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감성기 5
“실장님 대단해.”
해수는 2차로 포장마차에 들어와서까지 그 이야기였다.
“그만 좀 해라.”
중경은 정말 짜증이 났다.
“너는 몰라.”
해수의 말투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 동안 식탁 위에 데친 오징어와 계란말이가 나왔다.
해수는 능숙하게 소주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한잔을 들이켰다.
중경은 더 늦기 전에 가이아의 결정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지 묻고 싶었다.
“해수야, 저기 말야…”
해수가 젖은 눈으로 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보니 더더욱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중경도 소주를 들이켰다.
“궁금해서 그렇지?”
해수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뭐가?”
중경이 뜨악한 시선으로 해수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코지 쪽으로 기울었으니까.”
중경은 어둡고 짜증났던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저 눈앞에 닥친 공부나 일이 가장 중요했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재미없게 사냐?”
해수가 술김에 훈계조의 말을 꺼냈다.
“나한텐 늘 내일이 중요하니까.”
“누군 안 중요해?
그래도 사람이 때론 나사 한 두 개 정도는 풀린 채 살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누가 내 인생을 책임지지?”
“또 무겁게 나오신다. 그냥 쿨하게 좀 살자.”
해수가 손사레를 쳤다.
“난 너처럼 나사를 꽉꽉 조이고 살지 않았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잖아.”
“그러니까…”
중경은 그녀가 이혼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이혼하지 않았냐고? 요즘 이혼이 어디 흠이냐?
3쌍 중에 1쌍이 이혼한다는 데 그게 뭐 흠이냔 말야.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바람 피는 새끼를 어떻게 남편이라고 믿고 살겠냐.
차라리 어수룩해서 바람 피면 들키고 들키면 무릎 꿇고 빌고 다투기도 하고 그러면 봐 줄 수도 있어.”
해수는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어떻게 한 여자만 평생 맛보며 살 수 있겠냐?
너무 비극이지 않냐?
그러니까 너도 같이 몰래 바람 피워라.
대신 절대로 들키지 않게 펴라.
이렇게 말하는 게 남편이냐?
그 놈도 들키기 전까지 나는 물론이고 우리 친정 집에도 얼마나 잘했는지 알아?
동네에서 사위 잘 얻었다고 소문이 자자했어.”
해수는 또 한잔을 채우고 비웠다.
다시 술을 따르려 했을 때 중경이 술병을 잡았다.
“그만해.”
“사실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도 못했어.
너니까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 더 말해야겠어.
그러려면 술도 더 마셔야겠고. 그러니까 놔.”
해수는 막무가내였다.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중경의 말투가 차가웠다.
해수는 중경의 손에 잡혀 있던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중경은 말없이 걸었다. 해수는 중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거리엔 술 취한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갈 뿐 한적했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 많이 변했는데 너는 하나도 안 변했어.
예전과 하나 다른 게 없어. 차갑고 냉정하고 철저하고. 그런데 난 그게 그리웠다?”
해수가 뒷말에 힘을 주었다. 중경은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다시 시작하자면 마음이 움직일 것도 같았다.
“나도 많이 변했어. 그런 소리 하지 마.”
“어디?”
해수가 갑자기 중경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곤 기습적으로 중경의 얼굴을 잡아당기고 키스를 했다.
그녀는 중경의 입술을 벌리고 자신의 혀를 중경의 입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처음 중경은 거부했다.
하지만 오랜 옛날의 그 추억들이 기어코 중경의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대학 시절 연애할 때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곁을 지나가는 남녀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중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너는 대범해졌어.”
“한번 결혼했다가 실패해 봐. 겁이 없어져.”
해수는 중경에게 폭 안기다시피 해서 걸었다.
“사람이란 건 말야, 늘 후회하며 사는 동물인가 봐.”
해수의 말이 중경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중경은 차가운 눈으로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후회 같은 거 안 해.”
중경은 송림과 강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넌 정말 안 변했어.”
해수가 걸음을 멈추고 중경을 올려다보았다.
훤칠한 키의 중경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런 해수를 바라보았다.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나를 만나줄 수도 있지?”
해수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거야?”
중경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와서 그런 부탁을 하는 해수가 뻔뻔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중경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가 도로 쪽으로 걸어나갔다.
“너랑 헤어진 후에 말야.”
