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장수 4
“목이 마르다. 물을 떠오라.”
법당 바깥으로 나온 춘추가 나무그늘을 찾아 앉으며 말하자
종관들이 주지를 앞세우고 우물가로 갔다.
종관 하나가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지를 불렀다.
“물 빛깔이 왜 이렇소?”
두레박 속에는 맑은 물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본 주지가 황급히 불전을 향해 절을 한 뒤,
“큰일 났습니다!
이는 서동 임금께서 노하신 증거입니다! 반드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춘추는 물을 뜨러 갔던 종관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자 친히 우물가로 와서 물빛을 확인했다.
과연 우물물의 빛깔은 피와 같아서 한 모금도 입에 댈 수 없었다.
“괴이한 일이로다……”
춘추가 석연찮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는 것이 좋겠나이다.”
“그렇습니다. 백제는 망하기 전에 수십 가지 괴사(怪事)와 기변(奇變)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그 망조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듯하니 자칫 대왕께서 화를 당하실까 걱정이옵니다.”
신하들이 한결같이 권유했다. 하지만 춘추로선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더욱이 그런 일로 쫓기듯이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곳은 이제 무왕의 강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땅,
망조가 있다면 눌러서 꺾어야 하고 사기(邪氣)가 돈다면 마땅히 물리쳐 다스려야 할 것이었다.
“금마저도 소부리도 이젠 신라의 강역이며 죽은 임금도 살아 있는 중들도 모두 과인의 신하들이다.
우물에 기변이 생긴 것도 내 나라 내 땅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찌 내가 다스리지 않겠는가?
오늘은 이 절 근처에서 하루를 묵을 것이니 군사들에게 말하여 군장을 내리고 쉬게 하라.
사악한 기운은 우리 장병들의 정기로써 다스릴 것이다!”
과연 춘추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행원들뿐 아니라 금마군에 들어온 후군들까지 모두 불러와 대관사 근처에
군막을 치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이었다.
춘추가 어가를 내려놓은 금마저의 병영 주변에 비도 오지 않았는데 돌연 땅이 질척질척하게 변하더니
땅 밑에서 피가 흘러나와 무려 다섯 보 정도나 넓게 퍼졌다.
땅에서 솟아난 그것은 틀림없는 피였다.
역한 피비린내가 병영 주변에 가득 찼다.
그 냄새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곧 악취로 변했다.
군사들은 코를 싸쥐고 군막에서 달려 나와 먹은 것을 토하느라 사방이 숫제 아수라장이 되었다.
춘추도 병영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한밤중의 난리 통이었다.
대관사의 젊은 중 하나가 야음을 틈타 춘추가 머물고 있던 조막(朝幕)으로 숨어들었다.
의자의 서자 부여궁 이었다.
그는 나라가 망한 뒤 혼란한 와중에 소정방이 장악하고 있던 사비성을 탈출해 금마군에 숨어 지냈다.
금마군에는 난리를 피해 도성에서 먼저 도망간 그의 동복누이가 있었다.
궁은 누이를 만나 앞일을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왜로 피신하려 했으나 당장은 배편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누이의 남편인 금마군 장리의 아들이 배를 구할 때까지 대관사에서 중노릇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렇게 하면 신분도 쉽게 감출 수가 있지만 설혹 들통이 나더라도 서동 대왕을 생불처럼 섬기는
대관사에서 엄연한 대왕의 핏줄을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냐는 것이 매부의 말이었다.
궁은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대관사에서 어설픈 중노릇을 하며 살았다.
나라가 망한 뒤 중이 되겠다고 찾아오는 이가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히 의심은 받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숙부인 복신이 귀국해 결성한 부흥군이 칠악 근방에서 날로 맹위를 떨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궁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복신을 찾아가 미력이나마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한창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뜻밖에도 신라왕이 적군을 이끌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는 지하에 계신 열성조의 음덕이며 특히 할아버지 서동 대왕께서 나를 어여삐 여겨 마련하신
천금같은 기회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신라왕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왔으니 내 어찌 그를 살려 보내겠는가!”
