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안승 망명 4
방안에 앉았던 검모잠이 홀연 귀가 번쩍 열려 이게 꿈인지 생신지 어리둥절하였다가
군졸들이 밥을 먹고 일어나 갈 적에 가만히 뒤를 밟아 가서 관아 문전을 기웃거렸다.
조금 있으려니 관에 배속된 군졸들과 구실아치들이 일제히 나타나 오밤중임에도
부산을 떨어대며 현령 맞을 채비들을 서두르는데 그 중에는 낮에 만났던 중늙은이의 얼굴도 보였다.
검모잠이 관아 정문에서 서성거리다가 마침 한 젊은 군졸의 눈에 수상하게 보여,
“댁은 뉘시오?”
하는 질문을 받고는 엉겁결에 중늙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양반을 만나러 왔으니 좀 불러주오.”
했더니,
“이택(李擇) 어른 말씀이오?”
비로소 의심을 거두고 중늙은이를 데려왔다.
이택이라는 그 중늙은이가 다급히 검모잠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서,
“천우신조요, 천우신조! 이제 드디어 오살 맞을 마가놈을 죽이게 생겼소!”
희색이 만면하여 말하고는,
“장군은 주막에 가서 계시오. 내가 기회를 보아 기별을 하리다.”
검모잠이 부탁할 소리를 먼저 하였다.
검모잠이 다시 주막으로 돌아와 기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데,
3경이 넘어서고도 소식이 없자 혹시 현령이 오지 않은 게 아닐까 불안한 느낌이 일었다.
봇짐 속에 숨겨 가지고 왔던 칼을 꺼내 바지춤에 차고서 살금살금 바깥으로 나와
관아 쪽으로 막 걸음을 떼어놓으려 할 때였다.
“장군!”
밤길 모퉁이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보따리 하나를 품에 안고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이택이었다.
“왜 이리 늦었소? 어찌 되었소?”
검모잠이 거푸 물으니 이택이 된 숨을 고르며 말하기를,
“말도 마오. 현령놈은 고사하고 황주자사까지 들이닥쳐 부랴부랴 술판을 벌이고
여자들을 불러대느라고 여태껏 온 고을이 발칵 뒤집혔소.”
하고는,
“마가놈을 찾아온 법안인가 하는 중놈이 실로 어마어마한 자인가 봅디다.
마가는 고사하고 황주자사까지도 넙죽 큰절을 하고는 앉을 때도 무릎을 꿇고 앉는데,
중이 곽대봉이는 어째 안 왔느냐고 하니 황주자사가 곽장군은 반란군을 치러 가서
대사 오신 줄을 몰라 안 왔지 어찌 알고서도 찾아뵙지 않았겠느냐고 헤실헤실 웃어가며
비라리를 칩디다.”
하며 덧붙였다.
“그래, 그 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소?”
“관아 대청에 벌어지게 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셔대다가 별안간 중놈이 계림 여자 맛은
여러 번 보았으나 예맥의 여자는 품에 안지 못했다고 하니
마소삼이가 인물 고운 여자 10여 명을 직접 이름까지 불러가며 잡아들이라 하여
좀 전에서야 간신히 그 일을 마쳤소.
이제 한창 주흥이 무르익고 갈수록 방비가 허술해질 게요.
내가 먼저 가서 뒷문을 지키는 군졸들을 구워삶아 문을 열어놓을 테니
장군은 3경이 끝날 때쯤 이 옷으로 갈아입고 뒷문으로 오시오.”
그는 들고 온 보따리를 풀어헤치고 관복 한 벌을 내밀었다.
이택이 가고 나서 검모잠은 관복으로 갈아입고 병야가 지나기를 다렸다가
약속한 대로 관아의 후문으로 갔더니 과연 지키는 군졸도 없고 문도 수월하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택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쪽으로 오시오.”
하고 길 안내를 하려 들었다. 검모잠이 웃으며,
“나도 잘 아는 길이오.”
하고는 이택을 앞질러 쏜살같이 현령의 거처로 내달았다.
대청마루에선 미상불 거한 주연이 벌어져 마시고 지껄이고 웃고 노느라 정신들이 없는데,
검모잠이 언뜻 보니 가운데 승복을 입은 자는 법안인가 하는 중이겠지만
그 양쪽의 두 사람 중에는 누가 마소삼이고 누가 황주자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세 놈이 저마다 여자들을 양팔에 끼고 희희낙락하는 꼴이 검모잠을 새삼 격분시켰다.
그는 누가 누구면 어떠랴, 하고 생각했다.
