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장수 10
2월이 되자 당나라 칙사인 유인원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백제와 신라가 따로 동맹을 맺으라는 것이었다.
“이미 망한 백제와 무슨 동맹을 맺으란 말인가!”
유인원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조정 대신들은 한결같이 노발대발했으나
법민은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당이 부여융을 내세워 백제 유민의 저항을 무마하려는 것이라면
뒤를 지켜보는 것도 썩 손해날 일은 아니오.
어차피 지금 꼴로는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해도 같은 형편이 아니겠소?”
이어 법민은 자신의 아우인 인문을 불렀다.
김인문은 손인사의 대군이 올 때 따라와서 이때 금성에 머물고 있었다.
“인원이 백제와 동맹을 맺으라는 것은 우리가 도독부를 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데
우리에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오라.
결전은 백제 고토가 평온해진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나라 사정에 해박한 인문도 형과 생각이 같았다.
“현명하신 결단이옵니다.
저쪽에서는 대왕이 오실 것을 원하는 듯하지만 당주의 칙명이 아니라 유인원의 서찰을 받았고,
또한 상대가 부여융이라면 대왕께서 움직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습니다.
신이 가서 해결하고 오겠나이다.”
“혼자 보내기 께름칙하니 천존 장군과 함께 가라.”
이리하여 인문은 칠순 노장 천존과 웅진으로 가서 부여융과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그러나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왔다고 백제 전역이 일시에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재건과 복구의 와중에도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무리가 새롭게 일어나 항거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도독부에 배속된 당군의 출동으로 진압이 되었으나 간혹 맹위를 떨치며
유진군을 위협하는 무리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3월이 되자 유민 가운데 일부가 사비산성에 의거해 당군을 공격했다.
유진낭장(留陣郎將) 유인원은 군사를 내어 여러 날 이들을 공격했지만
때마침 심한 운무가 끼어 싸움에 애를 먹었다.
그는 사자 백산(伯山)을 금성으로 급파해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군사가 간들 운무가 걷히지 않는다면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니냐?”
법민이 묻자 백산이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다만 천지의 조화로 어려움에 빠진 것인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야지 별수가 있겠는가?”
결론은 그렇게 났다. 그런데 이 소식은 조정 회의에 참석한 내마 김삼광(金三光)을 통해
병석의 김유신에게 전해졌다.
삼광은 유신의 장자였다.
두어 달 정양 끝에 몸이 다소 나아진 유신은 이튿날 임금이 하사한 궤장에 의지해 대궐로 들어갔다.
유신을 본 임금은 어린애처럼 용좌에서 뛰어내려와 불편한 걸음을 친히 부축했고 조정 중신과
장수들도 한결같이 기뻐하며 유신의 주위를 에워쌌다.
“대각간께서 창졸간 어인 행차십니까?”
왕이 한편으론 걱정이 되고 한편으론 궁금해 묻자
유신은 오랜만에 상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무란 본래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심해 생기는 것이며 사비의 운무는 백강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인원의 군대가 운무 때문에 고민한다고 하니 그 방책을 일러주러 나왔나이다.”
이어 그는 백산을 향해 말했다.
“너는 가거든 인원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하라.
밤에 달무리가 지고 기온이 떨어졌을 때를 택해 강의 반대편에 불을 피우고
서풍이 불기를 기다리면 이튿날 낮에는 반드시 산성의 안개가 걷힐 것이다.
그때 북소리는 오직 산 밑에서 울리게 하고 장창 부대를 선봉에 배치한 규진법을 만들어
돌격하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유신이 가르쳐준 전법은 곧 유인원에게 전해졌다.
인원이 유신의 말을 따르자 신기하게도 안개가 걷혀 손쉽게 사비산성의 잔병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는 산성을 평정한 뒤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김유신은 가히 신장(神將)이다!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이 소식은 낙양에까지 전해졌다.
당주 이치는 과히 탐탁찮은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을 뿐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은 자꾸 생겼다.
그해 8월에는 남역에 심한 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더욱 어수선해졌고,
이듬해인 을축년(665년) 2월에는 왕제(王弟) 문왕이 급사했다.
누구보다 문왕을 아꼈던 법민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왕자의 예로써 성대히 문왕을 장사지내고 친히 장지로 행차해 통곡했다.
살아서 그렇게도 성질이 급하더니 죽는 것까지 남보다 빠르다며
법민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문왕을 각별히 생각했던 당주 이치도 특별히 양동벽(梁冬碧), 임지고(任智高) 등의 조위사를 파견했다.
