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장수 2
그날 밤, 신라 객관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다.
낮에 본 일이 하도 께름칙해 시종 마음이 언짢다가 신라 관리들이 베푼 주연에서
술을 두어 잔 받아 마시고 소피를 보러 바깥으로 나왔을 때였다.
“돌아가라지 않느냐!”
관사의 우물 속에서 무언가가 훌쩍 뛰어나와 소리쳤다.
혼비백산한 왕문도는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이번엔 먼저보다 더 놀라 바지에 오줌까지 쌌다.
우물에서 튀어나온 것은 낮에 본 바로 그 산발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기절할 지경에 이른 왕문도에게 다가와 물에 젖은 손으로 숨통을 짓누르며 매섭게 오금을 박았다.
“돌아가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 명심하라, 이놈!”
밤새 왕문도는 산발한 노인이 뿜어내던 그 형형하고 무서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함께 온 부하들에게 말을 하니 다들 취중 농담인 줄만 알아서 말하지 않은 것보다 더 답답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그는 이튿날 아침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병색이 완연했다.
“도독이 안 타던 배를 오래 타서 그렇습니다.”
“뱃멀미 심한 사람은 더러 죽기도 한답디다.”
“멀미 뒤엔 움직이는 게 더 빨리 낫습니다.
누워 있으면 사흘 갈 것도 일어나서 다니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시종관들의 말에도 왕문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삼년산성에 신라왕이 행차했다는 전갈을 받자
어쩔 수 없이 시종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렇게 무리를 한 탓이었을까.
조서와 예물을 전하는 중에 왕문도는 홀연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그가 할 일은 시종관들이 나서서 대신했다.
말에도 오르지 못하고 수레에 실려 간 웅진도독 왕문도는
그날 밤에 관사의 별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치는 급사한 왕문도를 대신해 선주 이세민의 신하인
노신 유인궤(劉仁軌)를 급파했다.
유인궤는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본래 백제의 5부에 각각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 등을 뽑아
소속 주현(州縣)을 다스리게 한 뒤 낭장 유인원에게는 도성을 진수토록 하고 자신은
망국의 유민들을 무마하고 회유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때 도독부의 관리는 당에서 데려온 당인들을 쓰기도 했지만 각 고을에서 추천하는
거장(渠長)들을 뽑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유민들의 저항을 고려해 민심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유인궤를 파견한 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토벌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있었다.
백제를 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 제위에 오른 뒤 어느 정도 군국사무를 파악하고
나름대로 자신감에 차 있던 이치는 차제에 삼한의 강역을 모조리 평정해 당나라 영토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백제를 치기 직전에도 연 이태나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요동을 치도록
지시한 일이 있었다.
당주 이치에게 백제를 쳐서 무너뜨린 것은 아버지 이세민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해(660년) 11월,
이치는 백제를 치고 돌아온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좌위대장군 설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각기 길을 나눠 고구려를 치도록 명령했다.
이치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10월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군사를 내어 신라의 칠중성(七重城:積城)을
먼저 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제와 전쟁을 치를 때부터 당이 바라던 일이었다.
고구려가 동맹 관계를 내세워 백제에 원군을 보내거나 신라 국경을 침범하면 당에게는
고구려를 칠 명분이 생길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요동의 방비도 그만큼 허술해질 거라고 이치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을 친 것은 이와 같은 이치와 당조의 계산을 미리 간파한
연개소문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개소문은 요동 국경에 이미 물샐 틈 없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해 해역의 수군을 더욱 보강한 뒤
미끼를 던지듯 신라를 쳤다.
칠중성을 치는 데 동원된 군사는 대부분 말갈군 이었고, 정작 고구려에서는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1천에도 못 미치는 남역의 향군들을 이끌고 나갔을 뿐이었다.
칠중성을 지키던 신라의 현령은 필부(匹夫)였다.
그는 아찬 존대(尊臺)의 아들로 충성스럽고 용맹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구려가 쳐들어와 칠중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필부는 성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20여 일간이나
잘 싸웠다.
그 바람에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들은 일이 어렵겠다고 판단해 성곽 밖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하려 했다.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는 어차피 당을 상대로 미끼를 던지는 데 목적이 있던 군사들이었다.
스무 날 가까이 국경을 소란스럽게 만든 이들은 그만하면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뒀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 군사를 북쪽으로 돌리려 할 때였다.
