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감성기 6
“사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이번 보너스에 보험을 첨가해서 들어주자 이 말이잖아.”
강일환은 자신이 만든 기획서를 사장의 눈앞에 펼쳤다.
“이 보험은 적립식 보험으로 월 3만원 내외이며
우리 회사에 근무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내주는 겁니다.
이직률을 낮추자는 의도도 숨어 있습니다. 직원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대신 보너스는 말 그대로 보너스니까 금액을 조금 하향 조정하면 회사로서도
그리 큰 부담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요즘 보너스를 지급하는 회사가 드물 정도로 경기가 하락세 아닙니까.”
“보험을 들어주자, 보험을…”
사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 가이아 납품건이 성공하면 실시하는 게 모양새도 좋을 듯 하구요.”
강일환은 신수정을 떠올렸다.
여자로 느낄 때엔 그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친구 사이로 남자는 말을 들은 뒤론 괜히 그녀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요즘 불경기로 인해 예전에 들었던 보험도 해약하는 판이니
새로운 계약자를 찾는 일도 힘들 터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사장은 강일환의 기획서에 싸인을 했다.
“그래, 보험사는 정했습니까?”
“네, 제가 이곳 저곳 비교를 해서 정한 보험사가 있습니다.”
“강 실장님이 알아서 잘 하셨겠지요.
그래도 이왕이면 알고 계신 보험사와 인연을 맺어 주세요.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저, 혹시 아시는 보험사라도?”
강일환은 잠깐 속이 탔다.
“아닙니다. 실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셔서 기획하신 일이니까
실장님이 마무리 지으십시오.”
강일환은 나이도 비슷한 그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그리고 오사카 박람회 일 말입니다. 우리가 두 팀을 보낼 순 있는 겁니까?”
“한 팀만 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박람회 측에서 대신 모델을 함께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모델은 왜요?”
“자사의 제품 선전을 극대화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래 보낼 사람은 정하셨습니까?”
강일환은 머릿속에서 중경과 송림을 슬그머니 지웠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여러모로 생각을 좀 해야겠습니다.”
“결정되면 보고해 주세요.”
사장은 약속이 있다며 강일환과 함께 사장실에서 나왔다.
강일환은 그를 배웅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수정이한테 미리 양해도 안 구했는데 자존심이나 안 상할까 모르겠네.’
강일환은 한편으로 괜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 이쯤이야.’
강일환은 기획서를 접고 신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세요?”
“오늘 잠깐 만날까?”
“어제도 만났잖아요.”
신수정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우면서도 애절했다.
“진국아, 우리 보고 오사카 가라는데.”
봉수는 서류철을 들고 진국의 자리로 향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사카에 가라고?”
진국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연씨랑 노애란 선배랑 넷이 가란다.”
진국은 사무실을 둘러본 후 봉수의 손을 잡고 휴게실로 나왔다.
“무슨 조화지?”
“그러게 말이다.”
“너나 나 둘 중의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다녀오라는 거야?”
“방금 실장님이 그랬다니까.”
진국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중경이랑 송림이라면 이상할 게 없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이제 비밀도 아니지만 가이아 속옷 메인 자리가 우리로 낙첨된 거 같던데.
그러면 두 사람 공이지 뭐야.”
봉수는 자동 판매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았다.
“선배들 말로는 오사카는 회사에서 키울 사람들 위주로 보내곤 했다는데.”
진국은 잠깐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오성그룹의 빌딩이 보였다.
“무슨 생각해?”
봉수가 진국의 어깨를 쳤다.
“아무 것도 아냐.”
“일단 가긴 가야겠지.”
“좋은 기회잖냐? 일본 여자들 무지 축축하대.”
진국은 예의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너는 아무튼. 수영이는 채연씨는 어떡하고?”
“사내가 어떻게 한 여자한테 만족하냐? 그리고 정하고 섹스하고 비교할 걸 해라.”
“누가 너랑 살지 걱정이다.”
“그나 저나 오사카 가면 채연씨랑 우리 같이 한방 쓰는 걸까?”
봉수가 그를 보고 픽 웃고 말았다.
“노애란이 요즘 다이어트 하는 모양이더라. 살이 부쩍 빠졌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겠냐.”
“그래도 디자인 실력은 송림 선배랑 맘 먹지.
다들 외모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애란 선배의 디자인을 폄하하는 편인 거 같아.
