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멸망 9
사정 얘기를 들은 예원이 잠시 궁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지금 북방은 누구도 앞일을 장담할 수 없는 안개 속과 같습니다.
비록 고구려의 사직이 끊겼다고는 하나 안시성을 위시한 10여 개의 요동성들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요하의 천리성에서는 여전히 북소리와 징소리가 조석으로 요란하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잔병을 돕는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백제가 망한 뒤에 주류성과 임존성에 웅거하며 사직 재건을 도모하던 잔병들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때 그들은 백제의 2백 성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1백여 성을 회복하며 맹위를 떨쳤습니다.
대개 수백 년 사직이 망하고 나면 재건을 도모하는 무리들은 나오게 마련입니다.
당이 비록 고구려를 수중에 넣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냉정히 말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도움을 청하러 온 자에게 다만 따뜻한 말과 극진한 환대를 베풀어서 보내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북방은 곧 어지러움에 빠질 것인데 어찌 공연한 싸움에 미리부터 참견하여
화를 자초하오리까?
하물며 지난해 사죄사로 당에 입조한 흠순공과 김양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음을 통촉 합소서.”
듣고 보니 예원의 말도 그른 데가 없었다.
법민은 곰곰 생각하다가 아직은 당과 척을 질 때가 아니라던 유신의 글을 떠올리고
예원의 진언을 좇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튿날 고하가 탑전에 불려오자 법민은 다시 주위를 물리고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일렀다.
“과인이 노장군의 말씀을 듣고 밤새 고민해보았으나 우리나라는 연거푸 대전을 치른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산곡간의 피폐함이 황무지와 같고, 곳간은 비었으며,
사람과 말은 모두 지쳐 아무래도 도움을 줄 길이 막연하오.
장군이 이미 우리와 당의 관계를 통연히 꿰뚫고 있으니
대개는 어제 말한 바와 같지만 아직은 본심을 숨기고 사이좋게 지내는 척하고 있는 게 현실이오.
그런데 우리가 군사를 내어 장군을 돕는다면 결국은 당과 일전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고
지금 우리 형편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 딱한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소.”
법민의 말에 고하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신라왕의 말하는 바를 수긍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법민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혜란이 불에 타면 난초가 슬퍼하고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 하였소.
고구려와는 비록 오랫동안 국경을 다투어 원수처럼 지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삼한의 일국이 중국의 종이 되고 그 천년 사직마저 흔적 없이 끊어지기를 바라겠소?
더군다나 전날 귀국의 담덕 대왕(광개토왕)이 크게 강성하여 대륙을 아우르고 북방의 천하 대지를
경략할 적에는 우리가 그 은덕으로 사직을 보전한 일도 있거늘 흥망이 무상하여 이제는 계림의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내 어찌 이를 모른 척 하리요.”
법민은 2백 년도 더 지난 전조의 일까지 들먹이며 고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서 말씀이오만 거사를 한 해만 뒤로 미루시는 게 어떻겠소?
하면 그 동안에 과인이 열심히 군자를 비축하고 안으로 힘을 길렀다가 반드시 원하시는 만큼
도움을 드리겠소.”
법민의 말투며 표정은 진지함과 애틋함으로 가득해 고하로선 진의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음에도 용상 아래 부복하여 격앙된 소리로 아뢰었다.
“형세가 하도 곤궁하여 전후불계하고 달려왔으나 신인들 어찌 대왕과 대국(신라)의 난처함을 모르오리까. 다만 저희의 사정 또한 긴급하와 1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돌아가서 나머지 장수들과 긴히 상의하여 결정을 하겠으니 만일 훗날 다시 도움을 청하거든
그때는 거절하지 마옵소서!”
“여부가 있겠소! 가시거든 과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동료들에게도 꼭 전해주시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다시 뵙지 못하더라도 옥체 만강합시오.”
법민은 고하가 국궁하고 물러나자 영객부에 명하여 약간의 폐백을 마련해주고 안전한 곳까지
군사를 딸려 환송하였다.