궁은 슬그머니 절을 빠져나와 누이의 집에서 칼 한 자루를 얻으며 말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 의자가 대전에서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던 광경이었다.
“꼭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라버니마저 화를 당하신다면 저는 누구를 믿고 살겠는지요.”
누이가 애틋한 눈길로 만류했으나 궁은 어금니를 깨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너는 아바마마께서 당한 수모를 보지 않아서 모른다.
자식으로 부모의 치욕을 갚지 않는다면 백수를 누린들 그 삶이 얼마나 떳떳하겠느냐.”
궁은 연신 눈시울을 적시던 누이와 하직하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신라군의 병영으로
숨어들었다.
과연 서동 대왕의 음조였을까.
궁이 조막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돌연 사방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땅에서 피가 솟아올라 병영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 덕택에 그는 대왕기가 펄럭이는 조막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궁은 막사 앞을 지키는 초병의 목을 따고 쏜살같이 안으로 잠입했다.
그때쯤 신라왕 춘추도 군사들의 소란과 역한 냄새에 눈을 떠서 바깥으로 나가보려고
막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궁은 재빨리 춘추의 등 뒤로 다가서서 품에 숨겨온 칼을 꺼내 들었다.
“김춘추는 나를 똑바로 보라!”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놀란 춘추가 급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냐?”
“나는 의자 대왕의 서자인 백제 좌평 부여궁이다.”
침입자의 결연한 표정과 자신을 겨눈 코앞의 칼끝을 동시에 바라보던 춘추는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자신에게 닥쳐온 최후를 예감했다.
“나를 죽인다고 망한 나라가 다시 일어나겠는가?”
춘추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물었다.
시간에 쫓기던 부여궁 으로선 마음이 급했다.
“그런 것은 나는 모른다.
다만 너에게 지울 길 없는 수모를 당하고 당으로 끌려간 내 아버지의 원한을 기억할 뿐이다.”
“허, 그런가……”
춘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서 뜻대로 행하라.
자식으로서 부모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은 가상한 일이니 어찌 너를 나무라겠느냐.”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춘추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니 그간 살아온 수많은 일들이 한순간에 뇌리를 스쳐갔다.
예기치 않은 순간 갑자기 덮친 죽음이라 한두 가지 미련이야 어이 없으랴만
문득 이대로 끝이 난들 또한 어떠랴 싶었다.
백제를 멸했으니 유한은 없고 본래 죽음이란 누구한테나 갑작스런 일이 아니던가.
춘추의 의연한 태도에 부여궁은 작심한 바를 선뜻 결행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무엇하는가?”
죽을 사람의 재촉하는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조막 밖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부여궁은 엉겁결에 칼자루를 단단히 그러쥐고 춘추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이제 속이 후련 하느냐.”
칼에 찔린 춘추가 궁을 안은 채로 말했다.
죽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 궁은 급히 춘추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내 다시 여러 차례
정신없이 찔러댔다.
신라 장수들이 들이닥친 것은 그때였다.
“아니 저놈이?”
무심코 조막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죽지와 흠순 이었다.
군사들의 병영을 옮긴 뒤 보고를 하러 들어온 두 장수는 뜻밖의 광경 앞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칼을 뽑아든 사람은 죽지였다.
춘추와 불상득하여 일생 사이가 버성겼던 그였지만 칼에 찔린 임금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네 이놈!”
죽지가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며 부여궁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사이 흠순은 칼에 찔린 임금을 안고 상처를 살폈다.
“태자를 도와…… 태자를 도와……”
돌아보면 모두가 한바탕 흐드러진 꿈이었으리.
오래도록 깨지 않던 고단하고도 휘황한 세월을 뒤로 한 채 처남 흠순을 바라보는 춘추의 두 눈이
떨어지는 유성처럼 무서운 속도로 빛을 잃어갔다.
“마마, 대왕마마!”
