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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황산벌 10

오늘의 쉼터 2014. 11. 22. 12:04

제31장 황산벌 10

 

 

 

김유신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한 당군 장수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유백영과 유인원은 황제의 밀명대로 신라를 치자고 주장했고,

풍사귀와 방효공 등은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쪽이었다.

특히 동보량은 아직 고구려를 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신라와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며

돌아가자는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소정방은 양론이 팽배한 가운데 이번에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을 의식한 그는 신라를 치는 일에 과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유백영의 권유에 못 이겨 사비성에 군영을 만들고 금성을 공격할 모의까지 마쳤으나

정작 군사를 움직이려니 자꾸만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신라에선 따로 방비를 세워두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만일 섣불리 출병했다가 일이 실패로 끝나면 혈맹의 가약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기왕에 얻은 백제 땅마저 신라에 빼앗길 공산이 큽니다.

차라리 백제를 진수해 우리 성읍으로 삼는 일만 같지 못합니다.”

동보량의 만류에 그때까지 신라를 치자고 주장했던 유인원의 마음도 차차 바뀌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우장의 말도 옳은 것 같습니다.

우선 총관께서 신라왕을 만나 그가 머물던 금돌성을 구경시켜달라고 청해보십시오.

신라왕이 선뜻 허락을 하면 방비가 따로 없는 것이지만

뒤가 구릴 경우엔 틀림없이 핑계를 댈 것입니다.

그사이에 저도 정탐꾼을 시켜 신라의 국경과 강역을 몰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정방은 유인원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아직 사비성 별궁에 머물고 있던 춘추왕 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때 춘추는 당군들의 수상한 낌새를 이미 알아차리고 군신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세민과 피로 서약한 문서에 따르면 백제 땅은 토벌한 뒤 마땅히 자신들에게 돌려주어야 했으나

사비에 입성한 당군들의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한편에선 백제 땅을 다스릴 유진군과 진수사(鎭守使)를 선발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사비성 전역에 풀어놓았던 당군들을 다시 끌어 모아 대오를 만들고 무기를 손질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필경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날 조짐이었다.

소정방이 김유신과 인문, 양도를 초청해 회유책을 썼다는 사실도

이미 유신과 양도의 입을 통해 알고 있던 춘추였다.

백제 땅을 돌려받기는커녕 오히려 사태는 당군의 침략을 걱정하는 쪽으로 치달았다.

수심에 가득 찬 임금에게 제일 먼저 태자 법민이 말했다.

“아바마마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정방은 감히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법민이 단언하듯 하는 말에 춘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하느냐?”

“그가 큰 외숙과 양도를 불러 회유한 것은 큰 외숙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군사를 함부로 낼 수 없는 첫 번째 이윱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직 북방의 고구려가 건재하므로 드러내고 우리와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군사를 일으키더라도 반드시 우리한테서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파맹(破盟)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기 위해섭니다.

그런데 이번 전역에 동원된 우리 군사의 숫자가 4, 5만에 불과하니

저들이 만일 꼬투리를 잡으려면 후군의 방비를 염탐한 뒤 그것을 가지고

거병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이 점만 대비하면 소정방은 큰 외숙과 고구려를 의식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법민의 설명을 듣고 나자 춘추의 안색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기왕에 세워둔 후군의 방비가 아니냐?

저들이 염탐하여 알아낸다면 무엇으로 변명을 한단 말이냐?”

“우리에겐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북방에 세워둔 군사들은 그런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당군의 침략에 대비해 금돌성과 한산주, 남역 접경에 배치한 군사들입니다.”

법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부제감 다미(多美)가 한 가지 묘안을 꺼냈다.

“접경에 배치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에게 백제 옷을 구해 입혀서

거짓으로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만들면 당나라 군사들은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딴 마음을 품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고 우리 군사를 움직여 사비성 외곽에서 먼저 당군들을 포위하면

능히 저들의 도발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춘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해 적을 토벌했는데 이제 도리어 그들을 포위해

궁지로 몬다면 천하의 비난을 받지 않겠소?

하늘이 우리를 도와줄 것인지도 의심스럽구려.”

그러자 김유신이 웃으며 말했다.

“다미공의 말이 취할 만하오니 청컨대 이를 가납하소서.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발을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난을 당하고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나이까.”

