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2장 장수 1

오늘의 쉼터 2014. 11. 23. 15:23

32장 장수 1 

 

 

서동 대왕의 조카이자 부여헌의 아들 복신은 선왕 때부터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안과 낙양의

숙위사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웬만한 당조의 중신들은 집에 제삿날까지 꿰고 있던 그가 나당 양국의 관계에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것은 그해 3월, 황제의 조칙으로 징집령이 내리고 등주와 내주 일대에 수백 척의 군함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본국으로 사람을 보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전란에 대비하라며

자세한 사정을 알렸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인 5월, 복신은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당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

관사에 갇히고야 나당 연합군의 거병 사실을 알았다.

군사들은 복신이 관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불철주야 감시했고,

사람과 물자의 출입도 철저히 봉쇄했다.

아무리 이해타산에 따라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사신들의 숙소에 갇힌 복신이 다시 풀려난 것은 두어 달 뒤인 7월,

그와 친분이 두터운 중신들은 한결같이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폐하의 명이 원체 지엄하니 어쩔 도리가 있어야지요.”

“나도 부여공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소. 그러나 어찌하오? 공이 이해를 해주오.”

하고 말했지만 복신의 마음은 벌써 당나라를 떠나 있었다.

당이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쳤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치가 떨리는 것은

30년 넘게 교분을 쌓아온 자들에게서 느낀 배신감이었다.

“당나라에서는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중국 쪽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을 것이다!”

복신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미련 없이 낙양을 떠나 등주로 갔다.

선주와 후주로부터 여러 차례 받은 벼슬과 녹읍, 정든 처첩과 노비들이 있었으나

나라를 잃는 마당이었다.

기왕 살던 나라도 버리고 떠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복신처럼 바깥에서 얻은 모든 것을 버리고

망한 나라로 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백제로 가는 배편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

전란 때문이었다.

그는 등주에서 다시 달포 가량을 보내고 요행히 감평(순천)으로 돌아 왜로 간다는

상선 한 척을 얻어 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복신이 귀국했을 때는 8월 하순,

이미 도성은 망하고 임금은 사로잡혀 천년 사직이 무참히 거덜나버린 뒤였다.

그는 법승 혜현의 그늘을 찾아 경사에서 가까운 덕숭산 수덕사(修德寺)로 갔다.

전날 연문진과 더불어 용화산 사자사로 출가했던 혜현은 일생을 산문에서 열심히 도를 구하여

말년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그가 수덕사에 머물며 법화경을 강론할 때는 승려는 물론 불법을 받드는 경향 각지의

왕족과 귀족들까지 앞을 다투며 모여들어 법당에서 신발 바뀌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혜현의 불법이 얼마나 높았으면, 그는 단 한 번도 서쪽으로 유학한 일이 없었지만

장안에서조차 전기(傳記)가 나돌 만큼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백제 대덕 혜현을 중국에 알리는 데 누구보다 크게 공헌했던 이가 바로 복신이었다.

그는 혜현이 여러 가지 신묘하고 기이한 행적을 보이다가 입적한 뒤로 혜현의 시자들과 교류하며

대덕이 남긴 저술과 강론의 요지를 수시로 나라 밖에 전파했다.

백제에도 혜현 같이 경전에 달통한 고승이 있다는 걸 알리는 일은 숙위사로 국사를 보좌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본국을 다녀갈 기회가 있으면 복신이 직접 수덕사를 찾았고, 수덕사 승려 가운데 장안을 다녀갔던

이도 있었다.

도침(道琛)이라는 중은 그렇게 사귄 혜현의 시자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혜현이 살았을 때부터 불법보다는 무예에 심취해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내가 널 보면 꼭 젊은 날 연문진이라는 내 도반을 보는 듯하다.

사람 찔러 죽이는 칼질, 창질은 고요한 산문에서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해대느냐?

그걸 할 양 이면 저자에 내려가 아예 연문진이같이 하든가,

연문진이처럼 못할 바엔 그 정성으로 내 밥그릇이나 닦아라.

 너만 보면 내가 심란해 못살겠다.”

“스님, 창칼을 쓰는 데도 법이 있고 도가 있습니다.”

“시끄럽다 이놈아, 사람 찔러 죽이고 부처 됐다는 소리를 나는 전고에 들은 바가 없다.”

“천하 만물이 불법을 알면 제가 굳이 창칼을 쓸 일이 없겠지만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중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어떻게 압니까?

스님 밥그릇 닦는 중은 여럿 있으니 저 하나쯤 샛길로 빠져도 좋지 않겠는지요?”

“저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주둥이질 하는 법만 배웠구나.

인석아, 내가 산중에 거한 지 수십 년째지만 아직 한 번도 맹수한테 봉변당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뭇잎 하나에도 불성(佛性)이 있어 사람이 그 아래 누우면 그늘을 만들어주는 법이거늘

하물며 산짐승들이 가만있는 산승을 해칠 일이 있느냐?”

