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감성기 2
봉수는 디자인 보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오빠, 사실 여름하면 노출 아냐?
뒤를 아무리 많이 따운시켜도 엎드리면 팬티라인이 바지 밖으로 나온단 말야.
그런 걱정 안 할 수는 없을까?’
송화의 이야기 봉수의 머릿속에 뱅뱅 돌았다.
실제로도 그런 광경을 많이 보기도 했다.
회사 여직원들이 허리를 굽혀 일할 때 보면 뒤 팬티라인을 많이 파 내린 제품을 입었다고 해도
조금씩 팬티라인이 드러나곤 했다.
하물며 일반 팬티를 입었을 땐 더 심했다.
‘아예 벗고 다니면 모를까.’
봉수는 그 생각을 하고 혼자 낄낄거렸다.
“뭐가 재밌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진국이 봉수의 다자인 보드를 넘겨다보았다.
“아무 것도 아냐.”
진국이 의자를 빼내곤 머리 뒤로 손을 깍지 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아, 정말 따분해 죽겠다. 이 시간에 퇴근도 못하고 이게 뭐냐?”
“다 나중에 살이 되고 피가 되니까 참아. 아니면 소설이라도 쓰던가.”
“도대체 머릿속이 텅텅 비어서 뭐가 나와야 말이지.”
봉수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1시가 넘고 있었다.
“이제 누가 소설을 읽는다고. 그것도 이제 마니아 문화로 전락했어.
인터넷 세댄데 누가 문자를 읽겠냐.”
“열심히 진실하게 쓰면 되는 그래도 누군가 읽지 않을까?”
“그러다 굶어 죽으면 니가 나 먹여 살릴 거냐.”
진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뭐든 성실하면…”
봉수는 자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가 싶었다.
그림에서 손을 놓은 지 벌써 2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송화랑 수영이란 뭐하고 있는가 몰라.”
진국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너는 어느 때보면 꼭 여자들 만나러 회사 다니는 놈 같아.”
“그거 말고 무슨 낙이 있냐?”
진국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술 마시고 있다고? 알았다. 이 오빠들은 퇴근도 못하고 있다. 나중에 보자.”
수영이한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수영이한테 목 매단 놈 같다.”
“지금은 만나는 애가 걔 하나니까.”
진국이 웃었다.
“요즘에 중경이 놈은 뭐하는 지 코빼기도 안 보여.”
“우리 쪽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어.”
“디자인 2팀으로?”
“디자인 2팀이 없어지고 전략기획부라는 명칭으로 바뀐다는 거 같지.”
“그런데 왜 나만 깜깜무소식이었을까.”
“너는 여자들 몸매나 감상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나의 유일한 취미를 폄하하지 마라.”
진국이 봉수가 앉아 있던 의자를 자신의 모니터 앞으로 잡아 당겼다.
“어때?”
진국의 모니터엔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런데 유두만 동그랗게 가려져 있었다.
“유두 브라.”
“그러니까 유두만 가린다는 거야?”
“그래.”
봉수는 진국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편할 걸.”
“너도 여자에 대해 알만큼 아는 놈이 어째 그런 소리냐.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얼마나 불편해 하고 답답해 하는 줄 알아?
그러면서도 벗지를 못해. 옷을 입으면 유두가 톡 튀어나오니까 말야.
이건 혁명이야. 유두 브라.”
진국이 젖꼭지를 비비는 시늉을 하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이거 들고 기획실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릴 거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더 나갈 수도 있잖아.”
진국도 봉수의 핀잔에 진지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슴이 처진 사람은?”
“가슴이 처진 사람은 못하는 거지.
그러니까 유두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는 난 가슴에 자신이 있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지. 안 그래?”
봉수는 모니터 안의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슨 힘으로 버티겠냐?”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야지.”
봉수는 진국의 아이디어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별 실용성은 없어 보였다.
“원단은?”
“물론 햄을 써야지.
유두 부분은 좀 더 부드럽고 뭔가 약간은 자극적인 원단으로 쓰고 말야.”
진국은 신이 나서 말했다.
아무튼 그는 엉뚱한 구석이 많았다.
“그리고 너 그거 아냐?”
“뭐?”
봉수는 그가 또 어떤 엉뚱한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채팅하다가 안 건데…”
진국이 봉수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여자애들이 말야.
