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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장 장수 5

오늘의 쉼터 2014. 11. 23. 23:59

32장 장수 5 

 

 

그런데 법민이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렀을 때 선군의 사자가 와서 백제의 잔적들이

옹산성(甕山城:회덕)에 의거해 길을 막으므로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알렸다.

병부령 진주가 머리털을 꼿꼿이 세운 채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마마, 옹산성은 신이 가서 단숨에 쓸어버리겠나이다!

신에게 태종 대왕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선왕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던 진주였다.

그는 국상이 난 뒤로 연일 서럽게 통곡하며 백제인 이라면 씨를 말려버리겠노라

새파랗게 이를 갈았다.

그 바람에 백제인인 충상과 자간, 무수와 인수 같은 이들은 진주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입궐도 기피할 정도였다.

진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성질 급한 흠돌이 나섰다.

“신에게도 3천 군사만 주옵소서!

백제인의 오장육부를 꺼내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왕의 영전에 바치겠나이다!”

어찌 그들뿐이랴.

국상을 치르고 나온 신라 장수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백제인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치를 떨었다.

“백제인처럼 배은망덕한 무리는 세상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선대왕께서 얼마나 저희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셨는데,

그 은공을 이렇게 갚는단 말입니까!

백제인을 궤멸시키지 않고는 언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나이다!”

“당나라 유진 군들로부터 백제 전역을 돌려받아 우리가 토벌에 나서야 옳습니다!

백제인 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사나운 짐승의 새끼를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차라리 죽여 없애는 편이 백번 지당합니다!”

장수들은 이구동성 소리쳤다. 그대로 두면 백제의 잔적들은 물론 무고한 양민들까지

해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신왕 법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제장들의 의견은 충분히 알겠소.

그러나 백제인을 모조리 죽여 없앤들 선왕께서 살아 돌아오실 것이며,

그렇게 한다고 대왕의 혼백이 기꺼워하시겠소?

선왕을 해친 자는 백제인이 아니라 부여궁일 뿐이오.

오히려 삼한 사람들을 전부 끌어 모아 한 지붕 밑에 살게 하려면

이런 때일수록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소?

원한으로 말하면 과인보다 더한 이가 어디 있겠소만 나는 그것이 돌아가신

선왕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이어 법민은 옹산성에 사신을 파견해 항복할 것을 권유하고자 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백제인 들을 말로 설득하자는 신왕의 뜻이

격분한 장수들에게 먹혀들 리 없었다.

“임금의 말씀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은 이미 창칼을 들고 우리를 가로막은 불충한 무리가 아니오?”

“그렇소! 임금께서 뭐라고 하든 나는 선왕의 원한을 갚아야겠소!”

“모시던 임금이 살해되셨는데 그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불충 가운데 가장 큰 불충이오!

신왕께서는 부왕의 원한부터 갚고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말씀하시오!”

장수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반응이 예상 외로 거세어지자 법민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아버지의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병부령 진주가 성난 장수들을 대표해 칼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나는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가로막아도 반드시 옹산성을 궤멸시켜야겠소!

장부에겐 장부의 길이 있고 신하에겐 신하의 도리가 있거니와 선왕의 원한을 갚는 일은

국사가 아니라 김진주 개인지사요.

임금께선 간섭하지 마시오!”

사태는 짐짓 불경한 지경으로까지 치달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상석을 지키던 노장 김유신이 진주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앉으라!”

신왕의 면전에서 칼까지 뽑아 들고 거벽을 떨던 진주도 김유신의 고함소리에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장군……”

“어서 칼을 거두고 자리에 앉아라.”

유신이 다시 점잖게 타일렀다.

진주는 유신의 노한 표정을 보고야 슬그머니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진주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자 유신은 조카인 법민 앞에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전하, 하늘같고 태산 같은 선대왕을 잃고 아직 매사가 상시(常時) 같지 않은 장수들이옵니다.

부디 오늘의 불경을 용서하옵소서.

시일이 흐르면 장수들도 차츰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릴 것입니다.”

이어 유신은 다음과 같이 계책을 내었다.

“옹산성에는 신이 가겠나이다.

신이 가서 옹산성을 포위하고 반드시 먼저 항복을 권유해 백제인 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겠습니다.

그러나 사비성의 진 수사 유인원과 해포(鞋浦)에서 만나기로 약정한 날이 있으므로

마냥 항복을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나이까?

세 번 기회를 주어 불응한다면 그때는 창칼로써 옹산성의 잔적을 토벌하겠나이다.”

