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안승 망명 9
백제 구토를 아우른 뒤에 계림의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선 곧 당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횡행하여 민심이 무척 어지러웠다.
실제로 당은 금성에 사신을 보내 당장 백제 땅을 도독부에 반환하지 않으면 대란을 겪을 거라고
협박하며 나왔다.
법민은 부여융이 먼저 회맹을 어겼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낸 거라고 버텼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일변 앞일이 걱정스러운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이미 빼앗은 백제 땅을 되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겨울, 하늘에서 토성(土星)이 달을 범하고 금성에선 지진이 일어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이 무렵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잘 다독거려놓은 왜국(倭國)에서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고치겠다며
허락을 구하였다.
법민이 왜국 사신을 만나,
“일본이라니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냐?”
하자 왜국 사신이 말하기를,
“계림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해가 돋는 곳이라 그렇게 지었을 뿐입니다.”
하고는 아울러 본국 백제와 완전히 결별하고 절연할 뜻을 밝혀왔으므로 법민도 크게 흡족하여
이를 쾌히 허락하였는데, 그 사신이 영객부에 머무는 동안 아우 지경이 병을 얻어
갑자기 자리에 눕게 되었다.
중신들은 왜국 사신한테서 풍토병이 옮았다고 쑥덕거렸다.
당나라를 두려워한 일부 신하들은 당에 불복한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도망가서 살고 있는
왜국과 우호하여 지내는 일도 과히 탐탁찮게 여겼다.
법민에게는 막상 외적의 침입보다도 나라 안의 이러한 분위기가 한결 근심을 더하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묵과할 수 없는 사건 하나가 또 생겼으니
한산주 총관으로 갔던 수세가 웅진의 부여융과 내통하여 당나라로 도망가려 한 일이
사전에 발각된 것이었다.
법민은 기회를 보아 마지막 남은 부성 일대를 치기 위해 접경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부여융과 흑치상지를 압박하는 전술을 썼는데, 친당파의 한 사람인 수세는
자신이 그 일의 선봉을 맡게 된 것을 늘 불만하여 임무를 태만히 하였다.
이에 한성 속현의 태수와 현령들이 왕에게 장계를 올려 수세의 태만함을 고변하자
수세는 일신을 도모하는 길은 당으로 달아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
그는 우선 금성에 있던 지친들을 모두 한성으로 옮기고 부여융에게 은밀히 서찰을 보내
내통할 것을 말하니 부여융이 수세의 말을 믿지 못 하겠다 하고 한성을 들어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수세가 혼자서는 일이 어려운 것을 알고 찾아간 사람이 한성 속현에 흩어져 살던 김진주의 족친들이었다.
백제를 멸할 때 태종 대왕을 도와 병부령의 직책을 수행한 진주가 아우 진흠과 함께 죽고 그 족친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하자 일각에서는 기강을 잡으려는 신왕의 처사가 과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고,
법민 자신도 그 뒤로 두고두고 마음 아파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변고 가운데 용케 살아남은 이가
진주의 아들 풍훈(風訓)을 비롯한 몇몇 종제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좋기로 이름난 풍훈은 당나라 국학에 입학하여 숙위 학생으로 머물고 있던 터라
화를 면했고, 그 종제들은 사방 각지에 흩어져 살던 덕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수세가 진주의 종제들이 한성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는 은밀히 찾아가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니
그러잖아도 법민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이들로선 마다할 턱이 없어,
“우리가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속이며 마소처럼 산지가 이미 오래요.
풍훈이 아직 당나라에 있으니 도독부에 공을 세우고 당으로 가면 여기서 짐승같이 사는 것보다는
백 번 나으리다.”
하며 기꺼이 동조할 뜻을 밝혔다.
진주의 종제들이 진주를 닮아 하나같이 기운들이 좋고 몸들이 날렵했다.
수세가 이들과 더불어 역모를 꾀하고 속현의 태수와 현령 가운데 뜻을 함께할 자들을
은밀히 알아보았는데, 이천현(利川縣)에 살던 진주의 종제 하나가 자신과 친분이 있던
현령 무태(武台)라는 자를 만나서 은근히 속마음을 떠보았더니 무태가 대번 안색이 개자하여,
“계림이 망하는 것은 비조즉석이네.
당으로 도망하여 살 수만 있다면 이까짓 현령 자리가 무에 그리 대수야!”
하며 찬동하는 소리를 듣고는 수세와 모의했던 바를 안심하고 털어놓게 되었다.
사정을 알고 난 무태가 밤중에 가만히 그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나는 그간 진주, 진흠 형제를 참수한 대왕의 처사를 내 나름으론 일견 과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아 그 푸네기들을 푸네기인 줄 알고서도 가까이 지내며
철마다 의식을 돌보아주었다.
그런데 이제 듣자니 이들이 총관 수세와 역모를 꾸민다고 한다.
내 비록 변방의 일개 현을 다스리고 있는 처지이나 어찌 나라에 반역하는
무리를 보고도 이를 용납하겠느냐?
너는 당장 금성으로 달려가 네 외숙을 찾아뵙고 이 사실을 낱낱이 고하여
윗 전으로 하여금 시급히 대책을 세우도록 하라.”
