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멸망 7
이 무렵 신라왕 법민(法敏:문무왕)은 날로 노골화하는 당의 흑심을 걱정하느라
거의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에 잠겨 지냈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유업을 계승해 마침내 삼한의 국경을 허물었다는 만족감도 잠시,
언제부턴가 당나라 사신이 속국을 드나들 듯 금성에 나타나 당주의 조서와 칙령들을
무례하게 전하더니 급기야는 사전에 아무 상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함부로 군자(軍資)와
사람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백제 땅에 5도독부를 두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은 그렇다손 치자.
신라를 계림도독부라 칭하고 자신을 계림도독으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동맹국에 대한 실례요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취리산의 억지동맹만 해도 그렇고, 그걸 금서철권으로 만들어 신라 종묘에 보관하도록 한 처사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웅진으로, 평양으로, 무슨 맡겨놓은 물건 찾아가듯 군량과 마초를 실어
나르라고 명령하고 군사와 무기를 요구해대니, 언제부턴가 당나라 사신만 보면
이번엔 또 무슨 가당찮은 말을 물고 왔는지 미리 안색이 변하고 속이 있는 대로 뒤집어질 판이었다.
“이치, 그 용렬한 자의 작태가 갈수록 가관이구나!”
법민은 무리하거나 방자한 요구가 있을 때마다 이를 악물고 초인적인 인내로 화를 삭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법민의 마음은 수백 보씩 당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동맹의 균열은 신라를 압박하는 당의 정책과 이를 받아들이는 법민의 마음속에서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칠 때 법민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동맹국의 책무를 다했다.
당에서 요구한 물자를 차질 없이 공급한 것은 물론이요,
당군이 수세에 몰려 고전을 면치 못할 때마다 원군을 보내 지원하기를
마치 청년이 병든 노인을 구하듯 했다.
무진년(668년) 6월, 당장 유인궤와 낙양에 숙위하던 삼광(金三光:김유신의 장자)이
고구려 토벌을 위한 군기(軍期)와 전술전략(戰術戰略)을 논의하고 헤어진 뒤,
신라는 곧 대대적인 정벌군을 편성해 평양 북쪽 영류산(대성산)에서 당병과 합류하였다.
이후 사천과 평양성 일대의 대문, 북문, 남교, 소성 그리고 평양 군영과 성안 전투에서
신라군은 그야말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특히 평양성의 예봉이 완전히 꺾인 것은 사천 싸움에서 신라 장수 김문영이
고구려군을 대파해준 덕택이었고, 이적이 평양성을 수중에 넣은 것도
문영의 5백 마군이 죽기를 무릅쓰고 분전한 덕분임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적은 싸움이 끝난 뒤 신라가 군기를 어겼다고 트집을 잡아
뒷날 반드시 엄벌에 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낙양으로 돌아가서는
신라에 아무 공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법민 으로선 당최 숨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당이 노리는 바는 자명했다.
법민은 당의 속셈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나름대로 성실히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당(麗唐)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왜국으로 가만히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왜는 백제 부흥군을 돕다가 패하여 물러간 뒤 나당 연합군이 자신들을 치러 올 거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왜의 이 같은 불안감을 없애준 것은 언젠가는 당과 벌일 일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왜가 더 이상 본국 백제를 원조하는 일이 없도록 해두려는 사전포석의 일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를 점령한 당은 역시 백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해
자국의 영토로 만들더니 마침내 신라를 향해 한층 노골적인 마수를 뻗쳐오기 시작했다.
대고구려전이 끝난 직후 당은 신라가 차지한 패수 남쪽의 일부 구역은 고사하고
심지어 30여 년 만에 수복한 비열성(卑列城)까지도 즉시 도호부에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법민왕은 그곳이 본래 신라의 영토였음을 밝히고 이미 관부를 두어 백성들을 옮겼다며 호소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초의 약속과 상도를 벗어난 당나라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주는 승려 법안(法安)을 금성으로 보내 군자에 요긴한 자석(磁石)을 구해 바치라는 칙령을 전하더니
그로부터 얼마 뒤엔 다시 법안을 칙사로 파견해 신라 사람 가운데 구진천(仇珍川)이란 자를 찾아
급히 당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법민은 안색이 백변할 만큼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구진천을 보내라는 것은 금성을 들어 당주에게 바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구진천만은 절대로 보낼 수가 없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계책이 무궁하고 마음이 담대하여 여간한 일에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던 법민 이었다.
탑전에 모인 신하들도 하나같이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고구려를 멸한 당이 드디어 그 여세를 몰아 우리까지 치겠다는 본색을 만천하에 드러냈구나.
아아, 소적을 치기 위해 대적을 끌어들인 줄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그 수작이 어찌 이리도 치졸하고 비열하며 시기 또한 이처럼 급하더란 말인가!”