유신의 말에 법민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는 상신만 믿겠습니다.”

김유신은 진주를 비롯한 몇몇 장수들을 거느리고 옹산성 으로 진격했다.

적당한 곳에 이르러 병영을 설치한 그는 진중의 목소리 큰 군사를 성 밑으로 보내

임금과 약속한 대로 먼저 적장을 설득했다.

“너희 나라가 대국에게 토벌을 당한 것은 치도(治道)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디 천명(天命)에 복종하라.

우리는 너희를 함부로 대한 일이 없다.

명에 순종하는 자에겐 상을 주고 거역하는 자만 죽였을 뿐이다.

지금 너희가 홀로 고성(孤城)을 지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필경은 다 참혹해질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느니만 못하다.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목숨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 가히 부귀영화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유신은 세 번이나 적을 설득했지만 적성에서 돌아오는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허튼수작을 거두어라!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모두 넉넉하고 군사들은 용감하다.

차라리 죽기로 싸울지언정 살아서 항복하는 일은 맹세코 없을 것이다!”

옹산성의 장수는 복신과 도침을 따라왔던 금물현의 장사 해미였다.

세 번 설득에 실패하자 유신은 마침내 진격 명령을 내렸다.

“궁한 지경에 빠진 새와 곤란한 처지의 짐승도 스스로 제 목숨을 구할 줄 아는 법이거늘.”

성군을 잃고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신라의 장수와 군사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북소리를 울리며 앞을 다투어 성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성문 근처에 이르러 대책(大柵)을 불 지르고

성벽을 향해 포차를 쏘아댔다.

웅현정에 머물던 신왕 법민은 정작 싸움이 벌어지자

갑옷과 투구를 쓰고 높은 곳에 올라가 친히 눈물 섞인 고함으로 군사들을 지휘하고 격려했다.

 

임금까지 나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려하자 신라군들의 사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9월 25일에 시작된 싸움은 사흘째인 27일에 끝났다.

결과는 신라군의 대승이었다.

5천을 헤아리던 옹산성의 백제군들은 거의 목숨을 잃었고 해미도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전사했다.

옹산성에 입성하자 법민은 다시 장수들에게 말했다.

“옥석을 구분해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러자 장수들은 다시 거세게 반발했다.

“지금 백제인으로서 저항하는 무리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원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기를 들면 잔적이고 무기를 놓으면 백성입니다.

어떻게 옥석을 가리란 말씀입니까?”

“우선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제외하고 남자들도 일일이 얘기를 나눠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당군과 혜포에서 약조한 군기가 있나이다.

그러잖아도 시일이 지체되었는데 생포한 자들과 일일이 얘기를 나누라니요?”

“시일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그렇게 하오.

무기를 들지 않은 백제 백성들은 모두 과인의 백성이오.”

법민의 뜻은 확고했다.

장수들은 한결같이 신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지만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은 김유신의 위세에 압도되어 감히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왕명을 받드느라 옹산성에서 다시 사나흘을 더 지체했다.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끝나자 법민은 승전의 공을 논해 각간, 이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하사하고, 잡찬과 파진찬, 대아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아래 있는 자들도 각각 1품씩 벼슬을 올려주었다.

논공을 마친 법민은 자신이 머물던 웅현정 부근에 역부들을 남겨 웅현성을 축조하라고 일렀다.

법민의 이 같은 행보는 옹산성 인근에서 궐기한 우술성(雨述城:대덕)의 백제인 들에게

당장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술성의 장수는 망국에서 달솔 벼슬을 지냈던 조복(助服)과 은솔 파가(波伽)였다.

이들은 옹산성이 공격을 받은 시초만 해도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상주총관 품일의 군대와

맹렬히 교전했으나 옹산성이 무너진 뒤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마침내 싸움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법민은 다시 장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복한 조복에게는 급찬 벼슬을 주어

고타야군(古陀耶郡:안동) 태수로 삼고, 파가에게도 급찬 벼슬을 주고 겸하여 집과 의복을 하사했다.

이 무렵 법민은 고구려로 들어갈 마음이 애당초 없었다.

당이 인문을 통해 소정방의 군대와 협공할 것을 말했지만 과연 소정방이

그 험한 요동을 거쳐 평양까지 이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칫하면 신라군들만 피해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주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법민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당주 이치는 법민의 환심을 사서 양국 동맹의 결호를 더욱 다지기 위해

뒤늦게 비단 5백 필의 부의와 함께 조위사를 신라에 파견했다.

