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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장 장수 6

오늘의 쉼터 2014. 11. 25. 09:35

32장 장수 6

 

 

대부분의 장수들은 유민을 구휼하라는 신왕의 명령에 시뜻한 마음들이 되었지만

하는 수 없이 복명해 나갔는데, 유독 남천주 병영에서만 문제가 생겼다.

“뭐야? 이젠 망국의 백성들까지 우리가 나서서 보살펴주라고?”

왕의 사신으로부터 출정 명령을 전해 받은 진주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진흠도 만만찮은 기세로 거들었다.

“대체 임금이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선대왕을 시해한 백제 놈들이다!

그따위 일로 전군을 동원하다니 아무래도 철이 덜 든 모양이구나.”

두 형제는 한동안 노발대발하다가 마침내 진주가 사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병이 나서 출정을 못하겠다고 아뢰어라.

내 아우 진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간밤에 똑같은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서 운신기동이 어렵다.

가거든 천번 만번 죄송하다고 전하라.”

사자는 두 장수의 불경스러운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금성으로 돌아오자 곧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털어놓았다.

신왕 법민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사자에게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남천주에 다시 한번 다녀오라.

가서 두 장수에게 과인이 특별히 좋은 약을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금성에 와서 찾아가라고 일러라.”

왕명을 거역한 진주와 진흠은 사신을 돌려보낸 뒤 남천주 병영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과 더불어 신나게 놀았다.

나름대로 임금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사신이 다시 와서 임금의 뜻을 전하자 취기에 편승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선대왕을 도와 천년 사직의 원수 백제를 멸한 장본인들이다.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어야 한다.

식읍과 보물을 주지는 못할망정 어찌 토벌한 적국의 망국민을 위해

우리에게 수고로움을 끼칠 수 있더란 말이냐?

이제라도 임금이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귀히 여긴다면 마땅히 우리도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칠 것이다.

지은 약은 당분간 임금이 보관하라고 전하라.

적당한 기회가 오면 찾으러 갈 것이다.”

진주의 이 말은 다시 법민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법민은 화도 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 두 번씩이나 먼길을 다녀온다고 고생이 많았구나.”

그날 밤에 법민은 아버지 무열 대왕의 위패를 모신 황룡사 불당을 찾아가 참배하고

그 어머니 문명 태후의 처소에도 들렀다.

이튿날에는 김유신과 노신 알천을 대궐로 초청해 긴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임금의 말을 들은 김유신과 알천의 안색은 몹시 어두워졌지만

두 사람 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진주와 진흠이 금성에 나타난 것은 출정했던 장수들이 내사지성을 평정하고 돌아온 후였다.

그들 두 사람이 편전에 이르러 왕을 배알하자

법민은 돌연 만조의 문무백관들을 소집하라는 영을 내렸다.

“각간에서부터 조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왕정에 모이도록 하라!”

법민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결연했다.

진주와 진흠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특별한 일이야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 문무백관들이 왕정에 다 모이고 나자

법민은 시립한 호위 군사들에게 진주와 진흠을 결박하라고 명했다.

“저들 두 장수는 선대왕을 도와 백제를 토벌한 공을 믿고 날로 방약 무도해져서

사사건건 과인의 정사를 어지럽히고 급기야는 왕명마저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두면 국법이 문란해지고 군율이 흔들리며 사직의 근본마저 위태롭게 될 것이니

어찌 이를 처벌하지 않으랴.

금일부로 진주를 병부령에서 폐하고 진흠을 남천주총관 에서 해임하라.

이는 신하로서 꾀병을 핑계삼아 임금을 속인 죄과를 묻는 것이다.”

문무백관들은 그것으로 진주와 진흠의 죄가 대강 마무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임금의 진노는 계속되었다.

“또한 금일부로 진주와 진흠을 참형에 처하고 그 목을 사흘간 병부에 효수하라.

이는 왕명을 어긴 대가로, 저들 두 사람이 어지럽힌 전군의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임금의 말이 떨어지자 진주와 진흠은 홀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자신들을 어쩌랴 싶었던 믿음이 단숨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아울러 진주와 진흠의 구족(九族)을 찾아내어 함께 멸하라.

악신의 뒤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보여주려면 반드시 씨를 말려야 할 것이다.