해수는 도로 위를 떠다니는 차들을 맥없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실은 무척 방황했어. 전 남편 만나기 전에 또 한 사람을 만났었지. 아주 잠깐.”
해수는 중경을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누구를 만났을 거 같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들은 웃겨.
자신의 과거는 용서하고 이해해 달라면서 여자의 과거는 이해조차 하려 들지 않아.
그 사람이 그랬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문제 삼았던 남자.
자기보다 잘 생겨 보이고 자기보다 잘 나가는 남자와 연애를 했던 여자를 용서 못하겠다는 거야.
남자들은 어느 때 보면 정말 철이 없어. 그래도 누군지 모르겠어?”
해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해수가 사귀었던 남자가 설마 강 실장?’
해수가 탄 택시는 어느새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강 실장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서류철을 넘기고 있는 사장을 바라보았다.
“홍 라라?”
“네, 이번 가이아에 납품할 제품의 광고 모델입니다.”
사장이 강 실장을 바라보았다.
“젊은 애들에게 인지도가 높습니까?”
“섹시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아입니다.”
사장이 여러 계산을 하고 있는 듯 눈이 빠르게 굴러다녔다.
“개런티가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홍 라라 정도면 그 정도는 주어야 할 겁니다.
계약 내용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회사의 중요한 계약 자리에 참석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실 때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괜찮은 앱니다.”
“혹시, 강 실장이 눈독 들이고 있는…”
강일환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사장님도 참, 무슨 말씀을.”
사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추진하세요.
가이아 납품과 상관없이 진행하세요.
어차피 새 브랜드 광고를 하긴 해야 할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새 브랜드 명칭은 모아지고 있는 중입니까?”
“가장 지배적인 의견이 하와이안 컨셉입니다.”
“하와이안 블루, 레드, 핑크, 화이트. 음, 좀 더 섹시한 느낌 좀 찾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강일환은 자신의 노트에 메모를 했다.
“그럼 모델과의 면담 일정을 금요일 저녁으로 잡으면 어떨까요?”
“나가는 길에 서 비서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별일 없으면 그날로 잡지요.”
강일환이 노트를 접었다.
“강 실장님, 그건 그거고 오사카 박람회엔 누굴 보낼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박중경 하고 나송림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장이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친구들은 가이아 하고 계약이 체결되면 바빠지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키워야 할 재목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빨리 시야를 넓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박람회가 일년에 몇 차례 있는 것도 아니고…”
“음, 내 생각엔 그 엉뚱한 조진국이란 친구랑 박봉수라는 친구도 괜찮을 듯 싶은데요.”
강일환의 얼굴이 약하게 일그러졌다.
“호흡이라는 게 있는데 중경이 그 친구 하고 나 팀장이 잘 맞습니다.”
“그 두 사람만으로 속옷을 끌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정 안되겠다 싶으면 두 팀을 보냅시다.
중경이 그 친구 실장님 후배라고 너무 감싸주는 거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저는 실력대로 사원들을 대접할 뿐입니다.”
사장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강일환은 그의 말속에 가시가 있는 느낌이었다.
‘조진국? 박봉수? 두 사람에게 사장이 왜 애정을 보이는 거지?’
강일환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 둘에게 기대를 하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두 사원에게도 기획서와 샘플 등을 준비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오성의 심 전무는 가끔 연락이 옵니까?”
사장이 무심하게 물었지만 경계의 말투였다.
“가끔 만나 술 한잔 하고 그렇습니다.”
강일환의 말투에 힘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장은 약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직접 조진국 하고 박봉수 이름을 거론했어? 이거 분명히 뭔가 있는데.’
강일환이 인터폰을 눌렀다.
“어, 전략사업부의 조진국이 하고 박봉수 두 사람 입사할 때 받았던 자료들 모두 가져오세요.”
강일환은 뒤가 찜찜했다. 박봉수는 사장이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진국은 그야말로 엉뚱하기만 할뿐 생산성에 그다지 도움이 안되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벌써 점심 시간인가?”
강일환은 양복 윗저고리를 들고 부리나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다른 별일 없지요?”
“네.”
비서가 간단하고 명랑하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가 2시30분쯤 들어올 겁니다.
모든 약속이나 일정은 그 시간 뒤로 정해 놔요.”
“네.”
비서는 대답을 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강일환이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달려간 곳은 홍익대 길 건너 골목에 있는 한 카페였다.
