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황산벌 8
굉음이 차츰 멀어지고 나자 궁녀 하나가 살그머니 고개를 빼고 동태를 살폈다.
당선들이 지나간 백마강의 물길은 더 이상 푸르지 않았다.
강바닥이 뒤집혀 오물처럼 누렇게 변한 흙탕물이 무슨 불길한 짐승처럼 절벽 밑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런 날에도 하늘은 어찌 그리 푸르고 태양은 또 왜 그리 밝은지,
위를 쳐다보면 눈이 부셨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 신세도 곧 저 강물과 같이 될 테지?”
누군가가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오물처럼 변한 강물은 마치 앞으로 닥칠 자신들의 신세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럴 때였다.
궁녀들의 탄식이 깊은 탓이었을까.
절벽에 매달려 피어 있던 이름 모를 꽃잎 한 떨기가 갑자기 바람에 목이 떨어져 강물로 날려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해따라 부산 절벽에는 유난히 바위틈에 많은 풀들이 자라나 있었다.
본래 부산에는 지초와 난초가 흔했다.
세상에서 좀체 보기 힘들다는 고란초(皐蘭草)도 잡초처럼 무리를 지어 생겨나서
임금이 내불전의 약수를 찾으면 물을 뜨러 간 궁녀가 고란초 잎사귀를 물바가지에 띄워 오기도 했다.
고란초 주변으로 산 목련도 피고, 봄과 여름에는 영험한 지초 꽃잎도 흐드러졌다.
풀 흔하고 꽃 흔한 곳에 어찌 열매인들 없으랴.
꽃 흐드러진 여름이 지나고 나면 궁녀들은 부산에서 나는 갖가지 열매를 따먹으며
또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서럽게도 떠오르는 것은 모두가 지나간 일,
갑자기 궁녀 하나가 강물로 날려간 꽃잎을 가리키며,
“저것 좀 보아!”
하고 소리쳤다.
낙화(洛花). 궁녀들은 일제히 추락하는 꽃잎에 시선을 모았다.
그 순간에 궁녀들의 뇌리엔 대부분 똑같은 생각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꽃잎을 가리켰던 궁녀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서 욕을 보지 않으려면 길은 하나뿐이야.”
그의 눈에는 시리도록 푸르디푸른 하늘만 가득 들어차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듯 궁녀는 절벽으로 난 계단을 밟고 더 높은 곳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가 당도한 곳은 부산의 가장 높은 절벽 끝,
그에게는 이승의 끝이기도 했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곳,
그곳에서 숨 한번 크게 쉬고 한 걸음만 더 보태면 비로소 좋은 곳이 있다고 했던가.
궁녀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벼랑 끝에 이르자
그대로 허공에 몸을 날려 백마강 강물로 투신했다.
그 또한 낙화.
꽃 하나가 떨어지자 뒤이어 수많은 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2백 송이의 꽃잎이 잇달아 지는 광경은 애처롭다 못해 차라리 아름다웠다.
어떤 장부가, 그 어떤 충신과 열사가 일제히 그토록 곱게 질 수 있으랴.
훗날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낙화암 이라고 부른 것은
여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대부분 3천 궁녀가 다 투신했다고 믿었다.
그때 민간에 나돈 소문으로 궁녀의 숫자는 3천 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꽃잎처럼 지고 있을 무렵,
왕궁에서는 신라 태자 법민이 항복한 백제 왕자 부여융을 자신의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무섭게 꾸짖었다.
“전날 너의 아비는 내 누이를 원통히 죽여 옥중에 파묻어서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였다!
네가 그 사실을 아느냐?”
융은 격분한 법민의 발아래 엎드려 머리를 땅에 붙이고 죄를 빌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왕을 대신해 백배 사죄합니다.
태자께서는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자신보다 10여 세나 위인 융의 간곡한 사죄를 받고도 법민은 분을 풀지 못했다.
비록 어머니는 달랐지만 자신을 등에 업어서 키운 고타소였다.
반드시 백제를 멸한 뒤엔 군왕과 왕자들을 제 손으로 모조리 베어 죽이겠다고
한때 얼마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가.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고 융의 목을 겨누며 고성을 질렀다.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똑똑히 보라!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안에 있다!
너를 죽여야 네 아비의 마음도 아프지 않겠느냐?”
법민의 노한 눈빛과 거친 태도에 융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하고 곱게 자란 그로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따위 봉변을 당한 적이 없었다.
법민이 겨눈 칼날이 조금씩 숨통을 아프게 짓눌렀다.
수치와 모욕은 차후의 문제였다.
우선은 죽고 사는 일이 다급했다.