자줏빛 관복 한 벌과 허리띠, 채능라(彩綾羅:무늬가 수놓인 고운 비단) 1백 필과 생초(生綃:명주)
2백 필의 부의가 당나라 조위사의 수레에 실려 바다를 건너왔다.
임금도 아닌 왕제의 죽음에 조위사를 보내고 부의를 그토록 성대히 갖춘 사례는 전고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치는 문왕의 조위사 편에 따로 책봉문을 보내 김유신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
(平壤郡開國公)에 봉하고 겸하여 식읍 2천 호를 하사했다.
명분은 그간 김유신이 세운 모든 공을 통틀어 치하한다는 것이었으나 입조도 하지 않은
번국의 장수에게 황제가 친히 책봉사를 보내고 식읍까지 하사한다는 것 또한 선대에는
유례가 없던 조치였다.
아우를 잃고 비통함에 잠겨 있던 법민도 그 순간만은 이치에게 서운했던 감정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조위사 겸 책봉사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답례로 금백(金帛)을 후하게 챙겨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문왕의 죽음을 이용한 당나라 조정의 외교적인 책략이었다.
얼마 뒤인 8월이 되자 이치는 법민에게 조서를 보내 웅진도독 부여융과 직접 화친을 맹약하라고
요구했다.
부여융과 법민을 동급으로 놓고, 도독부의 영토인 백제 고토를 신라로부터 굳게 지키겠다는 저의였다.
자신을 망국의 왕자였던 부여융과 같은 반열로 격하시킨 이치의 처사가 신라왕 법민 으로선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이럴 수는 없는 법 이옵니다, 마마!”
“차라리 이 기회에 웅진 부를 멸하고 당군들을 쫓아내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신하들도 격분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인내심이 많은 법민도 당주의 조서를 읽은 직후엔
눈에서 불꽃이 일고 머리털이 왕관을 뚫고 나올 만큼 대로했다.
정말 군사를 일으켜 도독부를 칠까도 심각히 고려했다.
그는 밤잠을 잊고 여러 날 고민을 계속했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하면 아직은 당과 정면으로 싸울 때가 아니었다.
북으로는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는 고구려가 건재했고,
싸움이 나면 당군 수십만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올 것이었다.
그에 비해 신라의 사정은 백제를 토벌하느라 치른 노역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뒤로도 걸핏하면 당군을 먹일 식량을 거두고 무기와 장병들을 수시로 징발하는 바람에
국고는 비고 물자는 부족하며 민심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대전을 벌이자면 수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사소한 일로 국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치욕은 나 개인으로 족하다.
때가 아니면 굽힐 줄 아는 것이 사직과 백성을 거느린 제왕의 책무가 아닌가.
옛날 한신(韓信)은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오는 수모를 당했지만 오히려 웃었고,
당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도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초기에는 돌궐의 힐리가한에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 신하라 칭했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지만 뒷날 치욕을 갚을 방책을 세운다면
오늘 당하는 수모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심사숙고한 법민의 결정이었다.
진주와 진흠을 목 베어 죽이고 그 구족까지 일거에 참형한 뒤로 신왕의 위엄을 넘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을 몸소 경험한 신라의 중신들이었다.
법민은 당이 요구한 대로 금성을 떠나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부여융과 유인원을 만났다.
어가에서 내리는 법민을 보자 부여융의 안색은 희게 변했다.
전날 자신을 말 아래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던 순간이 떠오른 탓이었다.
“원로에 노고가 크셨습니다, 대왕.”
유인원이 법민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법민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대국이 오라 하니 안 올 수 있소?”
그는 점잖은 말로 책망하듯 말한 뒤 인원에게 시선을 돌려 부여융을 보았다.
“새로 부임한 도독이신 게요?”
법민의 말에 융은 황급히 허리를 낮추었다.
아무리 같은 반열에서 화친의 동맹을 맺는 자리지만 우열과 서열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신 웅진도독 부여융, 대왕께 문안 여쭙습니다. 그간에 평강하셨는지요?”
그제야 법민은 짐짓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융을 자세히 살폈다.
“오호, 공은 의자 임금의 장자인 바로 그 부여융이구려?
신임 도독의 이름이 귀에 익었지만 필경은 동명이인이려니 하였소.
허허, 공은 재주도 용하시오!
망국의 왕자로 낙양에 갔다가 어찌하여 당나라 관인으로 다시 오셨소?”
뼈있는 인사말이었다.
융은 겸연쩍은 낯으로 더욱 허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하였나이다.
