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12. 흥정

오늘의 쉼터 2014. 12. 1. 16:02

◐ 흥정  

 

 

김원국은 다시 홍콩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강만철과 김칠성이 나와 있었다.
김원국의 뒤를 조웅남과 오함마가 따르고 있었다.
홍성철의 소식을 듣고 모두 달려온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쳤으나 그들은 이야 기를 나누지도 않챠다.
그들은 부하들이 끌고 온 차에 타고 오리엔트 호텔로 달렸다.
"형님, 성철이를 제가 간수를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김원국에게 강만철이 말했다.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오함마와 조웅남이 한세라의 도움을 받고 최정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한세라 가 처음에 장난감을 날라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바로 임영철 수사관에게
알려 준 것이 힌트가된 것이다.
그들은 최정호를 찾아회사를 덮쳤으나 이미 도주한 후였다.
그러나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고 조직에서도 찾고 있으니 곧 잡아 낼 것이었다.
박태운은 중간소매상이었다.
그는 소지하고 있던 마약과 함께 구속되었다.
강만철은 김원국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이중의 고통일 것이다.
장민애의 행방은 아직 알 수 얼었다.
위천산이 분융 납치했으나 그에게서 제의나 협상이 오지 않았다.
납치된 지 5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조직의 모든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홍성철까지 자책감에 뭇이겨 치고 들어가서 자살한 것이다.
위천산은 다시 집에 돌아왔으나 안심이 되지 않챠다.
 아래충은 부서진 기물들과 치우지 쟈은 핏자국으로 보기에도 끔쩍했다.
그리고 집으로 쳐들어온 사내가 홍성철 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난 위천산은 아연 했다.
마약 중독자 수용소를 랄출하여 단신으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위천산은 어떻게 해서든지 홍성철의 범행을 김원국이 시킨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홍성철은 면회금지된 수용소에서 탈주한 사내였다.
김원국이 시켰다고 할 근거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경찰에게 홍성철을 찾아달라고 수색신고까지 했던 것이다.
2충의 거실에 앉은 위천산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어쩐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천산의 계산대로라면 김원국·측은 설령 그가 납치한 것을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제의해 올 것을 기다라야 했다.
무조건 싸움을 걸었다가는 인질이 다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위천산은 인질석방 조건을 내일 아침에 그물에게 요구할 작정이었다.
그것을 여귀철과 충분히 상의해 두었다.
그런데 또 차질이 생겼다.
1층의 응접실에 남아 있던 여귀철이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가 의자를 집어 던져 유리창을 깨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더라면
응접실 안에서 여귀철과 함께 그 자신도 죽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흥성철은 지독한 놈이었다.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도 마지막엔 머리를 쏘아 자살해 버렸다.
"좋다. 해보자."
위천산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인터폰을 눌렀다.
"장지평에게 오라고 해라-"
아래충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하를 불렀다.
그를 김원국측에 보낼 예정이었다.
그들이 알고 홍성철을 보냈을지라도 어쨌든간에
누가 열쇠를 쥐고 있는가는 분명히 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기세를 제압 당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장지평은 육척 장신에 배짱이 두둑한사내였다.
위천산의 경호원 노릇을 10년 가깔게 해왔고 머릿속에 든 것도 제법 있었으므로
간부급 부하로 발탁되었다.
여귀철이 죽자 그가 김원국에게 가는 역할을 맡게 되자 우선은 공명심이 생겼다.
그리고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했다.
김원국의 약혼자를 납치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당장 중요한 문제는 여귀철 못지않게 자신의 위신을 드높여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과 두 번째로 위천산에게 신임을 받는 일이었다.
이 일만 잘 처리 되면 여귀철이 맡았던 측근 참모의 일도 맡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위천산이 자신을 발탁한 것이라고 믿었다.
장지평이 오리엔트 호텔로 들어서자 현관에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위천산이 보낸 사람이오?"
사내는 보스인 위천산의 이름 뒤에 '씨'도 '선생'도 붙이지 않았다.
물쾌하였으나 머리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장지평은 2명의 부하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으나 장지평에게는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호텔 투숙객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투숙객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투숙객들이 충마다에서 내려 15층에 이르렀을 때는 그들밖에 남지 않았다.
15층에서 내리자 그곳은 사무실이었다.
오고가는 사내들로 분주했다.