한창 논의가 무르익고 있을 때 당나라 진영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소정방이 알현을 청한다고 말했다.

용좌 곁에 시립했던 법민이 춘추에게 다가와 가만히 귀엣말로 속삭였다.

“총관이 아바마마께 우리 강역을 구경시켜달라고 청하면 흔쾌히 이를 허락하십시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으면 의심을 살 것이지만 아바마마께서 쾌히 수락하시면

조만간 그는 낙양으로 떠날 것입니다.”

법민의 예측은 정확했다.

춘추가 소정방을 만나자 그는 대뜸,

“대왕께서는 언제 신라로 돌아가십니까?”

하고는,

“가실 때 저를 좀 달고 가서 신라 강역을 구경이나 좀 시켜주십시오.

소문에 신라엔 이름난 명산이 많고 아름다운 계곡도 돌밭에 자갈처럼 허다하다고 들었나이다.

여기까지 와서 신라를 구경하지 않고 돌아가면 뒷날 후회가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청했다. 춘추는 내심 법민의 혜안에 탄복하면서 기쁜 얼굴로 말했다.

“여부가 있겠소? 그러잖아도 내가 총관에게 먼저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소!

예까지 왔으니 우리 땅도 구경하고 가야지.

아무렴, 총관뿐 아니라 장수들도 전부 데려갑시다.

내일이라도 좋으니 어서 채비를 하오!

계림의 산자수명한 곳을 다 돌아보려면 주마간산을 하더라도 족히 두어 달은 걸릴 게요!”

춘추는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춘추의 태도가 제 짐작과는 완연히 딴판이니

소정방으로선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우리 장수들을 다 데려가도 좋겠습니까?”

“물론이오! 여기 일은 대충 다 보았으니 내일 일찍 출발하는 게 어떻겠소?”

오히려 춘추가 다그치고 나오자 소정방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내일은 너무 촉박합니다.

대왕의 뜻을 알았으니 사나흘 말미를 주십시오.”

“사나흘이나 걸릴 게 무에 있소? 시급히 갑시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소정방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허둥지둥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간 당나라 장수들은 신라측과 연락을 끊고 각방으로 정탐꾼을 놓아

신라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소식을 물어오는 정탐꾼들마다,

“국경엔 방비가 가히 철통과 같아서 쥐새끼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드나들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저는 가까스로 국경 마을에 들어간 뒤 주막에서 지나가는 말로 임금 욕을 했다가 달려든

신라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임금을 정성으로 섬기고 김유신 이나 천존과 같은 장수들을

마음 깊이 흠모하는 듯했습니다.”

하며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안으로는 물샐 틈 없는 방비를 해놓고 겉으로는 트집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니

소정방으로선 신라를 칠 명분도 찾을 수 없고 그러구러 의욕도 잃어버렸다.

 

한편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사로잡혔지만 백제 전역이 연합군의 수중에

온전히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이는 웅진성까지 의자를 수행했던 좌평 정무였다.

그는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 등지에서 의병들을 끌어 모은 뒤

두시원악(豆尸原嶽:청양)에 진을 치고 나당 연합군에 대항했다.

8월 26일,

연합군은 정무의 세력이 포진한 임존성(任存城:대흥)의 대책(大柵)을 공격했으나

지형지세에 밝은 잔병들은 험지에 의지해 역공을 취했다.

결국 연합군은 이들을 격파하지 못하고 다만 소책(小柵) 몇 개를 무너뜨린 뒤 사비성으로 돌아왔다.

망국의 잔병들까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소정방은 신라를 치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단념했다.

그는 춘추를 만나 황제로부터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구려를 치지 않고 이대로 귀국을 하시겠소?”

“우리가 백제로 내려온 뒤 요동의 방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굳세다는 전언이올시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백제는 얻어놓았으니 아무 때고 남북으로 군기만 맞추면 되지요.

소장의 짐작으론 명년이나 후명 년쯤 적당한 기회가 오지 싶습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고구려는 동맹을 맺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망하는 순간까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을사년(645년) 전란에 백제가 돕지 않았던 일의 앙갚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그들 스스로의 안위였다.

연개소문은 백제를 토벌한 나당 연합군이 행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요동과 남쪽 국경에 물샐 틈 없는 방비를 펴고 나왔다.

소정방이 출정한 뒤 요동을 치려고 몇 번이나 기회를 엿보았던 당나라는

아무래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구려 정벌을 뒤로 미루었다.

