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충돌기 3
애란과 채연 그리고 봉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국과 손을 잡고 흔드는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반가와요. 에이꼬라고 해요.”
일본 여자 같기도 하고 한국 여자 같기도 했다.
봉수는 그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 진국에게 눈으로 물었다.
“누나 국적이 어디냐는데?”
진국이 아무튼 눈치 하나는 빨랐다.
“한국 사람이에요.
그리고 실은 이름이 영잔데 좀 촌스럽잖아요.
일본 발음으로 에이꼰데 그래서 그냥 그렇게 소개해요.”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이꼬는 다른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하지만 전혀 거만하지 않았고 다소곳했다.
채연과 애란 그리고 송화와 수영도 그녀의 미모에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글래머의 몸매였다.
“오빠, 언제 저런 여자 안 거야?”
수영이 낮은 목소리로 진국에게 물었다.
“옛날부터 알던 누나야.”
“오해하진 말이요. 친한 누나일 뿐이니까.”
에이꼬가 수영의 말을 들었는데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수영이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진국은 채연과 애란과 함께 리허설 준비를 위해 쇼장으로 들어갔고
외부 부스에 봉수와 세 여자가 남았다.
“어떤 걸 입을까요?”
에이꼬가 진국에게 먼저 물었다.
“싸이즈가 맞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녁 6시부터 시간 별로 10시까지 네 벌의 옷을 갈아 입으셔야 합니다.”
봉수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송화가 그런 봉수를 보고 눈을 흘겼다.
말은 자유분방한 척 해도 마음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따로 탈의실이 없어 부스 뒤편에 파티션으로 간이 탈의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세 여자가 속옷을 갈아 입었다. 하와이안 시리즈였다.
“착용감이 좋네요.”
먼저 홍부 부스로 나온 에이꼬가 봉수에게 말했다.
그녀의 몸은 송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농염했다.
삼십대 중반의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력적이었다.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익은 사과 같았다. 수영도 덜 익은 듯하지만 풋풋하고 탄력적이었다.
송화 역시 두 여자에 모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한 눈에도 익은 몸과 설익은 몸이 느껴질 정도로 에이꼬와 두 여자의 몸매 차이가 확연했다.
통역을 맡은 유학생도 부스쪽으로 걸어오며 에이꼬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새롭게 꾸민 부스를 둘러보았다.
다른 속옷 회사가 꾸며놓은 부스보다 인테리어가 훌륭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뒷면을 전부 거울로 처리해서 더 넓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모델의 몸매를 정면에 서서도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모델이 굳이 회전을 하지 않아도 뒷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그냥 어떻게 급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노력들 덕에 관람객들의 반응이 달랐다.
다른 회사의 부스보다 ‘코지’ 부스에 더 눈길을 많이 주었다.
비슷한 느낌의 몸매와 느낌의 모델들이 아닌 아마츄어 모델들인데도
세 여자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봉수씨, 여기에 심플한 테이블 하고 의자도 좀 가져다 줄 수 있어요?”
봉수의 귀엔 에이꼬의 말이 명령처럼 들렸다.
에이꼬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어린 두 여자를 잘 이끌었다.
그녀의 부탁대로 건물 가구 매장에서 협조를 구하자 서로 테이블을 가져다 주려고 했다.
결국 유리 테이블과 유리 느낌의 의자로 결정이 되어 홍보 부스로 올라왔다.
다른 매장은 많은 모델을 이용해 패션쇼가 열리는 무대처럼 끊임없이 워킹을 하고 있다면
‘코지’의 매장은 달랐다.
에이꼬의 주도 아래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어울려 수다를 떨었다.
“뭐 전공 해요?”
“우린 둘 다 국문학이에요.”
“어머, 좋겠다. 나도 시를 쓰는 게 꿈이었는데.”
“정말이세요?”
세 여자는 관람객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굴었다.
그러자 관람객들의 반응이 더 좋았다.
마치 여자들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듯했다.
“요즘 한국에선 어떤 분 시가 가장 많이 읽혀요?”
“취향들이 다 다르니까요.”
봉수는 거기에 소품을 더했다.
테이크 아웃 매장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세 여자는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속옷만 입고 커피숍에 앉아 있는 풍경이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는데
다른 홍보 부스에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코지’ 부스 앞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영과 송화도 다분히 끼가 있어 에이꼬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었다.
다리를 틀어 앉기도 하고 브래지어를 손으로 쓸어 내리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잠시 나온 진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네가 모셔온 저 누나 말야. 보통이 아니다.”
진국이 홍보 부스를 둘러보았다.