내가 볼 때 송림 선배보다 애란 선배가 훨씬 나은 거 같거든.”
봉수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진국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어 어디를 보고 있는 지 모를 정도였다.
“야!”
“어, 뭐라고 그랬어.”
“너 혹시 수영이 임신시켰냐?”
봉수가 눈을 흘기며 진국을 바라보았다.
“사람 잡을 소릴 하네. 내가 어디 여자 임신시키는 거 봤냐?
난 늘 심플과 클린이 신조 아니냐.”
봉수는 더 이상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얼굴이었다.
“유두 브라는?”
“오늘 밤 디스플레이 룸에서 보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가자.”
디스플레이 룸에는 채연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가 좀 늦었습니다.”
진국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봉수는 가볍게 목례를 보냈다.
“진국씨 덕분에 저도 연구를 하나 했는데 어떨란가 모르겠어요.”
채연은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에 착 달라붙는 푸른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진국과 봉수는 그녀의 풍성한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진국이 길다란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예요?”
“채연씨한테 이런 부탁 드려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저는 여기 속옷 입는 모델인데, 제 할 일이죠.”
채연이 상자를 집어들었다.
“이 일은 이 일이고 왜 그러셨어요?”
채연이 진국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뭐, 뭘요?”
“송림씨한테 다 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들었다고 그러세요.”
진국이 봉수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봉수는 이미 진국에게 들어 그가 정읍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만 괜히 주책없는 사람이 됐잖아요. 이 일 끝나고 돌려 드릴게요.”
봉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진국이 한 일이 짐작이 갔다.
회사 경조비 운운하더니 아마 개인 돈으로 채연에게 부의금을 냈던 모양이었다.
“채연씨, 그건 진국이 혼자만 결정한 게 아니라 저도 같이 동참한 겁니다.
그리고 힘없는 우리 서민 사원들끼리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그런 일 생기면 채연씨한테 도움 청할게요.”
봉수가 얼굴이 붉어진 진국 대신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이건 좀…”
“대신 저희들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이번에 오사카에 같이 가게 된다는 데 알고 계셨어요?”
“금시초문인데요.”
“이번에 우리랑 노애란 선배랑 채연씨랑 오사카 박람회에 같이 가게 됐습니다.”
“그래요? 송림씨랑 김중경씨가 아니구요?”
“내막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우리로 결정됐습니다.
오사카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면 돼요”
채연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곤 탈의실로 향했다.
“넌 언제나 엉뚱한 짓을 한다. 그래 얼마나 부조했어?”
“많지 않아. 혼자 하기도 그래서 디자인 팀 전부 걷은 거라고 말해버렸지.”
“뒷수습은 어쩌려고?”
“뭐 부조한 건데 설마 뭐라고 할까 싶었지. 집에 가보니까 보통 어렵게 사는 게 아니더라.”
“그래 얼마 했어?”
“디자인 팀 1인당 5만원씩 하는 걸로 해서…”
“오십 만원이나 했단 말야?”
진국이 히죽 웃었다.
“도무지 니 속을 모르것다. 수영이랑 채연씨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 할래?”
“오락가락 하긴…. 다 일을 위해 만나는 거 뿐이야.”
“에라, 이 제비야.”
그때 채연이 유두 브래지어를 입고 무대 위에 나타났다.
채연의 흰 젓가슴 살이 조명에 눈부시게 빛났다.
유두만 보이지 않을 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무대 전체를 밝히는 것만 같았다.
진국과 봉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괜히 전속 모델이 된 게 아니다 싶었다.
“채, 채연씨, 어때요?”
채연은 청바지에 유두 브래지어만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요염하고 섹시해 보였다.
“처음엔 이상하고 어색했는데 생각보다 편하네요.
유두를 가린 부분의 크기도 적당하구요.
사실 여자들이 가슴 전체를 가리는 브래지어에 익숙한데 여기에 익숙해지면
아마 가슴 전체를 가리는 브라가 불편해질 거 같아요.
한 가지 단점은 가슴이 처진 사람은 걸치기 힘들겠네요.”
채연이 조심조심 말했다.
대신 이야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한 가지 더 단점이 있는데 가슴 아래를 받치는 이 부분 있잖아요.”
채연은 가슴 아래를 받치고 있는 몰드 부분을 가리켰다.
진국과 봉수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기에 몰드를 넣으면 아플 거 같아요. 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진국은 열심히 메모했다.