흠순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춘추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뜨려고 몇 번 애를 쓰는 듯하다가
그대로 엷은 웃음을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
왕이 죽자 흠순도 이를 갈며 칼을 뽑아 들었지만 이미 부여궁은 죽지의 칼에 맞아 목이 떨어진 뒤였다.
흠순은 부여궁의 머리를 칼끝에 찍어 들고 조막 바깥으로 달려 나와 산천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대왕이 돌아가셨다! 우리 대왕이 돌아가셨다!”
선왕의 장수를 베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급변(急變)이었다.
임금이 죽자 금마군의 군사들은 시신을 어가에 모시고 장졸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금성으로 회군했다.
김춘추의 죽음은 백제를 멸한 뒤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하루아침에
충격과 비통함으로 바꿔놓았다.
문명 왕후 문희는 왕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다가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고,
태자를 비롯한 왕의 자제들도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떠난 뒤 대궐에 남아 국사를 돌보던 김유신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어전에 엎드려
사흘 밤낮을 움직이지 않았으며, 9장수를 비롯한 만조의 백관들 역시 수시로 통곡하는 것이
마치 부모를 여읜 어린아이들 같았다.
노신 알천은 집에서 비보를 듣자 맨발로 대궐까지 달려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울었고,
대국통(大國統:오늘날 종정) 자장(慈藏)과 법사 명랑(明朗), 대사 원효 등 이름난 중들도
눈물을 뿌리며 대궐에 모여들어 염불과 기도로 왕의 명복을 빌었다.
성군의 타계는 왕실과 조정의 슬픔만이 아니었다.
왕의 장례가 거행되는 동안 통곡소리는 집집마다 구슬펐으며 황룡사, 흥륜사를 위시한
경향 각지의 대찰과 소찰에서도 죽은 임금의 성덕을 기리는 제사와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오는 것은 만고의 섭리가 아니던가.
비명에 간 선왕의 나이 59세,
하물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나라 안팎의 어지러운 일들을 돌아보면 더욱 아깝고 원통한 죽음이었으나
한 번 넘어가면 그 어떤 재주로도 다시 돌릴 수 없는 것이 생사의 경계요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일 터였다.
신라의 문무백관들은 돌아가신 춘추왕의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정하고 영경사 북봉에
장사를 지낸 뒤 다시금 상호(上號:廟號)하기를 태종(太宗)이라 하니,
이는 전대와 후대를 통틀어 신라의 56임금 가운데 유례가 없는 일이며,
태종이란 종묘사직에 그이만큼 큰 사람이 다시없다는 최고의 예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죽은 당나라 이세민의 시호가 또한 태종이므로 살아서 남달랐던 두 사람의 관계를
회상하면 또 한 번 인연의 깊고 묘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춘추의 죽음이 당에 알려지자 이치는 낙성문(洛城門)까지 걸어 나와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삼한을 둘러싼 숨 가쁜 정세는 신라가 성군을 잃은 슬픔에 마냥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음을 듣고 낙양에서 달려온 선왕의 차남 인문이 장지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법민을 찾아와 말했다.
“당주는 이미 소정방에게 35도(道)의 수륙군(水陸軍)을 모두 거느리게 하여 고구려로 보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급히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서로 호응할 것을 말했으니
비록 상중이지만 칙명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 즉위식을 거행할 여유조차 없었다.
태자 법민은 편전에서 간소하게 즉위한 뒤 곧 거병 명령을 내렸다.
그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과 진주, 흠돌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을 귀당(貴幢) 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上州:尙州) 총관으로,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下州:창녕) 총관으로, 군관, 수세, 고순을 남천주(南川州:경기도 이천)
총관으로, 술실, 달관, 문영을 수약주(首若州:춘천) 총관으로, 문훈, 진순을 하서주(河西州:강릉)
총관으로, 진복을 서당(誓幢) 총관으로, 의광과 위지(慰知)를 각기 낭당(郎幢) 총관과 계금(?衿)
대감으로 삼은 뒤 친히 모든 장병들을 거느리고 금성을 출발해 한산주(漢山州:지금의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