관람객들 중엔 아예 연극을 구경하듯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세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깔깔거렸다.
“도대체 저 누나 뭐하던 사람이냐?”
“한 때 모델을 하긴 했지.”
“네가 저런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신기할 게 뭐 있냐.”
“완전히 프로야, 프로.”
“옛날에 모델이었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여기에 있는 홍부 부스 전체를 다 휘어잡는 여자라고.”
“그러면 좋은 거잖아.”
진국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쇼장 쪽으로 들어갔다.
상담이 폭주했다.
잠시 모델들이 쉬는 10분의 시간 동안에도 관람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세 여자가 속옷을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깊게 한숨을 내쉬는 남자들도 있었다.
다른 매장의 담당자들이 찾아와 구경을 할 정도였다.
봉수는 상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장에서 구매 의사를 남기고 돈까지 지불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시품만 가져온 터라 물건을 줄 수 없는데도 나중에 우편으로 물건을 받겠다며
관람객들이 열성이었다.
그 모든 게 진국과 에이꼬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상상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엄청난 주문 물량. 서울의 회사에서도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입기보다 그저 소장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물론 유럽 쪽 바이어 상담도 이어졌고
그 때마다 박람회장에서 준비한 통역들을 데려오느라 봉수는 부산을 떨었다.
에이꼬의 의도대로 홍보 부스가 꾸며진 다음 날엔 다른 매장들도 비슷한 흉내를 냈지만
이미 선점 효과에서 떨어진 뒤라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에이꼬는 다음 날 부스를 술집처럼 꾸몄다. 다른 매장에선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면
‘코지’ 매장은 작은 미니 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발이 아니라 두 발은 앞서 나갔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 4일간의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본의 몇몇 언론에서도 취재를 해갈 정도였다.
마지막 날 패션쇼장에서도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유두브래지어와 뒷끈이 없는 브래지어가 선보여진 때문이었다.
홍보 부스에서도 에이꼬와 수영 그리고 송화도 과감하게 유두 브래지어를 입어 주었다.
그 덕에 다른 매장은 개점 휴업 상태였다.
아예 홍보 부스를 일찍 철거하는 회사도 있었다.
마지막 박람회 일정이 끝난 후 일곱 사람은 도톤보리의 한 맥주집으로 향했다.
“브라보!”
일곱 사람은 맥주 잔을 높이 들고 부딪혔다.
“난, 정말이지. 언니를 존경하게 됐어요.”
수영이 부러움 가득찬 눈으로 에이꼬를 쳐다봤다.
“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내게 현재 주어진 일에 가장 충실할 뿐이에요.”
“그게 존경받을 만한 일이죠.”
송화도 에이꼬에게 깊이 감동했던 모양이었다.
“언니의 정체가 궁금해요.”
“그냥 이 동네에서 술집 하나 하고 있어요.”
“그러면 거기로 가죠.”
애란도 채연도 즐거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긴 이런 젊은 분위기가 아니에요. 전 이런 데가 좋아요.”
“누나, 정말 고마워.”
“고맙긴.”
진국이 에이꼬의 손을 잡았다.
수영이 잠깐 눈을 흘겼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봉수도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하지 마세요.
저도 언젠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올 겁니다.”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이고, 이거 꼭 저를 위한 자리처럼 되버렸네요.
그러면 안되는데.”
에이꼬가 얼굴을 붉혔다.
많은 시선들 앞에선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던 그녀라
봉수는 그녀의 행동이 의외였다.
‘이런 게 진짜 프로구나.’
봉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와 진국과의 관계가 몹시 궁금했다.
진국은 봉수의 의중은 모른 척 다시 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도대체 너 정체가 뭐냐?’
봉수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조진국! 또 지각이야!”
회의실로 몸을 낮추고 들어서는 진국을 보고 박 과장이 눈을 부라렸다.
“모델들 무대 올라올 때는 늦지 않는 놈이 꼭 회의 있는 날이면 늦는다니까.”
회의실에 모인 다른 직원들이 쿡쿡 웃었다.
“너, 오사카에서 일 처리 좀 잘했다고 잘난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거 나도 한다. 알아?”
봉수는 박 과장의 반응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사람이 오사카에서 올린 매출은 ‘코지’ 전체 부서의 분기 매출과 맞먹었다.
그러면 휴가를 주던가 보너스를 줘도 시원찮을 판에 계속해서 핀잔이었다.
“저 어제 먹은 술 때문에 설사가 자꾸 나와서.”
진국은 빈자리에 앉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만 설사해? 나도 나이 먹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설사를 하는데…
그리고 젊은 놈이 몸이 얼마나 부실허믄 술 좀 마셨다고 설사를 하냐!”