사내는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연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장지평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안은 널찍한 회의실 같았다.
길쭉한 나무책상이 놓여 있고 나무책상의 끝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책상의 양쪽에 가지런히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으므로
장지평은 왼쪽편의 의자 하나를 잡아당겨 앉았다.
부하들이 곁에 앉았다.
방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본 장지평은 놀라 입을 벌렸다.
곽도위였다.
같은 동료였던 그는 장지평의 얼굴을 보더니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말엄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단단한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와 드럼통 2개를 포개 놓은 듯한
사내가 들어와 양쪽 끝자리에 앉았다.
그의 뒤를 따라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들어와 끝자리에 앉았다.
짙은 눈샙 밑의 눈이 맑았다.
그가 힐끗 장지굉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위천산의 부하인가? 용건을 말해라."
앞쪽 끝에 앉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장지평에게 말했다.
그는 영어를 깼으므로 장지평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 역시 영어에는 익숙했다.
"인질석방 조건을 제의하겠다. "
그들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첫째, 지난 번 마약 강탈된 금액을 변상할 것, 금액은 홍콩 달러로 120만 달러다. "
"둘째, 이번 홍콩에서 탈취당한 마약 대금이 홍콩 달러로 1천 800만 달러다.
그 돈을 변상해야 한다. "
 "셋째, 홍콩의 이쪽 조직의 구역과 한국에 마약이 들어갈 수 있도록 협조할 것.
조건은 다른 조직과 같이한다. "
장지평은 말을 마치고 시선을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에게 돌렸다가
다시 김원국으로 보이는 끝자리의 사내에게 멈췄다.
그는 장지평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김원국이 물었다.
 장지평은 긴장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장지평이다. "
그는 턱을 내밀며 말했다. 김원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장지평, 위천산에게 전해라. 김원국은 거절한다. "
장지평의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김원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후유, "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장지평의 옆쪽 끝자리에 앉아 있던 거한이 내쉬는 숨소리였다.
어리둥절한 채 장지평이 자리에서 일어 섰다.
부하들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라."
강만철이 말했다.
장지평이 그를 바라보았다.
"앉으라고 말했잖아. 장지평, 앉아."
곽도위가 거칠게 말했다.
장지평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편님을 설득해 보겠다. 위천산에게 2, 3일 기다려 달라고 전해라."
강만철이 말했다.
"당신들의 럴스가 안 된다고 말했지 않는가? 그것으로 결정이 난 것 아닌가?"
장지평이 기세좋게 이야기하자 강만철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 이 자리에서 죽고 싶으냐?"
장지평은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에게 사지가 젠겨 죽고 싶으냐?"
강만철은 두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조웅남을 가리켰다.
"우리가 형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너회들은 1시간도 못 되어서 씨가 마를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느냐?"
"위천산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형님은 약혼자를 버리려고 하신다.
그러고 나면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한놈 한놈 찾아내서 사지를 토막낼 테니까."
강만철의 시선을 받던 장지평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우리가 형님을 설득시키겠다고. 기다리라고 말이다. "
장지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도 처음이었지만 이런 조직도 처음이었다.
보스는 자신의 여자를 버리려고 하는데 부하들이 기를 쓰고 가로막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곽도위가 옆에 있었다.
곽도위가 그를 보고 피식 웃었으나 왜 웃는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홍성철의 장례식에는 홍콩의 모든 보스들이 찾아왔다.
형주량, 조진량은 말할 것도 없고 원삼기와 진상주도 찾아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간부급 부하외· 수행원들로 장례식장은 살벌하면서도 북적거렸다.
빈 타오도 부하를 시켜 커다란 조화와 조의금을 보내왔다.
김원국은 상주의 자격으로 조문객에게 인사를 받고 있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형주량이 다가왔다.
그는 김원국 옆에 와 서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고인은 이름을 크게 남겼습니다. 그는 마약도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김원국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보스로서도 할일을 다한 것입니다. 그렇지 알습니까?"
김원국은 머리를 』1덕였다.
"고인의 생전에 친하게 지냈습니다. 평소 그는 형님을 존경하고 있었지요."
"마약에 빠지고 나서 이성을 찾았을 때 갈등이 심했을 것입니다. "
"저는 흥형이 리첸을 사랑했다고 믿습니다. 약 때문은 아닐 겁니다. "
"고맙소, 형 선생."
