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선전포고 1
이 사실은 부여융의 고변을 통해 즉각 당나라 조정에 알려졌다.
대로한 당주 이치는 평양성에 사신을 급파해 설인귀에게 신라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설인귀는 고구려 내지의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사정이 아니었고,
신라 토벌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때 고구려 내지에서는 왕자 안승의 일이 알려져서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했다.
안승과 검모잠이 4천여 호 주민을 인솔하고 신라에 몸을 의탁하였더니
법민왕이 기름진 땅과 성을 내어주고 따로 사직을 잇도록 선처하였으므로 누구든
신라에만 가면 다시 고구려 백성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망국민들의 황폐한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실제로 해안의 배를 탈취하여 서해나 동해로 빠져나가는 유민들의 숫자도
갈수록 늘어났다.
아직도 요하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며 다물군의 저항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당나라로선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설인귀는 궁여지책으로 안승의 인품을 모독하는 헛소문을 지어 퍼뜨렸다.
안승은 임금의 재목이 아닐 뿐더러 성품이 모질고 악독한 자로,
자신을 섬기던 충신 검모잠을 죽이고 혼자만 살겠다고 신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설인귀는 그 증거로 참혹하게 죽은 시신 하나를 구해 장군의 옷을 입힌 다음
이를 검모잠이라 주장하며 남경 부근에 오랫동안 효시한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백성들의 동요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정작 결과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했다.
뭉치면 다물군이요 흩어지면 백성인데, 한두 마을의 장정들이 모여 당인 관리를 살해하고는
그 길로 배를 타고 신라나 혹은 왜국으로 달아나는 일이 속출하니
명색 대국의 총관(大唐摠管)인 설인귀로선 잠시도 평양성을 비울 수가 없었다.
그는 이치와 무후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가 났는가를 소상히 알아보고 나서 인편에
다음과 같은 장문의 서찰을 지어 법민왕에게 보냈다.
행군총관 설인귀는 신라왕께 글을 보냅니다.
인귀는 삼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육로 1만 리, 해로 3천 리를 지나 이 땅에 왔거늘,
이제 듣거니와 왕께서는 흑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강화한다 하니
이는 유야(由也:공자의 제자 子路)의 편언을 저버리고 후생의 한번 약속한 일을 어긴 것입니다.
형(법민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김인문)는 충신이 되었으니
꽃과 꽃받침의 사이인 형제가 어느새 빛과 그늘로 나뉘어 서로 그리움의 달빛만 헛되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며, 자연히 양국(신라와 당)의 일도 그 내막을 말하려니
절로 깊은 탄식만이 흘러나올 따름입니다.
이렇게 화려한 수사로 시작한 설인귀의 서찰은 동맹국의 결합을 이끌어낸 선왕 춘추와
죽은 당태종의 각별했던 우애를 회고하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선왕 개부(무열왕의 당나라 작위, 開府儀同三司)께서는 나라의 통일을 도모하여 백성(百城)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염려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약탈을 경계하며
사방 천리 여러 곳에서 창칼을 맞대고 싸우는 바람에 부녀자들은 뽕잎 딸 시기를 놓치고
농부들은 밭갈이 할 때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선왕은 나이가 육순에 가까워 돌아가실 때가 다가왔지만 험한 뱃길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파도를 넘어와 중국에 뜻을 기울이고 마음을 의지하며 몸소 황제의 대궐을 두드려 형세의
어려움을 고변하였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간곡한 말로 호소하니
마침내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태종 문황제(이세민)께서는 그 기량이 천하에 우뚝하고 왕성한 정신은
우주에 두루 군림하신 분으로, 반고(盤古:전설에 나오는 중국의 창조신)의 하루 아홉 번 변화나
거령(巨靈:물의 신)의 손처럼 쓰러지는 자를 부축해주고 약한 자를 구원함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선왕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애원을 가납하사
가벼운 수레며 빠른 말, 좋은 의복과 훌륭한 약으로 특별히 우대하셨고,
선왕께서도 그 은의를 받들어 친히 군사(軍事)를 의논하시니,
두 분의 결호함이 수어(水魚)와 같고, 그 정의는 쇠와 돌에 새긴 것보다 더욱 명료하였던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1천 겹의 대궐과 만호의 학관에서 늘 잔치로 어울렸으며,