박 과장이 지시봉으로 삿대질을 하며 악을 쓰듯 말했다.
다른 직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유일하게 중경과 송림만이 굳은 표정이었다.
“자, 부서별로 기획서들 준비했지?”
진국은 봉수를 바라보았다. 봉수는 애란을 쳐다봤다.
채연과 함께 세 사람이 오사카에 다녀와 보니 해외개발부 2팀이라는
새로운 팀이 만들어졌고 세 사람에겐 작은 사무실이 따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신입 사원 한 명이 배정되었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직된 팀이었다.
오사카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일본엔 협력업체도 없고
일본 여성이나 남성의 취향에 대한 전문가 또한 없었다.
알아서 판로를 개척하라는 말이었다.
봉수와 진국은 수시 입사 형식으로 들어온 병달이를 바라보았다.
병달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두 눈만 껌뻑거렸다.
좋은 성적으로 입사를 했지만 둔하고 눈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판로 개척을 위한 기획회의라니?
네 사람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니 네 사람은 아무런 준비도 못했던 것이다.
일상적인 회의려니 싶었던 것이다.
“해외개발부 2팀부터 준비하고 있어.”
박 과장이 서류를 들추며 말했다.
“저 과장님.”
애란이 자리에서 삐죽삐죽 일어났다.
“뭐야?”
“무슨 기획서를 준비하는 거였죠?”
“뭐야?”
박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애란에게 쏠렸다.
“아니, 오늘 회의 내용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조금 잘한다고 추겨 세웠더니 군기들이 다 빠졌구만.”
“저희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요.”
애란이 해외개발부 1팀을 맡은 송림을 바라보았다.
송림은 그저 히죽 웃고 말았다.
1팀은 유럽과 미국 쪽을 담당했고 2팀은 아시아 담당이었다.
디자인부터 제작 판로 영업까지 총괄하는 것이었다.
영업은 영업 전문가가 따로 배정되어 있었지만 영업을 위한 마케팅은 달랐다.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국내 속옷 시장을 기존의 액세서리 팀이 담당하다 보니 사람은 적고 업무는 많아진 편이었다.
지금보다 인력이 두배쯤 더 필요했지만 사람을 자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정말 모른단 말야?”
애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런지 회사 사람들이 해외개발부 2팀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들 잘못이 아닙니다.”
눈만 껌뻑거리던 병달이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선배님들이야 뭐 일본에서 그저께 오셨는데 저 혼자 사무실 지킬 때
회사 메일로 판로 확대를 위한 아이디어 회의가 있으니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2팀은 제가 판단했을 때 아직 제대로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고
선배님들도 안 계신 터라 저희한테 해당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뭐야?”
박 과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때 사장과 강 실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목소리가 큽니까?”
강 일환이 박 과장을 보며 물었다.
“아니, 해외 2팀이 준비를 하지 못했다길래.”
강 일환이 잠깐 봉수와 진국을 둘러보았다.
사장은 개의치 않고 중앙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공문 메일은 일주일 전에 하달된 거 아닙니까?”
사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맞습니다.”
박 과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러면 해외2팀한테 무리겠네요.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그때 강일환의 눈빛이 불쾌하게 빛났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다들 그만그만한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다른 부서들의 아이디어가 발표될 때마다 병달은 히죽히죽 웃었다.
곁에 앉은 봉수는 그런 병달이 눈에 거슬렸다.
“…다들 알다시피 가이아 백화점 납품을 우리가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경기가 너무 어려워져 매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언더웨어는 물론 액세서리나 의류 팀의 매출도 형편없는 편입니다.”
강일환이 아이디어 발표 중간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오사카에서 있었던 일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진국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물론 오사카에서 몇 사람이 선전하긴 했지만 우리 회사 전체로 봤을 땐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봉수는 강일환을 바라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결정 받고 처리된 일이 아니라며 그때 들어간 경비 중에
박람회장 인테리어 비용만 청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화와 수영의 비행기 값이나 호텔 비용 등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나마 인테리어 비용도 애란이 사정사정해서 총무과로부터 받아온 것이었다.
“오늘 발표한 아이디어는 크게 들을 만한 게 없군요. 나 팀장 아직 발표를 안 했지?”
강일환은 유독 송림을 가리켰다. 해외 1팀은 강일환 직속이었다.
사실상 ‘코지’의 기획실이나 다름없었다.
송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의 올해 초 경영 방침 대로 다시 고급화 바람을 일으켜야 할 거 같습니다.”
송림이 입을 열자 중경이 자료를 돌렸다.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를 받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