그런데 고하가 신라를 다녀간 사나흘쯤 뒤에 법민왕 으로서는 도저히 더는 당을 용납할 수 없는
한 가지 비통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에 사죄사로 가 있던 충신 김양도의 옥사(獄死) 사건이었다.
법민이 특별히 나라의 보배로 만인의 추앙을 받던 흠순과 양도를 당에 사죄사로 보낸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이유인즉 당에 숙위하던 아우 인문이 신라가 백제의 유민들을 함부로 거둬들인다며
당주가 크게 격분했다는 사실을 인편으로 알려왔기 때문인데,
그로부터 1년 만에 흠순이 홀로 돌아와 고하기를,
“신과 김양도가 낙양에 입조하는 그날부터 옥에 갇혀 지금껏 지내다가
신은 대각간 인수(仁壽:김인문의 字)가 눈물로 읍소한 덕택에 풀려나 겨우 환국을 허락받았으나
양도는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양도와 신은 함께 죽기를 맹약한 사이라 신 또한 낙양에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대왕께 억울한 사정을 알려야겠기에 일촌간장이 에이는 비통함과 죽어도 잊지 못할 수모를 참아가며
망극 하옵게도 홀로 어전에 이르렀나이다.
대왕께서 신을 죽여주옵소서!”
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법민이 흠순과 양도를 사죄사로 보낸 데에는 나름대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당주와 무후의 노여움이 군사를 일으킬 정도라는 인문의 서신을 받고 만조를 통틀어
적임자로 삼았던 이가 곧 흠순과 양도였다.
흠순으로 말하면 왕의 외숙이요,
양도는 무려 여섯 차례나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했던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당에서도 알아주던
천하의 명장이며 양신들이었다.
적어도 사죄사의 격을 그 정도로 높이면 틀림없이 일이 잘 무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게
법민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주는 이러한 법민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고 동맹국 왕실에서 사죄사로 파견한 사람을,
그것도 왕의 외숙까지 근 1년이나 옥에 가두어 고생을 시키고, 그도 모자라 한 사람은 끝내
옥에서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동맹의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법민은 이때의 일을 신라에 대한 당주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백제 멸망 이후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롭던 나당(羅唐) 관계가 마침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법민은 흠순을 부둥켜안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과인이 부덕하고 용렬하여 연로하신 외숙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곡경을 치르게 하였으니
이 죄를 무엇으로 빌어야 하오리까!”
하며 울먹이니 설상가상 흠순이 다시 아뢰기를,
“더욱 기막힌 일은 장차 우리나라와 백제의 경계선을 획정(劃定)하여 유민들이
함부로 넘나들 수 없도록 하겠답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지도를 세밀히 살펴 우리가 차지한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웅진에 돌려주라고
하였나이다.”
하고 덧붙였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의 구토마저도 모조리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법민은 홀연 머리털이 곤두서고 치가 떨려 부들부들 진저리를 쳤다.
“아아, 당나라 놈들의 야수 같은 소행이 어찌 이처럼 날로 오만하고 무례해진단 말인가!”
그는 곤두선 머리털이 왕관을 치켜들 만치 비분강개하였다가 이윽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혼절하였다.
어의가 부리나케 입궐하여 왕을 진찰하고 처방을 썼다.
그러나 반나절 만에 간신히 깨어난 법민은 이내 핏발선 눈을 부릅뜬 채,
“내 어찌 저들을 용납할 것이며, 양도의 한 맺힌 원수를 갚지 않을 것인가! 장수들은 모두 들라!
오악(五岳)이 풍우에 씻겨 모래알이 되고 알천과 황천(낙동강)의 강물이 마를 때까지
필사의 힘을 다해 당과 싸우리라!”
말을 마치자 부들부들 사지를 떨다가 다시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두 번씩이나 쓰러진 왕은 한동안 운신하고 기동하는 데 내관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서 군신들과 백성들의 애를 태웠다.
이에 태자 정명이 나서서 신하들의 접근을 막고 사량궁(沙梁宮)으로 비접을 나가 지냈는데,
고구려로부터 당나라 도호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는
낭보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당에서는 이들을 반란군이라 칭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다물군 이라 불렀으니
다물(多勿)이란 국토 회복을 뜻하는 고구려 말이다.