왕의 탄식이 계속되자 성격이 급하기로 이름난 흠돌(欽突)이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놈들이 보자보자 하니 오만하고 무례하기가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가관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노사(弩師) 구진천은 계림의 보배 중에 보배올시다.
더구나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망했는데 잔적 토벌을 이유로 그를 데려가겠단 뜻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를 치겠다는 수작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요망한 당나라 중놈을 목 베어 죽이고 군사를 양쪽으로 내어 웅진과 평양을
동시에 칩시다!
당군은 고구려와 싸우느라
힘을 많이 소진하였으므로 번개같이 기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자 김유신을 따라다니며 공을 세운 아찬 대토(大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구진천을 데려가겠다는 법안의 말이 비록 당혹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아직은 당과 싸울 시기가 아닙니다.
웅진의 도독부와 평양의 도호부가 서북으로 포진한 형세는
전날 백제와 고구려가 건재했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니
만일 이들을 친다면 여제(麗濟) 양적에다 당까지 보탠 3국 군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같나이다.
또한 웅진의 부여융은 당을 섬기는 충절이 남다르고 그 수하인 예군은 흔히 성충과 흥수의 지략에
비견할 만한 재사(才士)라고들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웅진성 성주 흑치상지는 계백의 무예와 용맹을 능가하는 장수로 정평이 자자하고
평양에는 설인귀 까지 있으니 함부로 결정할 일이 결코 아니옵니다.
신의 생각에는 구진천이 칭병을 하고 법안을 재물로 적당히 구워삶아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그 뒤에도 몇몇 사람이 의견을 내었으나 대개는 흠돌과 대토의 양론을 벗어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대토의 신중론이 우세하였다.
법민은 대토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곧 그에게 당승 법안을 구워삶는 일을 맡기니
대토가 법안을 자신의 집에 청하여 연일 떡 벌어지게 주연을 베풀고 고운 여자를 안겨
환심을 산 뒤에 따로 마련한 자루에 왕이 하사한 재물을 넉넉히 봉박고서,
“그런데 대사, 노사 구진천이 급작스레 괴질을 얻어 이번에 대사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소?”
하며 가만히 법안의 눈치를 살폈다.
법안이 과분한 환대의 내막을 비로소 깨달았으나
그렇다고 재물까지 받은 마당에 아주 모르쇠로 나올 수가 없어,
“이거 야단이 아닌가.”
하며 한동안 낭패로운 기색으로 혀를 차며 앉았다가,
“노사의 득병한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네.”
하고는 대토를 앞세워 구진천의 집을 찾아갔다.
양국에서 이토록 탐내는 구진천은 활을 만드는 명공(名工)으로,
그가 손을 댄 활에 살을 메기면 비록 촌부가 쏘더라도 족히 1천보는 가볍게 날아갈 정도였고,
만일 명궁이 시위를 당기면 강과 성을 사이에 두고도 성루에 앉은 적장 머리를 정확히 관통시킬 만큼
성능이 탁월했다.
백제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신라의 궁척 부대(弓尺部隊)가 바로 구진천의 활 만드는 솜씨 덕택이요,
그가 만든 활을 지니지 않은 신라 장수는 아무도 없었으며,
당장 소정방은 구진천이 만든 활 한 자루를 얻자 천하의 신물을 얻었다며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했다.
이에 구진천의 이름이 당장들의 입을 통해 낙양의 이치와 무후의 귀에까지 이르러 급기야는
법안이 당주의 칙령을 가지고 금성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대토가 법안을 대동하고 구진천의 집에 들어서니 미리 입을 맞춘 구진천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였다.
법안이 이불을 걷고 꾀병 앓는 구진천의 이마를 짚어보며 찬찬히 혈색을 살폈다.
한참 만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신열도 없고 혈색도 좋은데 앓는 소리만 요란하니 확실히 괴질은 괴질일세.”
뜨끔한 대토가 무슨 변명인가를 더 하려고 했으나 법안은 팔을 휘저었다.
“더 듣지 않아도 알겠네.
어쨌든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있으니 황제께는 알아서 여쭙겠네.”
그리고는 싸준 재물을 챙겨 혼자 돌아갔는데 낙양에 가서는 아뢰기를,
“하필이면 빈도가 갔을 때 구진천이 병을 얻어 데려오지 못했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중병은 아니라 서너 달쯤이면 회도할 수 있지 싶습니다.
이번에는 비록 허행하였지만 올 겨울쯤에 다시 가면 반드시 데려올 수 있을 줄 압니다.
그 일은 소승에게 맡겨주십시오.”
