠돌에게 말해 해안에서 이를 격파하도록 하고

자신은 죽지와 더불어 당의 육군을 대적하려 했다.

그런데 고작 1백여 척의 선박을 끌고 나간 당천이 수중의 섬인 해구군(강화)의 급한 물길을 이용해

당군을 검포현(김포)에 고립시키고 해로의 샛길을 돌아 한수(漢水)를 거슬러 일시에 적을

후미에서 들이치니 당천 혼자서 해상의 적을 무참히 격살하고 흠돌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이때 당천의 전공은 실로 눈부신 것이어서, 당나라 선박 70여 척을 격침시키고 수군의 선봉장인

겸이대후(鉗耳大侯)와 군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의 숫자는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천의 대승 소식이 전해지자 흠돌은 그 길로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북향하여

죽지의 군사와 합류했고, 육로를 침공하려던 당나라 보기병들은 오히려 평양성이 함락될 것을

두려워하여 급히 군사를 돌려 퇴주하고 말았다.

법민은 이 소식을 듣고 급찬 당천에게 사찬 벼슬을 내려 그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였다.

당군을 물리친 강수가 그 여세를 휘몰아 백제를 친 것은 이듬해인 임신년(672년) 정월이었다.

그는 한산주의 군사들을 대거 보강하고 고성성(古省城:부여 인근)을 공격하면서

왕에게 사람을 보내 백제군이 고성성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남쪽의 가림성을 치도록 말했다.

법민은 곧 군관, 천품, 진복 등을 장수로 삼아 가림성으로 급파했다.

고성성이 침략을 받자 흑치상지는 강수가 예견했던 대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신라군과 대치했다.

“이제 가림성은 떨어졌다.

가림성을 얻고 나면 부여융의 한쪽 다리는 붙잡은 것이나 진배없다.”

고성성 공격은 적을 속이기 위한 위계요,

실은 난공불락의 가림성 탈취에 뜻을 두었던 강수로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불과 사나흘 뒤였다.

분명히 고성성에 나타났던 흑치상지가 돌연 하룻밤 새 군사를 거두어 종적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강수는 무슨 흉계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하루 이틀 군사를 내지 않고 성의 동향을 엿보았지만

매일 성루에 나와 허세를 부려대던 적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북소리를 울리며 싸움을 걸어보아도 성안에서는 일절 반응이 없었다.

참지 못한 흠돌이 벌컥 성을 내며,

“흑치가 우리를 보고 겁을 내어 도망한 것이 분명한데 그대는 무엇을 그토록 망설이는가?”

하고는 한떼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일시에 성문을 부수고 들어서니

고성성은 이미 텅 비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것 봐라!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놈들한테 무슨 흉계가 있다고 벌벌 떠는가?

강수 자네도 이제 보니 만판 겁쟁일세.”

흠돌이 성을 얻은 만족감에 도취하여 껄껄 웃으며 강수를 놀려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강수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성성을 소리 없이 빠져나간 흑치상지는 그 이튿날 가림성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때는 신라군이 가림성을 치기도 전이었다.

가림성은 흑치상지가 도착한 후에야 신라군의 공격을 받았다.

천품과 진복이 이끄는 신라군은 전날 죽지가 머물던 가림성 남쪽에 진을 치고 달포간이나

총력을 기울여 성을 공격하였지만 흑치상지가 버티는 가림성 탈취에는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얼마 뒤에 이 소식은 강수의 귀에 전해졌다.

“흑치상지가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우리가 가림성을 칠 줄 미리 알았더란 말인가!

이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밀고를 했기 때문이다.”

강수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고 서둘러 대궐로 돌아가 왕을 알현했다.

“전하께서 백제의 구토를 거의 빼앗고 그 유민들을 포섭하여 우리 백성으로 삼은 뒤에

대왕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유민들이 많습니다.

본래 백성들이란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들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또한 유민들에게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진실로 대왕의 백성들이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평한 시기가 아니므로 나라에 공을 세우자면 창칼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은덕에 보답하려는 백제의 유민들만으로 따로 서당(誓幢:군대)을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을 이루고 명실 공히 계림의 백성과 전하의 신민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렵 법민 또한 강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과인은 그간 임생의 말에 착안하여 조정의 직제를 개편하고 널리 새로운 인물들을 구하는 중이오.

이미 유사에 말하여 병부와 승부, 사정부의 인원을 대폭 늘려놓았고,

요즘은 제군관(諸軍官)의 장군과 당주(幢主)직을 보강하려는 중이니 잘되었소.”