그러니까 젖가슴이 막 발달하려고 할 때 브래지어를 하면 정말 답답하거든.”
“그래서?”
“그래서 브래지어를 안하고 유두에다가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다닌다는 거야.”
봉수는 상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일회용 밴드에서 진일보 한 거지.”
“너 애들 채팅방에 들어갔냐? 너 혹시 너도 원조…”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아이디어를…”
진국이 기겁을 하고 펄쩍 뛰었다.
“도둑놈이 제발 저린다고 나한테 고백해 봐.”
봉수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런데 진국은 의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설마…”
“아니야, 아니라니까. 난 그저…”
봉수는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진국에 대해 믿고 싶었다.
“하여튼 조심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자칫하면 한 순간에 아작 나는 수가 있어.
만난다는 게 잘못된 거니까 애초에 그런 일 벌이지 마라.
난 내 친구가 뉴스나 텔레비전에서 모자이크 처리돼서 나오는 거 보기 싫으니까.”
봉수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웃었다.
진국은 젓가락으로 꼼장어를 뒤적였다.
숯불에 타오르는 꼼장어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실은 이걸 샘플로 만들어서 채연이한테 부탁 좀 하려고 했지.”
“채연이가 누구였지?”
“왜 우리 연구 전속 모델 있잖아.”
진국이 눈독을 들이는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요즘 보이질 않아. 전속을 그만 둔 건지, 아니면 짤린 건지 모르겠어.”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채연만은 볼 수 없었다.
디자인 1팀과 2팀에서 속옷이 꾸준히 만들어졌다.
모델들이 샘플을 입어 보는 건 일상이었다.
스무 개를 디자인하면 그 중 열 개가 샘플로 만들어졌고
그 중 한 가지가 채택되어 상품으로 나올까말까 했다.
디자인 회의를 통해 샘플이 만들어지면 기록하고 정리하고 공장을 다녀오고
디자인에 맞게 봉제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광고 기획을 세우고 섭외를 하고
계약이 체결된 회사와의 납품까지 책임지는 게 봉수와 진국의 일이었다.
그 틈틈이 아이디어도 제출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영업사원이 축소된 이후 영업적인 일들까지 간혹 떨어지기도 했다.
“우린 완전히 동원사단이야.”
“동원사단은 뭐야?”
“동원사단 몰라? 전시에만 예비군 받아야 원래의 병력이 나오는 사단 말야.
예비군들 동원 훈련시키고 그런 부대.”
“그걸 누가 모르냐? 왜 동원 사단이냐고?”
봉수가 술잔을 비우고 꼼장어를 한 점 집어먹었다.
회사들이 인접한 부근의 포장마차라 그런지 술집에 앉아 있는 사람이
대부분 늦게까지 야근을 하던 직장인들 같았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넥타이를 맸고 여자들도 대부분 세미 정장 스타일이었다.
“동원사단 현역들, 보직이 서너 개씩이잖아.”
봉수는 진국이 동원사단을 떨 먹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채연이 얘기를 하다가 무슨 동원 사단이야?”
“동원사단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채연이 찾아볼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
“수영이는 어쩌고?”
봉수는 송화의 친구에 대해 말했다.
“말도 마라. 걔도 남자가 하나 둘이 아냐.”
진국이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그렇지 않겠지만 요즘 여대생들 어쩌면 그렇게 당차고 당돌한지 모르겠어.”
“너도 오십보 백보야.”
진국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진국은 수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 팀장이 연락처 갖고 있을까?”
“요즘 나 팀장도 뭘 하는지 바쁜 모양이더라.”
진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
“화장실 간다.”
진국이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마땅히 오줌 눌 곳을 찾지 못했다.
포장마차와 인접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벽을 향해 섰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도로가 보였다.
‘저게 누구야.’
진국의 눈에 중경과 송림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국이 바지 지퍼를 닫는 둥 마는 둥 하곤 골목에서 뛰어나왔다.
진국이 중경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극구 사양하는 두 사람을 진국이 포장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야, 입사 동기끼리 오붓하게 술 한 잔 하자는 데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냐.
자, 자, 받아. 선배님도 받으시죠.”
진국은 중경의 잔에 술을 따른 후 쭈빗쭈빗하는 송림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그나 저나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 두 사람은 어디에 있다가 오는 겁니까?”
중경과 송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 두 사람은 아직도 집엘 안 가고 뭐 하세요?”