패수 남변의 궁모성을 근거로 일어난 다물군의 숫자는 처음에는 고작 3천 명에 불과했으나
소문이 퍼지자 산지사방에서 유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금세 5, 6천을 헤아렸고,
급기야 달포 만에 1만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군장과 무기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향군들이요,
손에 든 것이라곤 대부분 농기구와 집에서 쓰던 연장이었다.
그러나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생사를 돌보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불구대천 원수를 만난 듯
당군들을 처참히 죽이는가 하면, 심지어 그 인육을 입에 씹으며 격렬히 날뛰었으므로
이내 당군들 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다물군은 순식간에 패수 일대를 장악하고 매일 2, 30리씩 북으로 진격해 설인귀의 1만 군대와
도성 남단에서 대치하였다.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압록수 북방까지 전해졌고,
당에 항복하지 않았던 천리장성 부근의 10여 개 제성들도 크게 고무되어
곧 남북으로 성원상접(聲援相接)하려는 태세를 취하고 나왔다.
궁지에 몰린 설인귀는 황급히 본국 조정에 원군을 요청했다.
급보에 접한 낙양에서는 말갈에 진무사(鎭撫使)로 가 있던 연산도총관 이근행(李謹行:말갈 출신의 장수)에게 반란군의 진압을 명하는 한편 요동 지리에 밝은 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파견해
이근행의 진압군을 돕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이 수나라 양광의 침략에 대비해 구축해놓은 요동의 석성(石城)들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들이었다.
오죽하면 양광의 군사 수백만이 반년 이상을 주둔하고서도 분루를 삼키며 돌아서야 했으랴.
이 근행은 요동 반란군의 근거지인 장성 부근 안시성과 요동성 일대를 달장근이나 공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양에서 당도한 고간의 군사들에게 그곳을 맡기고 자신은 말갈의 군사들과 함께
압록수에서 가까운 오골성 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평양의 설인귀로부터 원군을 요청하는 두 번째 급보가 날아들었다.
압록수 이남의 반란군을 제압하자면 결국 신라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형국이었다.
백제가 멸망하던 무렵부터 이미 국사의 전권을 도맡아 행사하던 측천무후는 신라에 사신을 급파해
위급함에 빠진 설인귀를 도우라는 황제의 칙령을 전했다.
한편 당이 고구려 다물군의 저항으로 한창 홍역을 치르는 동안 신라 태자 정명은 원병을 요청하러
금성을 방문한 설인귀의 사신을 만났다.
그는 아버지 법민을 대신해 설인귀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부왕께서 지금 환후가 위중하여 정무를 제대로 살필 수 없으니
이는 귀국에 사죄사로 갔던 우리 장군 김양도가 처참하게 옥사를 당했기 때문이다.
동맹국의 굳은 결의와 아름다운 약속을 먼저 헌신짝처럼 저버린 그대들이 무슨 염치로
우리에게 원병을 청하러 왔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구나.”
하고 선 채로 한참을 꾸짖은 뒤에,
“지금은 대왕의 환후가 워낙 깊어 어떤 말씀도 아뢸 수 없으니 그리 알라.
다만 차도가 있으면 적당히 기회를 봐서 여쭐 것이되 낙양에서 억울하게 죽은 양도는
대왕께서 평소 혈육과 같이 여기시던 사람이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양도가 살아오지 않는 한 아마 원병을 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며 말을 분질렀다.
사신이 평양으로 돌아간 뒤 하루는 흠순이 사량궁에서 정양 중인 법민을 찾아왔다.
시위부 군사들에게 자신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던
태자 정명이 처음에는 찾아온 사람을 묻지도 않고,
“천지가 뒤바뀌는 일이 아니거든 훗날 들라고 하라.”
하며 물리치려 하였는데 내관으로부터 입궁한 이가 흠순 이라는 말을 듣자 두말없이 달려 나가
절한 뒤에 친히 흠순을 안내해 왕 앞에 이르렀다.
