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장수 7
마음 같아선 당장 복신을 사로잡아 목을 치고 싶었으나 따르는 세력이 자신의 갑절은 되니
함부로 일을 벌였다간 도리어 자신이 해를 당할 공산이 컸다.
그는 두 아들에게 입 조심을 당부한 뒤,
“기회가 올 것이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너희는 과히 염려하지 말라.”
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복신의 사자가 와서,
“상잠 장군께서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하고 울먹였다. 풍이 깜짝 놀라,
“며칠 전에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별안간 무슨 병이 났단 말인가?”
하니 그 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왕께서 보내신 제사 음식을 들고 돌연 목숨이 경각에 달렸나이다.”
했다.
풍은 사비성이 망한 날짜인 7월 18일에 동명 묘와 사직단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그 음식의 일부를 복신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야단났구나. 날씨가 더워 음식이 상했던가?”
“소상한 일은 모르겠소.”
“그 음식을 먹은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닌데 어찌하여 복신만 병이 났단 말이냐?”
“글쎄올시다.”
“상태가 어떻느냐?”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사지를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는데 괴질 중에도 그런 괴질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럼 의원을 구해 뵐 일이지 병명도 알기 전에 내게는 어찌하여 시급히 왔는가?”
“장군께서 수시로 대왕을 찾으시니 무언가 남길 말씀이 있을까 하여 왔습니다.
필경은 살아나기가 힘들 듯합니다.”
풍은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탄식했다.
“그렇다면 이건 참으로 예삿일이 아니다.
복신이 죽는다면 누가 무너진 사직을 일으킨단 말이냐!
아아, 복신이 죽으면 안 된다!”
그는 황급히 말을 대령하라고 주위에 말한 뒤 복신의 사자에게 소리쳤다.
“너는 어서 가서 복신 장군께 과인이 곧 간다고 전해라.
과인이 도착하기 전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네 목을 칠 것이다!”
사자가 기겁을 하고 달려가자 풍은 곧 휘하의 장수 가운데 흑치상지(黑齒常之)를 불렀다.
흑치상지는 키가 7척이 넘고 성품이 곧은 장수로 무엇보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는데,
서동 대왕을 도와 명성이 높았던 전대의 장수 흑치사차가 본국에 와서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사차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고 말년에 다시 아들을 하나 더 보았는데,
첫아들 흑치모(黑齒謀)는 가혜성 싸움에서 김유신의 칼에 죽었고 말년에 본 아들이 바로 흑치상지였다.
공성신퇴한 흑치사차는 경사에서 조금 떨어진 서부 가림군에 식읍을 받아 살면서 늙어서 본 막내아들을 각별히 귀애했다.
아이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며 걸핏하면 간지럼을 태우고 엎치락뒤치락
맹수 부자처럼 싸우곤 했는데, 아이가 자랄수록 어찌나 몸이 날래고 발이 빠른지 예닐곱 어름부터는
숫제 아버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이놈은 틀림없는 장군감이다!”
사차는 싸움터를 전전한 자신의 일생이 과히 흡족한 것이 아니라 되도록 상지만은
다른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아이의 자질이 제 뜻과 다르니 한탄하듯 말하기를,
“자식 겉 낳지 속 못 낳는다고, 이 아이가 이처럼 태어난 것은 모두 제 운명이다.”
하면서 뒤에는 말 타고 칼 쓰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다.
장자 흑치모가 싸움터에 나가 죽은 뒤 흑치사차는 이를 괴로워하다가 얼마 뒤 죽었다.
사차가 죽을 때 상지를 불러 손을 잡고,
“홀로 만군을 상대할 자신이 없거든 칼을 들지 마라.
무슨 일이건 10년쯤 하면 문리가 트이고, 20년쯤 하면 경지가 보이고,
30년쯤 하면 내가 보이고, 40년쯤 해야 천하가 보인다.
