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멸망 5
당나라 관리들은 부임하기 직전에 반란을 경계하는 조정의 교시를 받았고,
마소삼도 그 교시에 따라 침소를 위장해 지내오고 있던 터였다.
일이 틀어졌음을 안 검모잠은 그대로 내당을 빠져나와 옥사를 향해 달려갔으나
이때는 이미 번을 돌던 순라들이 안채에서 나는 심상찮은 인기척을 들은 후였다.
검모잠은 옥사가 저만치 바라 뵈는 곳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10여 명의 군사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웬놈이냐!”
창칼을 든 군사들이 검모잠을 에워싸며 소리쳤다.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검모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사방의 군사들을 상대로 칼을 휘둘렀다.
멋모르고 대들던 졸개 서너 명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나둥그러지자 군사들은 그제야
상대가 범상 찮은 인물임을 알아차리고 자객이 나타났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순식간에 관아가 발칵 뒤집히고 횃불을 든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나왔다.
내당의 아래채에서 양쪽으로 계집을 끼고 잠들었던 마소삼도 깜짝 놀라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뭣들 하는 게냐! 저 흉악한 놈을 당장 붙잡아라!”
현령의 다그치는 소리에 군사들이 일제히 칼날과 창끝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해마다 북방의 격전지를 누볐던 고구려의 명장이었다.
아무리 혼자 몸이지만 한낱 향리 졸개들의 두서없는 창칼에 당할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검모잠은 도성에서부터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한꺼번에 풀려는 듯 대갈일성 포효하며
무섭게 칼을 휘둘렀다.
그의 장검이 숲을 지나는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턱대고 달려들던 군사들이
2, 3명씩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실로 날렵한 몸놀림이요,
현란한 검술이었다.
옥사가 보이는 관아의 마당은 이내 향군들의 시체와 잘려나간 목,
스치는 칼날에 떨어진 신체의 일부와 낭자한 유혈 따위가 뒤범벅이 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이놈들아, 머뭇거리지 말고 대들어라! 수십 명이 어째 한 놈을 당하지 못한단 말이냐!
주저하는 놈들은 똑똑히 보아두었다가 나중에 필히 형벌로써 다스릴 것이다!”
마소삼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팔짝팔짝 뛰어대며 닦달하고 협박하였지만 군사들은
나중의 형벌보다도 귀관이 출몰하는 목전의 생사가 더 위중했다.
검모잠은 완연히 겁을 집어먹고 무춤거리던 앞줄의 군사 하나를 제물로 삼아
한 번 칼질에 허리를 여지없이 동강내고 나서 곧 사방을 둘러보며,
“이제 죽은 자가 절반을 넘어섰구나! 목숨이 아깝거든 지금 달아나라!
만일 눈치를 살피며 미적거리는 자가 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이 꼴로 만들어 주리라!”
하니 멀찌감치 에워쌌던 향군들이 일제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는데,
“네 이놈들!”
하는 호통소리가 나자 그만 부리나케 줄행랑을 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호통은 검모잠이 지른 게 아니라 현령 마소삼의 것이었다.
물러서지 말라고 지른 고함소리에 오히려 군사들이 뿔뿔이 달아나자
혼자 남은 마소삼은 돌연 눈앞이 캄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엉겁결에 그도 도망가는 군사들을 뒤쫓아 내당으로 피신한 뒤 안에서 빗장을 걸고
아래채 마루 밑으로 숨어들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위세만 부릴 줄 알았지 실은 칼 한 번 잡아보지 못했던
책상물림 마가가 이때 얼마나 혼비백산했으면 입고 있던 바지가 다 축축했다.
그러나 마소삼은 약삭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마루 밑에 숨었다가 마침 현령의 일이 걱정되어 나타난 늙다리 당인 하리(下吏)에게
자신의 관복을 입혀 대신 숨게 한 다음 자신은 하리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
마소삼이 그런 수작을 부리는 동안 검모잠은 옥사의 문을 열고 온사문의 식구들을 밖으로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온사문과 큰아들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산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고,
노환이 있던 온사문의 처도 봉변 끝에 그만 정신이 나갔는지,
“낭군님 오셨구랴.”
검모잠을 치바라보고 배시시 웃더니 돌연 비틀거리며 일어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춰가며,
“주필산(요동)에 춘화가 만발하면 태평지절 온다기에 연지곤지 찍고 손꼽아 기다렸더니
우리 낭군 오실 제 마음이 변하였나, 지천으로 핀 그 꽃을 왜 아니 꺾어왔소.”
하고 얄궂은 노래를 불러댔다. 함께 붙잡혀 있던 딸과 며느리들이 그런 노모를 양옆에서
부축하려 들자 이번에는 이년들이 사람 잡는다며 마구 고함을 질러대니
그나마 몸이 성한 온사문의 둘째 아들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은 고맙기 한량없으나
우리는 벌써 살아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고서,
“이곳에 붙잡혀온 뒤로 아버지께서는 진작에 사람들을 끌어 모아 당과 대적하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셨습니다.
