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멸망 8
왕이 다급하게 묻자 원정이 부복하여 아뢰었다.
“성은의 지극함 덕택에 차차 나아가는 중이옵니다.
근자에는 스스로 수저를 들고 밥과 찬을 모두 비울 만치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유신은 고구려와 싸움이 끝난 직후 또다시 풍기가 있었다.
원정의 말에 왕은 돌연 희색이 만면해 소리쳤다.
“오, 하늘의 돌보심이다! 대장군께서 회도하신다는 말을 들으니
만 가지 번뇌가 일시에 스러지는구나!”
그러다가 그는 돌연 원정을 책망하듯 물었다.
“너는 부친의 병 수발에 전념할 것이지 어찌하여 이곳에는 왔느냐?”
“실은 가친의 심부름을 왔나이다.”
“대장군의 심부름을 왔다고?”
법민이 놀라 반문하자 원정은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진상했다.
“대왕께 급히 전해 올리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왕이 급히 서찰을 펼쳐보니 그곳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신은 본래 어리석고 재주가 없으나 두 분 대왕의 바다와 같은 은덕에 힘입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지냈는데 이제 육신이 늙고 병들어 옥체를 가까이 대하지 못하니 늘 이를 슬퍼합니다.
신이 병석에서 풍문을 들으니 당이 우리의 명공 구진천을 원하여 사신을 보냈노라 하고,
전하께서 이에 반대하여 당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기에 급히 몇 자 글로써 아룁니다.
구진천을 보내라는 당주의 요구는 실로 가당찮은 것으로 저들이 흑심을 품지 않고는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구진천은 본래 나라에 대한 충심과 절개가 남다른 사람입니다.
어찌 당이 불러 낙양에 간들 저들을 위해 명궁을 만드오리까.
지금 우리나라는 오랜 전란을 겪은 탓에 백성들이 모두 지치고 피곤해 있습니다.
게다가 조정 대신 중에는 당에서 유학을 했거나, 당에 연고가 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당을 섬기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초한 신의 생각에도 당과 한 번은 결전을 치러야 비로소 삼한을 일가로 아우를 것이요,
또한 그 날이 목전에 닥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오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을 굽어 살피사 마침내 한 번 군사를 일으키면
기필코 삼한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때는 아직 얻지 못하였으니 대왕께서는 부디 현찰하소서.
읽기를 마친 왕은 더욱 밝은 얼굴로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서찰에 담긴 내용을 궁금해 하던 장수들을 대표해 천존이,
“용안이 근자에 드물게 밝고 쾌하십니다.
태대각간께서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적어 보내셨습니까?”
하고 묻자 왕은 유신이 글로 적은 내용을 대충 일러준 뒤에,
“과인의 마음이 날아갈 듯한 것은 서신의 내용보다도 대장군의 필체요.
보시오들, 풍을 맞은 바른손으로 쓴 글씨가 이토록 반듯하고 힘이 넘쳐나니
대장군께선 조만간 병석을 걷고 일어나 과인의 곁으로 달려오실 게 틀림없소.
대장군이 건재 하는 한 내 무엇을 근심하며 두려워하겠소!”
하여 천존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도 왕이 내보인 서신의 필체를 확인하느라
목을 뽑고 차례를 다투었다.
유신의 서신 한 통에 그때까지 머리를 맞대고 하던 공론은 모조리 무위로 돌아갔다.
왕은 원정을 데리고 모처럼 별궁으로 자리를 옮겨 장수들과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나누는데
그 유쾌하고 흥겨워하는 것이 법민은 고사하고 장수들까지도 방금 전에 근심하던 사람들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뒷날 왕은 사찬 구진천을 편전으로 불렀다.
“본시 재주가 뛰어난 이는 사방에서 서로 데려다 쓰려고 다투는 법이다.
이제 당주가 그대를 탐내어 기어코 데려가려 하니 힘없는 과인이 어찌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
내 너를 보내고 밤마다 계림의 연못가에 앉아 괴로운 심사를 술로 달랠지언정 당주의 칙령을
더는 거역할 수 없구나.”
왕이 전에 없이 애잔한 소리로 깊이 탄식하자 구진천도 홀연 눈물을 흘렸다.