형주량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젠 마약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
김원국은 형주량을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때에는 충격을 받지만 곧 조직으로 되돌아가면 마약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었다.
조직의 중요한자금원이기 때문이다.
김원국은 찾아온 조문객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건장하고 험상궂은 남자들뿐이었다.
서로 적대시하는 조직들도 있었으므로 이곳이 장례식장만 아니라면
금방 총소리와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김원국은 형주량이 갑자기 리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궁금했다.
하긴 리첸은 그의 전 보스였던 해리슨의 정부였으니
그가 관심을 가질 법도 했다.
그렇지만 여자 한 사람 없는 살벌한 장례식이 그의 가슴에도 안차게 보인 것 같았다.
형주량이 자리로 돌아가자조진량이 다가왔다.
"김원국 대형, 홍형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그의 말투는 정중했다.
"고맙소, 조형."
"위천산 그 쥐새끼 같은 놈은 유리창을 깨고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유감입니다. "
그는 이제 빈 타오가 마약을 형주량에게만 공급시키고 있으므로 위천산과는 거래가 없었다.
"마약업자들은 모조리 없애야 합니다. "
김원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진량이 사라지자 서울에서 달려온 오함마가 다가와 물었다.
"형님, 화장터에 가시겠습니까?"
김원국은 머리를 저었다.
수용소는 마치 감옥같이 보였다.
그러나 감옥보다 더 무질서하고 더불결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치는 환자들의 눈빛은 모두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햐게 뚫린 의식 없는 짐승의 눈이 아니면 막 광기를 일으키려는 눈빛, 둘 중의 하나였다.
지나치는 간호사나 간호원들은 모두 지쳐 보였다.
김원국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감방같이 보이는 방으로 들어섰다.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이자 간호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형구가 문에 둥을 기대고 섰다.
김원국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리첸은 두 팔다리가 침대에 묶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는 어지럽게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깜박이지도 않고 김원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은 맑았다.
두어 개의 빨간 실핏줄이 흰 눈동자 위에 걸쳐 있었다.
볼이 여위기는 했으나 화장기 없는 피부는 아직도 매끄러워 보였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아름다웠다.
김원국은 그녀 옆에 앉았다.
"리첸, 나를 기억하나?"
"네, 김 선생님."
그녀가 맑은 목청으로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군 "
"죄송해요, 김 선생님."
김원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왜?"
"제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요."
리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리첸."
"약 때문에. 탐 람은 우리가 먹을 약을 하루 분밖에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매일 물어 볼 것을 시키고 나서야 약을 주었어요."
그녀는 아이가 엄마한테 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이와 같이 병원에 가기로 했어요.나으면 절 방송국에 다시 출연시켜 준다고 했어요."
"우리 그인 지금도 치료받고 있나요?"
"이제 우리가 나으면 남들처럼 살 거예요,
전 그이를 이용한 것이 아니에요.
그일 만나시면 제가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전해 주세요."
"그러지, "
리첸은 값자기 숨을 헐떡였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두 팔과 다
리를 심하게 떨었다.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김원국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형구가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곧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김원국의 등을 밀었다.
김원국은 수용소를 나왔다.
밖에 세워 둔 차에 타려던 그는 잠시 수용소를 바라보았다.
장민애의 얼굴과 리첸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눈앞이 흐려졌다.
리첸에게는 홍성철이 살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무리 기억이 무뎌지고 의식이 죽어 간다고 해도
그들의 처절한 사랑은 남을 것이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두 배로 남을 것이다.
그러자 홍성철은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원국은 차에 올랐다.
그리고 문득 장민애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았다.
"그 자식은 총을 열 몇 방을 맞고도 제 손으로 머리를 쏘아 죽었어."
강만철은 대취했다.
조웅남과 시합이나 하듯이 양주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자살해 버렸단 말이다. 그놈들의 총알이 저를 못 죽이니까 자살을 했어. 응, 응."
강만철은 응응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조웅남이 꿀컥이며 양주병을 거꾸로 세워들고 마시고는 빈병을 내려 놓았다
"아녀, 가짠혀서 그런 거여."
오함마와 김칠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성철이 가가 건방진 디가 있었거등.