평소 필부에게 밉보여 앙심을 품고 있던 대내마 비삽(比샘)은 필부가 다시 공을 세워 명성이 높아지고
벼슬이 올라가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은밀히 적진으로 심복을 파견해 성내의 궁핍한 사정을 전하면서 지금 공격하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부추겼다.
고구려 장수 뇌음신 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의심했다.
“서찰을 다시 성주에게 보내라.
만일 이것이 계책이라면 비삽이 온전할 것이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배신자의 신변에
불상사가 생길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리는 비삽을 처리하는 성주의 태도를 지켜본 뒤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뇌음신의 뜻에 따라 비삽의 서찰은 곧 필부에게 전달되었다.
필부는 성안의 실상을 알리는 비삽의 글을 읽자 크게 격분했다.
그는 대뜸 칼을 뽑아 들고 비삽을 찾아가 단칼에 그 목을 베어 성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비삽의 죽음을 확인한 뇌음신은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망자의 고언이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어찌 성을 치지 않겠는가!”
그는 군사들을 독려해 다시금 맹렬히 칠중성을 공략했다.
성이 도탄에 빠지자 필부는 직접 절도봉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굴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성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으니 제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힘껏 싸워라!”
성민과 군사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성주의 말에 병자(病者)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다투어 성루로 기어올랐다.
싸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비삽의 밀고대로 칠중성의 어렵고 궁핍한 사정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하룻동안 벌인 싸움에서 성군의 희생은 과반이나 되고 사기도 급격히 떨어졌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마저 성 쪽으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역풍을 안고 싸워야 하는 성군들로선 화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뇌음신은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화살 끝에 기름을 바르고 불을 붙여 성안으로 날려댔다.
화염에 휩싸인 성루에서 필부는 본숙(本宿), 모지(謀支), 미제(美齊) 등의
부하들과 끝까지 적에 대항했으나 빗발처럼 날아든 화살에 맞아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필부가 죽자 성은 이내 함락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칠중성까지 얻고 나자 고구려 전역에서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개소문은 직접 요동으로 건너가 성주들을 격려하고 군사들을 단속했다.
“이제 곧 전란이 있을 것이다.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
그런데 과연 그의 말대로 당나라가 대병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군사들은 한결같이 개소문의 혜안에 탄복했다.
만사가 짐작대로 돌아가는 판에 어찌 그에 대한 방비가 없을 것인가.
계책을 내고 군사를 부리는 개소문의 신출귀몰함은 보통 사람들로선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정교했다.
“육로로 건너오는 군사는 적고 수군의 숫자는 많을 것이다.
요동의 길은 미리부터 차단해 시일을 끌고 뱃길은 방어선을 물려 적을 유인한 뒤
해포 근해에서 한바탕 결전을 벌일 것이다.
수군은 필경 백제를 칠 때의 해로를 그대로 따라올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첫째, 당나라 수군은 수군이 아니라 육지의 군사를 배에 태웠을 뿐이다.
따라서 대부분은 물길에 서툰 자들이므로 배에 올라 하루나 이틀이 지날 때가 가장 괴로울 것이다.
이럴 때는 굳이 칠 이유가 없다.
또한 백제로 가는 해로는 풍랑이 심한 곳을 거쳐 돌아가는 곳이다.
가만히 두어도 군사들은 저절로 지치게 마련이다.
하물며 당선들은 대부분 백제를 칠 때 건조한 대선(大船)들로
배 한 척에 수백 명이 탄 경우가 허다하다.
대선은 풍랑에는 강할지 모르지만 움직임이 둔하므로 해전에 서툰 자들이 배를 다룰 때는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의 중선과 소선들이 적선을 포위하여 바람의 방향을 잡고 발 빠르게 화공을 쓰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개소문은 수군 장수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당선들이 결집할 해포 근해는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곳일 뿐만 아니라
비사성과 압록수의 물길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당나라 선박이 우리 해역에 들어오고 난 뒤 비사와 압록에서 동시에 배를 내어
해포의 수군과 함께 적선을 포위하라.
그런 다음 기름을 실은 빈 배 몇 척을 적의 선단 사이로 떠내려 보낸 뒤
화살에 불을 붙여 쏘되 적선이 흩어지는 것을 막는다면 풍랑에 지친 당나라 군사는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일은 개소문의 예측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정방을 뺀 나머지 장수들이 백제에서 돌아온 선박을 앞세우고
세 패로 길을 나눠 동시에 쳐들어간 그해 싸움에서 당군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해포 근해에서 대패했다.