“전조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은 왜국에 가서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조국을 섬겨
만대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겼는데 신이 계림의 사람으로 어찌 그 도리를 모르오리까.
비록 신에게 미미한 재주가 있어 사방에 부질없는 허명이 알려진 모양이오나 나라의 사정과
대왕의 근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대 신은 어디를 가든 우리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면
단 한 개의 활과 화살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그 말을 들은 왕은 구진천을 가까이 불러 손을 잡았다.
“날씨가 추우니 옷을 두껍게 입고 가라.
고생이 되더라도 조금만 참고 지내면 내 머잖은 날 반드시 태평한 세상을 만들고
천하를 뒤져서라도 그대를 찾아 데려올 것이다.”
구진천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당승 법안이 구진천을 데리고 떠난 얼마 후에 고구려 사람으로 기어코
왕을 알현코자 하는 이가 있어 왕이 친견을 허락하고 그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을 망국의 패장(敗將)이라고만 밝힌 그 사람은 군사들에게 이끌려 편전에 이르자
곧 왕에게 주위를 물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법민이 용상에서 그를 내려다보니 백발은 성성하고 행색은 남루하였으나
건장한 체격에 어딘지 범상치 않은 기색이 감돌았다.
왕은 노장의 무례함을 꾸짖는 중신들에게,
“삼한이 이미 한식구와 같은데 경들은 무엇을 그토록 의심한단 말인가.”
하고는 곧 백관들을 밖으로 물리고 불과 3, 4보 거리에서 그와 독대하였다.
“이제 되었소?”
왕이 묻자 정체불명의 그 노장이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입을 열었다.
“과연 대왕께서는 세상에 알려진 대로 비범한 영웅의 풍모를 갖추신 분입니다.
저는 전날 고구려에서 동부욕살을 지내던 고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고하는 장시간에 걸쳐 당의 처사에 불만 하는 고구려 백성들의 민심을
전하고 아울러 자신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당에 대항하여 거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그때까지 당이 장악한 고구려 내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던 법민 으로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어찌하여 장군은 그와 같이 중대한 기밀을 내게 와서 발설하는 게요?
설마 우리나라와 당의 관계를 모르고 오지는 않았을 게 아니오?”
법민이 의심하여 묻자 고하가 대답했다.
“범의 새끼를 데려다가 길러보면 처음에는 개 젖도 빨고 양젖도 빨며 지극히 양순하게 지내다가도
차츰 이빨과 발톱이 자라나면 개도 잡아먹고 양도 잡아먹고 마침내는 우마와 사람까지 해치기
마련입니다.
삼국이 형세를 나란히 하여 지낼 때 당은 마치 양순한 범 새끼와 같았으나 백제가 망하고
지금은 우리마저 사직이 끊어졌으니 신라를 대하는 태도 또한 어찌 예전과 같겠나이까?”
고하의 예리한 지적에 법민은 일순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다.
고하가 다시 말했다.
“본래 중국 족속들이란 오 잡처의 여러 무리들이 함부로 뒤섞여 저희들 간에도 말과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 삼국은 비록 그 뿌리는 다르지만 말과 글이 흡사하고,
예식과 종교가 유사하며, 풍류와 향속이 크게 다르지 아니하여 백성들 간에는
일가로 여긴 지가 이미 오랩니다.
당의 속국이 되느니 차라리 계림의 번병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저 혼자만의 뜻이오리까?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라,
오직 대왕의 현명하고 너그러운 처사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법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하에게 물었다.
“그래 과인이 어떻게 도우면 되겠소?”
“남경을 수비하는 당군의 숫자가 1만이요,
도성 부근의 여러 요지에 1만의 당군이 더 있습니다.
우선 그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약간의 군사를 내어주십시오.
압록수 북방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이 10여 곳이 되므로 남경만 되찾는다면
남북에서 서로 협공하여 내지에 들어온 당군을 능히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하의 요청을 들은 법민은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장군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겠으니 과인에게 하루만 말미를 주시오.”
그는 영객부에 명하여 고하를 융숭히 대접하라 이른 뒤
서둘러 자신의 넷째 아우인 파진찬 지경을 불렀다.