법민은 강수와 의논 끝에 백제민들로 구성된 당을 따로 조직하여

그 이름을 백금서당(白衿誓幢)과 장창당(長槍幢)이라 일컫고 청주, 완산주 등 공취한 백제땅과 한산주,

우수주(춘천) 등에도 지방 서당을 설치하고 이를 5주서(五州誓)라 하여 별도로 군역을 징발할 수

있도록 했다.

백금서당과 장창당이 조직되자 강수는 이들을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자로 백제에서 귀화한

대내마 무수와 그 아우 인수를 천거하였다.

무수는 전날 당나라로 보내는 임금의 장계를 지니고 당성항으로 가다가 중로에서

웅진성에 들러 장귀에게 귀띔을 해준 뒤 자신은 삼년산군으로 다시 와서 칭병을 하고

금성에 발병한 사실을 글로 아뢰었다.

그러나 이미 무수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법민은 그의 허물을 묻지 않고 오히려 병이 낫거든

천천히 금성으로 돌아오라는 답서로 따뜻이 위로하니 문초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던 무수는

크게 감동하여 법민을 섬기는 마음이 더욱 돈독해졌다.

그런 무수가 다시금 백금서당을 감독하라는 독관(督官)의 중책을 맡게 되자

성은에 흥감하여 오랫동안 조아린 머리를 들지 못하였는데,

어전을 물러난 뒤 강수가 은밀히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공의 형제를 대접하는 것은 은나라의 탕왕이 이윤(伊尹)을 중용한 것과 같고

한의 무제가 장건(張騫)을 믿은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소.

그런데 이윤은 탁월한 지략으로 폭군 걸왕(桀王)을 쳐서 은혜를 갚았고,

장건 또한 미천한 관리로 흉노족에게 10년간이나 사로잡혀 지내면서도 늘

황제의 신표를 몸에 지니며 귀중한 자료를 모아두었다가 마침내 무제를 도와

서역을 아우르고 스스로도 높은 제후의 지위에 오르지를 않았소?”

하고서,

“지금 백제는 망하고 웅진은 당의 하수인인 부여융이 사방 한 치의 땅에 둔거하며

악착같이 버티고 있지만 천하의 대세는 우리에게 기운 지 이미 오래요.

부여융과 흑치상지는 비록 백제에서 났으나 그들은 이제 당나라의 관리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그들이 차지한 부성 일대도 당나라의 한 고을에 불과할 뿐이오.

저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칫 우리 계림마저도 당의 수중에 떨어져 삼한의 모든 백성들이

당인들에게 마소와 같은 멸시와 업신여김을 당하고 그 화가 자손만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삼한의 백성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가 어디 있겠소?

이제 우리 임금께서는 삼한의 강역에서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심하시고

대군을 일으켜 웅진을 치려하시는데, 만일 부여융의 치하에서도 당에 반대하고

우리에게 동조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옥석구분 없이 화를 당할까 오직 그 한 가지가 걱정이오.

공은 웅진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사전에 미리 손을 써서 먼 일가붙이나

혹은 같이 자란 옛 벗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고 물었다. 무수가 당장 떠올린 이는 장귀였다.

그는 녜군을 따라온 수미와 장귀가 영객부에 머물고 있을 때 몇 번이나 장귀를

은밀히 만나 담소를 나누었고, 한 번은 객부 관리들의 눈을 피해 장귀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서

밤을 새워 술잔을 나눈 일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어찌 일국의 대사를 사사로운 일 때문에 지체할 수가 있겠소?

내겐 전하께 그런 소원을 말씀드릴 염치가 없소.”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공이 마음만 있다면 내가 전하께 잘 말씀드려 약간의 말미를 얻어 보겠소.

공도 익히 알다시피 삼한의 백성을 골고루 애호하시는 전하가 아니시오?”

강수가 장담하자 무수는 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공이 윤허만 얻어낸다면 구할 벗이 꼭 한 사람 있소.”

이리하여 무수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급히 웅진성 접경으로 달려가 장귀를 만나보고자 청했다.

흑치상지가 가림성으로 떠나며 웅진성의 방비를 맡긴 장귀는 무수가 왔다는 말에 황급히

말을 달려 접경으로 나왔다.

무수는 근황과 안부를 묻기도 전에 장귀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서 사태의 급박함을 낱낱이 전하고,

“나라가 망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네.

웅진에 있는 것이 당이지 어디 백제던가? 당을 섬길 바엔 차라리 자네도 계림으로 가세.

우리 임금은 삼한의 백성들을 구분 없이 거두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백제의 유민들만을 따로 모아 서당도 만들고,

신라인과 똑같이 벼슬길까지 열어주셨네.

이만하면 능히 섬길 만한 성군이 아닌가?

내 자네를 구하려고 출병할 날짜까지 미루고 이렇게 달려왔으니

나하고 함께 금성으로 가세나!”