궁정의 연회에서 담소하시고 군사를 의논하시매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기를 나누고 성원할 것을 약속하시어 일조에 대군을 일으키고
수륙 양면으로 싸우게 되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변방의 잡초에 꽃이 피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필산(요동)에 싸움이 벌어지자 먼저 문제(이세민)께서는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친히 험지로 나아가셔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불쌍한 자를 구휼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의리를 아는 정의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산과 바다가 형상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왕 또한 선왕의 왕업을 계승하게 되었거니와,
양국은 여전히 바위와 칡넝쿨이 서로 의지하듯 함께 토벌군을 일으키고 싸움이 끝나면
나란히 병기를 씻고 말을 손질하여 선대의 아름다운 뜻을 대를 이어 준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여러 해가 흘러 중국은 피로하게 되었지만 이에 상관없이 국고를 열고
번번이 군량과 마초를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창도(蒼島:한반도)의 땅 때문에 황도(皇徒:황제의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무용한 일은 많아 어찌 이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것을 모르오리까마는,
우리는 오직 선대의 신의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중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장황한 서설을 늘어놓은 설인귀는 이어 오만방자한 글로 당대의 일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제 고구려와 백제의 강적들은 말끔히 소탕되었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병사들이며 말과 재물은 모두 왕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몸과 마음을 헛된 일에 쓰지 말고 마땅히 양국이 서로 병기를 녹이면서
민심과 후세를 위해 협력하여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길만이 아름다운 선례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편하고 좋은 길을 버리고 떳떳한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천자의 명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왕의 뜻을 저버릴 뿐 아니라,
천시(天時)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를 속여가면서 한쪽 구석의 궁벽하고 작은 땅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모으고 해마다 싸움을 일으키니,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아이로 하여금 밭을 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화를 자초한 결과 나라를 지키자니 지탱할 방도가 없고,
나아가 싸우자니 대항할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얻는 것을 잃게 되는 것이요,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며, 작은 것이 큰 것을 배척하는 것이고,
순리와 역리가 뒤바뀌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비유하자면 무기를 가지고 허황한 것을 잡으려다가 우물을 보지 못하여 빠지는 것과 같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에게 잡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일과 같으니,
바로 왕께서 자신의 능력과 힘을 알지 못하는 탓입니다.
만일 선왕께서 살았을 때 일찍이 황제의 돌보심을 입고서도 몰래 음험한 생각을 품고,
거짓으로 성실한 척하며, 자신의 사욕을 좇아 황제의 공로를 탐내고,
앞에서는 구차하게 은혜를 빌었다가 뒷날 반역을 도모하였더라면 어찌 그 뜻이 오래갔겠나이까?
한 번 맹세는 황하처럼 영원하며, 의리와 명분은 추상같이 엄정해야 합니다.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충성이 아니며, 어버이의 마음을 배반하는 일은 효도가 아닌데,
왕께서는 충성과 배반의 마음을 한 몸에 지녔으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가 일조에 떨쳐 일어난 까닭이 모두 우리 황제의 인정과 위력 덕택임은 천하가 아는 일입니다. 이에 따라 왕의 부자는 차례로 황제의 책명을 받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였던 것인데,
이제 경서에 말한 시(詩)와 예(禮)를 상세히 알고서도 의(義)를 좇지 아니하며,
선(善)을 보고도 경멸하고, 권모술수에 귀를 기울이며, 부귀의 터전을 소홀히 하니
어찌 귀신의 책화를 면할 수 있으오리까?