카페 실내는 어둠침침했다.
강일환은 주변을 살피며 신수정이 앉아 있는 미니 룸으로 들어갔다.
다섯 사람 정도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룸이었다.
아베크 족들을 위해 만든 룸이기도 했다.
강일환의 손은 자연스럽게 신수정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신수정은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 느낌의 치마를 입은 터라 마치 맨 살을 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쩐 일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 들린 거예요.”
신수정도 강일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몸을 더 밀착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달라붙었다.
신수정이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른 뒤 간단한 과일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나간 뒤 신수정이 팔짝 일어나 강일환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았다.
“하루 종일 실장님 생각밖에 안나요.”
강일환은 그녀와의 관계 진척이 조금 지나칠 정도로 빠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쩌지 못했다.
“나도.”
사실이었다.
신수정은 이제 대범해졌다. 강일환이 준비도 하기 전에 바지를 끌어내리고
자신도 치마 속의 팬티를 벗어버렸다.
그리곤 강일환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았다. 뒤로 앉는 자세였다.
강일환이 룸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흥분이 되어 있던 탓인지
신수정이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자마자
강일환의 물건이 미끈하게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장소에서 경험하기는 두 사람 모두 처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
신수정은 신음이 새어나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우린 왜 이렇게 늦게 만난 거죠?”
“그러게.”
강일환은 그녀의 배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강일환의 물건이 그녀의 몸 깊이 들어갔다.
신수정은 자지러질 듯 몸을 떨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떠는 그녀의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강일환은 천장에서 내려온 불빛과 신수정의 등을 번갈아 보았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수정은 분명 나송림과는 그 스타일이나 대범함이 천지 차이일 정도로 달랐다.
전혀 색다른 느낌 때문에 강일환은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정으로 배팅하지 마라, 정으로.’
강일환은 마음속으로 심 전무가 들려주었던 말을 되뇌였다.
“수정씨도 채팅을 해?”
“전에는 가끔 했는데 이젠 흥미가 없어요.”
신수정이 물끄러미 강일환을 바라보았다. 뒷말을 물어보라는 눈치였다.
“요즘 애들은 왜 그러나 모르겠어.”
강일환은 신수정의 눈길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놓인 팬티를 찾아 입었다.
강일환도 바지를 추스렸다.
“왜요?”
“우리보다 더 대범하다니까.”
“무슨 말이에요?”
“글쎄, 한번은 농담으로 번개를 하자고 했는데 정말로 나온 거야?
걔가 20살이었을 거야.
이제 갓 대학 들어갔다고 그랬으니까.”
신수정은 무심한 척 케이크를 포크로 조각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났어요?”
“남자들 중에 열 여자 마다할 놈이 어디 있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저 서로 즐길 뿐이라며 못을 단단하게 박아 두어야 했다.
신수정의 눈이 조금 일그러졌다. 눈치가 빠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안 돌려도 돼요. 저 실장님 잡고 늘어질 생각 없으니까.”
신수정은 강 일환의 마음을 꼭 집어내기라도 하듯 말했다.
“그,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닌데…”
“저 실장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쿨 해요.
지금은 저도 실장님이 누구보다 좋아요.
그건 실장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요?
두 달? 길면 반년쯤?”
강일환은 남의 이야기를 듣듯 케이크를 포크로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전 실장님 가정을 파탄 낼 생각도 없구요.
그럴 분이 아니시지만 말이에요.”
신수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나도 솔직해지지.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고마워.
실은 내가 수정씨한테 너무 빨려 들어가서 걱정이었거든.”
강일환은 세상의 빠른 변화에 적응된 사랑의 속도 때문에 자신도 변했다고 생각했다.
“어느 학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는데 아무리 길어야 3년이라고.
그 3년이라는 기간을 견디는 사람조차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전 생각해요.”
“그 말 나도 들은 적 있어.
하지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의외의 변수가 있어.
아이러니 같은 거.
내가 결혼한 사실도 아이러니 중의 하나지.”
강일환은 그 말을 하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아파트 그리고 지금 몰고 다니는 차까지 아내의 집에서 장만해 준 것들이었다.
강일환은 그런 것들을 적당히 거절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만큼 처가 집에 잘했다.
“우리 남자나 여자로 만나지 말아요.
친구로 남아요.
그래야 언제든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강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