하며 장귀의 투항을 권유했다.

한참 동안 가타부타 말이 없던 장귀가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은 실로 고맙기 한량없네.

나라고 어찌 당에 예속된 웅진의 실상과 그 암담한 장래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가 도망가면 식솔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요,

또 여태까지 섬기던 흑치 장군께도 차마 사람으로 못할 짓이네.”

그리고 장귀는 약간 맥 빠진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스스로 투항이야 어찌 하겠는가.

나중에 굽지도 접지도 못할 불가피한 곡경을 만난다면야 또 모르지만.”

장귀의 혼자말과도 같은 넋두리에 무수는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하면 우리 군사가 웅진성을 칠 때 자네는 성문 하나를 몰래 열어놓고

싸우는 척하다가 형세가 위급해지면 그때 투항을 하게나.

싸움터에서 이기고 지는 거야 비일비재한 일이 아닌가?”

그러자 장귀는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나서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전날 계림의 사신으로 왔던 유돈이 지금 내게 와서 머물고 있는데

그를 내어줄 테니 데려가게나. 유돈은 우리네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아마도 자네와 계림에 큰 도움이 될 걸세.”

말을 마치자 장귀는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말을 타고 떠났는데,

그로부터 밥 한 솥쯤 지어낼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 바랑을 짊어진 승복 차림의 중 하나가 나타나

성주의 비표를 내보이며 국경을 넘어가고자 하였다.

삼국이 개 이빨처럼 지경을 접하고 물샐 틈 없는 경비를 할 때부터도 승려들의 출입만큼은

대체로 자유로운 축에 속했다.

하물며 그가 성주의 허락까지 얻어 왔으니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성문 밖에서 서성거리던 무수는 중을 보자마자 대뜸 그가 대아찬 유돈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나리!”

둘이서 10여 보를 격하고 국경을 한참 빠져나와 안전한 곳에 이르렀을 때 무수가 유돈을 소리쳐 불렀다. 이태 만에 신라 땅을 밟게 된 유돈도 감개무량한 얼굴로 무수와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우리 대왕께서는 평강하시오?”

“네.”

“강수가 얼마 전에 한산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거기 있소?”

“아닙니다. 강수는 대궐에 있고 저도 강수의 말을 듣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럼 서둘러 대궐로 갑시다. 웅진을 단숨에 쓸어버릴 방법이 내게 있소.”

유돈과 무수는 바삐 걸음을 재촉하여 삼년산성까지 와서 말을 얻어 타고 부리나케 금성에 이르렀다.

탑전에서 왕을 배알한 유돈은 제가 보고 들은 부성의 사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소상히 고한 다음

품에 지니고 온 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적의 요새인 가림성, 웅진성, 두릉윤성과 성주산 북쪽의 주류성, 임존성, 두솔성에 이르기까지, 칠악과 백강 주변 도독부 전역의 성세와 군사 배치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가림성과 웅진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곽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작년 가을에 죽지 장군이 가림성의 벼를 모두 짓밟아버린 후로 부성의 잔당들은 먹을 것이 없어

크게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흑치상지가 비록 용맹하다 하나 그는 가림성 하나를 지키기에도 여념이 없습니다.

또한 백제의 잔군이 4, 5만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부풀려진 헛소문이요,

실은 1만의 군사가 있을 뿐 이온데,

그 중에서도 흑치상지의 휘하에 있는 2천여 명을 빼면 죄 허수아비들입니다.

신이 웅진성을 떠나올 때 장귀와 주고받은 얘기가 있으니

우리 군사들을 웅진성으로 보내어 두릉윤성과 주류성, 임존성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함락시킨다면 부성의 부여융은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항복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법민은 유돈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고 그에게 파진찬 벼슬을 제수한 뒤 웅주 총관으로 삼아

무수와 함께 웅진성을 치도록 명하였다.

유돈이 왕명을 받고 물러나려 할 때 배석했던 강수가 물었다.

“얼마 전에 실로 귀신이 곡을 할 이상한 일 한 가지가 있었네.

내가 고성성을 위계로 치면서 실은 가림성을 얻고자 하였는데,

흑치상지가 고성성으로 왔다가 갑자기 가림성으로 군사를 돌린 이유를 혹시 아시는가?”

그러자 유돈은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이 말했다.

“내마 변산(邊山)의 서신이 부여융의 수중에 있는 것을 보았네.”

변산은 김군관이 편장으로 데려간 장수였다.

그 말을 들은 강수가 비로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흑치상지에게 혹 귀신같은 신통력이 있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네.”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법민은 당석에서 군관에게 사람을 보내

내마 변산을 묶어 대궐로 압송하라는 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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