또한 왕께서는 선왕의 업적을 받들지 아니하고 시종 다른 뜻을 품는가 하면,
안으로는 충신을 없애고 밖으로는 강적을 불러들이니
어찌 이를 슬기로운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쯤에 이르러 설인귀는 법민왕에 대해 품고 있던 불만을 보다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나왔다.
고구려의 안승은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었기 때문에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던 자로, 왕의 직위를 능히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인귀의 병선이 본래 순풍에 돛을 달고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의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그가 패전한 나라의 왕자임을 불쌍히 여겨 차마 군사를 풀지 않았던 터인데,
왕은 안승에게 도리어 의탁할 곳을 허락하였으니 이를 어찌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까?
황제의 은덕은 끝이 없고, 어진 교화는 멀리 미치며,
사랑은 햇빛처럼 따스하고 봄날의 꽃잎처럼 밝게 비치는 법입니다.
황제께서는 멀리서 안승의 일을 들으시고도 이를 염려하실지언정 차마 믿지 않으려 하시며
신에게 모든 사유를 알아보라 하였사온즉,
근래에 왕은 사람을 시켜 서로 문안도 아니 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들을 대접하지도 않으며,
마침내는 군사와 병기를 따로 언덕 밑에 감추고 숲 속에 숨겨 훈련을 시킨다고 하니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해칠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돕기를 마다하는 일입니다.
뒤이어 그는 한층 노골적으로 신라를 협박하고 심지어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왕을 훈육하기까지 하였다.
당나라의 대군이 아직 출동하기 전에 먼저 유격대의 대열을 정비하여 바다로 보냈더니
물고기들은 놀라 달아나고 새들도 도망을 쳐서 숨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보자면 왕께서는 사람의 도리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을 찾으시고
망령된 짓은 당장 그만둘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저 큰일을 하려는 자는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고,
높은 절개를 가진 자는 아울러 영명해야 하는 법입니다.
난봉을 잘 길들이지 않으면 승냥이와 이리 떼가 덤비는 것은 세상의 이치올시다.
고간 장군이 거느린 한(漢)나라의 기병과 이근행이 이끄는 오(吳)나라, 초(楚)나라의 용감한 수군들,
그리고 유주와 병주의 사나운 북방 젊은이들이 산지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배를 타고
삼한으로 건너와 험지에 성을 쌓고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려고 하는데,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창도에서 벌어진다면 왕에게는 고칠 수 없는 중병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만일 지금이라도 사심을 버리고 준비한 군사들을 쉬게 한다면
오늘의 이 잘못된 일도 단번에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니
왕께서는 저간의 사유를 낱낱이 해명하고 우리 양국의 사이를 분명히 밝히소서.
그리고 설인귀는 마침내 회유하는 글로써 장문 서찰을 마감하였다.
인귀는 일찍 황제를 수행한 덕에 친히 모든 일을 위임받았으니
장계에 기록하여 황제께 알리면 일은 반드시 올바로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애써 초조해하며 복잡하게 생각해 소동을 피울 하등의 까닭이 없습니다.
아아, 옛날에는 충신이었다가 지금에는 역신이 되려 하십니까?
처음에 좋은 사이가 나중에 흉하게 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요,
근본은 서로 같았으나 종말이 달라지게 되니 원망스러운 마음 가눌 길이 없나이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차며 나뭇잎은 떨어지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가는데,
산자락에 의지하여 먼 곳을 바라보니 쓸쓸한 회포가 더욱 마음을 저립니다.
왕께서는 심지가 맑고 풍신(風神:풍채)이 준수하오니 겸손한 의리를 지키시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때에 따라 제향의 복을 누릴 것이요,
국토와 왕통은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부디 복을 지으시는 방도와 계책을 깊이 연구하소서.
싸움하는 중에도 마침 사신의 내왕이 있어 왕의 휘하에 있는 중 임윤(琳潤)에게
평소 마음먹은 바를 한두 가지 글로 적어 보내나이다.
글을 읽은 법민의 노여움은 가필할 것이 없었다.