천하를 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대면 네 형과 같이 되기 십상이니 너는 부디 아비의 말을 명심하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
상지는 의자왕이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만들 때 선대의 공으로 함께 달솔에 봉해졌으나
실제로 싸움을 하거나 정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림군에 머물며 식솔들을 보살피다가 나라가 망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내 비록 아버지의 유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수모를 당했음에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장부의 도리가 아니다.
선친께서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그와 같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상지가 그렇게 결심한 어느 날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 야산에 난데없이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없이 울어댔다.
그것은 보통의 말울음소리가 아니라 이상하게도 귀에 거슬리고 신경을 긁어대는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말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해서 울어댔고
그마저도 산지사방을 뛰어다니며 우는 통에 마을 전체가 송신하고 뒤숭숭했다.
“저놈의 말이 대체 뭘 잘못 처먹고 저리도 울어대나?”
“나라가 망했다더니 말까지 미쳐 날뛰는군 그래!”
“저게 말소리여, 귀신소리여?”
한밤중에 말이 울면 아이들은 집집마다 자다 놀라 울어대고 어른들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참다못한 마을 청년 몇 명이 말을 잡으려고 야산으로 밧줄을 가지고 올라갔지만
말은 신기하게도 사람만 보면 달아났다가 사람이 없어지면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런 와중에 몇몇이 도망가는 말을 언뜻 보았는데, 가라말이더라고 했다.
가라말 중에도 털빛이 짙은 담가라더라고 했다.
담가라도 보통 담가라가 아니라 보통 말보다 갑절은 크고 무섭게 생긴 맹수 같은 담가라라고 했다.
“사람이 키운 말이 아니여. 하늘에서 내려온 말인 게여.”
소문은 차츰 그렇게 퍼졌다.
흑치상지가 마을에 나도는 소문과 밤낮없이 울어대는 예사롭지 않은 말울음소리를 듣고는,
“이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게다.”
하고서 하루는 혼자 말이 우는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울음소리를 따라가자 이내 저만치 산모퉁이에 검푸른 가라말이 하늘을 향해
처절한 울음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흑치상지는 날쌘 동작으로 말에게 접근해 힘껏 말목을 움켜잡고 익숙한 솜씨로
답삭 말 잔등에 올라탔다.
깜짝 놀란 말이 갑자기 앞발을 높이 쳐들고 울더니 쏜살같이 산등성이로 내닫기 시작했다.
흑치상지가 아무리 달리는 말을 멈춰보려고 애를 썼지만 말은 거침없이 앞으로만 내달렸다.
달리는 말 잔등에서 흑치상지는 찬탄에 찬탄을 거듭했다.
뛰어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놈아, 어디로 가는 게냐?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게냐?”
상지는 달리는 말목을 연신 쓰다듬으며 살갑게 다뤘지만 말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산과 계곡을 따라 정신없이 내달리던 말이 마침내 강변에 이르렀다.
말은 강물로 훌쩍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
상지는 그제야 말에게 목적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야 강물을 건너갈 리가 없었다.
강을 건넌 말이 다시금 맹렬한 속도로 내달려 마침내 멈춘 곳은 황산벌,
아직 치우지 않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격전장 한 귀퉁이에서 말은 숨을 씩씩거리다 말고
또 한번 앞발을 곧추세우며 슬피 울었다.
말이 대가리를 처박고 킁킁거리는 곳에 제법 커다란 무덤 하나가 있었다.
수상히 여긴 흑치상지는 말에서 내려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백제 충신 계백지 묘’
아, 상지는 그제야 무릎을 쳤다.
“네가 계백 장군의 말이었구나!”
일순 그의 눈에 핑글 눈물이 돌았다.
상지가 말에게 다가가자 녀석은 무덤 주위를 서성거리다 말고 양순한 태도로 눈을 끔벅였다.
“사람도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판국인데 참으로 네 뜻이 맑고 아름답구나.
너는 사람보다 오히려 낫다.
주인이 여기 묻힌 것을 알리고 싶어 그렇게 목이 쉬고 애간장이 타도록 울었던 게냐?”