당선 2천척이 동원된 해전에서 5백 척에 가까운 배가 불길에 휩싸여 전소되고,
고구려 수군에 나포된 배도 1백 척이 넘었다.
주력부대인 수군이 위력을 발하지 못하니 요동으로 진군한 소정방의 군대도
기운을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한 발짝도 더 진격하지 못했다.
기대와는 달리 장수들이 참패하고 돌아오자 성질 급한 이치는 약이 올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동안은 선제의 간곡한 유언 때문에 요동으로 군사를 내지 않았던 그였으나
한 번 대패를 경험하자 이젠 모든 것이 자신의 일로 변해버렸다.
더군다나 그는 이 무렵 백제 정벌에 성공하고 그 기고만장함이 하늘에 닿아 있을 때였다.
아버지와 같은 천자가 되리라던 즉위 초의 마음가짐은 어느덧 스스로를 아버지를 능가하는
황제로 자부할 만큼 변질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신유년(661년) 정월,
이치는 그동안 써오던 연호까지 영휘(永徽)에서 용삭(龍朔)으로 바꾸며 고구려 정벌의 의지를
뜨겁게 달구었다.
아울러 하남과 하북, 회남 등지의 67개 주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라는 조칙을 내렸으며,
홍려경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 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병(部兵)을 거느리게 했다.
이렇게 모집한 군사가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것은 4월경이었다.
이치는 임아상(任雅相)과 설필하력, 소정방 등에게 67주에서 선발한 정병 4만 4천 명을 나누어
맡기고 소사업 에게는 다시 호병(胡兵) 35군을 배정한 뒤 수륙 양쪽으로 고구려를 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이세민의 뒤를 이어 자신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설 뜻을
밝혔다.
“선제께서 요동 정벌을 금하라는 유조를 남긴 것은 짐의 제업을 걱정해서이지
어찌 본심이 그러했겠는가?
옛일을 돌이켜보매 고구려만큼 중국을 괴롭히고 개소문 만큼 선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인도 없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본심을 헤아리고 말 속에 숨은 참뜻을 깨달아 천하를 온전히 구제하는 일이야말로 마땅히 행해야 할 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백제를 멸한 것은 선대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며 이로써 짐작컨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한의 강역을 모조리 수중에 넣는 것도 짐의 세대에선 능히 꾀할 만한 일이다.
선제께서 물려준 기업으로 선제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는 곧 진정한 효라고 볼 수 없다.”
이치가 친정(親征)에 나설 뜻을 밝히자 울주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를 비롯한
당조의 중신들은 한결같이 이를 극구 만류했다.
“고구려는 소국입니다.
소국을 멸하는 하찮은 일에 어찌 폐하께서 직접 나서려 하옵니까?”
“게다가 고구려의 개소문은 위험천만한 인물이올시다.
선제께서 남긴 유조의 깊은 뜻을 다시 헤아리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만일 고구려가 이미 망했더라도 필히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것인데,
적게 내면 위세를 떨칠 수 없고 많이 내면 인심이 불안할 것입니다.
천하가 오직 피로할 뿐이며, 정벌함이 도리어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멸망이 멸망치 않음만 못하다는 것은 고구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신하들의 상소가 끝없이 이어지자 심약한 이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반대하는 이는 중신들뿐 아니었다.
그 무렵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무후(武后:측천무후)까지 나서서 친정은 고사하고
고구려 정벌 자체를 맹렬히 반대하자 이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몇 달을 허비했다.
5월이 되자 개소문은 다시 장군 뇌음신 으로 하여금 말갈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이 역시 머뭇거리는 당군을 유인하기 위한 개소문의 술책이었다.
이치는 개소문의 예측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8월이 되자 소정방과 설필하력은 육로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지만
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이 압록강을 막고 수비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의병을 모아 사비성을 위협하던 복신과 도침, 정무의 군대는 날로 그 위세를 더해갔다.
이들은 임존성과 주류성을 기반으로 세력을 크게 떨치며 당나라나 신라의 유진군 들과
싸울 때마다 승승장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국 각지의 젊고 의로운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연합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칠악 근방으로 모여들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2장 장수 4 (0) | 2014.11.23 |
---|---|
제32장 장수 3 (0) | 2014.11.23 |
제32장 장수 1 (0) | 2014.11.23 |
제31장 황산벌 10 (0) | 2014.11.22 |
제31장 황산벌 9 (0) | 2014.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