한낱 설인귀 따위에게 그런 서찰을 받은 자체가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치욕인 터에
그 내용인즉 사실은 선전포고에 다름이 아니라,
법민은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각간 천존을 궐로 청하였다.
유신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일컫던 천존은 법민에게는 늘
아버지와 같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천존도
이때는 나이가 들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조정 일에 참섭하였는데,
팔순에 가까운 노인답지 않게 아직도 풍채가 좋고 체력이 강건하였다.
유신이 병석에 있는 터라 법민에게는 천존의 건재가 더욱 고맙고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늙은 것이 오랜만에 용안을 우러러 뵈오니 사지에 새 힘이 솟는 듯합니다.
대왕께서는 그간 평강하셨나이까?”
천존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문후를 여쭙자 법민이 침통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과인이 서불한(舒弗邯:각간의 다른 명칭)을 청한 것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서불한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선왕의 유지는 삼한이 한데 모여 일가를 이루며 사는 것이었고,
과인은 비록 아둔하나 지금껏 하시도 그 뜻을 잊어본 바가 없습니다.
선왕께서는 전날 장안에서 문제(이세민)와 약조하시며, 여제(麗濟) 양적을 토벌하고 나면
삼한의 땅과 백성은 모두 우리나라에 귀속시키고 다만 요동의 일부 지역만 당에서 취하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인데, 정작 양적을 멸한 뒤에 보니 당이 양국의 구토를 거의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계림의 땅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한에서 당을 몰아내고 선왕께서 못다 이루신 바를 실현하는 일은 과인에게 남은
필생의 과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이 저절로 물러갈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면 만부득이 당과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당과 음으로 양으로 교분을 맺은 이가 많아 당에 대적하는 것을 반대하는 숫자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당과 우리가 각별한 선린의 관계를 맺어온 지 이미 오래라
사람과 인연이 서로 얽히고설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그것을 지금에 와서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당의 오만하고 방자한 작태를 용납한다면
우리 계림은 영원히 당의 속국으로 전락해 종국에는 삼한 전체가 당나라 땅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천존에게라면 새삼 제왕의 권위를 세울 까닭도 없었고,
말이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여 따로 감추어야 할 일도 없었다.
아직 젊은 군주 법민은 경륜과 식견이 풍부한 천존을 상대로 마치 자식이 어버이를 대하듯
그즈음 자신의 고민하고 번뇌하는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당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은 백제나 고구려와 싸울 때와는 그 유와 격이 다른 일입니다.
전국의 모든 백성들이 한 덩이가 되어 필사의 각오로 싸워도 반드시 이긴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인데, 조정의 중신들조차 패가 갈리고 뜻이 상충하니
어리석은 과인으로서는 도무지 어째야 옳은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서불한께서는 과인의 외가인 가락국 출신으로 선왕께서 삼한일족의 이념을 펴는 데
누구보다 크게 공헌하신 분이고, 또한 한림(漢林)의 일로 당을 섬기는 신하들의 마음 역시
능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현명한 말씀을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엎드려 청하거니와 과인에게 부디 바른길을 인도해주십시오.”
한림은 천존의 장자로 유신의 맏이 삼광과 더불어 오랫동안 당나라에 숙위사로 가 있던 터였다.
노신 천존은 왕의 간곡한 말을 듣자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붕어하신 선대왕께서 예전에 신과 태대각간에게 남기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선대왕께서는 늘 당나라의 일을 근심하시며 정작 큰일은 양적을 토벌한 후일 거라고 하셨는데,
이제 바로 그와 같은 때를 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천존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선왕께서 당에 입조하여 허리를 굽히고 문황제를 섬긴 것은 당의 힘을 빌려 나라의 오랜 숙적인
여제를 멸하기 위함이지 당의 속국이 되고자 함은 아니었습니다.
수나라 장수 이연과 그의 차자 이세민이 장안에 사직을 창건한 이래로 그를 받들고 섬기는 일에는
우리 삼한의 세 나라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각축하였거니와, 조공으로 치면
고구려가 우리보다 훨씬 더하였고, 사신의 빈번한 왕래로 말하면 백제가 도리어 윗길이었습니다.
