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2장 충돌기 1

오늘의 쉼터 2014. 11. 26. 23:31

제3장 충돌기 1

 

 

 

 

“아니, 채연씨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채연의 말에 진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발끈했다.

그런 그를 봉수와 애란이 놀라 바라보았다.

 

 

 

 

봉수와 진국은 채연과 애란과 함께 오사카로 출발했다.

 

기존에 제작했던 속옷 샘플을 싸이즈별로 열 세트,

그리고 채연과 진국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브래지어도 싸이즈별로 다섯 세트를 챙겼다.


진국은 제품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비롯해 전시회와 관련된 잡다한 진행 전반을 맡았고,

일본에서의 숙식과 통역은 애란이 담당하기로 했다.

 

네 사람이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건 해질 무렵이었다.

인공섬 위에 조성된 공항이라 요새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네 사람이 공항 대합실 1층으로 향했다.

 

“우리가 묵을 곳은 힐튼 오사카라는 곳입니다.”

 

진국은 후텁지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이라곤 일본이 처음인데, 원래 여긴 이렇게 공기가 답답한가요?

나는 왜 그런지 답답하네요.”

 

“오사카는 제주도보다 남쪽에 있는 도십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습도도 높구요.”

 

애란이 진국을 쳐다보며 설명했다.

 

“그나저나 노 선배는 언제 일어를 배웠습니까?”

 

“입사한 뒤에요.”

 

“얼마나 하면 노 선배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까?”

 

“하기 나름이죠 뭐.”

 

애란은 오사카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티켓을 끊었다.

 

“노 선배는 꼭 동네 나온 사람 같아요.”

 

“그냥 방황할 때 좀 다녔죠.”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깔끔하고 깨끗했다.

진국은 일본인에 대한 막연한 미움이 슬슬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참 묘하죠. 왜 우린 일본 사람들한테 나쁜 감정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어요.”

 

채연이 애란의 뒷통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일종의 유전자 인식 같은 겁니다.”

 

진국이 또 잘난 체 하기 시작했다.

 

“유전자 인식이 뭡니까?”

 

“에, 그러니까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걸

유전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때 대다수의 국민이 피해를 봤는데

그 피해를 본 감정이 그냥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걸 겁니다.”

 

“그래서 일본하고 우리 공만 차면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된건가요?”

 

“채연씨만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왜 그런지 다른 나라하고 공 차는 건 모르겠는데

일본하고 붙었다 하면 괜히 열이 나고 지면 눈물이 다 나고 그러더라구요.”

 

애란도 채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한 감정이 우리완 많이 달라.”

 

봉수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테지. 지배자였으니까. 그냥 아량 같은 거잖아.”

 

“왜 자기네를 미워하는 지 모르겠대.”

 

“지 놈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까 그러겠지.”

 

“우린 제대로 알고?”

 

“야, 너 일본하고 무슨 연고 있냐?”

 

진국이 발끈하자 봉수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넌 다혈질이다.”

 

봉수가 진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버스는 1시간 남짓 달린 후 오사카 역에 도착했다.

 

“내일 저녁 6시부터 신우메다 시티라는 곳에서 각 회사의 속옷 패션쇼가 열립니다.

저희 옷을 입어줄 모델로 재일교포 출신들을 섭외했으니까,

그건 해결이 됐고. 상담 부스엔 유학생 한 명이 나와 통역을 해주기로 했고….”


애란이 수첩을 들춰보며 내일 일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상담 부스는 누가 지켜 주실 겁니까?”

 

진국과 봉수가 서로 눈치를 봤다.

상담 부스는 패션쇼가 열리는 외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제가 하죠.”

 

봉수가 선뜻 나섰다.

 

“그래, 나는 원래 덜렁대서 상담 체질이 아냐.”

 

진국이 봉수의 어깨를 쳤다. 봉수는 그냥 웃었다.

 

“그리고 채연씨가 우리 팀 워킹 시간에 마지막 휘날레를 장식할 겁니다.

