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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안승 망명 5

오늘의 쉼터 2014. 11. 29. 21:45

제34장 안승 망명 5

 

 

 

뒷날 날이 밝을 무렵부터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관청 뒤편 공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중식 때까지 1천여 호, 4천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운집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렇게 되자 검모잠도 그들을 버려두고 해포로 되돌아가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강서향의 주민들은 대개가 부녀자와 노약자들이었다.

거기 비하면 해포에는 자신 말고도 여러 장수들이 있었으므로 배가 마련되면 어렵잖게

서해로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고심 끝에 그는 강서향 주민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소삼을 볼모로 삼아 주민들을 인솔하고 갯가로 나갔다.

강서향 서남쪽 갯가에는 곽대봉의 원군들이 타고 온 선박 1백여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로 천행은 배를 지키는 당군의 숫자가 고작 30명 안팎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검모잠이 홀로 말을 타고 나가려 하자 이택이 황급히 붙잡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배를 빼앗아야 타고 나갈 게 아니오?”

“장군 혼자서 저 많은 군사를 상대하려는 게요?”

“그렇소.”

“차라리 마가놈을 내세워 꾀를 써보는 게 어떠하오?”

“염려 마오. 저 정도쯤은 말로 하는 것보다 칼로 해결하는 것이 한결 더 빠르고 오히려 덜 번거롭소.”

검모잠은 불안해하는 주민들의 시선을 등에 지고 당군들에게 다가가 책임자를 보자고 청하였다.

곽대봉을 따라왔던 당군 장수가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오니 검모잠이 대뜸 마상에서 일렀다.

“우리가 이 배들을 좀 가져가야겠다.”

“너는 누군데 감히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당군 장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검모잠은 그런 당군 장수를 향해 다짜고짜 칼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순순히 배를 내놓아라!

저항하면 오직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놈아, 너는 대관절 무엇을 믿고 그처럼 꼴사납게 까부느냐!”

당군 장수라고 질 턱이 없었다.

그는 단기필마로 나타난 검모잠을 얕보고 느긋하게 칼을 뽑아 응수하였다.

그러나 곽대봉의 부장 따위가 검모잠의 상대일 수는 없었다.

양인이 칼날을 세워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단 1합의 교전이 있었을 뿐인데 당군 장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몸이 두 동강으로 끊어져 말꼬리 부근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군 30여 명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예삿놈이 아니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그들은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저마다 손에 무기를 찾아들고 순번을 다투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또한 혼비백산한 졸개들의 체계 없는 창 칼질에 지나지 않았다.

검모잠은 실로 모처럼 자신의 화려한 칼 솜씨를 자랑하며 눈 깜짝할 사이

당군 30명을 모조리 죽여 개펄에 처박아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주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자

이택을 비롯한 강서향 주민들은 혀를 내두르며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쳐댔다.

검모잠은 그들을 1백여 척의 선박에 나누어 태우고 돛을 올려 해포 쪽으로 북향했다.

배가 육지를 떠난 직후 그는 끌고 온 마소삼을 갑판 위로 불러내었다.

“나는 혹시 너를 써먹을 데가 있을까 하여 데리고 왔더니 그야말로 무용지물이구나.”

포승에 묶여 끌려나온 마소삼은 검모잠의 말투며 표정에서 새삼 위협을 느꼈다.

그는 기겁을 하며 다시금 눈물을 질금거렸다.

“왜 쓸 곳이 없겠습니까?

소인은 본래 회남(淮南)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배를 타서 노를 귀신같이 젓습니다.

장군께서 가시는 곳까지 사력을 다해 뫼시겠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글쎄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느냐만 너의 처리는 내 소관이 아니니 딱하구나.

자고로 벼슬아치란 백성들의 심판을 받게 마련이니

너의 생사 또한 강서향 주민들의 손에 달렸을 뿐이다.”