잦은 꾸중에도 불구하고 도침은 스승의 눈을 피해 조석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무예를 닦았다.

말년의 혜현은 수덕사의 번잡함에 싫증이 나서 남쪽 달라산(達拏山)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는데,

그곳은 왕래가 어렵고 산세가 험악할뿐더러 도처에 범이 많았다.

도침이 다른 시자들과 함께 스승을 수행해 암자에 머물고 있을 때 돌연 사납게 생긴 수범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나타나 승려 하나를 와락 덮쳤다.

이에 도침이 들고 있던 작대기로 범의 이마를 정통으로 내리쳐 그 자리에서 죽이고 호환당할 뻔한

도반을 구해내자 다른 시자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혜현이 미간을 잔뜩 지푸린 채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범을 내려보더니,

“범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 시자다.

산승 덮친 범이나 그놈 때려죽인 중놈이나 불성을 잃기는 매한가지다.”

하며 혀를 찼지만 그 뒤론 도침이 창칼 들고 수련하는 것을 설령 보더라도 별 타박을 주지 않았다.

혜현이 입적한 뒤 도침은 수덕사로 돌아와 산중 공터에 나이 어린 중들을 모아놓고,

“불법을 배워 도를 닦으려면 우선 심신을 수련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하고 예불에 앞서 조석으로 체력을 단련시켰지만 이를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때는 도침이 작대기 하나로 범을 때려죽인 일이 산문에 널리 알려져서

호신의 용도로 무예를 배우겠다는 젊은 납자(衲子)가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나라가 망하고 복신이 덕숭산을 찾아갔을 때는 수덕사 인근에도 사비성의 비보가 전해져서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임금이 무릎을 꿇고 술을 쳤다는 얘기며 옛 태자 부여융이 신라 태자 법민의 말발굽 아래 엎드려

곤욕을 치렀다는 소리에 백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를 갈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민심을 잃은 왕이요 조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왕이 당한 수모는 백성들의 수모였고, 왕자가 당한 치욕 역시 백성들의 몫이었다.

“사정이 어떨지 모르지만 의병을 일으켜 도성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도침을 만난 복신이 소문을 듣고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하자

도침은 마침 자신을 찾아와 산중에 머무르고 있던 금물현(今勿縣:예산, 덕산) 장사 해미(解彌)에게

관병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다.

“난리 소식에 달아난 자가 많지만 농기구를 들고 찾아온 의로운 장부들도 있으니

소집을 해보면 5, 6백 명쯤은 되지 싶습니다.”

해미의 말에 도침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소승이 산중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승병(僧兵)도 2백 명은 너끈하오.

지금 전국의 백성들이 사비성의 참변 소식에 울분을 금치 못하니

우선 우리가 떨쳐 일어나면 인근 기군(基郡:서산)의 어부와 지육(地育:서산 지곡)의 농부들,

결기(結己:홍성)와 두릉(豆陵:청양 정산)의 의병들까지 가세해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소.

소문에 좌평 정무공이 두시원에 진을 치고 적과 용맹하게 싸우고 있다 하니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가 정무공과 합류한다면 도성을 되찾을 희망이 있지 않겠소?”

도침의 주장으로 승병과 금물의 관병, 의병을 모으고 다시 사방의 군현에서 장정들을 소집하자

모여든 사람이 사나흘 사이에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스스로 싸우겠다고 찾아온 이가 3천 명이니 그들의 눈빛과 기세는 자못 뜨거웠다.

도침과 복신은 이들을 이끌고 두시원악으로 가서 정무의 군사들과 합류했다.

홀로 고군분투하던 정무는 크게 기뻤다.

세 장수는 먼저 웅진과 칠악 주변의 제성(諸城)들을 확보하기로 계획을 세운 뒤

아직 지형에 낯설고 연합군 편제에 서툴러서 방비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진군을 상대로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기는 지방 관아의 무고(武庫)에서 조달했고, 군량은 각 고을 백성들이 자진 기부했다.

선량한 백성들은 의병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제발 나라를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그 정성에 감복해 의병들도 울고 장수도 울었다.

이때의 감동은 싸움터에 나가면 그대로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되고 뜨거운 사기가 되었다.

백제는 망하기 전의 관병보다 망하고 난 후의 의병이 더 무서웠다.

김유신의 명령으로 웅진을 점령했던 진주와 진흠, 흠돌은 휘하의 1만 5천 군사를 총동원해

두시원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접전이 벌어지는 곳마다 밀리기 시작했다.

사비에서 두릉성 쪽으로 올라온 당나라 군사도 마찬가지였다.