이제 장군께서 몸을 일으키셨으니 저희는 이대로 두고 더 큰일을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직이 망할 때 왕실 사람들은 대개 다 이적이 낙양으로 끌고 갔으나
오직 임금의 서자인 안승(高安勝)만이 목멱산 동황성에 숨어 지내는 바람에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적자인 복남(福男), 덕남(德男)보다도 훨씬 인품이 높고 기개가 뛰어나서
임금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남생의 아들들을 개 꾸짖듯 꾸짖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승은 문무를 겸비하고 지모도 출중하여 능히 임금의 재목이 될 만한 사람이니
장군께서는 그를 찾아서 사직의 재건을 도모하십시오.
이는 저의 소망이자 저기 누워 계신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합니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
검모잠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거적 위에 누운 온사문의 팔과 어깨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보았으나
그는 가까스로 숨만 쉴 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하는 수 없다고 판단한 검모잠은 성한 둘째 아들에게 말했다.
“그럼 자네와 나머지 분들이라도 나를 따라 가세나.
밖에 자네의 매부가 말을 준비하고 기다리네.”
그러자 둘째 아들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마저 가고 나면 아버지의 시신은 누가 거두겠습니까?
또한 여자들도 장군을 따라가면 공연히 짐만 될 뿐입니다.
우정 데려가시려거든 누이와 계수씨만 데리고 가십시오.
계수씨가 여기 있는 한은 군역을 나간 아우의 목숨마저 위태롭습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검모잠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뒤 시신이나 다를 바 없는 온사문을 향하여
큰절로 하직 인사를 하고서,
“당나라 현령놈은 내가 죽이고 가네. 자네는 식구들을 집으로 옮기게나.”
말을 마치자 두 여인을 데리고 나와 후문에서 기다리던 사위에게 인계한 뒤
곧장 발걸음을 돌려 내당으로 달려갔다.
질러놓은 내당의 빗장은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선 검모잠의 발길질에 대번 박살이 났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아래채로 달려가 방문을 확 잡아채니
현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겁에 질린 여자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현령놈은 어디로 갔는가!”
검모잠이 분기에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저희는 모릅니다.”
“아까 소란 중에 나가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번갈아 대답했다. 하지만 그 중의 한 여자가 말과는 달리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마루 밑을 가리켰다. 검모잠이 비로소 눈치를 채고,
“그대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현령놈을 잡으면 따끔하게 야단을 치려고 했는데
이놈이 뵈지 않으니 불이나 질러 분풀이나 하고 가야겠다.”
하고서 방에 켜둔 등촉을 가져다가 마루 밑으로 훌쩍 집어던졌다.
가슴을 죄며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던 당인 하리가 기겁을 하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는 검모잠을 보고 맨땅에 넙죽 엎드려,
“소인은 현령이 아니올시다.
소인은 다만 현령의 명을 받고 마루 밑에 숨어 있었을 뿐 절대로 현령이 아니올시다!”
하며 사정을 밝혀 말하였다.
하지만 검모잠은 당나라 말을 쓰고 관복까지 입은 그의 주장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현령이 목숨을 구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라 믿은 그는,
“닥쳐라, 이놈! 네 감히 누구를 속이려 하느냐!”
땅이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과 함께 단칼에 목을 쳐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죽인 자의 목과 육신을 창에 꿰어 관아의 대청에 걸어놓은 뒤에야 유유히 강서현을 떠났다.
밤새 길을 재촉한 검모잠 일행이 해포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해가 동천에 훌쩍 치솟아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위의 벗은 이름이 음직(陰稷)으로, 육덕이 실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첫눈에도 힘깨나 쓸 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성품마저 호방한 그는 강서현의 얘기를 전해 듣자,
“당나라 놈들이 들이닥친 후로 늘 뱃속이 그들먹하고 징건하더니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체기가 싹 가시오.
정말 자알 하셨습니다!”
하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일행을 보며,
“이곳 해포는 수군 진지를 폐쇄하는 바람에 감시가 오히려 허술할뿐더러 관아의 군사들은
거의 다 전날 내가 훈련시킨 아이들이올시다.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내 집에 계시면 별탈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온사문의 뜻을 받들기로 마음을 도슬러먹은 검모잠은 음직의 집에서
한숨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돌연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일행들은 지금쯤이면 마소삼의 죽음이 외관으로 알려져서 방비가 삼엄할 거라고 걱정들이 심하였다.
검모잠은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옥사에서 들은 온사문의 뜻을 대강 설명했다.
“어제 왕경에 나붙은 격문을 보니 삼짇날 망국의 울분을 품은 자는 목멱산으로 모이라 하였는데
왕자 안승이 동황성에 있다니 어쩌면 그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어쨌거나 나는 동황성 으로 가서 안승 왕자를 만나볼 작정이오.
