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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선전포고 2

오늘의 쉼터 2014. 12. 2. 15:09

제35장 선전포고 2

 

 

 

그는 용좌에서 걸어 내려와 천존의 손을 덥석 그러쥐고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서불한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인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그예 통렬히 깨우치겠습니다!

장군께서는 과연 계림이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충신이십니다!

저는 이제야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명료하고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어찌 장군의 보배 같은 충고를 좇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친당파의 일로 꽤나 갈등이 심했던 법민은 통일 전쟁의 주역인 천존을 통해

당에 대항하는 자신의 정책이 결코 그르지 않다는 신념을 재차 확인했다.

천존은 어전을 물러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국론을 하나로 모으자면 불법의 신묘함에 의지하는 것도 좋은 방편입니다.

근래 법사 명랑(明朗)이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고 왔다 하니

그를 불러 물어보면 혹 민심을 다스릴 계책이 있을지도 모르겠나이다.”

법민은 천존의 진언을 받아들여 즉시 명랑을 수소문했다.

당에 유학하고 귀국한 법사 명랑은 민간에 신승(神僧)으로 이미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법민이 민심을 다스릴 계책을 묻자,

“도성의 낭산 남쪽 성지 신유림(神遊林)에 도량을 열면 됩니다.”

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법민은 괜히 절을 짓느라 공역을 일으키면 백성들의 고달픔이 가중되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명랑이 대답하기를,

“눈에 보이는 대찰을 짓는 것이 아니옵고 마음에 도량을 세우는 것이므로 거창한 공역이 필요 없습니다. 소승이 데리고 있는 시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니 대왕께서는 아무 근심을 마시옵소서.”

하므로 법민이 크게 기뻐하며,

“법사의 불력을 믿소.”

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명랑이 물러가자 법민은 죽지와 흠돌이 빼앗은 석성과 소부리벌 일대에

주(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소부리주 총관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매제 의관의 일이 있고 난 다음 한동안 멀리했던 강수를 다시 불러 설인귀가 보낸 서신을

내보였다.

“과인이 용문(龍門:설인귀의 고향)의 잡부 따위에게 이처럼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글귀를 받았는데

경의 소회는 어떠하오?”

근 1년 만에 보는 강수는 여전했다.

낡을 대로 낡아 올이 성긴 관복 아래로 여러 겹의 기운 누더기 속옷을 입고 한 뼘이나 치켜 들린

복두를 쓴 채로 법민이 내민 서찰을 훑어보던 그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설인귀 따위가 이처럼 상도를 벗어난 글로 대왕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은

낙양의 당주가 그에게 우리나라를 치도록 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평양은 고구려 다물군의 일로 설인귀가 평양성을 비울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 같은 글을 지어 보낸 것입니다.”

강수는 마치 사정을 본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선전포고요,

대당(對唐) 전쟁은 벌써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주가 설인귀에게 신라를 치도록 명했다면 요동에 나와 있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그와 같은 뜻이 이미 전해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당과 대전을 벌일 만한 형편이 아직은 아닙니다.

전쟁을 치르자면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 준비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예전에 없이 강수는 긴장하고 있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고 표정에는 사뭇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엿보였다.

강수가 그러니 법민도 덩달아 걱정이 되었다.

“군량과 마초를 말하는 것이오?

그거라면 과인이 따로 준비해둔 것이 있소.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군마와 무기도 넉넉히 마련을 해두었소.”

그러자 강수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대체 그게 무엇이오?”

법민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첫째는 성곽을 보수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성곽들은 국경의 일부만 빼고는 대개가 지은 지 오래되어

적의 침략을 받기라도 하면 병법을 쓰고 용병을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당은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들락거린 터라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도성 주변에도 손을 볼 데가 더러 있지만 접전이 예상되는 변방의 요소요소에도

신축하거나 증축할 성곽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당과 결전을 치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곽을 손보는 일은 아무리 바쁘게 서둘러도 한두 해는 족히 걸릴 일이 아니오?

더구나 그처럼 일시에 공역을 일으키자면 백성들의 불만도 불만이고

오히려 민심이 흉흉해질까 걱정이오.

그러잖아도 당의 침략을 걱정하는 백성들이 많아서 민심이 예사롭지 않소.”

“성곽을 신축하고 보수하는 일은 접전에 대비하는 방책도 되지만

일변으론 어수선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섭니다.

조정에서 앞날을 내다보고 빈틈없이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백성들은 반드시 대왕을 믿고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딴에는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또 준비할 일은 무엇이오?”

법민이 묻자 강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대왕께서는 신에게 사영에서 퇴각한 몇몇 신하들의 일을 말씀하시며

굳이 그들에게 벌을 주자고 주장한 까닭을 물으셨습니다.

그때 신은 중시께서 함께 계시므로 대답을 미루었습니다.

하오나 이제 그때 미룬 대답을 올리겠나이다.”

그것은 법민이 오랫동안 궁금해 하던 일이었다.

그 일로 법민은 혹시 강수가 갑작스레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되자

지나치게 오만해져서 분에 넘친 세도를 부리려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했었다.

물론 그 궁금증과 의심은 그때까지 풀리지 않고 법민의 마음속에

께름칙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게 사실이었다.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리다 보면 사례가 흔한 일이었다.