법민이 핼쑥한 얼굴로 흠순을 반갑게 맞이하고서,
“외숙께서는 옥사에서 고생한 사독이 조금 풀리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흠순이 웃으며,
“신이 앓을 여독을 대왕께서 대신 앓고 계시니 더욱 민망합니다.”
하여 법민은 고사하고 정명까지도 모처럼 밝은 표정으로 소살하였다.
법민이 아직도 양도의 일만 생각하면 피가 끓어 참을 수가 없다 하고,
그러나 흠순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을 천행으로 여겨 심신을 다스리는 중이라고 말하니
흠순이 한동안 무춤거리다가,
“양도가 신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하고는 연하여 이르기를,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아직은 당과 결전을 치를 때가 아니니
대왕께 잘 말씀드려 국사가 감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했다. 그 말을 듣고 법민은 양도가 더욱 그리워져서 눈에 물기가 그득하였다.
흠순이 대왕의 심란해하는 것을 보자 문득 건강을 해칠까 두려워져서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신이 대왕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태대각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섭니다.”
유신의 말을 전하러 왔다는 소리에 법민의 안색은 금세 밝아졌다.
법민이 유신과 흠순, 두 외숙을 의지하고 따르는 마음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큰 외숙 유신을 믿고 흠모하는 정은 너무도 깊고 자별해서 가끔은 맹목적이다
싶을 때마저 있었다.
“그래 대장군의 환후는 좀 어떠하십디까?”
“신이 떠나기 전보다 많이 좋아진 듯합니다.”
“조만간 바깥출입을 하실 수 있겠던 지요?”
“지금도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측간에는 다닐 정도이니 그러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흠순의 말에 법민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전에는 야간에 미복으로 대장군을 자주 찾아뵈어 궁금한 것이 덜하였는데
한번 크게 꾸지람을 들은 뒤로는 통 뵙지 못하니 아무래도 과인의 병이 거기서 연유된 듯합니다.”
그것은 법민과 유신, 둘만 알았지 흠순이나 정명으로선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다.
“설마하니 신하의 도리를 아는 형이 감히 전하를 꾸짖기야 했겠습니까.”
“작은 외숙께서도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허허, 한 사람의 병든 족친을 섬겨 만신의 충절을 잃으려 하느냐고 아주 눈물이 쑥 빠지도록
야단을 쳤습니다.
제가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 뒤로 큰 외숙의 집 근처는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지냅니다.”
법민의 설명을 듣자 흠순은 평소의 언행대로 김유신을 조롱했다.
“형이 본래 신통한 소리를 제법 하는 사람이지요.
그 바람에 이름이 높아져서 낙양의 애들까지 김유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흠순은 유신의 전언을 상주하였다.
“신이 환국 인사차 형의 집을 찾아갔더니
형이 시종 전하의 환후를 걱정하면서 이는 필경 몸의 병이 아니라 심병(心病)일 테니
그 병환을 다스릴 사람도 의원 가운데 있지 않고 조정 대신 중에 있다고 하였나이다.
그러면서 전하께 특별히 한 사람을 천거해달라고 하였으니
그는 지금 내관에서 상서와 작문의 일을 맡아보는 내마 자두(字頭)이올시다.
계림의 문장 자두의 지략이라면 지금 전하를 괴롭히는 심병쯤은
능히 퇴치할 수 있을 거라는 게 형의 얘기였습니다.”
법민이 자두라는 이름을 이때 처음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상서와 작문의 일을 맡아보는 문장이라면 전에는 양도와 풍훈(金風訓)이 있었고
지금은 강수(强首)와 설수진(薛守眞)이 있을 뿐인데 자두라는 이가 다시 어디에 있는지요?”
그러자 흠순이 웃으며 대답했다.
“강수가 곧 자두입니다. 강수는 붕어하신 선대왕께서 지어 부르신 이름이요,
자두는 그의 집안에서 부르는 이름이올시다.”
법민은 강수가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얻어 태종무열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계책과 지략을 가진 사람인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법민은 무열왕 즉위 이후 바쁘게 팔방을 돌아다니느라
강수를 직접 면대하여 얘기를 나눈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강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법민이 묻자 흠순이 강수에 관한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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