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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안승 망명 3

오늘의 쉼터 2014. 11. 29. 13:54

제34장 안승 망명 3

 

 

 

음직의 처는 본래 의심이 많은 여자였다.

잠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되새길수록 수상한 일인데,

남편이 인물 고운 여자와 도란도란 무슨 정담을 한참 나누더니

그것도 모자라 아래채로 옮겨가고 급기야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까지 밖으로 새어나오자

내심 두 사람의 사이를 아름답지 못한 쪽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음직의 아래채에서 밤을 거의 뜬눈으로 밝힌 이씨는 뒷날 동이 트자

서둘러 일행들이 묵고 있던 야산으로 와서 자신이 본 해포현의 사정과 음직의 말을 전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검모잠이 문득 이씨의 퉁퉁 부은 눈을 유심히 살펴보고서,

“그런데 아주머니께선 하룻밤 새 안색이 왜 그리 창백해졌습니까?

혹시 무슨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들으셨소?”

하고 물어 이씨가 음직에게서 들은 말을 소상히 털어놓게 되었는데,

새삼 눈물이 솟구치고 가슴이 미어져 이야기를 마치고는 소리를 높여 통곡하였다.

검모잠이 마소삼을 죽이지 못한 것을 이때 알았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한동안 새파랗게 치를 떨다가,

“음직의 말이 사나흘이라 하였소?”

재차 확인을 한 뒤 곧장 안승과 장수들에게로 달려가 사정 얘기를 전하고,

“신이 그사이 하루 이틀만 급히 도다녀올 데가 있으니 허락해주십시오.”

하였다. 안승과 장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검모잠이 이씨의 일을 대강 말하고 나서,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대관절 우리 백성들을

개 잡듯이 때려잡는 마소삼과 같은 놈을 안 죽이고 간대서야 말이나 되겠습니까?”

하며 씩씩거렸다.

안승은 이씨가 통곡한다는 소리에 마음이 짠하여,

“여기 염려는 말고 어서 다녀오시오.”

하였고, 고하는 지도를 펴 보이며 강서향이 곽대봉의 주둔지이므로 조심하라 당부하고,

다식은 늘 그렇듯이 아무 말이 없는데 오직 백포정만이,

“혼자서 되겠소? 내가 따라가리까?”

하며 물었다. 검모잠이 그럴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만약의 일을 알지 못해,

“설인귀가 해포에 군사를 보낼지도 모르니 장군은 그냥 여기 계시오.”

하고는 혼자 말에 올라 쏜살같이 강서향 으로 내달았다.

해포에서 강서향 까지는 본래 반나절 거리이나 검모잠은 사방에 널린 당군을 피하느라

승석 무렵이 되어서야 현의 입구에 닿았다.

그곳 역시 관문에는 지키는 군사들이 있었다.

검모잠이 말에서 내려 일부러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며,

“나는 군역에 나가 반란군과 싸우다가 다리를 다쳐 귀향하는 사람이오.

내 고향인 강령으로 가자면 이곳을 지나야 길이 빠르오.”

하니 초병들이 검모잠의 아래위를 훑어보고서,

“그렇다면 증서가 있을 게 아니냐?”

하고 물었다. 검모잠이 증서를 잃어버렸노라 급히 둘러댄 뒤에,

“가까운 일문이 강서현에 살고 있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 집서 묵어가야 할 것 같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나 만일 들여만 보내준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사례를 톡톡히 하겠소.”

하자 초병들은 무얼로 그 말을 믿느냐고 이기죽거리는데 뒷전에 있던 약간 나이 든 이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며,

“내일 술 말이나 받아 오겠느냐?”

하고는 그대로 보내라고 고갯짓을 하였다.

검모잠이 강서향에 와서 주막에 묵으며 소문을 들으니

곽대봉이 군사를 이끌고 올 적에 마소삼이 갯가까지 나가 영접을 하였는데,

황주자사가 곽대봉을 모셔가자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노라 하였다.

그렇다고 마소삼 하나를 죽이러 황주까지 가자니

황주에 가서 마소삼을 만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해포에 돌아갈 시간도 촉박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관아에 가서 현령이 언제쯤 돌아오느냐고 물었더니

관아에서 일하는 늙수그레한 고구려 사람이,

“순전히 제 놈 마음이지 내야 알 수 있소.”