 "너는 씨발놈아 입 닥쳐!"
갑자기 강만철이 고함을 질렀다.

조웅남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 돼지 2마리 합친 것 같은 놈아. 너는 성철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놈이야. 이 새끼야!"
강만철이 악을 쓰자 의외로 조웅남은 잠자코 있었다.

조웅남은 언젠가 강만철에게 마약에 빠진 홍성철을 잔뜩 욕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양쪽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김원국이 그들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강만철은 소파에 자빠져 있었다.

김칠성은 소파 뒤rT 큰 자로 누워 있었고,오함마는 자빠뜨린 의자를 베고 코를 골았다.

조웅남만이 똑바로 앉아 술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원국이 다가가자 조웅남이 술병을 내밀었다.

김원국이 술병을 받아 반쯤 남은 양주를 병째로 마셨다.

술병을 내려놓자 조웅남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님, 성철이한티 미안혀서 어쩐디야?"
그러고는 어깨를 들썩이다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참다못한 김원국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란한 울음소리에 오함마가 깼고 김칠성도 따라 일어났다.

강만철도 머리를 들었다.

김원국은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쉬 거라."
문을 열고 나가는 김원국을 오함마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장민애는 2층의 발코니에 서서 검푸른 나무숲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쪽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밀림은 울타리처럼 저택을 에워싸고 있었다.

헬리콥터로 끝없이 펼쳐진 밀림 위를 비행해 이곳으로 왔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아래쪽에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밀림 속의 널따란 공터 위에 세워진 이 저택에 도착한 것은 3일 전이었다.
5일 동안 배와 비행기에 시달린 장민애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움과불안이 절망과체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김원국이 찾아내 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를 버티게 하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달려가는 것 같던 배와 헬리콥터는 점점 김원국과 멀리 떨어지고 있다는

압박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은 홍콩도 아니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려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장민애는 그녀를 바라보고 선 40대의 사내를 보았다.

검은 얼굴에 검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내는 저택의 주인 같아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서서 그는 차가운 눈으로 장민애를 훌어보았다.
"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당신은 내 손님이 되었소."
그는 기진맥진한 그녀를 바라보더니 부하들에게 데려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장민애는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침대가 안쪽에 놓여져 있었고 문 옆에 화장실과 목욕탕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장민애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서울을 떠난 지 며칠이 되었는가 다시 헤아려 보았다.

오늘까지 8일째 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충격에 대한 반응은 무뎌지고 있었으나

그만큼 김원국이 자신을 찾아낼 시간이 많았을 것이라는 끈질긴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8일이면 7일보다 시간이 더 많았다.

내일이 되면 오늘보다 그에게 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문이 철커덕거렸다.

장민애는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저택의 주인이 들어섰다.

그는 문앓에 서서 그녀에게 잠깐 시선을 주더니 방안을 돌아보았다.

그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장민애는 긴장하고 있었다.

식사 때가 되면 사내가 음식을 가져왔을'뿐으로 이제까지 이야기를 나눈사람도 없었다.

방안에 텔레비전이 있었으나 화면상태가 좋지 않아 알아듣지도 못한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사내는 다가와 장민애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지내기가 어떤가?"
그가 영어로 물었다.

장민애는 잠자코 있었다.
"난 빈 타오라고 하는 사업가야."
그녀의 얼굴을 뚫어질듯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장민애는 얼굴을 돌렸다.
"김원국 씨도 사업가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내 친구가 그에게 사업적인 제의를 하려고 당신을 납치한 거야.

물론 나도 그 일에 찬성했지."
"김원국을 사랑하는가?"
장민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얼굴을 돌렸다.
"결혼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이야?"
무슨 의도로 물어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녀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대답해서 이 남자가 도와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것 봐,김원국이는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야.

쉽게 말해서 당신을 데려가지 않겠다는 거지. 당신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
장민애는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빈 타오를 쏘아보았다.
"거짓말 말아요."
빈 타오가 싱긋 웃었다.
"내가 거짓말 할 이유가 있겠나? 생각해 봐."
"비정한 사내로군. 당신의 약혼자는 말이야. 나도 뜻밖이야."
장민애는 앞에 앉은 빈 타오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의 말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오는것 같았다.
"거짓말 말아요."
안간힘을쓰면서 다시 말했으나 이젠 자신의 목소리도 자기 것이 아
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던 거야. 그를 사랑하고, 결혼할 작정이었냐고 말이야.

이해가 되지 않아? 아주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 것인데. 아니, 양보도 아니야.