“그러면 그 부분을 여러 겹의 햄 원단으로 만들면 좀 낫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연구실에서 다시 만들어 오시면 그때도 입어 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생각한 건데…”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가 탈의실로 사라졌다.
“가슴 전체를 가릴 때랑 지금이랑 분위기가 어떠냐?”
진국이 봉수를 쳐다봤다.
“확실히 색다른 맛이 있다.
다만 수요자가 그렇게 많지 않을 거 같은 게 문제지.”
“너도 참 모른다.
요즘 여자애들 가슴이 얼마나 빵빵한 줄 아냐?
우리도 구 세대야.
우리 나이 때에 채연씨 가슴처럼 풍만하고 탄력있고 예쁜 가슴을 가진 사람이 드물지만
수영이 세대는 다르다니까.
잘 먹어서 그런가, 아무튼 가슴들이 다 빵빵해.”
“그거야 인스턴트 음식 때문이지.”
“어쨌든 말야.”
“아무튼 색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긴 하겠다.”
채연이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
여느 브래지어랑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연분홍 빛의 브래지어였다.
“어때요?”
“뭐 별로 다른 점을 못 느끼겠는데요.”
채연이 뒤돌아 섰다.
어, 그런데 등을 가르는 끈이 없었다.
“어때요?”
“끈이 없네요.”
봉수와 진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부터 이런 브라를 하고 싶었어요.
그냥 상상만 했던 건데 진국씨 말 듣고 연구실에 한번 의뢰를 했죠.
연구실장님이 특별히 만들어 주셨어요.”
채연이 입은 브래지어는 앞가슴 아래에서 조여 올려 어깨에만 걸치게 만든 형태였다.
“흘러내리지 않아요?”
“전혀!”
진국은 채연이 입고 있는 브래지어가 획기적인 히트 상품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친구라는 거 참 편해요.”
신수정은 강일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물침대가 출렁거렸다.
“수정씨가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 좋네.”
“부담 느낄 게 뭐 있어요. 저도 즐거운 걸.”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서로 뒤엉켜 있었다.
“정말 이렇게 자주 만나도 사모님한테 들키지 않겠어요?”
“요즘 우리 마누라는 예술하는 친구들한테 빠져 가지고 정신이 없어.”
“그러다 바람나면 어떡해요?”
“나 모르게 나면 상관 없지.”
“그런 게 어딨어요?”
“나도 그러니까.”
강일환의 말에 신수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야 매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이잖아.
하지만 환쟁이들 어디 그런가? 우리처럼 양복을 입기를 하나,
누구한테 싫은 소릴 듣기를 하나, 시간 개념이 있기를 하나. 얼마나 자유분방해 보이겠어.
우리 와이프 자유분방한 거 좋아했거든. 그러니 즐겁지.”
“그러다 정말 바람 나겠다.”
“우리 와이프 절대로 그럴 사람 아냐.
아니, 나 몰래 바람은 피겠지. 하지만 그걸로 문제 만들 사람 아니거든.”
“실장님은 참 편하네요.”
“실은 스와핑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 걸.”
“어머, 미쳤어. 사모님은 뭐래요?”
“그런데 내가 못 견디겠어.
내가 안 보는 데서 일 저지르면 몰라도 내가 뻔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못하겠더라.”
“남자들은 정말 순 이기주의적이야.”
신수정이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먼저 씻을 게요.”
신수정이 욕실로 들어가자 강일환은 서류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녀는 몸만 씻은 후 이내 욕실에서 나왔다.
“그게 뭐예요?”
“봐 바.”
신수정이 침대로 다가왔다.
“직원들 신상 정보네요.”
“우리 이번에 보너스로 보험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거든.”
신수정이 순간 강일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친구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려는 거지.”
“그래도 이런 건 싫어요. 제가 실장님을 뭐 보험 때문에 만났나요.
처음엔 종신보험이라도 하나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장님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났어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예요.”
“수정씨, 이건 회사 직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 아닌가.
사장이 오케이 했고 직원들에게도 고지가 됐어.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찾아와서 면담하면 될 거야.
직원들은 공짜니까 대환영이고.”
신수정이 한동안 서류뭉치를 쳐다봤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실장님, 나 정말 감동 먹었어. 어떻게 보답해?”
강일환이 다시 신수정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앞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강일환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신수정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