백제 의병 1만여 명은 정무가 장악한 임존성을 거점으로 연일 맹공을 퍼부으며 동남쪽으로 진출해

주류성(周留城)과 두솔성(豆率城), 심지어 두릉이성(豆陵伊城)까지 장악해 칠악 일대를 완전히 수복했다.

9월 23일, 이들은 강을 건너와 사비성 북문까지 진격하며 기세를 올렸다.

도성 안의 항복한 사람들이 의병들의 기세를 보고 술렁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위기를 느낀 당장 유인원은 인태와 더불어 연합군을 이끌고 가서 의병의 선군을 격파했지만

그사이에 복신과 도침의 군사는 사비성 남령(南嶺:부여 錦城山)을 점거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다음 네댓 겹으로 울타리를 굳게 치고 수시로 북을 울려 사람들을 모집하는 한편

틈틈이 주변 성읍을 돌며 배신한 자를 죽이고 따르지 않는 자의 집에선 약탈을 일삼으니

도성 안팎의 20여 성이 크게 동요해 의병들에 호응하였다.

한편 정무가 임존성과 두시원을 장악하고 수시로 의병을 내어 연합군에 저항할 때부터

이 소식은 당나라 수도 낙양에 알려졌다.

이때까지 백제의 소유권에 관해 나당 양국이 합의한 바는 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근거로 이세민과 김춘추 사이에 피를 찍어 맺은 맹약문이 있었으나

이치는 마음속에서 이를 무시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소정방이 유인원과 유진군 1만을 사비성에 남겨놓고 귀국한 직후 낙양에선

신하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13만 군대나 동원해 빼앗은 나라를 무엇 때문에 신라에 넘겨주느냐는 측과,

선제의 약속을 지키고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선 신라와 척을 질 수 없다는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이치가 택한 조치는 양론의 절충안이었다.

“백제를 토벌했다고는 하나 아직 모든 지역이 복종한 것은 아니므로 내일의 일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인원의 장계를 보면 우리 군사가 떠난 뒤로 반란의 무리가 매일 생겨나서 유진군을 괴롭힌다고

하니 마땅히 백제 땅에 도독부(都督部:당나라 행정관서)를 두어 황제의 위엄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신라도 이를 알면 고마워할 일이지 어찌 원심을 가지겠는가?

백제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모든 일이 고요해지면 다시 거론할 일이다.”

이치는 백제 내정이 어려운 것을 핑계로 도독부 설치를 강행했다.

명분은 반란을 진압시켜 신라에게 평온한 땅을 주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백제를 자신들의 강역으로 만들겠다는 계책이었다.

전란 이후 낙양의 눈치만 보고 있던 신라로선 더욱 불안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당주 이치는 백제 땅을 다스릴 장수와 행정 관료들을 선발한 뒤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치도 부집존장(父執尊長) 김춘추에 대해 마지막 예까지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자세히 글로 적은 뒤 삼한 땅에 들어가면 먼저 신라왕에게

이를 전하게 하여 형식적이나마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일은 사신을 통해 한발 앞서 금성에 전해졌다.

“당이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춘추는 호의 뒤에 감춰진 이치의 음흉한 속셈을 단번에 간파했다.

그것은 그 옛날,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뒤 어쩔 수 없이

당나라와 동맹을 맺기로 각오를 하면서부터 줄곧 걱정해온 문제이기도 했다.

춘추는 누구보다 먼저 삼한일가(三韓一家)의 큰 뜻을 세우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까지 제시했던

김유신을 불러 이치의 조서를 내보이며 의견을 구했다.

글을 읽고 난 김유신은 별로 놀라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는 오래전에 이미 충분히 예측했던 일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백제는 당분간 소란스러울 것이 뻔하고,

고구려의 개소문은 당주 따위가 함부로 넘볼 인물이 아니올시다.

고구려가 건재 하는 한 당은 우리와 드러내놓고 싸우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백제를 토벌했지만 삼한을 일가로 만들기엔 아직도 숱한 어려움이 남았나이다.

대왕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시고 당나라가 도독부를 설치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순리를 따르다 보면 좋은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유신의 말을 듣고 나자 춘추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웅진도독의 부임 인사를 받기 위해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행차했다.

그날은 9월 28일이었다.

배를 타고 당항성 으로 들어온 왕문도 일행은 삼년산성에 이르러 춘추왕 에게 당주의 조서를 바쳤다.

왕문도가 동쪽에 서서 두 번 절한 뒤 서쪽에 선 춘추에게 당주의 인사를 전하고 준비한 예물을

막 바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왕문도는 두어 차례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돌아가라, 이놈아!”

쓰러진 왕문도의 귀에는 오직 그 소리만 들렸다.

그가 당항성 갯가에 배를 대고 막 내리려 할 때 물 속에서 돌연 머리를 산발한 귀신같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은 소리였다.

워낙 뜻밖의 일이어서 왕문도는 뱃전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수상한 노인을 본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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