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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멸망 11

오늘의 쉼터 2014. 11. 28. 17:08

제33장 멸망 11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는 반드시 먼저 계책이 있어야 하니

그대는 이와 같은 과인의 뜻을 잘 전하여 기필코 두 사람을 청해 오도록 하시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전하께서는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

예원이 장담하고 떠난 뒤에 강수는 조용히 법민을 찾아가서 말했다.

“이번에 예원공은 두 사람을 데려오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장수들을 소집하여 출병할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셨다가 예원이 당도하거든

대내마 무수(武守)로 하여금 신이 지은 거짓 서찰을 지니게 하여 낙양으로 보내십시오.

무수는 우리나라의 신하가 된 지 오래이나 흑치상지의 충복인 장귀(長貴)와는

각별한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무수의 충절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 또한 사람인데 어찌 고향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강수가 말한 무수는 그 아우 인수(仁守)와 더불어 백제에서 은솔 벼슬을 지냈던 사람으로,

나라가 망한 뒤 형제가 나란히 신라에 귀화하여 무열왕 으로부터 대내마 벼슬을 제수 받고

무수는 대감, 인수는 제감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한 일가를 외치던 무열왕이 재능을 보아 등용한 충상, 상영, 자간 등의

다른 백제 중신들과 더불어 자신들을 거두어준 신라 조정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다.

과거의 동료였던 백제 잔병들과 싸울 때는 물론, 고구려를 칠 때도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

서로 공을 다투며 꽤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법민은 강수의 계책을 짐작하고 곧 그 말에 따랐다.

웅진으로 떠난 예원은 부여융과 녜군을 만나 법민왕의 뜻을 전하고 함께 신라로 가서

계책을 상의하자고 말했다.

이때 부여융은 스스로를 백제왕이라 칭하고 녜군을 웅진도독부 사마(司馬)에 책봉하여

이전과 다름없이 구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예원의 말을 들은 녜군이 빙긋이 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상국이 위급함에 처하였으니 이를 구원하는 것은 번병의 당연한 책무이나 어찌 하필이면

우리가 금성에 가서 논의를 해야 한단 말씀이오?

금성이 고구려로 가는 길목에 있다면 또 모르지만 오히려 평양은 이곳에서 더 가까운데

화급을 다투는 일을 의논하면서 굳이 그곳까지 오라는 저의를 모르겠소.”

예원은 사마 녜군의 지적에 당황하면서도 일변 크게 마음이 상했다.

아무리 당의 위세에 굴복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 화친을 맹약하였다곤 하지만

백제는 엄연히 신라와 싸워 멸망한 나라였다.

멸망한 나라의 일개 장수가 승전국의 왕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대등한 관계에서

말하는 태도에 예원으로선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예원의 마음을 녜군은 오만불손한 말로 더욱 무참히 짓밟았다.

“더구나 우리는 천자의 앞에서 웅령(熊嶺)을 다스리며 끊어진 사직을 이으라는 칙명을 받고

부임한 상국의 신하들이니 격으로 따지더라도 마땅히 계림의 장수들이 이곳에 이르러 계책을

논의함이 옳을 것이며, 출병을 할 때는 우리의 절도와 군령을 받아야 사리에 합당할 것이오.

그대는 시급히 법민왕께 가서 나의 이러한 뜻을 전해주시오.”

예원은 일순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차서 차마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심 이찬인 자신이 사신으로 오면 녜군이 황감해하며 따라 나설 줄로 잔뜩 기대했던 터라

낙담과 분노가 더욱 컸다.

하지만 가야 할 사람이 가지 않겠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필시 뒷날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한참을 매시근히 앉았던 예원은 부여융과 녜군을 번갈아 치바라보며 씹어 뱉듯 한 마디를 남기고

급히 말을 몰아 금성으로 돌아왔다. 예원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법민왕은 속으로

강수의 예측에 혀를 내둘렀지만 짐짓 격분한 척 옥음을 높였다.