그럼 진국씨는 모델에게 싸이즈 별로 옷 찾아주고 무대로 나갈 때

색깔 순서대로 내보내시는 거 잊지 말구요.”

 

“그런데 나한텐 통역이 없습니까?

난 일본말이라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하고 스미마셍 밖에 모르는데.”

 

‘거기에도 유학생 한 명이 붙기로 했어요.

그리고 리허설은 내일 오후 1시부텁니다.

다른 회사들하고도 조율을 해서 시간이 따로 정해질 겁니다.”

 

애란은 펜으로 한 항목씩 체크해 나갔다.

 

“자, 자. 점검은 끝났고 이젠 기념 사진 한장….”

 

진국이 디카를 꺼내들었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창가 쪽으로 몰려 섰다.

창 밖으로 오사카의 야경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방을 두 개 잡았는데 저랑 채연씨랑 같이 쓰는 겁니까?”

 

“진국씨!”

 

진국의 농담에 채연이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발끈했다.

 

“아 아, 농담입니다.

회사에서 실은 그런 배려로 우리 네 사람을 보낸 게 아닌가 해서….”

 

봉수가 곁에 있는 베개를 들어 진국에게 던졌다.

 

“흰소리 말고 얼른 와서 안서!”

 

진국이 디카를 자동으로 조절해 놓고 사람들 사이로 달려와 섰다.

후레쉬가 터졌다.

진국이 디카에 찍힌 얼굴들을 보고 웃었다.

 

“저녁 먹으러 가죠.”

 

“여기 호텔에서 먹을까요?”

 

“여기까지 와서 호텔이라니, 도톤보리로 가야지.”

 

“진국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애란이 서류들을 챙기며 물었다.

 

“첨 외국에 나오는데 그 정도는 준비해야죠.”

 

진국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 솔직히 얘기해. 아무래도 공항에서부터 하는 행동이 무척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너 외국 여행이 처음이란 거 거짓말이지?”

 

봉수가 진국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냐. 정말 첨이야.”

 

“아무튼 30분 뒤에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애란과 채연이 진국과 봉수가 묵는 방에서 나갔다.

 

“그나저나 난 여러 가지가 의문이다.”

 

“뭐가?”

 

“왜 우릴 여기에 보냈을까?”


도톤보리는 한국의 신촌과 흡사했다.

젊은 사람들의 유흥가였다.

 

오사카를 동에서 서로 가르며 흐르는 도톤보리 강을 끼고

양편으로 술집과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공항도 인공섬이고 이 강도 인공천이지.”

 

진국은 갖가지 네온과 조명들로 화려해진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국씨 많이 아시네요. 정말로 외국 여행이 첨이세요?”

 

“참 사람들도 제 말을 그렇게 못 믿으실까….

 

진국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이 강은 1615년에 완성된 인공천입니다.

그래도 예전엔 물고기들이 뛰어 놀았다고 하는데 여기도 많이 더러워져서

물고기 구경하긴 힘들어졌지요.”

 

애란이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는 사이 진국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곤 게요리집이라고 쓰여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진국의 뒤를 따랐다. 거리엔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진국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일본라면집이었다.

 

“우리 여기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어디 가서 뜨거운 샤케나 한잔씩 합시다.”

 

“너 일본에 자주 다녔지?”

 

“아녀. 이래저래 주워 들은 정보 덕택이지.”

 

진국은 봉수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언제 이런 델 다녔을까?”

 

봉수가 넘겨짚었는데도 진국은 라면 메뉴판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만 했다.

 

“이게 맛있다고들 하더라.

다른 거 먹어봐야 입만 버리니까 내가 시킨 걸로 다들 먹어.”

 

애란과 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국이 주문한 라면은 국물은 얼큰했고 면발은 쫄깃쫄깃했다.

사이사이 썰어놓은 어묵 맛도 매콤했다.

서울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출발한 터라

다들 허기져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릇을 비웠다.

 

“저도 오사카에 와봤지만 이 라면은 처음 먹어봤어요.”

 

애란이 입가를 닦으며 진국을 쳐다봤다.

 

“나도 첨입니다.”

 

진국은 빙글빙글 웃었다.