“용서하십시오……”
융은 땅에 엎드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김유신이 들어와서 융에게 칼을 겨눈 법민을 보고는 슬그머니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지금은 달아난 의자왕을 찾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 말을 듣고야 법민은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융이 공손하고 다소곳하게 나오자 법민도 굳이 그를 해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융은 이때의 일이 평생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았다.
한때 태자로서 만인의 공경을 받았던 그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악몽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사비성을 장악한 나당 연합군은 의자가 이미 웅진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에 크게 격분했다.
소정방은 군사들을 이끌고 당장 웅진성으로 쳐들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당나라 군사를 웅진으로 데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께름칙했다.
당군의 공격에 대비해 한산과 금돌성에 배치한 아군이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동맹군의 우호와 결속이 깨어질 공산이 컸다.
“총관은 어찌 쉬운 일을 어렵게 처리하려 하시오?
웅진으로 달아난 것은 의자 부처와 태자뿐이오.
나머지 식솔들은 모두 여기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부르면 결국 오지 않을 수 없을 게요.
사정이 다급해 달아났지만 지금쯤은 그도 이곳의 일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을 거외다.
우선 사람을 보내어 청해보고 그래도 오지 않거든 군사를 냅시다.”
유신의 설명을 들은 소정방은 곧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하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태자의 아들 문사라는 아이가 우리 수중에 있소.
그 아이는 성루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항복한 녀석인데
특히 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능히 심부름을 보낼 만합니다.
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식구들의 안위이니
총관이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이오.”
소정방은 유신의 뜻에 따라 문사에게 자신이 직접 쓴 글을 주어 웅진으로 보냈다.
스스로 찾아와 항복하면 목숨과 안전을 책임질 것이지만 만일 끝까지 거역하면
사비성의 부여 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웅진성으로 쳐들어갈 거라는 게 문사 편에
보낸 글의 내용이었다.
자신의 손자인 문사에게서 글을 받아 읽은 의자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웅진성의 군사는 기껏해야 3천여 명,
주변에서 농부와 아이들까지 끌어 모은다고 해도 1만 군사를 만들기 어려웠다.
좌평 정무는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의자는 깊은 고심 끝에 항복을 결심했다.
“그럴 거면 무엇 하러 힘들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정무가 눈에 핏발을 세워 묻자 이미 위엄을 잃어버린 왕은 침통한 얼굴로 한숨에 섞어 말했다.
“당시에는 사정이 너무 급해 세세한 것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사비성이 함락되고 닷새가 지난 7월 18일,
의자는 웅진 지방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궐문 앞에 이르자 태자와 함께 수레에서 내려 머리를 떨구고
칼을 거꾸로 잡은 뒤 대궐로 들어갔다.
용상에는 이미 소정방이 앉아 있었고 나당 양국의 장수와 수만의 군사가
궁정과 전각을 빽빽이 메우고 있었다.
의자는 소정방의 앞으로 나아가 항복의 예를 표한 뒤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신 백제국대방군왕 부여의자는 상국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나이다.
이에 멀리 황제 폐하의 대명을 받아 나오신 대총관께 머리를 숙여 깊이 사죄합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의자의 항복을 받은 소정방은 흐뭇한 표정을 짓다 말고
옆에 나란히 앉은 김유신을 돌아보았다.
“죄인 의자는 들으라!”
“네!”
“여기 신라국 김유신 장군께도 항복하고 사죄하라.”
이미 김유신의 위엄에 여러 번 압도당한 소정방은 차제에 유신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긴 양국 연합군으로 백제를 쳐서 이겼으니
신라에서도 누군가가 항복을 받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제야 의자는 고개를 들어 비로소 김유신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김유신은 소문으로 듣고 짐작한 것보다 훨씬 나이가 들고 유순해 보였으나
범상치 않은 자태만은 짐작했던 대로였다.
“무엇을 하는가?”
소정방이 재촉하자 의자는 잠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정방에게 항복하는 것과 김유신에게 항복하는 것은 격이 다른 일이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항복을 받을 자격이 없소.
조만간 우리 대왕께서 납시거든 그때 항복하시오.”
유신의 이 말은 의자보다도 소정방에게 더욱 크게 와 닿았다.
물론 소정방은 선주 이세민이 살았을 때부터 신라사로 장안을 들락거린 춘추를 잘 알았다.
그러나 유신이 군신의 위계를 명백히 하자
그는 다시 한번 김춘추에 대해 어렵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금돌성에 머물던 춘추가 의자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고 사비성에 행차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쯤 뒤인 7월 29일이다.
그는 우선 제감 천복(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해 전첩(戰捷)을 알린 뒤
사비성에 이르러 양국 장수들의 환대와 영접을 받았다.
힘겨운 승리 뒤에 한바탕 잔치가 빠질 리 없었다.