말을 마치자 이택에게 말하여 동승한 주민들에게 조리돌림을 시켰더니

미처 남자들이 나서기도 전에 마가한테 몸을 망친 여인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순식간에 숨통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원한에 사무친 주민들은 이미 절명한 마소삼이를 밟고 할퀴고 짓이겨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곤죽을 만들고는 웬만큼 분을 풀고 나자

그 처참한 시신을 바다 한가운데 던져버리고 말았다.

한편 검모잠 일행이 해포 근처에 이르렀을 때

안승도 궁모성 주민 3천 호를 이끌고 막 육지를 빠져나왔다.

검모잠은 무사히 해포를 빠져나온 안승의 배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안승에게 문후를 여쭙고 1천여 호의 강서향 주민들을 데려온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안승이 탄 배로 건너갔다.

“무사하셨구려, 장군!”

검모잠을 본 안승도 눈시울을 붉히며 크게 반가워했다.

“신에게 약간의 사정이 생겨 육로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로 나왔습니다.

전하께서는 별고 없으셨는지요?”

검모잠이 허리를 굽혀 안부를 묻자 안승이 돌연 처연한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장군이라도 무사하니 다행이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챈 검모잠이 주변을 살펴보니

다식이 홀로 안승의 곁에 시립하여 있을 뿐 나머지 장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검모잠이 다식을 향해 묻자 그 역시 침통한 낯으로,

“장군께서 떠나신 뒤에 당군의 습격을 받아 나머지 장군들은 모두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서 해포에서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참변의 시발은 음직의 처였다.

음직의 처는 미색의 낯선 여인이 나타나 하룻밤을 묵고 간 뒤로 음직이 당군의 눈을 피해

배를 수리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자 이를 남편이 딴 여자와 눈이 맞아 어디론가 달아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그는 음직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근처의 친정으로 달려가서 하소연을 하였는데,

친정 오라비 중에는 전날 음직이 해포의 수군들을 훈련시킬 적에

그 밑에서 감독의 일을 맡아보던 선일(詵日)이라는 자가 있었다.

선일이 음직보다 나이도 서너 살 아래이고 인품이며 바탕도 보잘것없는 자였으나

오직 매제 하나 잘 둔 덕택으로 나라의 녹까지 받으며 지냈다.

그럼에도 늘 저는 천하를 움직일 비상한 영걸인데 손아래 음직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노라

불평하고 날이 갈수록 직무를 태만히 하니 하루는 음직이 선일을 꾸짖으며,

“공과 사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는 자가 무슨 자격으로 녹봉을 받는단 말이냐?”

크게 호통을 친 일이 있었다.

선일이 이때부터 음직을 원수처럼 여겨 마음에 앙심을 품고 지내다가 나라가 망하자

식구들에게 말하기를,

“음직과 같은 놈이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일생지대사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힘없는 백성들한테야 그게 그거지.

또 누가 아나? 오히려 앞으론 더 크게 출세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시국 품평까지 곁들였는데,

그 뒤로 당나라 관리들이 와서 고구려 사람 중에 당에 협력할 자를 구하게 되자

전후불계하고 달려가 미관말직 하나를 얻어 찼다.

그가 세상이 바뀐 후로 도리어 살판이라도 난 듯이 설쳐댄 이면에는 음직을 이기고

누르려는 마음이 제일 컸다.

하루는 당나라 관복을 턱하니 차려입고 누이동생의 집을 찾아와서,

“내 전날에는 자네의 밑에서 호령소리를 들어가며 비참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덕을 좀 베풀고자 하니 어떤가, 내 밑에 와서 잡무나 거들지 않을 텐가?”

설만히 눈알에 흰 창을 드러내고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잖아도 망국지통으로 하루하루가 생지옥과 같던 음직이 그 꼴을 보자

그만 분기를 참지 못하고,

“예끼, 이 빌어먹을 놈아!”

다짜고짜 주먹으로 상판을 몇 대 후려친 뒤에,

“다시는 내 집에 얼씬거리지도 말아라!”

하며 내쫓으니 봉변당한 선일이 집에 돌아와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복수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 선일에게 누이동생의 하소연은 치려는 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격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놈이 반드시 무슨 일을 꾸밀 줄 알았다!”