상지는 말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흑치상지가 울자 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나도 이제 세상에 나서려는 참이었다. 네 등에 나를 태우겠느냐?”
감격한 흑치상지는 말의 목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물었다.
계백의 애마 담가라를 흑치상지가 얻어 타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뜻을 세운 그는 가림군을 떠나 좌평 정무의 휘하에 들어갔다.
정무가 여러 차례 싸움에서 흑치상지의 탁월한 솜씨를 눈여겨보고,
“만일 저 사람이 일찍 세상에 나왔더라면 천하의 일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구나.”
하며 만시지탄을 금치 못했다.
그 뒤로 칠악 부근의 여러 성들을 되찾을 때 흑치상지와 지수신의 무공이 으뜸이었는데,
특히 복신이 주류성을 빼앗고 사비성을 위협해 유인원의 2천 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섬멸할 때는
흑치상지가 고향에서 데려온 수미(首彌)와 장귀(長貴)에게 적의 뒤를 막아서게 하고
별부장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무인지경 적진을 달리며 창날로 목을 땄는데
그 숫자가 무릇 기백에 달했다.
또한 품일의 신라군이 두릉윤성을 공격했을 때도 흑치상지가 홀로 나가 막았고,
천존의 아우인 천품과 임존성 앞에서 싸울 때는 1백여 합이 넘도록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천품이 군사를 되돌려 물러났다.
내지 사정에 어두운 풍이 왜국에서 귀국한 직후 복신에게 가장 믿을 만한 장수 하나를
천거해달라고 부탁하자 복신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흑치상지를 말했다.
그때는 복신이 풍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충성을 맹세했을 때였다.
그러나 시일이 흐를수록 복신은 그 일을 가장 후회했다.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눈에 헛것이 씌어 흑치상지를 풍에게 소개했구나.
아, 내가 과연 미친놈이다!”
복신은 수시로 그렇게 탄식하며 기회만 있으면 흑치상지를 다시 임존성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풍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복신의 사자를 먼저 돌려보낸 뒤 풍은 흑치상지에게 가만히 물었다.
“공은 나와 복신 가운데 누구를 섬기시오?
내 앞이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말고 솔직히 그대 뜻을 말씀해보구려.”
뜻밖의 질문에 흑치상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군주께서는 이미 백제인의 임금이십니다.
신이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누구를 섬기오리까?”
“그게 과연 진심인 게요?”
“그렇습니다.”
“하면 한 가지 부탁이 있소.”
“하명하십시오, 전하.”
“이제 복신이 거짓으로 칭병하고 나를 부른 뜻은 과인을 죽여 스스로 임금이 되려 함이오.
충지의 말로는 도침을 죽인 자도 복신이라 하고, 임존성의 장수 지수신 조차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어찌 복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겠소?
하니 공이 나를 수행하여 복신에게로 갑시다.
그가 정말 사경을 헤맬 양이면 위협이 없겠지만 필경은 꿍꿍이가 따로 있을 게 틀림없소.
공이 같이 가야만 내가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겠소.”
풍이 애처로운 얼굴로 부탁하자 흑치상지는 쾌히 청을 수락했다.
“지수신은 현명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사실일 것이니 소장이 어찌 전하를 뫼시지 않으오리까.
복신이 비록 부흥군을 이끈 공은 높으나 충심이 없다면 그 또한 일개 역신일 뿐입니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신이 먼저 결판을 짓겠나이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사타상여와 수미, 장귀로 하여금 풍을 엄호하게 하고
자신은 손때가 묻은 창 한 자루를 든 채 앞장서서 임존성으로 향했다.
이때 복신은 비밀히 풍을 암살할 계책을 짜놓고 어두운 골방 속에서 일부러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병풍 뒤에는 미리 10여 명의 도부수가 배치되어 복신이 어이쿠,
소리를 지르면 이를 신호로 달려 나와 풍의 머리를 베도록 말을 맞춰두었다.
이윽고 복신의 수하가 달려와 풍이 온다고 알리자
복신은 끙끙거리며 열심히 꾀병을 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