그에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인데도 그는 쓸데없는 자쫀심파 고집을 부리고 있어."
"그래, 조직의 원칙과 명예를 위한다고 그러더군."
"그것을 위해서는 당신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장민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감에 빠진 자신의 끝툴을 그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이봐, 여기다 녹음기를 두고 가겠어. 당신의 약혼자에게 이야기를 해.

나도 사람이고 김원국이도 사람이야. 당신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말해. 당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란 말이야.

오늘 밤까지 녹음해 둬. 내일 비행기로 보낼 테니까."
빈 타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국말로 해 우리도 한국인 통역이 있으니까."
그는 싱긋 웃었다.

장민애는 얼굴을 감싼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빈 타오는 장민애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지나치던 부하들이 인사를 하였으나 받지도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돌멩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무거웠고 편치 않았다.
빈 타오는 홍콩에 있는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2시간쯤 전이었다.

어젯밤 위천산 집이 홍성철의 습격을 받아 쑥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빈 타오가 알고 있던 여귀철도 총에 맞아 죽고 홍성철도 자살했다 는 보고였다.

홍성철이 마약 중독자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빈 타오는 아연했다.

그가 탈출해서 위천산을 친 것이다.

그를 중독자로 만들고 이용한 것은 빈 타오였다.

그래서 그들이 탐 람에게 보복한 것이라고 빈 타오는 믿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홍콩에 있었다면 그의 표적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서 1시간쯤후에 위천산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원국이 제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빈 타오는 상황이 예상밖의 최악의 상태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완전한 거부요?"
빈 타오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예, 그렇지만."
위천산이 말끝을 흐렸다.

그도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뭐요?"
"김원국의 부하들이, 강만철 같은 보스들이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김원국을 설득해 보겠다고 합니다. "
빈 타오도 강만철을 알고 있었다.

눈치로 보아서 위천산은 강만철의 설득작업을 기다릴 것 같았다.

어차피 그와는 손발을 맞춰야 하므로 빈 타오는 전화를 끊고 장민애를 찾아간 것이다.

그러자 녹음 데이프에 실린 내용이 어떤 것이건 간에 김원국이나 그의 부하들에게

충격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동안 김원국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강만철과 조웅남이 여러 번 방에 들어갔으나 혼자 있고 싶다면서 그들을 돌려 보냈다.

강만철이 위천산과 타협하는 절충안을 내 놓았다가 호된 질책을 받고 방을 나왔다.

강만철과 조웅남도 위천산의 석방조건이라는 것이 일순간에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애꿎은 술만 마셨다.
저녁 6시쯤 되었을 때 김칠성이 찾아왔다.

이틀 동안 그는 보이지 않았다.
"형님, 나하고 같이 나팜시다. "
김칠성의 옆에는 곽도위가 서 있었다.
"왜?"
짜증스럽게 조웅남이 물었다.
"사람 잡으러 잠시다. 곽도위 말로는 위천산의 부하의 화교 한 놈이
그 사건 일어나기 전에 서울로 출발했답니다.

그놈이 납치한 것이 틀 림없다고 합니다. 그놈이 돌아왔다고 해요."
조웅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자의자가뒤로 넘어졌다.

그는서둘러 그들의 앞장을 섰다.

승용차는 위천산의 집을 나와 넓은 차도로 들어서자 부쩍 속력을 냈다.

 1 1시가 넘어서인지 변두리인 해변도로는 한산했다.
어제 홍콩에 도착한 광여림은 그둥안 위천산의 집이 습격당하고 인질석방

조건을 거부한 김원국과의 상황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은 할일을 다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일주일 동안 배를 타고 시달렸으므로 아직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 푹 쉬고 싶었다.

그는 백 미러로 뒤를 바라보았다.
뒤를 따라오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원국 일당은 자신이 누군지도 자신이 그 여자를 납치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가 인질을 잡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놈들에게 통보힌으므로 만일

그들이 일을 벌인다면 인질에게 영향이 갈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해변도로를 달리던 차는 우회전하고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좌우는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서 밤이 늦었으나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광여림은 속력을 줄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가 눈앞에 보였다.
김칠성은 아파트 12층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아파트의 좌측에 붙어 있어서 내린 사람들은 우측으로 뻗어나간

통로를 타고 제 집을 찾아가야 했다.

광여림의 집이 1205호였으므로 엘리 베이터로부터 5번째 집이었다.
김칠성은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곽도위가 차 안에 있었다. 광여림의 얼굴을 알고 있으므로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신호를 해주기로 했다.