씨족들이야 특별히 무슨 죄가 있으랴만 저들이 저질러놓은 죄가 이미 사직의 근본을 위협할 지경이다.

이를 바로잡자면 안타깝지만 또한 불가피한 일이다.”

만조의 백관들은 한결같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차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일장 훈시를 마친 법민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변한 진주와 진흠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장수는 들으라.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백제를 평정하고 마침내는 삼한의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한집을 꾸려야 할 과인으로선 제 살을 도려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절박한 심정으로

너희를 문죄할 수밖에 없다.

공이 높으면 그에 따르는 책무도 그만큼 큰 법임을 어찌 그토록 몰랐더란 말이냐?

너희가 이 나라 사직에 세운 찬란한 공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만대에 전할 것이니 안심하라.

어제는 공을 세우고 오늘은 죄를 지었으니 과인은 다만 신상필벌을 명확히 할 따름이다.”

왕정에는 무수한 신하들이 도열해 있었으나 감히 누구도 왕의 준엄한 유시에 토를 달지 못했다.

오로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만이 감돌 뿐 이었다.

그동안 임금에게 반감을 가졌던 늙은 신하와 장수들은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오싹해 서로 눈치만 보았고, 젊은 신하들 역시 꿈에도 예상치 못한 임금의 처사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제 그만 명대로 시행하라.”

왕명이 떨어지자 진주와 진흠은 눈물을 흘리며 도부수들에게 끌려 나갔다.

두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또 후회했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한번 노하면 누구보다 무서운 젊은 군주 법민 이었다.

진주와 진흠 형제가 망나니의 칼에 목이 떨어져 죽은 그날,

경사와 남천주, 하주와 북한산주에 흩어져 살던 그들의 식솔과 구족도 모조리 참변을 당했다.

6두품 출신으로는 최초로 병부령 까지 지낸 천하의 검객 김진주의 뒤가 그처럼 끔찍하고 참혹하였다.

한편 춘추왕이 붕어하고 당이 고구려 정벌에 기운을 쏟는 틈을 타 칠악과 웅진 부근의 백제군들은

더욱 숫자가 늘어나고 세력이 커졌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왜로부터 원군을 이끌고 귀국한 부여풍(扶餘豊)의 공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서동 대왕의 차남이자 의자의 아우인 부여풍은 젊어서부터 날카로운 기질과 총명한 자질로 한때

그 형과 왕위를 다투던 인물이었다.

그는 의자가 태자 자리에 오른 뒤 형제간의 세력이 갈리고 다툼이 일 것을 걱정한 서동 대왕의

뜻에 따라 왜국으로 가서 일생을 보냈는데, 사비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왜 왕실의 후원으로 선단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서동 대왕의 차남 부여풍이 귀국하자 백제 의병들의 기세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세력이 커갈수록 덩달아 커지는 것이 의병을 이끌던 수장들의 알력과 갈등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보완에 보완을 거듭해온 체제와 법도가 여지없이 무너진 뒤

별다른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급조한 의병 세력으로선 필히 극복해야 할 당연한 갈등일지도 몰랐다.

처음 부여풍이 왜국에서 선단을 이끌고 귀국했을 때만 해도 복신과 도침은 풍을 임금으로 맞아

전권을 위임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데 시일이 흐를수록 복신은 풍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국의 의병들을 통솔해 위세를 드높인 장본인은 정작 복신이었다.

그는 도침과 함께 수덕사에서 몸을 일으킨 이래 늘 신묘한 계책과 뛰어난 판단으로 맞서는 곳마다

나당 연합군을 크게 무찔러 당이나 왜에까지 명성이 알려질 만큼 맹위를 떨쳤다.

나라 안팎에서 망국의 일을 슬퍼하던 백제 유민들 사이에선 오로지 복신이 있어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칭송이 자자했고, 이에 용기를 얻어 칠악 으로 찾아오는 장정들은

열에 아홉이 복신 장군의 부하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는 661년 2월, 유인원이 이끌던 당나라 유진군 2천을 전멸시키고 임존성을 점거한 일을 필두로,

품일의 신라 원군을 기습해 모조리 땅에 묻어버렸고, 주류성을 탈환해 사비성을 장악한

당군의 바닷길을 봉쇄한 것도 복신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이었다.

