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안승 망명 2
백성들이 떠나고 나자 고하가 말했다.
“손우지 혼자 이곳을 맡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오.
나도 여기 남아 손 장군을 돕겠소.”
“장군께서는 연세가 높으시니 차라리 제가 남겠습니다.”
백포정이 고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니 손우지가 벌떡 일어나 휘휘 손사래를 쳤다.
“장군들은 장차 전하를 뫼시고 사직을 일으켜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는 분들이오.
어찌 이까짓 성곽 하나를 지키는 일에 여러 사람이 남는단 말씀이오?
이곳은 내게 맡겨두고 어서 어가를 호위하여 떠나기나 하오!
나도 차차 기회를 봐서 신라로 넘어가겠소.”
“손 장군의 말씀이 옳소.”
검모잠이 그런 손우지의 의견을 두호했다.
이리하여 궁모성은 손우지와 남은 다물군들에게 맡겨졌다.
검모잠은 외지에서 온 장정 30여 명을 징발해 안승의 거기(車騎)를 호위토록 한 뒤
자신도 평복으로 갈아입고 나머지 장수들과 몇 보를 앞장서서 서쪽으로 길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궁모성을 벗어나 해포로 가는 길이 결코 평탄할 리 없었다.
이들이 당군을 맞닥뜨린 곳은 강동의 경계를 지나 막 인적이 드문 마을 뒷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거기 가는 자들은 길을 멈추라!”
별안간 시야가 크게 어지럽더니 창칼을 든 한 패의 군사들이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너희는 어디로 가는 누구의 행차냐?”
군사들 틈에서 말을 탄 장수 하나가 나타나 당나라 말로 물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눈매가 꽤나 매섭게 생긴 장수였다.
선두에 섰던 백포정이 슬그머니 말 잔등에 걸어놓은 장창을 그러쥐며 대답했다.
“우리는 궁모성의 환난을 피해 살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냐?”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어제도 그런 자들을 많이 보았다만 너희는 그들과는 달리 무기를 갖추고 말까지 타고 있으니
어찌 수상하지 않겠느냐?”
“난리에 목숨을 지키려고 집에 있는 말과 무기를 지니고 나온 것이 무엇이 수상하오?
공연한 트집일랑 그만두고 어서 길이나 열어주시오.”
당군 장수는 네 장수의 행색을 찬찬히 훑어본 뒤에 고개를 잔뜩 빼고 장정들에 둘러싸인
안승의 행차를 힐끔거렸다.
“저 뒤쪽 수레에는 누가 탔느냐?”
“마을의 지체 높고 연로한 어른 한 분이 타셨소.”
“혹시 저 속에 반란군의 수괴인 안승이 숨어 있지 않느냐?”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요!”
백포정이 유창한 당나라 말로 펄쩍 뛰자 당군 장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길을 비켜줄 테니 무기는 모두 버리고 가라.”
“그렇게는 못하겠소이다.”
“어째 못한단 말이냐?”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아오?”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길을 열어줄 수가 없다.”
당군 장수가 고집을 꺾지 않고 시간을 끌자 보다 못한 검모잠이 나섰다.
“잔소리 말고 냉큼 비켜서라! 우리는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다!”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칼을 뽑아 드니 당군 장수가 움찔 놀라 말고삐를 잡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검모잠은 눈대중으로 재빨리 당군의 숫자를 파악했다.
어림잡아 2백 남짓 될 성싶었다.
그는 당군 장수를 향해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았다.
“나는 전날 요동서 1만 군대를 거느렸던 고구려 장수 검모잠이다.
지금 너희와 같은 숫자는 나 혼자 상대해도 능히 새와 벌레의 밥으로 만들 자신이 있으니
알아서들 하라!”
되도록 싸움을 피해보려고 잔뜩 위엄을 갖춰 한 말이었으나
그 소리에 당군 장수는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검모잠 장군이라 하셨소?
오, 아까부터 면이 눈에 익다 했더니 진실로 모잠 장군이구려!”