조웅남은 엘리베이터 옆쪽의 비상계단에 앉아 있었다.
아래쪽에서 끊임없이 차량의 소음이 들리고 있었으나 늦은 밤이어서 인지
아파트는 조용했다.

집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밖으로 울려나오지 않아서일 것이다.
김칠성이 등을 기대고 있던 창가에서 몸을 몌었다.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오고 2에 불이 켜졌다.

 2층에 올라온 것이다.

그러자 빵, 빵, 빵,빵, 하고 4번의 경적이 울렸다.

곽도위의 신호였다.

김칠성아 긴장하여 조웅남 옆으로 다가왔다.

조웅남이 부스스 일어났다.

김칠성은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았다.

6에서 한번 멈추었다가 그대로 올라오더니 12에서 멈췄다.

그는 옆으로 몸을 비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한 사내가 그들에게 둥을 보이며 걸어나왔다.

김칠성이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에 놀란 듯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크게 떠진 눈과 약간 벌린 입이 보였다.

그리고 한손이 재빠르게 가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칠성의 주먹이 그의 관자놀이를 쳤다.

퍽 소리가 들렸으나 사내는 비틀거리면서도 가슴에서 꺼낸 권총을 놓치지 알았다.

다시 김칠성의 발길이 그의 아랫배를 차올렸다.

권총을 떨어뜨리면서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악문 이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웅남이 다가왔다.

땅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던 조웅남이 생각난 듯이 몸을 일으키면서
주먹을 휘둘러 그의 턱을 쳤다.

사내는 입을 쩍 벌리면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원국은 들어서는 강만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 조웅남과 김칠성이 들어왔다.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들은 말없이 앞자리에 앉았다.
"형님, 형수씨는 태국의 빈 타오가 데리고 있습니다. "
강만철이 입을 열었다.
"공해상에서 빈 타오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아까 웅남이하고 칠성이가 납치했던 부하 한 놈을 잡아 자백을 받아 낸 겁니다.

그놈은 화교 였습니다. "
김원국이 조웅남을 바라보았다.
"빈 타오의 농장에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태국 북부에 있답니다. "
조웅남은 잠자코 있었으나 김칠성이 대답했다.
"결국은 빈 타오와 위천산이가 같이 일을 꾸민 겁니다. "
그령게 말하는 강만철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장민애가 홍콩도 아니고 태국의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자

난감한모양이었다.
"알았다. 그런데 그놈을 잡아서 어떻게 했니?"
김원국이 김칠성에게 물었다.
"실은 그것이 문젭니다. "
강만철이 다시 나섰다.
"어떻게 손을 대다 보니까 죽었습니다. "
"그래서 일단 바다에다 던져 넣었습니다만, 저쪽에서도 곧 알아차릴 것 같은데요."
납치한 당사자가 조웅남을'만났으니 김원국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필요없다. "
김원국이 자르듯 말했다.
"그리고 웅남이는 오늘 아침에 서울로 돌아가거라."
"여기서 미련을 가지고 있는 듯이 놈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 "
"앞으로 내 허락없이 개인행동을 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땐 나하고는 남이다. "
모두들 잠자코 있었으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김칠성은 머리를 숙이고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만철은 김원국을 바라보았으나 입을 꾹 다물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조웅남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끝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다.
"마약으로 성철이 하나를 죽였으면 됐다. 이제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어.

그놈들에게 굴복해 조건을 들어줄 수도 없다. "
김원국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 감정은 잘 안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너희들이 기둥이야.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아라."
김원국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님."
강만철이 김원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는 섬뜩해졌다.

김원국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정신차려. 감정에 쉽쓸리지 마라."
그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날카로웠다.

조웅남과 김칠성이 그를 바라 보았다.
"이건 내 일이다. 내가 비록 큰형님이지만 내 약혼자하고 조직을 바꿀 수는 없다. "
"너희들이 목숨을 바쳐서 지켜 내고 쌓아 올린 조직의 명예다.

이동수, 오유철, 홍성철, 걔들의 피를 더럽게 만들 수는 없다. "
"웅남이는 아침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가거라. 함마 혼자 어려울 거다. "
"만철이 너는 칠성이하고 여기 일을 수습해야 할 테고,저놈들과의
공식적인 협상은 있을 수 없다. 모두 끝났다. "
"모두 돌아가거라. 나는 쉬겠다. "
김원국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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