하여 당주 내외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한편 법안이 돌아간 후 신라왕 법민은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군신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우리는 강계(疆界)가 백제와 고구려에 인접한 까닭에 서벌과 북벌로 잠시도 편안한 세월이 없었으며,
전사들의 뼈는 부서져 들판에 쌓이고 몸과 머리는 따로 떨어져 강토에 널렸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의 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당주에게 군사를 청하였는데, 이는 양적을 평정하여 쌓이고 쌓인 원한을 갚고
백성들의 수명을 완전하게 함이었다.
이에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쉽게 격멸시키지 못하였더니
최근에 이르러 내가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그 뜻을 완성하였다……
이처럼 고구려 토벌을 공식화한 그는 곧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미한 죄로 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사(大赦)하고, 관작을 뺏긴 자들에게는
다시 옛날대로 벼슬을 주었으며, 곡식이 잘 여물지 않는 땅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아예 조세를 없애주었다.
아울러 옥토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나라에 갚을 이자를 탕감하거나 감면해주는
대대적인 은전을 베풀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앞으로 닥칠 전란에 대비한 또 다른 사전포석으로,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단한 민심을 위무해 새로운 결의를 얻어내기 위함이요,
싸움에서 승리하면 그 혜택이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간다는 점을 상기시켜
또 한 번 단합된 민심을 이끌어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법민의 하교를 끝까지 기록하면 이러하다.
……이제 백제와 고구려의 적들은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었고,
싸움터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이미 상을 내렸으며, 전사한 유혼들에게는
따로 명자(冥資)를 추증하였다.
다만 감옥에 갇힌 죄수는 가쇄의 고충으로부터 읍고(泣辜:죄인을 보고 울어줌)와
갱생의 은총을 입지 못했으므로 이 일을 생각하면 과인의 침식이 불안하니
국내의 죄수들은 대사(大赦)함이 옳을 것이다.
총장 2년(669년:總章은 당나라 이치의 여섯 번째 연호) 2월 21일 미명 이전에
5역죄(五逆罪:君, 父母, 祖父母를 죽인 죄)와 사죄(死罪:사형) 이하를 범한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내놓고, 앞서 대사(大赦)한 이후 죄를 범해 삭탈관직한 자는
다 복구케 하라.
도적죄인은 몸을 놓아주고 변상을 원칙으로 하되 변상할 재물이 없는 자라고 다시 가두지 말라.
또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곡식을 먹은 자로 농작이 부실한 곳에 살면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좋고, 만일 농작이 잘 되는 곳에 살면 금년 추수 때에 단지 그 본 곡만 갚고
이자는 물지 말 것이니, 금월 30일을 기한으로 유사는 이 뜻을 받들어 곧 실행하라.
그로부터 몇 달 뒤 당승 법안이 또 금성을 찾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일전에 꾀병을 앓은 구진천의 일을 말하며,
“만일 이번에도 나를 속이려 들면 황제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오.”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법안은 신라 조정의 의중을 꿰뚫고 오히려 이를 마음껏 농락하고 있었다.
왕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법안이 영객부로 물러가고 나자 왕은 장수들을 불러 말했다.
“웅진과 평양을 동시에 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겠소.
그런데 평양성이 함락된 뒤로 웅진에 주둔하던 당군들이 거의 빠져나갔으므로
부성(府城:도독부의 주성인 사비성)에는 부여융과 일부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밖에 남아 있지를 않소.
비록 녜군과 웅진성의 흑치상지가 있다 하나 세력이 미미하니 무슨 수로 우리와 대적하겠소?
북방의 당군이 도착하기 전에 번개같이 기습하여 백제의 구토를 장악한다면 부여융 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오.”
장수들은 왕이 이미 결전을 치를 각오가 된 것을 알고 군말 없이 이에 순응했다.
왕은 먼저 각간 천존을 대총관 으로 삼고 문충과 죽지를 총관으로 삼은 뒤
품일, 문영, 흠돌, 천품, 군관 등의 걸출한 장수들을 모조리 동원해 웅진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당에 사죄사로 가 있던 흠순과 김양도의 빈자리를 자신의 아우들인
인태(仁泰),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으로 충원했다.
그런데 편전에 모인 장수들이 한창 계책을 세우고 있을 무렵 내관이 와서 아뢰기를
유신의 셋째아들 원정(元貞)이 입궐해 임금께 알현을 청한다고 알렸다.
“어서 들라 하라!”
왕은 논의를 잠시 중단하고 내관에게 일렀다.
원정이 탑전에 이르자 왕은 몸을 일으켜 원정을 맞이했다.
“태대각간의 병환은 어떠하신가?”
본래 신라엔 각간이 제일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백제를 토벌한 뒤에 김유신을 높여 대각간(大角干)으로 삼았고,
고구려를 정벌하고 나서는 다시 유신을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왕제 김인문을 대각간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