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2장 장수 8

오늘의 쉼터 2014. 11. 25. 10:07

32장 장수 8

 

 

지수신은 가지내(은진)현을 다스리던 관수 지(遲)시덕이 낳은 3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첫째 아들 수은은 도성을 지키던 방군 장수로 있다가 사비성이 함락될 때 목숨을 잃었고,

윤충의 부장이던 둘째 수영은 대야성에서 김유신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김품석 내외의 뼈와

교환된 뒤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절로 들어갔다.

그는 불문에 귀의하며 손에서 무기를 놓았으나 나라가 망한 뒤 도침이 승병을 모집할 때

다시 칼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지시덕이 불사를 깊이 받들어 마지막에 얻었다는

지장(智將) 수신은 오랫동안 고향에서 아버지를 도와 향군을 거느렸다.

그 공으로 지시덕이 죽자 관수 일을 물려받았는데, 가지 내가 나당 연합군의 집결지가 되어

적군의 손에 들어가자 향군을 이끌고 칠악 으로 도망가 좌평 정무와 합류했다.

그는 인근 가림군에 살던 흑치상지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다.

사람을 결코 높여 말하지 않던 수신은 향당의 나이 많은 무인들 사이에서 건방지다는

조명이 떠돌 정도였지만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흑치상지에게는 늘 예를 갖춰 깍듯이 대했다.

집안의 막내로 처지와 나이가 비슷했던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다짐하며 좋은 일과 궂은일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지 오래였다.

주류성이 망하고 부여풍이 왜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寶劍)까지 버려둔 채 종적을 감추자

흑치상지는 사타상여와 수미, 장귀 등의 별부장을 거느리고 성곽 뒤편 험한 곳에 의지해

끝까지 저항했다.

이때 흑치상지를 설득하기 위해 나선 이가 곧 부여융 이었다.

융은 유인궤와 손인사의 허락을 얻어 혼자 흑치상지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융을 본 흑치상지는 크게 놀랐다.

“태자마마께서 여기엔 어인 일이십니까?”

왕궁을 상시 드나들던 흑치사차를 따라 어려서부터 왕자들과 면을 익힌 흑치상지는

단번에 융을 알아보았다.

융 또한 자신이 태자에서 쫓겨나 금표 구역에서 지낼 때 지엄한 왕명에도 불구하고

문안을 와준 흑치상지를 모를 리 없었다.

“오늘은 태자로 오지 않고 당나라 관인으로 왔소.

이번에 당군이 들어온 것은 웅진도독인 나를 보좌하기 위함이오.”

융은 자리를 잡고 앉자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그러니 장군께서도 이 부여융을 좀 도와주오.

나당 연합군의 숫자가 40만이 넘소.

이런 형세로는 비록 지조와 절개를 드높일 수는 있으나 복국(復國)은 어렵소.

지금으로선 딱히 장담할 수 없지만 오늘 장군이 나를 도와준다면 뒷날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융으로부터 소상한 사정을 전해들은 흑치상지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흑치상지가 눈을 뜨고 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태자께서는 당나라 관인으로 공을 세우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회를 보아 이 나라를 되찾을 뜻이 분명히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흑치상지에게 융은 낙양으로 끌려갔다가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최후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믿어주오, 장군! 장군이 내 형편으로 들어와 생각하면 명백하지 않소?”

그러자 흑치상지는 어금니를 굳게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설혹 제가 항복을 하더라도 그것은 당인에게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태자마마께 신속하는 것입니다.

태자마마께서 풍 임금처럼 달아난다면 언제고 다시 일어나 싸울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소. 나는 결코 숙부처럼 달아나지 않을 것이오. 맹세하겠소!”

흑치상지가 항복할 뜻을 드러내자 융은 그에게 임존성의 지수신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지수신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흑치상지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어떡하오?

나는 지수신과 일면식도 없으니 찾아가서 설득하기도 어렵구려.”

“마마께서 가셔도 마찬가집니다.

최근에 그는 풍 임금과 좌평 복신이 싸우는 것을 보고 난 뒤 왕실에 대한 반감이 있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로 낭패가 아니오? 장군의 뜻은 어떠하오?”

융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묻자 흑치상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수신과 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눠온 사입니다.

그는 회유할 수 없는 강직한 인물입니다. 회유할 수 없다면 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를 꺾을 사람은 천하에 오직 저밖에 없습니다.”

융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융은 감히 지수신을 쳐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했다.

한참 만에 흑치상지가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 험지에 의거해 밥을 굶은 지 오랩니다.

돌아가시거든 저에게 갑옷과 식량을 좀 보내주시고,

그런 다음 임존성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알겠소. 장군의 말씀대로 하리다.”

융은 당군 진영으로 돌아와 흑치상지의 뜻을 전했다.

“흑치상지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융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인사가 발칵 화를 냈다.

“어떻게 흑치상지를 믿는단 말이오?

그에게 갑의를 주고 군량을 보조한다면 이는 도둑에게 오히려 편의를 제공하자는 게 아니오?”

하지만 노신 유인궤의 생각은 달랐다.

부여융이 웅진 도독이 된 뒤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에 봉해진 그는

융의 제안이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보니 도독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지모 또한 대단하오.

지모가 있는 자가 어찌 이 같은 사면초가의 형세를 읽지 못하겠소?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변절하거나 배반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투항할 수 있는 명분이오.

지수신과 흑치상지가 비록 오랜 우정을 나눈 절친한 사이라고는 하나 수많은 부하와 군사들의

목숨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것이오.

기회를 주어 공을 세우게 합시다.”

손 인사는 그 뒤로도 두어 차례 흑치상지의 야심을 걱정했지만 모든 일에 능숙한 유인궤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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