검모잠 으로선 전혀 예기치 못한 그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가 나를 아는가?”
“저는 설인귀 장군의 막비로 주필산의 횡산 협곡서 입은 장군의 대은을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소.
그때 장군께서 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었겠소!”
“그랬던가? 하면 이제 그 보답을 하시겠는가?”
검모잠이 말투를 고쳐 점잖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당군 장수는 즉시 길을 비켜서며 뒤쪽의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서 모잠 장군의 행차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라!”
궁지에 몰렸던 검모잠 에게는 실로 뜻밖의 횡재였다.
백포정과 다독이 먼저 지나가고 뒤이어 고하가 안승의 거기를 호위하며
당군 사이를 아무 탈 없이 빠져나가자 검모잠은 비로소 당군 장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도 그대처럼 의리를 아는 사람이 있으니
비록 살상과 도륙을 천직으로 삼는 무장의 길을 갈지언정 장부 일생이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으이.”
그 공치사에 흥감한 때문이었을까.
당군 장수는 돌아서려던 검모잠에게 다가와 급히 귓속말로 물었다.
“장군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평양 남쪽의 해포로 가는 중이네만……?”
“그렇다면 이것이 혹 도움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그는 품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은밀히 검모잠의 손에 쥐어주었다.
검모잠이 언뜻 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당군들의 행군로를 그려놓은 지도였다.
“오호, 실로 갚지 못할 은혜를 입네!”
지도를 받아든 검모잠이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당군 장수는 전날 검모잠이 그러했듯 마상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군사들을 이끌고 궁모성 쪽으로 사라졌다.
지도를 입수한 덕에 일행들은 당군의 행군로를 피해 무사히 해포에 당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해포였다.
방비가 허술했던 것은 옛말이요,
마을로 통하는 외성 입구에서부터 창칼을 든 군사들이 진을 치고 늘어서서
통행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다행히 설인귀의 군사가 온 것은 아닌 듯하나 해포현의 경계가 삼엄하기 짝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근교 야산의 둔덕 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에 몰두할 때였다.
일행 가운데 검모잠을 급히 찾는 사람이 있다기에 누군가 싶었더니 온사문의 며느리 이씨였다.
“제가 마을로 들어가 음직이란 분을 만나보고 아울러 갯가의 동태를 살피겠습니다.”
이씨는 검모잠이 궁모성으로 올 때 데려와서 당초 그의 소원대로 군사들의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거들도록 하였는데, 그 개자한 미색 때문에 집을 떠나 있던 여러 장수와 장정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루는 안승이 군사들의 훈련하는 곳에 왔다가 이씨의 소문을 듣고 마을 여자들과 어울려 장설간에서
물 일하는 이씨를 친히 구경하게 되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초라한 입성에 볼품없는 행색이라도
전날 궁중에서 보던 어떤 꾸며놓은 궁녀 나인들보다 자태가 아름다웠다.
이때부터 안승이 이씨에게 마음을 두고 은근히 뒤를 알아보았더니
검모잠이 데려온 사람이라 하므로 한번은 검모잠에게 지나치는 말로,
“장군과는 어떤 사이인데 고된 일을 함부로 시키시오?”
하며 물었다.
이에 검모잠이 이씨가 온사문의 며느리인 것과 그에 얽힌 사연을 대강 털어놓고서,
“훗날 그 남편이 군역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신이 데리고 다니는 중입니다.”
하니 안승이 짐짓 껄껄 웃으며,
“허, 나는 그네가 처자인 줄 알고 잠시 마음을 빼앗겼더니
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실망이 크오.”
하고서,
“지체 높은 댁의 여인네 몸으로 수천 군사들의 뒷바라지가 고달플 터이니
앞으로는 과인의 조석 끼니를 돌보게 함이 어떠하오?”
하고 제안하였다. 검모잠이 안승의 말을 마다할 턱이 없어,
“성은이 망극합니다.”