선일은 제 누이를 보고 큰소리를 쳤다.

“은혜를 베풀고자 찾아간 나를 주먹질로 대접한 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놈이 평소 너와 우리 식구를 어찌 생각하는지 잘 알 게 아니냐?

네년도 일찌감치 정신을 차려라!”

그리고는 당장 해포현 현령을 찾아가 음직의 반역을 본 듯이 고변하자

현령이 당석에서 현군들을 풀어 일변으로는 외성 밖을 규찰하고 일변으로는

음직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안승 일행이 은둔하던 외성 밖 야산 둔덕이 갑자기 당군의 기습을 받게 된 경위는 그러했다.

하지만 음직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해포의 장정 5백여 명을 동원해 자신을 잡으려고 나타난 현군들과 싸우는 한편

수리한 선박을 끌고 나와 물에 띄우고 외성 밖의 안승에게도 사람을 보내 시급히 갯가로 나오도록 했다. 백포정과 고하가 향군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다식은 안승의 거기를 호위하며 해안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해지자 안승도 수레에서 나와 친히 칼을 잡고 적군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의 피를 튀기는 접전 끝에 안승과 다식이 가까스로 해변에 이르러 막 한숨을 돌리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당군 1천여 기가 요란하게 북소리를 울리며 나타났다.

그것은 평양의 설인귀가 정체불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해포현 현령의 장계를 읽고

부랴부랴 파견한 군대였다.

“아, 이제는 죽었구나……”

안승이 1천이나 되는 적군을 보고 크게 탄식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전하께서는 서둘러 개펄을 따라 내려가십시오.

신이 해포에 모여든 백성들을 소집해 물이 빠져나간 곳에 배를 가져다 놓고 기다리게 했으니

중물이 돌면 노를 저어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늠름하고 건장한 사람 하나가 장정 수백 명을 이끌고 나타나 말했다.

안승과 다식은 지옥문 앞에서 부처를 만난 듯했다.

“그대는 누구신가?”

안승이 경황 중에도 그의 이름을 묻자 그가 마상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신은 음직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다시 뵙게 되면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겠으니 지금의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말을 마치자 급히 장정들을 이끌고 당군 진영을 향해 내달았다.

안승이 말로만 듣던 음직의 기개를 찬탄하며 곧 질척한 개펄로 내려서서 해안을 돌아가자

과연 궁모성에서 헤어졌던 백성들이 수리한 배 앞에 모여 있다가 일제히 환호하며 기뻐했다.

“사정이 위급해 우리끼리 배를 타고 나왔으니 전하의 마음인들 어찌 천근같지 않겠소.”

다식에게 얘기를 전해들은 검모잠은 안승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필경 천우신조가 있었거니와 신이 강서향의 1천여 호 주민들까지

데리고 나왔으니 이 나라 열성조의 넋이 전하의 옥체를 수호하고 있음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4천 호 2만여 백성이면 비록 미약하나마 끊어진 군장을 잇고 사직의 명맥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모쪼록 심신을 편안히 하소서.”

1천 호 주민들을 이끌고 왔다는 검모잠의 말에 장수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안승도

다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

검모잠은 이들을 인솔해 남쪽으로 내려와 사야도(史冶島)란 섬에 정박하였다가

신라의 한성(漢城)으로 들어가 투항할 뜻을 밝히고 다식을 금성으로 파견했다.

“멸망한 국가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서 이를 허락해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우리나라 선왕은 왕도를 잃고 멸망하였으나 이제 신 등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맞아

임금으로 모시고 대국 신라의 속국과 번병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오니

대왕께서는 부디 저희들의 소망을 저버리지 마소서.”

다식이 안승과 고구려 유민을 대신해 법민왕에게로 가서 편전에 엎드려 고했다.

그러잖아도 설오유가 떠난 뒤 줄곧 북방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법민은

다식을 상대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캐어묻고 나서 쾌한 얼굴로 이를 수락했다.

그는 한산주 군주에게 명하여 당분간 안승 일행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선처한 뒤에

곧 중신들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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