 

“도무지….”

 

봉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혹시 진국이가 오성 그룹 회장 아들? 성이 다르잖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봉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국에겐 부자들 특유의 어떤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진국은 같은 대학 출신이고 사진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터였다.

그리고 진국은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내가 엉뚱한 상상을 다하고 있네. 그런데 진국이네 집이 어디였지?’

 

봉수는 그 생각을 하다가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국은 가끔 봉수의 작업실에 와서 잠을 자고 가긴 했지만

봉수가 진국의 집엘 갔던 적은 없었다.

 

‘별 엉뚱한 상상을 다하네.’

 

봉수는 계산을 하는 진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 한 구석 당찬 데가 없었다.

지각하기 일쑤고 틈만 나면 탈의실의 여자들이나 훔쳐보는 진국이었다.

 

‘아무튼 미스테리야,’

 

봉수는 라면집을 나오며 진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어디 가냐?”

 

“난 이제 몰라. 라면 집만 알지.”

 

진국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우메다 시티는 최신식의 건물이었다.

 

여의도의 63빌딩보다 높진 않지만 마치 파리의 개선문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 공중정원에서 속옷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각 나라의 쟁쟁한 의류 회사들이 대부분 참여를 했다.


봉수는 패션쇼장 외부의 상담부스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라, 돌체앤가바나, 페라가모, 프라다, 구찌 등 액세서리와 의류 속옷 등

전방위적인 업체들의 상표가 보였다.

비라의 매장도 보였다.

패션쇼장에선 요란한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대 출입구쪽 문은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때요?”

 

애란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이 행사가 원래 이렇게 큰 행사였습니까?”

 

“저도 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건 처음이에요.”

 

각 회사의 상담 부스는 ‘코지’의 상담 부스와는 천양지차였다.

상담 부스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매장이었다.

일반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모델 대여섯 명이 속옷을 입고 자유분방하게 춤을 추거나

상담 부스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동양계 모델들도 있지만 서양계 모델들이 더 많았다.

관람객들은 연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비라’의 매장도 러시아계 모델 네 명이 속옷을 입고 가볍게 춤을 추며

관람객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지금 알았어요.

박람회 측에서 보낸 공문을 보니까 일정 공간 이상의 부스를 쓸 경우

사용료를 내도록 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린 그냥 기본 부스만 신청을 한 터라 이렇게….”

 

‘코지’의 매장은 초라했다.

마네킹 세벌을 가져다 놓고 속옷을 입혀 놓은 게 전부였다.

부스 뒷편 벽면에 하와이안 시리즈 속옷을 입고 찍은

홍라라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노 선배 몰랐어요?”

 

“서울에 전화해 본 후에야 알았어요.

공문을 기획실에서 받았는데 저한테 공문이 내려온 항목 중에

부스에 관계된 세부 항목은 없었거든요.”

 

애란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펼쳐 보였다.

그녀가 빨간 줄로 밑줄 그은 곳을 보니 부스 사용에 관한 특별 항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누군가 일부러 그 항목을 누락했다는 겁니까?”

 

“잘 모르겠어요. 서울로 돌아가 봐야 알 거 같아요.”

 

“다들 처음이니 알 수가 있어야지.

전에 우리 직원 중에 왔던 사람은 없었습니까?”

 

“송림이가 2년 전에 왔었는데 그땐

그냥 지금 저희가 차려놓은 수준 정도라고 그랬죠.”

 

“옛날엔 10년만에 강산이 변하지만,

요즘은 1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세상인데.”

 

‘코지’의 부스는 지나가는 관람객들이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음악이 있고 살아 있는 모델이 있고 섹시함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아무리 정보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아무래도 일부러 그 세부 항목을 누락시킨 거 같아요.

만약에 그런 세부 항목이 있었다면 저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자회사 모델을 데려오라는 말이 아마 상담 부스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패션쇼 장에선 모델들 워킹을 위해 애란이 준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경쾌하게 편곡한 음악이었다.

애란이나 봉수는 상담 부스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패션쇼 장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로 모델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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