이는 삼국이 모두 당의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7백 년에 걸친 장구한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작파하고 삼한의 땅을 서로 차지하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과 수단이었음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당은 끝내 우리와 한편이 되었고,
이는 영명하신 선대왕께서 보위에 오르시기 훨씬 전부터 당에 숙위사로 지내시며
명성과 덕망을 쌓고 이세민과 자별한 친분을 나누신 탁월한 외교의 덕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제 양적이 이미 망한 뒤에는 당의 존재 또한 마땅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수레를 다 만들고 나면 연장을 손에서 놓는 것과 같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타고 다닌 말을 마구간에 넣어두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친당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일의 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이거나,
사사롭고 작은 이익으로 일국의 대사를 그르치는 간신배들이 틀림없습니다.
대저 6사9)와 6정10)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천하의 대세를 바로 읽고 성지(聖旨)를 충실히 받들면 6정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6사의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충신이었다가 뒤에 악신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과거에는 한낱 무명의 촌부였다가 홀연히 때를 만나 영웅이 되는 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존의 말은 막힘이 없이 계속되었다.
“지금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은 대개 여제 양적을 멸할 때 공이 많은 자들입니다.
하오나 그들의 책무는 이제 끝난 것 이옵고 앞으로 전하께서 찾을 신하들은 당과 일전을 벌이는 데
소임을 다할 젊고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수레를 만드는 연장과 성곽을 짓는 연장이 어찌 같을 수가 있을 것이며,
먼 길을 가면서 중간에 말을 갈아타는 것은 수상하거나 야박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월은 가고 인재는 끝없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신이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에 이르러보면 대개 책사들은 수십 가지 계책을 말하지만
그것을 듣고 군령을 내리는 것은 장수 한 사람의 일입니다. 대군을 통솔하는 장수가
뜻이 명확하면 사지에 가서도 능히 대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 조정에 이견이 분분하고 공론이 여러 갈래인 것은 전하께서
대각간의 일을 근심하느라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천존은 법민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아픈 곳을 찔렀다. 과연 싸움터에서 일생을 보내며
적의 수백 가지 계책을 몸으로 읽어온 그다운 예리함이었다.
“전하께서 친히 사사로움을 버리고 몸소 대의를 세우지 않으시면 신하들은 좀처럼
성지를 좇지 않을 것입니다.
전날 우리 군사가 황산벌에서 계백의 군사를 맞닥뜨렸을 때 흠순과 품일 양 장군이
그 자식들인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장렬히 목숨을 바치게 함으로써
사그라질 뻔한 아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준 일이 있었습니다.
만조의 백관들과 전군의 장수들에게 이와 같은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각오가 없이는
소국이 대국을 상대해 결코 승산이 없습니다. 반굴과 관창의 일을 생각한다면
지금 새털 같은 공으로 문벌이 높아져 오로지 당에 숙위 학생으로 가 있는 제 자식의 일 따위나
염려하는 자들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이내 짐작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시급히 성지를 굳건히 하시고 당과 벌일 일전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줄로 압니다.
지금의 형세로는 당과 대적하기가 어렵지만 인재를 발굴하고 준비를 착실히 한다면
과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올시다.
신의 나이 어느덧 팔순입니다. 모쪼록 근력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당과 싸우는 일이 있어
신이 마지막 무공을 세우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야 훗날 지하에 계신 선대왕을 뵈오면 그 근심하시는 바를 풀어드릴 것이며,
생전에 맡은 신의 소임을 다하였다고 떳떳이 아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법민은 노장 천존의 말에 돌연 가슴이 뭉클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5장 선전포고 3 (0) | 2014.12.02 |
---|---|
제35장 선전포고 2 (0) | 2014.12.02 |
제34장 안승 망명 11 (0) | 2014.11.30 |
제34장 안승 망명 10 (0) | 2014.11.30 |
제34장 안승 망명 9 (0) | 2014.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