무태의 아들이 지체 없이 말을 달려 찾아간 곳이 병부대감 김보가(金寶嘉)의 집이었다.
병부에서 수군의 일을 맡아보던 충신 보가가 조카의 말에 기겁하여 당장 어전에 고하자
법민은 파진찬 흠돌을 불러 보가가 아뢴 내용을 말하고,
“아무래도 사돈이 가야겠소.
가시거든 무턱대고 처리하지 말고 자초지종을 알아본 연후에 죄가 있을 때만 목을 베시오.”
하고 당부하였다.
흠돌은 딸이 태자 정명의 비로 간택되어 임금과는 사돈지간이었고,
그 자신 9장수 가운데 하나로 무예와 용맹이 뛰어났으나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성질이 완악스럽고 급하여 물불을 가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가서 수세를 만나 속속들이 사정을 다 알아보고 빈틈없이 처리를 하겠습니다요.”
욱둥이 흠돌이 대답은 차돌같이 하고서 그 길로 한성까지 말을 달려갔는데,
가는 길에 벌써 칼집을 어루만지고 장광도를 빼었다가 꽂았다가 해가며
수세를 만나면 어디를 쳐서 죽일까,
생각이 온통 거기에만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흠돌을 보자 수세는 내심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시침을 뚝 떼고서,
“장군께서 이 벽지에 어인 일이십니까?”
하며 물었더니 흠돌이 성큼성큼 들어와 수세 앞에 턱하니 버티고 서서는,
“내 한 가지만 물어봄세.”
하고는 이어,
“그래 당에는 언제 가는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자실 것도 없이 대뜸 묻는 소리가 그러했다.
수세가 너무도 황당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섰다가,
“도, 도대체 무슨 소리요?”
시인을 하면 목부터 칠 것만 같아서 생판 모르쇠로 나왔더니 흠돌이 시뜻이 웃고서,
“역모를 꾸미려면 끝까지 모르게 해야지 발각이 나면 이렇게 되는 게야.”
말을 마치자 칼집에서 장광도를 뽑아 순식간에 수세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수세의 목을 들고 나오며,
“아니 땐 아궁이에 연기가 날 리 있나? 벌써 그런 소문이 돌면 죄 사실인 게지.”
하고는 곧장 관사의 내실로 뛰어들어 그 식솔들을 모조리 결박하고 부총관 선원(仙元)을 불렀다.
“너는 역모를 알았더냐, 몰랐더냐?”
흠돌이 모질게 닦달하자 젊은 장수 선원은 백변한 안색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총관이 무엇이 답답하여 역모를 꾸몄답디까?”
하며 반문하는데 그 태도며 표정이 워낙이 진솔해 의심할 데가 없었다.
“네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지만 어찌 조석으로 면대하는 자가 흉계를 벌이고 있는 줄도 몰랐더란 말이냐!”
흠돌의 책망에 선원이 자신은 총관의 명으로 접경 순시를 다녀온 지
불과 이틀밖에는 되지 않았노라 하고,
“하기는 얼마 전에 금성의 일문이란 일문은 모조리 한산주로 데려와서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설마 역모를 꾀할 줄은 짐작도 못했나이다! 어찌 모시는 상관을 그런 쪽으로 의심하오리까?”
하였다.
흠돌은 선원에게 수세의 일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 명하고 자신은 이천현 현령을 찾아가
내친 김에 진주의 종제들까지 한꺼번에 요절을 내었다.
뒷날 흠돌이 한성을 선원에게 맡기고 떠나는데,
참수한 예닐곱 개의 목을 무슨 치장처럼 말안장에 주렁주렁 매달고
그 뒤로는 수세의 일문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라에 묶어 따르도록 하여서
목을 한 자나 뺀 40여 명의 행차가 실로 웃지못할 가관이었다.
흠돌은 금성에 와서 법민을 알현하고,
“신이 가서 샅샅이 내막을 적간하였더니 모두가 사실이었나이다.”
외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니 법민이 수고했노라
치사를 톡톡히 하고는 유사에 명하여 잡아온 수세의 일문들을 모두 천민으로 만들었다.
수세의 반역 사건은 법민으로 하여금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절박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그는 득병한 아우 지경 대신 한집안이나 다를 바 없는 알천의 아들 예원을 중시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성 남쪽을 공격하였다.
위급함에 빠진 부여융은 재차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우선 급한 대로 5천여 명의 원군을 웅진으로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소식은 때마침 인문을 만나러 낙양에 들렀던 유학승 의상(義湘)을 통해 당군보다
한발 앞서 금성에 전해졌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을 은사로 10년간 화엄가(華嚴家)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득도한 의상은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세 번째 조사에 등극한 터라
당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덕택에 당조의 일을 훤히 꿰뚫게 된 의상은 당주와 무후가 곧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휩쓸어버리려 한다는 계획을 듣자 부랴부랴 낙양으로 인문을 찾아가
고국의 일을 의논하였던 것인데, 만나자마자 인문이 먼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아직까지는 대군을 움직일 형편이 아니라서 다소 여유가 있지만 당장 군사 5천을 내어
백제부터 구원한다고 하니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자 외국의 유학승으로 화엄종의 종정에까지 오른 눈부신 성취를
당석에서 헌신짝처럼 내던지며,
“소승이 가리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국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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