되퉁스레 응대하고서,

“강서향의 얼굴 해반주그레하고 나이 젊은 여자들은 모두 끼고 잤으니

이제는 황주 본청에 가서 오입질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모양이오.”

하며 욕을 하였다. 검모잠은 그가 현령에게 불만이 있는 줄을 알고,

“어찌하여 고을 현령을 함부로 말하시오?”

하자 그 사람이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고서,

“보아하니 외지서 와 고을 사정을 통 모르는 듯한데 강서향의 마누라나 딸년 둔 사람치고

마가놈 한테 원한 안 진 사람이 없소.

나도 시집 안 간 딸년 둘을 지난달에 내리 헌계집을 만들었는데,

집에서 3년째 고생하던 데릴사위들이 그것을 알고도 딸을 달라니

당최 사위들 볼 면목이 없어 죽을 맛이오. 우리 고을 사람들은 마가놈 잠청에 마누라나

딸년 한두 번 뺏기는 건 고만 예삿일이 돼버렸소.

꼭 연장 빌려주듯 밤에 빼앗겼다가 뒷날 마가놈이 끼고 잔 마누라를 그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찾아와 데리고 사니 사람마다 넘 세고 우세라 말을 안해 그렇지 그 심정들이야 오죽 복잡하겠소?”

하며 기막힌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에 검모잠이 죽일 놈이라고 덩달아 욕을 하자

그가 만 번을 죽여도 고을 사람 원한은 다 갚지 못할 거라 하고는,

“온사문 장군 댁이 멸문한 뒤 진작에 다른 데로 살러 간 몇몇 사람들이 부럽고 심지어

얼마 전에 요하로 끌려간 사람들까지도 부럽기가 한량없소.

우리도 어떻게든 여기를 떠났어야 하는 건데. 이제는 마가놈이 제 허락 없이는

이주도 함부로 못하도록 군사를 내어 관문을 지키니 들어오는 건 쉬워도 나가는 건

야반도주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소.”

하였다. 검모잠이 그와 이런저런 말을 나누며 종일 관청 문 근처에서 현령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그날도 해가 질 때까지 마소삼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에 검모잠이 다시 아침 일찍 관청에를 가니 전날 말벗이 된 고구려 구실아치가,

“오늘도 나오셨소?”

하며 알은체를 하고서,

“대체 마가놈은 무슨 용무로 기를 쓰고 보려 하오?”

비로소 용건을 물었다. 검모잠이 그라면 믿을 만하다고 여겨,

“실은 마가놈을 죽이러 왔소.”

하고는 대강의 사연을 말하였다.

중늙은이 구실아치가 검모잠의 말에 장히 귀가 솔깃한지 시종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검모잠이 말끝에,

“내가 몇 달 전에 분명히 마가놈의 목을 치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때 엉뚱한 사람을 죽인 모양이외다.”

했더니 그가 돌연 화들짝 놀라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하면 나리가 바로 검모잠 장군이오?”

“내 이름을 어찌 아오?”

“평복을 하여 몰라 뵈었소! 어라?

하늘이 우리 강서향을 버리지 않았구려!

여기 사람들치고 마가놈 말을 하면서 장군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사람이 없소.

마가놈도 그때 얼마나 혼쭐이 났으면 곽대봉이가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온 고을에 평시 징발을 하고서 뒤가 마려워 칙간에 갈 적에도 칼 든 군사를 데리고 갔소.”

구실아치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나저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보고 가야 할 텐데 시각이 촉박하여 큰일이오.

오늘도 마가놈이 안 오면 내일은 천상 그냥 돌아가야 할 판이니 억울해서 어쩌면 좋소?”

검모잠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한숨을 푹 쉬고는 해포서 기다리는 안승 얘기를 했다.

그러구러 중식 때가 지나고 다시 해거름이 되었으나 기다리던 마소삼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틀린 일이겠소.”

검모잠이 바지를 털며 일어서자 왼 종일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겼던 고구려인 구실아치가

황망히 검모잠의 팔을 붙들었다.

“내일에는 가시겠소?”

“그래야지 별수 있겠소? 개 한 마리 잡자고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지 않소?”

“해포서 배를 타면 어디루 갑니까?”

“아마도 신라로 가서 몸을 의탁하기가 쉬울 듯싶소.”

“그렇다면 우리 강서향 사람들도 같이 데리고 가주오.