선대의 묵은 원한을 풀고 새로운 화친의 세월을 일구자면 부족하나마
신이 적임이라는 황제 폐하의 분부가 있었나이다.
앞으로는 신라를 상국으로 섬겨 대왕의 성지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니
대왕께서도 그만 지난날 백제의 허물을 용서하옵소서.
대왕마마의 은총과 자비를 바라나이다.”
융의 말투는 깍듯하고 태도는 더없이 겸손했다.
법민도 화려한 수사(修辭)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융의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매사는 도독이 하기 나름이외다.
금의환향을 하셨으니 서로 손발을 맞춰 잘 지내봅시다.
과인이 유민들을 거두어 집과 전답을 하사하고 한 사람이라도 구제해
내 나라 백성으로 삼으려는 것은 조금이라도 구원(舊怨)이 남았다면 어려운 일이오.
도독이 백제 유민들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있다면 이를 돌보는 과인과 신라 백성들에게
마땅히 고마워해야 할 것이외다.”
“삼가 명심하겠나이다.”
대강 인사를 마치자 유인원은 미리 준비한 제단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그는 황제의 칙사 자격으로 제사를 주관하고 양국의 화친을 서약하는 맹약문을 낭독했다.
맹약문 역시 유인원이 직접 쓴 것이었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先王)은 순종의 도리에 어두워 이웃나라와 우호하지 않고,
인척(姻戚:신라와 백제 왕실이 성혼한 것을 뜻한다)간에도 서로 화목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포한 짓을 저지르는 동시에 신라를 침해하고
성읍을 약탈해 거의 한 해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에 천자는 한 사람이라도 마음 놓고 살 곳이 없음을 민망해하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번번이 사자를 보내 화친할 것을 권했으나 백제는 지리가 험한 것과 중국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天道)을 모만(侮慢)하므로 드디어 황제께서 노하여 삼가 조벌(弔伐:정벌)을 행한 것이다.
황군들의 깃발이 이르는 곳은 모두 다 평정되었다.
제대로 하자면 마땅히 그 궁궐을 없애 연못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훈계로 삼고,
사직의 근원을 막아 뿌리를 뽑음으로써 후사의 영원한 교훈을 보일 것이지만 한편 생각하면
유순한 자를 감싸주고 배반하는 자를 정벌하는 일은 선왕의 아름다운 전례요,
망하는 것을 일으켜주고 끊어지는 것을 이어주는 것은 전철(前哲)의 상규(常規)가 아니던가.
모든 일이 반드시 옛날 일을 거울로 삼음은 사기의 기록으로 전해오는 바이다.
하여 전날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국토를 보전하게 하였으니,
앞으로는 신라와 서로 의지하며 오래도록 벗이 되어 각기 지난날의 원한을 풀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며, 각각 조명을 받들고 영원한 번병(藩屛)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뜻에서 사자로 우위위장군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을 파견해 친히 권유하며
뜻을 선포하는 것이니,
이를 약정함은 혼인으로써 하고, 맹세는 백마를 희생물로 삼아 피를 서로 입에 찍어 바름으로써
할 것이며, 시종을 돈독히 한 후로는 재해를 나누고 환난을 구원하며,
은의를 형제처럼 하여 윤언을 잘 받들고, 감히 이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한 번 맹약한 후로는 반드시 함께 의리를 잘 지킬 것이다.
만에 하나 이 맹약을 배반하고 덕망을 저버려 군사를 일으키고 변경을 침범한다면
천지신명은 온갖 재앙을 내려 그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할 것이고,
사직을 무너뜨려 제사조차 받들지 못하게 끊어버릴 것이다.
맹약식을 거행한 뒤엔 이런 내용을 금서철권으로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고
자손만대에 감히 위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신이여, 이 맹약을 잘 들으시고 흠향(歆饗)하사 가없는 복을 내려주소서!
자신이 쓴 장문의 맹약문을 읽은 유인원은 데려온 장정들을 시켜 백마를 잡아
천지신명과 천곡(川谷)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법민왕과 부여융에게 맹약의 증표로
백마의 피를 마시게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희생물인 백마를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간직해두도록 한 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취리산을 내려왔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검교 유인궤는 신라, 백제, 탐라, 왜의 4국 사신들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 모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취리산에서 유인원이 낭독한 것과 같이 4국이 싸우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다.
모욕이라면 큰 모욕이었지만 취리산에서 돌아온 법민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대궐로 돌아오자마자 장자인 정명(政明:신문왕)을 세워 태자에 봉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사(大赦)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