춘추는 의자로부터 항복과 사죄를 받은 뒤 사비궁에서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도록 지시했다.
춘추를 비롯한 신라인에게 그것은 실로 꿈에서나 그리던 광경이었다.
7백 년 사직의 숙원을 이루는 날,
얼마나 많은 이가 바로 이날을 꿈꾸며 죽어갔던가.
승전의 낭보를 듣던 때부터 춘추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잠도 오지 않았다.
공연히 어깨춤이 절로 나오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백제를 멸하다니, 오오 백제가 망하다니……”
그는 한밤중에도 새삼스레 감격에 들뜬 음성으로 감탄을 연발하곤 했다.
수시로 기쁘고 문득문득 즐거운 모양이었다.
승자의 너그러움이었으리라.
춘추는 머리를 땋고 무릎을 꿇어 사죄하는 의자를 보는 순간
죽은 딸의 원한을 갚는 개인사쯤은 능히 잊어줄 수 있었다.
잔치 준비가 진행되는 한편에선 백제 관인들을 샅샅이 적간해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전력을 캐고 전비를 살펴 용납할 수 없는 자는 옥에 가두었고,
이미 항복을 했거나 협조적인 자에게는 가산을 보존하고 식솔들을 지킬 수 있는 비표를 나눠주었다.
세상은 또 한번 송두리째 뒤집혔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신이 되고, 오늘 살 길을 얻거나 출세한 자는 어제까지 눈물겹던 이였다.
나라가 망했으니 어쩔 수 있으랴.
망국의 충량(忠良)을 재던 잣대 대신 새로운 잣대가 생겨나 만사를 다시 재단했다.
강자의 편리에 따른 천지개벽의 대역리(大逆理)는 망국 백성들의 수난에 이어 다시금
민간의 비탄과 슬픔을 자아냈다.
8월 2일이었다.
신라왕 김춘추는 의자가 집무를 보던 사비궁 편전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동원해
모든 장수들을 위로했다.
그때 왕은 김유신과 소정방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상(堂上)에 높이 앉고
의자와 부여융을 당하(堂下)에 엎드리게 한 뒤 망국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죄인 의자는 어서 이리로 와서 술을 따르라!”
하고 지시했다.
모욕의 극치였다.
세상에서 차지했던 자리가 높고 화려할수록 추락의 치욕은 큰 법이었다.
당하에 무릎을 꿇린 채로 앉은 의자 앞에 곧 술병이 놓여졌다.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인 의자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내관이 가져온 술병을 지그시 응시했다.
시간이 지체되자 이번엔 당장 소정방이 소리쳤다.
“무엇을 하는가? 어서 사죄의 술을 따르지 못하겠느냐?”
만일 이런 치욕이 뒤에 있는 줄 알았다면 차라리 자결이라도 했을 거라고 의자는 후회했다.
자신의 뒤에 시립한 신하들 가운데는 벌써부터 흐느끼는 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
김춘추가 부여헌의 조문사로 왔을 때
그를 죽여줄까 하고 묻던 부왕 서동 대왕의 얼굴이 새삼 눈앞에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저의 아비는 늙고 병든 몸이라 손이 떨려 술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아비를 대신해 제가 술병을 들도록 해주십시오.”
융이었다.
그러나 융의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늙고 병이 들었기로 어찌 술병 하나를 들지 못하랴.
넘쳐도 좋고 흘려도 좋으니 임금이 직접 따르도록 하라.”
기어코 의자에게 술 한 잔은 받아 마셔야겠다는 게 춘추의 뜻이었다.
그것으로 죽은 딸과 두 사위의 원한을 잊고,
아울러 백제군의 손에 죽은 역대의 숱한 충신과 벗,
누대에 걸친 크고 작은 원한을 말끔히 털어 버리겠다는 것도 그리 과한 욕심은 아닐 터였다.
7백 년 묵은 원한을 풀고 마음속에서 굳어진 양국의 경계를 허무는 데 어찌 술 한 잔을 받지 못하랴,
춘추는 그렇게 마음을 도슬렀다.
“사무친 한을 그대가 따르는 술 한 잔으로 씻으려 한다.
의자는 대범한 마음으로 명을 따르라.”
춘추가 다시 재촉하자 의자는 비로소 술병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잠시 현기증이 이는 듯 두어 걸음 비틀거렸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아 당상으로 올라갔다.
망국대신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의자는 제일 먼저 춘추의 잔에 술을 쳤다.
의자가 허리를 굽힌 채 양손으로 술을 따르고 춘추는 한 손으로 그 술을 받아 마셨다.
춘추의 뒤로 소정방과 김유신, 유백영과 풍사귀, 천존, 흠순, 방효공, 품일 등의
연합군 장수가 차례로 의자에게 술을 받았다.
당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제 군신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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