“망국한 나라의 무리들이 어찌 이리도 무엄하고 방자하더란 말이냐!

사직을 잃고 상국에 기생하여 빌어먹는 것들의 처지가 하도 불쌍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자 하였더니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이 모든 경위를 당주께 글로 아뢰고 우리만이라도 원군을 보낼 수밖에!”

그는 강수가 말한 대로 대내마 무수를 불러 말하였다.

“그대는 과인의 장계를 지니고 당에 입조하여 작금의 일을 황제께 낱낱이 고하도록 하라.

부여융과 그 졸개들이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충절을 중히 여기는 동맹국 군주의 도리가 아니다.”

무수는 왕의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강수가 미리 써둔 글을 받아 지체 없이 금성을 출발했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금성에서 당항성(화성군)에 이르는 7백 리 당은포로(唐恩浦路)를 달려가다가

삼년산성(보은)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삼년산 관아에서 내어준 객관 한 채를 빌려 홀로 등촉을 밝히고 앉았으려니

달은 휘영청 처량히도 밝고 빛을 물고 되살아난 밤하늘의 별자리는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어 한모금 술 생각이 절로 간절해졌다.

무수가 객관의 당번을 불러 술상을 청하자 그 당번이 무수의 쓸쓸한 마음을 눈치로 알아차렸는지,

“보아하니 객수가 사뭇 깊사온 듯한데 자작으로 마시는 술이 도리어 독이 되지 않겠습니까?

혹간 오가는 사신들을 뫼 시는 기생이 있으니 말벗이라도 하심이 어떠실는지요?”

하고 넌지시 일렀다. 무수가 생각하니 그도 싫지는 않은지라,

“아무렇게나 하게.”

반 답을 하고서,

“이거 술값일세.”

하며 공으로 먹는 객관 술에 넉넉히 셈까지 치르니 당번의 입이 한순간에 활짝 찢어져서는,

“천하절색으루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요!”

하고 물러갔다.

 

그로부터 달이 한 치나 움직였을 때 여인 하나가 술과 식어빠진 나물 전 몇 가지를 올린 소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 여인은 당번의 말처럼 천하절색은 아니었으나 그런 대로 인물이 곱고 태도가 정숙하였다.

무수가 여인에게서 술 한 잔을 받고 이름을 묻자,

“은고라 합니다.”

하였다. 무수가 돌연 허허 웃음을 터뜨리고서,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어찌하여 하필이면 이름이 은고더냐?”

하니 여인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무수를 살피며,

“소녀의 죽은 아비가 이름을 그리 짓고 갔습니다.”

하고서,

“그런데 소녀의 이름에 무슨 연고가 있사옵니까?”

하며 반문하였다. 무수가 술 한 잔을 다시 비우고서,

“전에 내 알던 가인의 이름과 같아 그런다.”

하니 그때까지 무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여인이,

“혹시 나리께서도 백제분이십니까?”

하므로 무수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백제분을 신라 사신이 묵는 객관에서 만나다니 놀랍고 반갑습니다. 소녀 또한 그렇습니다.”

여인은 반색을 하며 자신의 아비가 곡내부(穀內部)에서 진무 벼슬을 지냈던 곡창지기였다는

말과, 변란 중에 일가붙이와 식솔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왜국으로 건너갔으나

자신은 연로한 홀어머니와 함께 남았다가 신라로 넘어와 살게 된 사정을 차분히 털어놓고서,

“소녀도 얼마 전에서야 은고라는 이름이 당나라에 끌려가신 왕후(의자왕비)의 존함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신라에 와서 살 만은 하더냐?”