이치로선 그렇게 하는 것이 협공할 신라군을 동원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행한 일이었지만

법민으로선 당의 요구를 잠시 뒤로 미룰 빌미를 얻은 셈이었다.

10월 29일,

남천주 근교에서 차일피일 기회만 엿보던 법민은 당주가 보낸 조위사가 온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황제의 조위사가 온다는데 내 어찌 그를 친히 맞지 않으랴!

뒷날 다시 오는 번거로움이 있어도 마땅히 대궐로 돌아가리라!”

그 이후로도 당은 고구려를 칠 때마다 번번이 신라에 군사와 식량을 요구했다.

요동으로 군사를 내면서 식량을 원조하라는 요구는 달리 말하면 고구려와 신라를

싸우게 한 뒤 뒷전에서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국세는 고구려와 정면 대결을 펼치기엔 여러 모로 불리했다.

법민이 조위사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금성에 돌아온 뒤 당에서는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을 파견해 또다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주의 칙명을 전했다.

군량인들 넉넉할 리 없었다.

백제를 칠 때 당에서 건너온 13만 군대도 신라의 양식으로 먹였고,

도독부에 남은 유진군 들에게도 달마다 양식이 건네지는 판이었다.

임술년(662년) 정월, 법민은 당의 요구에 못이겨 김유신을 비롯한 선왕의 9장수와 자신의 아우인

인문, 양도 등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도정하지 않은 벼 2만 2천여 석을 나눠 싣고

당군을 원조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갖은 고생 끝에 식량을 전해준 보람도 없이 당나라 군사는 밥만 지어 먹고 돌아가 버렸다.

안팎으로 심한 어려움에 처한 신왕 법민 이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어려움은

선왕의 장수들이었다.

선왕을 도와 백제를 멸한 장수들은 이제 갓 보위에 오른 젊은 임금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임금이 장수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는데 정사가 순탄할 리 없고,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선왕을 도와 백제를 멸하고 공전절후의 대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연일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언쟁하는 것도 민망하고 볼썽사나운 노릇이었다.

법민은 아버지 춘추가 표방했던 덕치(德治)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삼한의 민심을 얻으려 했고,

그것이 진정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선 매사에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수들은 그런 자신을 나약한 임금으로 취급하는 눈치들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훈계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정사가 그릇되지 않다는 확신은 수시로 느낄 수 있었다.

창칼로 사방을 제압하는 것보다 비록 시일은 오래 걸리지만 덕으로 다스려야 민심을 얻고

근본을 평정할 수 있었다.

춘추의 뒤를 이은 법민의 덕치는 조금씩 나라 밖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해 임술년(662년)에는

탐라국(耽羅國)의 주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와서 항복하고 속국이 되기를 자청했다.

그때도 법민은 흔쾌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도동음률 에게 이찬 벼슬을 주려 했으나

진주를 비롯한 장수들은 새로운 관리를 뽑아 탐라를 다스리자고 주장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법민은 궁리 끝에 잔치도 열어주고 선물도 하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열 마디, 백 마디를 하는 것보다 김유신의 한 마디가 더 위력이 있었다.

그런 일들은 법민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큰 외숙 김유신의 위엄을 빌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비록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장래를 내다보면 과히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김유신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답답한 그는 김유신에게 몇 차례 속내를 털어놓고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김유신 이라고 별 뾰족한 묘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신 역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일을 깊이 고뇌하는 중이지만 이는 전하께서 넘어야 할 산입니다.

신이 오로지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니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소서.”

“큰 외숙께서 보시기에 제가 과연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뜻이 다를 뿐 잘잘못은 없나이다.

장수들이란 본래 거친 구석이 있게 마련이며 방자함이란 무언가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8월에 백제 잔적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충남 유성)에 집결해 이미 신라에 항복한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하소연이 금성에 전해졌다.

급보에 접한 왕은 재빨리 장수들을 불러 말했다.

“유민을 괴롭히는 것은 우리 백성을 짓밟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어서 가서 괴로움에 시달리는 유민들을 구휼하시오.”

이어 그는 흠순을 대장군으로 삼고 천존, 죽지, 진주, 진흠, 품일, 문충, 문영 등

무려 19명의 장수들에게 잔적 토벌을 명령했다.

물론 백제에서 귀화한 충상과 자간, 무수 등도 신라 장수들과 함께 동원됐다.

그런데 이들 장수 가운데 병부령 진주와 새롭게 남천주총관 으로 임명된 진흠 형제는

남천주 병영에 머물러 있었고, 품일과 충상은 상주에서, 문영은 수약주에서 각각 왕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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