“신이 알기로 지금 조정의 수많은 신하 가운데 대왕의 뜻을

올바로 받들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백제나 고구려를 멸할 때는 만조가 한결같이 뜻을 합치고 힘을 모아

성지를 받들고 왕업을 보필하였지만 당에 대항하는 일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신하들은 그래도 나은 축입니다.

비록 전하의 위엄에 눌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불만하고 반대하는

친당의 무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당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자고로 전장은 백계(百計)가 난무하고 은밀한 궁리가 조석을 두고도 수십 번씩 바뀌는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그런데 만일 대업에 불복하는 자들이 내부에 있어 진영의 은밀함이 밖으로 새어나가고

계략이 적의 수중에 이른다면 무슨 수로 적을 물리칠 수 있겠나이까?

신이 그때 죄 주기를 극간한 사람들은 거의 친당의 뜻을 가진 자들로,

특히 국서이신 의관공 주변에는 그런 이가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조정에 그대로 있어서는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사직이 위태롭게 되면 당자들도 역적의 오명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이를 현명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오나 또한 친당파의 대부분은 전날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때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므로

죄인을 다루듯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은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잠시 물러나게 하였다가 뒷날 당을 물리치고 나면

다시 벼슬길을 열어주고자 그와 같은 계책을 내었던 것입니다.”

천리 앞을 내다보는 강수의 말에 법민은 잠시나마

그를 의심한 데 대해 깊은 죄책감과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사뭇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기를,

“그런데 경은 전날 수세를 한산주 총관에 임명하도록 과인에게 요청했고

그는 임지에 가서 반역을 꾀하고 당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소.

이것은 경이 수세를 잘못 본 것이오?”

하니 강수가,

“신은 수세를 잘못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서,

“물러나서 될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부득불 없애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신은 수세에게 반역할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일부러 웅진과 가까운 한산주 총관으로 천거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수세와 같은 자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생은 과연 하늘이 낸 선비다. 실로 심모원려가 아닐 수 없도다……”

법민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크게 무릎을 치자 강수가 연하여 말을 보탰다.

“친당의 뜻을 가진 장수와 관리들을 솎아내어 당분간

국사에 참례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하지만

새로운 인물을 뽑고 중용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시급합니다.

전하께서는 오로지 당과 일전을 벌이는 데 소임을 다할 새로운 인물들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조정에 적당한 직책을 새로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명을 바쳐 공을 세우도록 만드셔야 할 땝니다.

이 역시 한두 해는 족히 걸릴 어려운 공역입니다.

전쟁을 치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해야 할 일은 그런 것들입니다.”

“경의 말이 어찌 그토록 서불한 천존의 말씀과 똑같은가!”

법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전쟁이 이미 시작되고 설인귀의 선전포고까지 받은 마당이니

이거야말로 낭패가 아니오?

아아, 과인이 어리석어 공연히 경을 의심하고 멀리하는 바람에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였구려!”

그러자 강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다행히 북방의 일이 아직 어지러우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봐야겠지만

신이 계책과 궁리를 다해 당을 달래고 되도록 시일을 끌어보겠습니다.

전하께서도 마음을 굳건히 자십시오.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기자면 일전에 말씀드린 화전 양책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화친과 복종을 내세워 침략을 막고 당에 숙위 중인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안으로는 착실히 결전에 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신의 소견으로 반드시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잘만 하면 한두 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면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오?”

“웅진을 완전히 멸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웅진은 영원히 멸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웅진은 당의 교두보가 되어 대군의 왕래를 막기도 어려워집니다.

우선 죽지와 흠돌 장군을 한산주로 파견하고 신을 책사로 삼아주신다면

몇 달 안에 반드시 웅진을 멸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법민은 강수의 청을 당석에서 허락했다.

강수는 어명을 받고 떠나기에 앞서,

“전하께서는 설인귀의 서신에 답서를 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어 법민이 심드렁한 낯으로,

“그래야 하겠지만 분노로 손끝이 떨려 글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오.”

하니 강수가 웃으며,

“신이 한번 답서의 초를 잡아보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법민이 반색을 하다 말고,

“경은 곧 떠날 사람인데 언제 그럴 여유가 있겠소?”

하자 강수가 어디론가 갔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돌아오는데 손에는 서신 한 통이 쥐어져 있었다.

“신이 설인귀를 달래고 대략 그의 말에 반박하는 뜻을 밝혔는데 전하께서 읽어보시고

미진한 대목이 있거든 가필하십시오.”

법민은 그러마고 대답하고 강수가 떠난 뒤에 그가 주고 간 서신을 펼쳐보았더니

한달음에 갈겨쓴 듯한 장문의 글이 손 하나 댈 바 없는 명문장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목조목 당의 부당함을 따지고 은근히 그 처사를 비꼬며,

때로는 글자로 추켜세우면서도 문맥으로 빈정거리고, 구절로 칭송하면서도

행간으로 꾸짖는 것이 도무지 잠깐 동안에 지은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법민이 그 글을 읽고 어찌나 통쾌한지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다가 문득 탄복하기를,

“강수는 나의 심경을 외려 나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하니

홀연 섬뜩한 기분마저 드는구나.”

하고는 강수의 글에 다만 몇 글자만을 덧붙여 설인귀에게 보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문무왕의 답서다.

그러나 워낙이 장문이라 전문을 게재하지 못하고 책 뒤에 별도로 약간의 지면을 할애하니

나당 동맹의 허실을 보다 상세히 알고자 하는 독자는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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