송림이 진국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우리야 일이 많아서…"
“저도 일이 밀려서 이제야 나온 건데 중경씨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겁니다.”
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국은 그녀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쭈빗쭈빗하는 모습도 맘에 걸렸다.
“난 이만 일어날게.”
중경이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송림도 덩달아 일어났다.
겨우 소주 두 잔씩 비운 후였다.
“나 선배, 잠깐만요.”
진국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 송림의 팔을 잡았다.
송림이 멈칫했다.
중경도 머뭇거렸다.
“요즘 채연씨가 안 보이던데 연락처 좀 알 수 없을까요?”
송림은 진국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채연이는 왜요?”
“다른 게 아니라 꼭 채연씨가 착용을 해줬으면 하는 아이디어 상품이 있어서요.”
“다음 주면 다시 나올 거예요.”
“어디 갔습니까?”
다들 채연의 일이 궁금했다는 듯 송림을 바라보았다.
“설마 짤린 건 아니죠? 잘 나가는 스타들보다 몸이 훨씬 좋은 모델이잖아요.”
“짤리긴 왜 짤려요. 이번에 우리 전속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는데.”
송림의 말에 진국은 누구보다 반가워했다.
“그런데 왜 안 보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랬군요. 그럼 채연씨는 고향에 갔겠군요. 고향이…”
진국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정읍인데 다녀오기라도 하시게요?”
송림이 농담으로 물었지만 진국의 얼굴은 진지했다.
“계약직 모델이라고 해도 우리 동료 아닙니까? 계약직이니
뭐 경조비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겠네요.
하긴 가까이 있었던 우리도 무슨 일로 안 보이는 지 몰랐으니….”
진국은 한숨을 쉬었다.
“혹시 진국씨가 채연이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송림이 가방을 들며 물었다.
“조, 좋아하다뇨? 그냥 물어본 겁니다.”
“저는 이만 갑니다.”
이번엔 송림이 먼저 인사를 하고 포장마차를 나갔다.
그 뒤를 중경이 따랐다.
“재네 둘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게 확실해.”
진국은 채연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포장마차 밖으로 사라져 가는
중경과 송림을 내다보았다.
강일환과 신수정이 택시에서 내렸다.
“처음부터 사는 곳이 비슷했다면 이 부근에서 만날 걸 그랬습니다.”
강일환이 택시기사에게서 거스름돈을 받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댁은 어디시죠?”
신수정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영성아파틉니다.”
“정말이세요?”
신수정이 놀란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수정씨도…”
신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강일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래 만날 사람은 못될 인연이군.’
“그런데 어떡하죠? 저는 다음주에 이사를 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집이 혼자 살기에 너무 커서 작은 오피스텔로 옮기려구요.
어디 좋은 오피스텔 없을까요?”
두 사람은 인도를 따라 영성아파트 쪽과는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강일환이 그렇게 길을 잡자 신수정도 머뭇거리지 않고 따라왔다.
‘도무지 이 여자의 속셈을 모르겠군. 보험 얘기는 언제 꺼낼건가?’
신수정은 ‘주몽’에서 3시간 남짓 술을 마시면서도
일체 보험에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외로운가?’
강일환은 뒷짐을 쥐고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름 끝 무렵이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결혼한 줄 알았는데요.”
강일환의 말에 신수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혼자예요.”
“그럼 이혼?”
강일환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신수정이 눈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아파트 건물의 불빛들이 점점이 켜져 있어 마치 별처럼 보였다.
강일환도 조용히 그녀의 곁에 앉았다.
“참 이상하죠. 강 실장님 만나니까 너무 편한 거 있죠.”
“편하다니 다행이군요.”
“실은 저 2년 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뒤로 어쩔 수 없이 보험을…”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강 실장님한테 이런 얘기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실은 강 실장님 보는 순간 깜짝 놀랬어요.”
신수정이 곁에 앉은 강일환을 바라보았다.
“제가 정말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집에서 너무 극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홧김에 다른 남자랑 결혼을 했던 거거든요.
죽은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해요.
그런데 내가 좋아했던 그 남자랑 실장님이 너무 닮았어요.
실은 실장님이 더 멋있지만 말이에요.”
그녀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오늘 하루 종일 제 이야기만 했네요.
사모님도 기다리고 계실텐데.”
강일환은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듯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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