지경은 이때 국가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 중시(中侍)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구려 구토의 사정이 예사롭지 않은 듯하다.”
법민은 고하가 했던 말을 아우에게 대충 전한 뒤에 그의 견해를 물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기회입니다!”
지경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사정은 점점 당과 결전을 벌이는 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에서 반란 세력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입니다.
한산주에 말하여 군사들을 모두 고구려 복장으로 갈아입힌 뒤 서해로 배를 내어 돕는다면
당의 시선을 감쪽같이 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경의 말에 법민이 개운 찮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너처럼 생각했다만 저들이 말하는 반란 세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니 걱정이다.
우리가 군사를 낸다고 해도 당이 모르게 하자면 그 숫자는 기껏 1, 2천을 넘지 못할 것인데,
거사가 성공한다면 뒤탈이 없겠지만 만일 실패하면 그 화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것은 자명하지 않느냐? 또한 거사가 크게 성공하는 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제아무리 당의 소행이 괘씸하더라도 유민들이 사직을 일으켜 전날의 고구려로 되돌아간다면
그 또한 낭패가 아니냐?
지금이야 형편이 딱하니 무슨 소린들 못하겠느냐만 나라를 회복하고 나면 사정은 금세 달라질 것이다.
요컨대 돕기는 돕되 그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적당히 도울 것이요,
북방에 주둔한 설인귀의 군대가 힘을 모두 소진하여 궁극에는 우리가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도록 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면 군사는 그만두고 우선은 물자만 내어 저들의 향후 동향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아무래도 그 편이 옳지 않겠느냐?”
형제가 공론 끝에 대충 이렇게 가닥을 잡아가고 있을 때 왕명을 받고 말 기르는 목장 일을
감독하러 갔던 알천의 아들 예원(禮元)이 돌아왔다.
이 역시 앞으로 쓰일 군마를 미리 확보해두려는 법민의 심모원려였다.
“승부령은 고생이 많았다. 그래, 마장을 다 손보고 왔느냐?”
“네.”
“한데 어찌 이리 늦었느냐? 일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40여 목장을 손보고 새로 망아지를 기를 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하느라
약간 지체가 되었습니다.
용서하여주소서.”
“오호, 이심전심이라더니 그대가 과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았구나!”
법민은 예원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들의 땅을 침범하지는 않았는가?”
“그럴 리가 있겠나이까.
새로 지은 마장은 거의 험지를 개간하여 새로 얻은 곳입니다.”
“잘했다. 그 수는 대강 얼마쯤이나 되느냐?”
“130곳이 조금 더 되는 줄 아옵니다.”
“뭐라고?”
법민이 소스라치게 놀라 되묻자 동석했던 지경 또한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저 1백하고도 30곳이나 되는 마장을 어디다 새로 개간하였단 말씀이오?”
그러자 예원이 미연히 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친히 마장을 손보라고 말씀하신 데는 장차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하여
도성 밖의 폐가와 버려진 황무지와 잡목이 무성한 임야를 두루 돌아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말들에게 먹일 풀도 구해두었나이다.”
자고로 군자 중에서도 군마만큼 중한 것이 없었으므로 법민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과연 이찬이다! 하나를 맡기면 열 가지 근심이 절로 해결되는구나.”
그는 예원을 크게 치하하고 당석에서 어명을 내렸다.
“그토록 많은 목장을 관에서 다 관리할 수 없으니 중신들에게 상급으로 주어 말 기르는 일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따라 태대각간 유신에게 6개소, 당에 숙위 중인 대각간 인문에게 5개소,
각간 7인에게 각 3개소, 이찬 5인에게 각 2개소 등 대아찬 이상의 모든 관리들에게 목장을 할애하고
나머지 40곳 정도만 승부와 궁중으로 귀속시켰다.
처리를 끝내고 나자 예원이 물러가지 않고 물었다.
“신이 입궐하며 들으니 망국의 장수가 찾아와 대왕께서 친견을 허락하셨다 던데 혹시 고구려에서
모반하려는 자가 아닌지요?”
법민은 예원을 기특하게 여기던 터였으므로 곧 기밀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