그래서 만일 그가 들은 말과 같이 섬길 만한 인물이고 또 사직의 재건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도와 큰일을 도모할 것이외다.”
얘기를 듣고 난 음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승 왕자 얘기는 나도 들은 바가 있거니와 남생이 두려워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안승이라 합디다.
이제 모잠 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목멱산에 모이라는 격문은 그와 관련된 것이 틀림없는 듯하오.”
음직은 검모잠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직위허를 통탄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소?
이곳 해포에는 약간의 손만 보면 당장이라도 띄울 수 있는 선박이 1백여 척은 되고
또 내가 나서서 사람을 모은다면 5백 명 정도는 어렵잖게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장군이 안승 왕자를 만나 대사를 도모하게 되면 반드시 내게도 기별을 주십시오.
틀림없이 보탬이 될 것입니다.”
검모잠은 음직의 말에 큰 힘을 얻었다.
“그러지요. 공과 같은 충절이 있는 한 어찌 성급하게 망국을 논하겠소.
수군이 필요하게 되면 당장 해포로 달려오리다.”
그는 음직에게 일행들을 부탁한 뒤 이른 저녁까지 얻어먹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검모잠이 막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온사문의 며느리 이씨가 별안간 검모잠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강서현의 일로 고을마다 경비가 삼엄할 것을 들어,
“저를 데려가신다면 장군께서도 사람들의 의심을 한결 덜 받을 것이지만
저 또한 그러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여기 형님 내외분은 돌아갈 본댁이라도 있으나 저는 이제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제발 엎드려 청하옵건대 장군을 따라다니며 고구려 군사들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이라도
거들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야만 시댁이 멸문하고 지아비와도 헤어진 제 가슴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처음만 해도 검모잠은 이씨의 말을 거절하려 했지만 이씨에게 별반 감정이 좋지 않던 온사문의 딸이,
“어디를 가든 그것은 자네의 자유이나 앞으로 두 번 다시 강서향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게!
나는 자네 아버지의 군역을 대신 나간 내 아우가 돌아오면 자네가 죽었다고 말하겠네!”
하며 냉담하게 쏘아붙이는 말을 듣고서야 이씨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결국 온사문은 말에서 내려 마차로 갈아타고 둘이 작반하여 해포를 떠나게 되었다.
여자와 동행한 덕택인지 검모잠은 군사들에게 심문 한 번 당하지 않고 무사히 평양까지 들어왔다.
그는 우선 아는 사람의 집에 이씨를 데려다놓고 삼짇날 목멱산에를 대어갔더니
동황성 밖 신묘 사당에 모인 장정들의 숫자가 족히 6, 7백은 돼 보이는데,
앞에 나와 그들을 통제하는 조의 복장의 젊은이들 중에는 전날 주막에서 담을 넘어 도망갔던
낯익은 면면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장정들을 일일이 면대하여 이름이 무엇이냐,
전에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무기는 다룰 줄 아느냐,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었느냐 따위를 시시콜콜 따져 묻고서 선에 든
사람들만 따로 사당 뒤편 공지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윽고 검모잠의 차례가 되어 묻는 말에 답을 하니 조의가 이름 석 자만 듣고는 돌연 반색을 하며,
“장군께서 오셨습니까? 예서 잠시만 기다립시오.”
하고서 부리나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내 사람 하나를 달고 나타났다.
“이게 누구신가? 연무(高延武)가 아닌가!”
검모잠은 조의를 따라 나온 사람을 보자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가 덥석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네가 오기를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네.”
고연무가 그런 검모잠을 향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전날 위기에 빠진 안시성을 구원하러 갔다가 당태종에게 포로로 붙잡혀
장안에서 죽은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의 아우로, 검모잠과 같은 수림성 사람이었다.
양인은 어려서부터 동향에서 자란 죽마고우이자 한때는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맹약할 만치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벼슬길에 나온 뒤부터 그만 사정이 달라졌다.
온사문의 영향을 받아 서진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던 검모잠과는 달리 연무는
억울하게 죽은 형을 생각해 끝까지 서벌을 주장하던 개소문의 뜻을 충실히 받들었고,
개소문이 죽은 뒤로는 남생을 섬겨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벼슬이 태대형에까지 올랐다.
이를 두고 검모잠은 연무가 나라와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출세와 문달을 추구한다고 여겼으며, 연무는 연무대로 검모잠을 기피하여 둘 사이가 꽤나 데면데면하고 버성겼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이제 다 무슨 소용이 있더란 말인가.
나라는 망하고 사직은 폐허가 되어 똑같이 처량한 망국대부의 신세로 만났으니
오직 남은 것이라곤 동향의 향풍에서 힘과 뜻을 기르던 죽마고우의 옛정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