무수가 묻자 여인은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잖아도 인접한 본향 곰나루(웅진)의 산하가 눈앞을 어른거려 술을 청했던 무수인지라

같은 처지의 유민을 만나니 그 심사가 바이 처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구러 밤이 깊어 한 잔 두 잔 받아 마신 술이 거나해지자 간간이 부는 바람에 달마저 흔들리는데,

풍편에 전해오는 야릇한 향내가 해마다 그맘때면 곰나루 강변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창포 향기인

듯하여 무수의 눈에선 까닭 없이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7백 년 영화가 스러진 곳에 와
가인의 그림자와 하룻밤을 새노라니
예 살던 곳은 동이던가 서이던가
만릿길 가다 말고 수레 멈춰 돌아보니
꽃 내음 끊어진 곳에 망국의 달빛만 그득하여라

무수는 생각이 깊고 마음이 정한 사람이었다. 구슬픈 감회를 시 한 수로 읊고 멀거니

허공을 향해 앉았던 그가 슬그머니 왕의 장계를 열어보기로 용기를 낸 것은 향수에 사무친

술 힘을 빌려서였다.

“큰일 났다! 이 글을 당주가 본다면 그나마 이어오던 부여씨의 명맥마저 끊기고 말겠구나.

아아, 내 어찌 이리도 기구한 소임을 맡았더란 말인가……”

무수는 부여융과 사마 녜군의 소행을 꾸짖고 흑치상지에게 딴마음이 있는 듯하다는

장계의 통렬한 문장을 읽고 나자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그는 혼잣소리로 길게 탄식하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날이 새자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소녀가 극진히 뫼시겠사오니 눈을 좀 붙였다가 떠나시지요.”

그는 은고가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급히 말을 몰아 웅진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차마 부여융을 만날 자신은 없었다. 그는 국경의 관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웅진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며 화급을 다투어 장귀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연락을 받은 부성(사비성)의 장귀는 무수가 왔다는 말에 의심 없이 웅진성으로 달려왔다.

국운이 쇠하여 사람의 길은 갈렸으나 한때 관포지교를 논하던 옛 벗의 정리마저 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나루터 길쌈집의 큰 육손이가 아닌가?”

장귀는 예전과 다름없는 반가운 얼굴로 무수의 손을 맞잡았다. 무수의 어머니는 길쌈하는 솜씨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형제들은 모두 손가락이 여섯 개여서 어려서는 이름 대신 길쌈집

큰 육손이로 불리던 무수였다.

“잘 계셨는가……”

무수가 약간 겸연쩍어하며 장귀에게 인사를 건네자 장귀는 호방한 성격답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라가 망해서 그렇지 나는 잘 있네. 이 사람아, 기왕 예까지 왔으면 곰나루 옛집 구경도 하고

나랑 모처럼 술잔이라도 나누게 성안으로 들어올 양이지 국경에까지 사람을 불러낼 건 무어야?

신라인들도 허락을 얻으면 왕래가 자유로운 판국인데 아무려면 누가 자네를 해치기야 하겠는가?”

장귀는 무수의 팔을 잡아끌며 지금이라도 주성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무수는 어정쩡하게 서서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그리곤 품에서 법민왕의 장계를 꺼내 보이며 자신이 찾아온 까닭을 털어놓았다.

“여우도 죽을 때는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였네.

내 비록 신라의 신하가 되었으나 어찌 촌각인들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고향을 잊고 지낼 것이며,

고향이 잘되기를 바라고 근심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장귀는 무수가 내민 장계를 읽는 순간 안색이 백변하였다.

특히 그가 주목한 대목은 흑치상지에 관한 글이었다.

흑치상지에 대한 유민들의 신망은 대단했다.

계백 이후 다시 흑치상지가 있다고들 칭송이 자자했다.

우선 당에 투항해 시일을 두고 백제를 재건하자는 융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인

그에게 당은 절충도위진웅진성대주(折衝都尉鎭熊津城大主) 벼슬을 내리고

도독부의 치소인 웅진성의 책임을 맡겼다.

결코 섭섭지 않은 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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