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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멸망 2

오늘의 쉼터 2014. 11. 26. 10:04

제33장 멸망 2

 

 

 

그는 급히 말을 달려 유신의 집을 찾아갔다.

“형님 계십니까? 어디 계시오, 형님!”

흠순이 부리나케 대문을 열고 들어와 고함을 질러대자

유신은 뒷짐을 진 채 마당으로 나왔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던가?”

“지금 막 떠나려는 참입니다.”

“바쁠 텐데 여긴 어인 일이야?”

“내가 급히 여쭐 일이 있어 왔소.”

시간에 쫓긴 흠순은 자연 말이 바빴다.

“우리가 재간도 없는 몸으로 대왕을 모시고 위험한 곳으로 가는데 형님은 해줄 말씀이 없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거든 해보시오.

내가 참고로 삼아주겠소.”

그제야 유신은 흠순이 찾아온 속셈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자네가 내게 가르침을 구하러 온 겐가?”

“……굳이 말하자면 그렇소.”

흠순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야 평소에 자네 말처럼 별 지략도 없이 그저 운이 좋아 몇 차례 무공을 세웠을 뿐이니

무슨 할 말이 특별히 있겠는가. 가르침이라니 당치 않네.”

유신이 은근히 빼자 촉박한 흠순은 애가 탔다.

“에이 형님도, 새삼스럽게 왜 그러시오? 한 수만 배워 나갑시다!”

“그럼 잘 듣게.”

“네.”

“에헴, 대저 장군이 된 자는 국가의 간성이고 임금의 조아(爪牙:무기)가 되어

승부를 시석 가운데서 결단하는 것일세.

그러니 위로는 반드시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으며,

가운데로는 인심을 얻은 연후에야 가히 성공을 바랄 수 있네.

백제는 오만함으로써 멸망했고, 고구려는 교만함으로써 위태롭게 되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잘 단합돼 있으니

바른 도리를 가지고 저들의 그릇된 바를 친다면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네.

싸움에 나가거든 부지런히 힘쓰고 조금도 게으름이 없도록 하게나.”

“그게 다유?”

무슨 신통한 말이 나올 줄 알았던 흠순은 기가 막힌 얼굴로 유신을 쳐다보았다.

“암, 다지.”

“에이, 형님!”

“왜?”

“삼척동자도 알 그런 소리 말고 실전에 도움이 될 가르침을 좀 주오!”

흠순의 볼멘소리를 듣고 유신은 또 한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임금을 뫼시고 평양까지 갈 건 없네.

평양에서 군기를 약정했으니 서두를 것도 없고.

그러니 우리 군사들을 가능한 한 피곤하게 하지 말고 힘을 비축해두었다가

당군이 평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그때 곧바로 평양성으로 가게.

평양성은 쉬 함락되지 않을 것일세.

그때 우리 군사를 내어 결전을 벌이고 평양성을 함락시키면 알짜배기 공은 우리 것이 된다네.

성 하나를 함락시켜 당군 보다 더한 공을 세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명심하시게.”

귀를 세우고 솔깃해서 듣고 있던 흠순의 표정에 비로소 엷은 웃음이 번졌다.

“과연 형님이오. 그럼 다녀와서 뵙겠소.”

장안성을 비우고 평양성에 나와 있던 보장왕은 적이 성을 포위한 채 달을 넘기자

남산을 불러 항복할 것을 권했다.

남산은 형 남건에 비해 마음이 여리고 용기마저 없던 인물이었다.

곧 왕의 권유를 핑계 삼아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이적을 찾아가서 항복하니

이적은 이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때마침 당도한 신라의 날쌘 기병 5백을 얻어

평양성을 손쉽게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남건은 장안성 으로 달아나 성문을 굳게 닫고 끝까지 군사를 내어 저항하였다.

이때 남건의 휘하에서 군무(軍務)를 맡은 사람 가운데 신성(信誠)이라는 중이 있었다.

평양성까지 점령한 당군과 혈투를 벌이는 게 무모하다고 판단한 그는 가만히 소장들을 불러

의논한 뒤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할 것을 청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 신성은 몰래 성문을 열어놓았고,

이적은 그 틈을 타 재빨리 군사를 내어 성에 올라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불을 질렀다.

성이 함락된 것을 알아차린 남건은 자살을 하려 했으나 죽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10월에 이적은 보장왕과 남건, 남산 형제를 앞세우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당주 이치는 먼저 보장왕을 소릉(昭陵:태종 이세민의 능)에 바쳐 빌게 한 뒤

군용을 갖추고 개가를 연주하며 개선군 들을 서울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대궐 함원전(含元殿)에서 붙잡혀온 포로들을 처리하기에 이르렀는데,

고구려왕 보장은 정사가 자신의 뜻에 따라 처리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고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으로 삼고, 남산은 항복한 점을 참작하여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제수하고, 중 신성은 내응한 공을 들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봉하고,

남생에겐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내리고, 이적 이하 공을 세운 장수들은 각기 차등이 있게

봉상(封賞)하였으나 유독 끝까지 저항한 남건 만큼은 검주(黔州)로 귀양을 보냈다.

또한 백제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식 행정제를 도입하여 본래 5부, 176성, 69만여 호의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통치하게 했는데,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 등의 관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공이 있는 자와 당나라 사람을

적당히 섞어 뽑았으며,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에 봉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전역을 진무케 하였다.