여기도 말만 하면 따라 나설 사람들이 적잖을 거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소만 배가 없소이다.”

“배는 우리가 마련을 해보겠소!”

그는 검모잠의 팔을 붙든 채로 애원했다.

“당나라 놈들과는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소.

곽대봉이의 군사들이 타고 온 배가 요 근처에 있으니

장군이 허락만 한다면 내가 우리 고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걸 타고 서해로 나가겠소!

제발 우리 강서향 사람들을 버리지 마시오!”

검모잠은 눈물까지 글썽이는 중늙은이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배까지 스스로 마련하여 오겠다니 마다할 까닭도 없는 일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소?”

“위험한들 어떻소.

지금 우리 고을에는 8할이 나 같은 늙은이와 아녀자들과 약골이 병둥이 들이오.

혹간 젊은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축들은 마소삼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따르는

반미치광이들뿐이오.

정신깨나 올바르고 힘깨나 쓸 법한 장정들은 얼마 전에 죄 요하로 끌고 가서

마을엔 마소삼이 하나 죽일 만한 사람이 없다오.

나도 처음엔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구실아치로 들어왔다가 나중엔 마가놈을 죽이고

나도 죽자고 기회를 엿보는 중인데, 요즘엔 생각이 그렇소.

설령 마소삼이를 죽인대도 그 다음에 오는 후임이 마소삼이보다 낫다는 보장이 어디 있소?

여기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앉아서들 그 소리요.

하늘 아래 어디를 간들 당나라 놈들 밑에서 사는 것 보덤이야 백 번 낫지 않겠소.”

“그럼 시급히 준비를 해보오. 힘쓸 장정들이 없다니

당군이 타고 온 배를 탈취하기도 쉽잖을 게라.”

“일심만능(一心萬能)에 일념통천(一念通天)이라 하였소.

강서향 민가가 1,300호이니 뜻을 합치고 중지를 모으면 필시 방법이 있을 것이오.”

검모잠이 해질 무렵에 늙은이와 헤어져 주막에를 왔다가 마소삼이를 못 죽이고

끝내 허행하는 것에 통분하여 이른 저녁상에 반주로 술을 반말이나 마셨다.

그러고는 이내 곯아떨어져 초저녁 내내 정신없이 잠을 잤는데,

제 코고는 소리에 제가 놀라 눈을 뜨니 바깥 평상에 관복 입은 군졸 두 사람이 앉았다가,

“어따 그 양반 코고는 소리 한번 요란할세. 무슨 놈의 코를 집이 죄 흔들리게 고오?”

하며 핀잔을 주었다. 검모잠이 일어나 큰 소리로 주모한테 물을 청하였더니

주모가 야참 상에 물 사발을 얹어 와서 물 사발은 방에 들여다 놓고 상은 평상에 갖다 놓으며,

“현령은 황주를 가고 없는데 적당한 데 가서 잠이나 자지 뭣 하러 야참까지 먹어가며 열성이오?”

군졸들을 보고 물었다. 군졸 중에 마르고 나이 든 사람은,

“우리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고 더 중언부언하지 않고 국에 밥을 놓아먹는데 육덕이 실한 젊은이가,

“우리 편한 꼴은 오늘로 끝난 성싶소.”

하고서,

“초저녁에 난데없이 당나라 중놈 하나가 와서 현령을 찾는데 말하는 품새를 보아하니

예사 중이 아닌가 봅디다.”

하였다. 넉살 좋은 주모가,

“중이면 다 중이지 예사 중이 아닌 건 무어야?”

하였더니 젊은 군졸이,

“현령 이름을 개 부르듯이 부르면서 남경에 설인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렀노라 하는데

당인 하리가 나와 현령이 곽대봉이와 황주자사를 따라 본청에 간 것을 말하였더니

대뜸 이놈아 그럼 본청에 가서 데려와야 할 게 아니냐고 고함을 칩디다.

하리가 그 중놈 이름을 물어 듣고 나더니 당석에서 오줌을 질금질금 싸며 직접 말을 타고

황주로 떠났는데, 그 꼴이 범 만난 개라고 해도 과히 틀린 소리가 아니오.”

하고 말하는 도중에 나이 든 군졸이 팔을 휘휘 저으며,

“이 사람 군서설 그만두고 어여 밥이나 먹게. 현령이 일찍 온다면 당도할 때가 거진 되었네.”

하고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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