그리하여 사비성과 웅진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강역이 거의 수복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 그가 왜국에서 나타난 부여풍을 임금으로 섬기자니 원통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죽 쒀 개 준다고, 장군께서는 무엇 때문에 힘들여 수복한 땅을 남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전날의 사직은 이미 망한 것입니다.

지금 수복한 땅은 장군의 땅이 아닙니까?

사직을 다시 세우심이 옳습니다.”

“왜국에서 원군이 왔다 해도 그 수는 기껏 2만이 넘지 않습니다.

칠악에 운집한 의병들이 갑절은 되니

세력을 견주어도 마땅히 장군이 보위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신의 부하들도 틈만 나면 흔들리는 복신을 그렇게 들쑤셨다.

풍과 복신은 사촌 형제간이었다.

보위를 자신이 이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차츰 임금이 될 궁리에 사로잡히게 된 복신은 제일 먼저 도침의 동의를 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대사께서는 왜국에서 온 부여풍이 과연 수복한 나라의 임금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보시오?”

하루는 복신이 임존성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놓고 주류성에 머물던 도침을 청하여

은근한 말로 묻자 도침은 사뭇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소승이 염주와 목탁을 버리고 창칼을 든 것은 오로지 스러진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섭니다.

이제 부처님의 도움으로 강토를 거의 되찾았으니 마땅히 임금을 모셔야 하겠는데,

전에 모시던 임금과 태자께서는 모두 낙양으로 끌려가셨으니

서열로 보아 왕제(王弟)를 옹립하는 것이 순리지요.

자격을 논하매 그이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도침은 야속하리만치 말을 매섭게 분질렀다.

복신은 이 일로 도침에게 앙심을 품었다.

처음 몸을 일으킬 때부터 온갖 궂은일을 나누고 함께 고생해온 그가

하루아침에 풍에게 붙어 충성을 하려 드니 은근히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복신의 속내를 알아차린 도침으로부터,

“장군께서는 자중하십시오.

지금은 보위를 놓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나라를 온전히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니 부디 마음을 비우시오.”

하는 훈계까지 듣고 나자 급기야는 도침을 죽일 뜻을 품었다.

그는 부하를 시켜 도침이 주류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덩이를 파놓은 뒤 근처에 궁수들을 매복시켰다.

이튿날 임존성을 나선 도침이 수레에 올라 졸고 가는데 갑자기 땅이 송두리째 꺼지면서

수레가 구덩이에 둘러빠지자 사방에서 궁수들이 나타나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영거 장군 도침은 온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가 되었다.

복신은 이를 적의 기습으로 위장한 뒤 도침의 시신을 거두어 성대히 장사지내니

도침을 따르던 승병들은 모두 복신의 휘하로 들어오고 말았다.

도침을 없애고 나자 복신은 더 이상 자신의 본심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는 부여풍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보아하니 군주께선 군사(軍事)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왜군의 지휘를 내게 맡기고 제사만 주관하는 것이 어떻소?”

“왜국에선 원군이 더 오지 않소?

기껏 2만도 안 되는 원군을 보내 무너진 사직을 일으키라니 어이가 없을 뿐이오.”

하고는 심지어,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 원군을 청해보는 것이 어떠하오?

군주께서 가신다면 내가 장수들을 시켜 평양의 장안성 까지 안전히 다녀오도록 조치를 취하겠소.”

하며 거만하게 위협했다.

풍이 듣기에 고구려로 들어가라는 말은 수복군의 전권을 자신에게 양도하라는 뜻이었다.

젊어서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풍이 복신의 변심을 눈치 채지 못할 턱이 없었다.

“아바마마, 영거 장군 도침을 죽인 사람은 복신 숙부입니다.

우리 군사가 칠악 근방을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엄중히 수비하는 판에

적이 어느 길로 들어와 유독 도침 한 사람만을 죽이고 돌아갈 리 있습니까?”

풍의 큰아들 충승(扶餘忠勝)의 말에 작은아들 충지(扶餘忠志)도 이렇게 덧붙였다.

“임존성의 장수 지수신(遲受信)은 의리가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가 도침을 죽인 사람은 복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소자가 직접 들었나이다.”

풍은 아들들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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