 

비록 그 위에 요동도안무대사 우상 유인궤가 있었으나 이는 명목에 불과할 뿐,

실상은 설인귀가 고구려를 다스리는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로써 시조 고주몽이 천명을 받아 비류수 상류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칭한 지

28왕 7백여 년 만에 마침내 군장(君長)은 끊어지고 사직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니

이때가 곧 무진년(668년) 12월이다.

뒷사람이 노래를 지어 고구려를 예찬하였다.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아이들아
요동으로 가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는 한웅이라 불렀으니
자손들 이어져 영걸도 많았더라
주몽, 태조, 광개토님
거룩한 위세는 더할 나위 없었고
을지문덕, 양만춘, 개소문은
나라 위해 몸 바쳐 스스로 사라졌다
고구려쯤 주머니에 든 물건이라 큰소리치더니
어찌 알았으랴, 백만 군사가 고깃밥이 될 줄을
유철(한무제), 양광, 이세민은
보기만 해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다
영락(광개토대왕의 연호) 기공비는 1천 척
만색 깃발이 하나 되어 태백은 높았더라


嗟汝蠢蠢漢家兒 莫向遼東浪死歌
文武我先號桓雄 綿亘血胤英傑多
朱蒙太祖廣開土 威振四海功莫加
文德萬春蓋蘇文 爲他變色自靡
謂是囊中一物件 那知百萬化爲魚
劉徹楊廣李世民 望風潰走作駒過
永樂紀功碑千尺 萬旗一色太白峨

 

북방 강국 고구려의 종말을 슬퍼하는 이가 어찌 한둘이랴.

또 다른 뒷사람이 폐허로 변한 사직을 회고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외진 땅 벽지에 성문은 높이 열렸는데
구름 끝 맞닿은 성벽은 길기도 하여라
물 맑은 곳에 석양이 비치더니
강변에 밤이 들자 촛불 별빛 반짝 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일고
새 꽃은 흙을 털며 치장을 하건만
밝아오는 아침에도 다시는 듣지 못할
아아, 옛 관현(管絃)의 소리여
가시밭 황진(黃塵) 속 옛길 옆에는
돋아난 잡초만 덧없이 수북 하도다
세월은 무상하여 영걸은 가고
다시는 양떼처럼 적(敵)을 몰지 못하니
춘몽일거나, 옛날의 일들
가을소리 고요한 곳에 기러기만 날으네

 

검모잠과 왕자 안승

평양성에 안동도호부가 들어서고 당장(唐將) 설인귀가 만승의 위엄을 갖춘 채 집무를 보기 시작하자

이를 바라보는 고구려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이 터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개중에 나라의 녹을 받던 신하와 장수들의 비통함과 치욕스러움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호태 대왕(광개토왕) 시절에는 중국 대륙을 경략했던 고구려였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양광의 수백만 군사가 을지문덕의 고함소리 한 번에 놀라 흩어지고,

당태종, 도종, 이적, 장손무기 등도 해마다 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는 것이 범을 보고 도망가는

들개의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망국대부들에게는 그때의 일들이 너무나도 또렷한데,

사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한낱 변방의 소장에 불과하던 설인귀 따위가 지존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울화가 치밀고 억장이 무너져 견딜 재간이 없었다.

안동도호부의 등장은 고구려 사람들에겐 전혀 예상 밖이었다.

비록 싸움에 져서 도성은 함락되었지만 7백 년을 면면히 이어온 한 나라의 사직이

그처럼 허무하게 끝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대개 왕이 낙양에 입조하여 죄를 빌고 신하의 예로써 번국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면

적어도 조상의 제사는 받들고 사직은 잇게 해주는 것이 전고의 상규요 선대의 오랜 관례였다.

설사 원한이 깊어 굳이 왕을 폐하기로 들면 왕자나 왕실 족친 중의 한 사람을 후왕으로 세울 줄 알았다. 그러나 당은 왕과 왕자들을 모조리 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당나라 장수와 관리들을 보내

백성을 다스리게 하니, 그간 당에 우호적이던 서화남진파(西和南進派:북화남진) 사람들까지도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수림성(水臨城) 사람 검모잠(劍牟岑)도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평양에 다니러 왔던 검모잠이 당나라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성을 순시하던

설인귀의 행차를 우연히 길에서 보고는 곧장 주막으로 달려가 술을 청하여

단숨에 대여섯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정명진과 소정방을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던 용문 촌놈의 태도가 어찌 저리도 거만하고 무례하단 말인가! 아, 분하고 원통하구나!

저놈이 저리 될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 어찌 횡산(橫山)서 만났을 때 그냥 보냈으랴!”

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마침 마당 평상에서 술상을 받고 앉았던 귀골풍의 청년 하나가 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실례지만 전에 무얼 하시던 분이오?”

하고 물으니 검모잠이 다시 두어 사발술을 거푸 들이켠 뒤에,

“지난 일이야 말해 무엇 하는가.”

대뜸 반말로 답하며 젊은이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남쪽의 신라 놈들을 더 괘씸하게 여겼지 당인들에 대해선 그다지 나쁜 마음이 없었는데

정작 도성이 함락된 후에 하는 꼴을 보니 실로 후안무치하고 흉악무도한 도적놈들이

바로 당나라 것들일세.

상고에 이런 법은 없었네.

남의 땅에 들어와 사직을 하루아침에 거덜 내고 나라와 백성들을 통째로 집어먹는 것들이

당나라 놈들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청년이 분개하는 검모잠의 행색을 찬찬히 살피는 중에 별안간 조의 복색을 한 젊은이 몇이

부리나케 주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마당에 서서 잠시 우왕좌왕하는 사이 꼬리를 물고 이내 당군 들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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