“네 이놈들!”
검모잠이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며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고 대청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동시에 한복판에 앉은 중부터 가차 없이 목을 쳤다.
그것이 얼마나 순식간이었으면 중은 목이 떨어져 불귀의 객이 되고도 손에서 잔을 놓지 않았다.
단칼에 법안의 목이 달아나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소요를 틈타 한 놈은 술상 밑으로 기어들고 다른 한 놈은 여자들의 치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객이다, 자객!”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나 두 놈은 이미 만취불성이 된 상태여서 고함소리에는 맥이 없었고 발음도 명확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택이 미리 어떻게 손을 썼는지 군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검모잠은 먼저 술상을 뒤엎고 상 밑에 들어가 숨은 자에게 물었다.
“네가 마소삼이렷다?”
“아, 아니오. 나, 나는 화, 황주자사요.”
“누구면 무슨 소용인가!”
호통과 동시에 검모잠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그는 허리가 두 동강으로 끊어져 처참하게 죽었다.
“네 이놈, 마가야!”
검모잠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그 속에 머리통을 쑤셔 박은 채 안간힘을 써대는 자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한동안 사지를 버둥거리던 여인이 급히 아랫도리를 풀어헤치고 몸만 빼내어 달아나자
마소삼은 치마를 머리에 휘감은 채로,
“목숨만 살려 줍쇼, 대인! 제가 무슨 죄를 지어 대인의 마음이 상하였는지,
목숨만 살려주시면 즉각 조처를 취하고 시정을 하겠습니다요!”
하며 두서없는 소리로 지껄였다.
검모잠이 치마에 휘감겨 오두발광을 떨어대는 마소삼을 잠시 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섰다가
칼끝으로 치마를 벗겨내고서,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하니 마소삼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 글쎄올시다……”
하는지라,
“내가 일전에 분명히 너를 죽이고 그 목과 육신을 바로 이 청마루 위에 걸어두고 갔는데
아직도 살아서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냐?”
하고 물었다.
마소삼이 그제야 검모잠을 알아보고 마룻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소인이 워낙이 어리석고 또 아직 요동의 풍속에 서투른 탓에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대인과 같은 분이 계시는 줄을 알았으니 어찌 함부로 정사를 독단하겠소?
앞으로는 일마다 장군께 여쭤 뜻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으니
부디 이국의 관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이번 한 번만 관대히 용서합시오.”
하고 구구하게 목숨을 애걸했다.
검모잠이 껄껄 웃고 나서,
“네가 죽지 않으려면 꼭 하나 방법이 있다.”
하자 마소삼이 다급하게,
“그것이 무엇입니까요?”
하고 물어,
“무엇인고 하면 내가 섬기던 온사문 장군과 그분의 가엾은 식솔들 목숨을 도로 살려내는 길이다.”
하였더니 마가가 돌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저 죽을죄를 지었으니 살려줍시오.”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강서현은 평양과 가까운 곳이라 당인들이 많은 축에 속했다.
현령을 돕는 하리도 10여 명은 되었고, 관아에 배속된 군사들도 당인과 고구려인의 숫자가
서로 비슷했다.
검모잠이 처음 칼을 뽑아 들고 대청으로 뛰어올랐을 때
당인 하리 하나가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는데,
그는 곧 당군들을 소집해 관아로 몰려들었다.
이택이 이 모습을 보고 황급히 검모잠에게 뛰어와서,
“장군, 시간이 없소! 당군들이 몰려들고 있소!”
하며 고함을 질렀다.
검모잠은 마소삼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앞장을 서게 한 다음에,
“군사들을 당장 물러서게 하라.”
등 뒤에 칼끝을 박고 말했다.
조금 있으려니 하리가 끌고 온 당군 1백여 명이 관청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나 마소삼이 하리를 꾸짖으며,
“너희는 감히 누구의 명으로 이곳에 창칼을 들고 나타났느냐?
당장 물러가지 못하겠니?”
하는 말을 듣고는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만일 물러가지 않는 자는 내일 목을 벨 것이다.”
하니 마가의 포악함을 익히 알던 당군들은 그 말이 진심이라 믿고
슬그머니 포위를 풀고 돌아가 버렸다.
검모잠은 마소삼을 끝까지 이용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이택에게 말하기를,
“이곳을 떠나 신라로 가려는 사람을 모두 모아보시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강서향 사람들이 무사히 떠나는 것을 보고 가야겠소.”
하여 이택이,
“알았소.”
하고는 밤새 사람들을 풀어 소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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