하여 이때부터 이씨가 안승의 거처인 관아 뒤채에 기거하며
임금을 뫼시는 찬모 노릇을 하고 살았다.
“아주머니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검모잠의 허락을 얻은 이씨는 외성의 삼엄한 경계를 용케 통과해 음직의 집을 찾아갔다.
음직이 그 처와 막 잠자리에 누웠다가 이씨를 보고는 깜짝 놀라 나와서,
“모잠 장군을 따라갔던 아주머니가 아니시오?”
잊지 않고 알은체를 하였다. 이씨가 사방을 조심스레 살피며,
“급한 일로 장군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므로 음직이 서둘러 이씨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젖가슴을 죄 드러낸 몰풍한 차림새로 누웠던 음직의 처가 밤중에 난데없이
안방까지 찾아온 여자 손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홑이불 자락으로 몸을 가리니 음직이,
“임자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오.”
하고 벗어놓은 저고리를 훌쩍 던져주었다.
음직의 처가 매시근히 돌아앉아 옷을 입으며 생각하니
이 야밤에 여자 손한테 쫓겨나는 것도 적이 탐탁찮은 바이지만 하물며
그 손이 여간한 인물이 아니라 수상한 느낌이 왈칵 들었다.
어쨌거나 처가 나가고 나자 이씨가 음직과 우어하여 안승이 외성 밖에 이르러 있다는 것과
전날 말한 배를 얻었으면 한다는 검모잠의 뜻을 전하였다.
음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어제오늘 남부여대한 행렬이 해포로 잔뜩 모여들었구려.”
하고서,
“마땅히 배를 마련하고 군사를 모아보겠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사나흘 말미는 있어야 할 게요.
그런데 갑작스레 외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니
해포현 현령이 무슨 일인가 하고 어제부터 부쩍 경계를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일설에는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는 소문도 들립디다.
배를 준비하는 사이에 혹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오.”
근심 어린 얼굴을 해보였다. 이씨가 음직과 더불어 이런저런 방책을 의논하다가
아무래도 시급히 배를 마련하는 것밖에는 달리 묘책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는,
“그럼 준비를 마치는 대로 기별을 주십시오.”
하며 일어서려니 음직이 이씨를 황급히 붙잡으며,
“2경에 접어들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가긴 어디를 간다고 그러오?
공연히 의심을 사서 문초당하지 말고 내 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낼 아침 일찍 가오.”
하고는 직접 아래채로 데려가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까지 깔아주었다.
이씨가 아래채로 내려온 뒤 비로소 시누 내외의 안부가 궁금하여 뒷 소식을 물으니
음직이 나가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방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서,
“그때 모잠 장군이 죽인 자는 강서현 현령 마소삼이 아니라
관아에서 일하던 구실아치였다고 합디다.”
하며 운을 떼더니 연하여,
“그 바람에 격분한 마소삼이 온장군의 일가란 일가는 샅샅이 적간하여 어린아이까지
모두 도륙내고, 군역 나간 아들도 붙잡아다가 참수하고, 심지어는 시집간 딸까지 데려다가
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광포한지 선처를 부탁하러 갔던 남편이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고 돌아와 나한테서 여러 날을 울고 갔소.”
이씨가 듣기에 가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하였다.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있던 남편마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이씨는 너무 기가 막혀 처음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차 설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망국의 통한에 멸문의 참혹함까지 겹쳐 감정을 좀체 억누르지 못했다.
이씨가 하도 섧게 흐느껴 우니 음직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해 발가락만 매만지고 앉았다가
한참 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씨한테서,
“부인께서 무슨 일인가 하겠습니다. 그만 건너가 보시지요.”
하는 말을 듣고야,
“참고 살다 보면 더러 좋은 날도 있을 거외다. 부디 맘을 굳게 자시오.”
한 마디를 건네고는 못 이긴 척 일어나 안방으로 건너갔다.
이때는 어느덧 3경도 깊을 대로 깊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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