“그보다는 백제 강역의 유진군 문제를 의논했으면 합니다.”

소정방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명목상 백제 강역은 모두 신라에게 주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13만 대병을 거느리고 와서 애써 얻은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자니

소정방으로선 아깝다 못해 원통한 심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를 쳐서 요동을 얻었다면 사이좋게 양국의 땅을 갈라

전리품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지만 언제 요동으로 군사를 낼지,

군사를 낸다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을지도 사실은 의문이었다.

신라가 내세우는 선제와 춘추왕 사이의 맹약문은 빛이 바랜 지 오래,

두 사람이 책상머리에서 이마를 맞대고 의논한 일과 정작 그를 실행으로 옮길 때의 사정은

가히 천양지차였다.

하물며 기회를 보아 그런 신라까지 토벌하라는 게 지금 황제의 본심이 아니던가.

“소총관이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와서 백제를 궤멸시켜준 것만으로도

이미 갚을 길 없는 큰 신세를 졌는데 어찌 유진군까지 남겨달라고 부탁을 하겠소?

만일 그렇다면 물에서 건져놓았더니 옷까지 말려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과인이 그처럼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오.”

서로가 상대의 속셈을 간파하고 나누는 대화였다.

소정방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비록 백제왕을 사로잡고 사비성을 장악했다지만 백제 땅 전역을 취한 것은 아닙니다.

당장 엊그제만 하더라도 임존성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도성을 되찾고 망한 사직을 일으켜 세우려는 자가 어찌 비단 정무 하나뿐이겠습니까?

유진은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동안 애쓴 공적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

향후 몇 년간은 각별한 노력과 주의가 필요합니다.

마땅히 양국에서 유진군과 진수사를 두어 같이 다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럴 것까지야 있겠소. 우리 군사만으로도 충분하오.”

춘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소정방은 얄미울 정도로 춘추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여기 온 군사가 신라군의 거의 전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지요?”

“그, 그렇지요……”

“북방의 군사들은 계속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야 할 테고,

이번 전역에 동원된 전군을 사비성에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희 황제께서도 대왕을 도와 뒷일을 빈틈없이 마무리해놓고 돌아오라고 각별히 당부하셨나이다.”

황제의 명령이라는 말에 춘추도 더 이상 고집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긴 백제 전역(全域)에서 얼마나 되는 무리가 저항을 해올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너무 지나치게 고집을 부려 당군들을 기어코 돌려보낸다면

양국의 사이가 틀어질 것도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뒷날 사정이 위태로울 때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하면 얼마나 군사를 두고 가시겠소?”

춘추가 묻자 소정방은 미리 계산을 해놓은 듯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1만쯤을 두고 갈까 합니다. 신라에서도 그쯤 되는 군사를 남겨두십시오.”

기왕 당이 유진군을 두고 가는 마당이라면 한 사람의 신라군이라도

더 고생시킬 이유가 없다는 게 춘추의 재빠른 판단이었다.

“그럼 우리는 사천당과 중당의 군사들만 남겨두겠소.

양군이 모두 합쳐 7천 명쯤 되니 총관의 뜻과 부합하지 않겠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경신년(660년)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 내외와 태자 효, 왕자 융과 태, 연, 태자의 아들 문사 등을 귀국선에 태우고

좌평 천복을 비롯한 망국대신과 장수 1백여 명, 그 밖의 왕족 및 귀족 1만 2,807명을 포로로 삼아

백강을 출발했다.

부총관 김인문도 사찬 유돈(儒敦)과 대내마 중지(中知)를 데리고

소정방을 따라 다시 낙양으로 들어갔다.

유진군 1만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은 당나라 장수는 유수(留守)이자 낭장(郎將) 유인원이었다.

소정방이 떠나는 날 춘추왕도 사천당과 중당의 군사 7천여 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귀경 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신라왕 춘추의 처사는 다시 한번 빛났다.

그가 유인원을 도와 사비성을 진수하라며 선발한 장수는 인태(仁泰), 바로 자신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아직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적성 한복판에 자식을 책임자로 남겨두는 판이니

다른 장수와 군사들이 불만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사찬 일원(日原)과 급찬 길나(吉那) 같은 장수는 물론 유진군을 자청하는 군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춘추는 일원과 길나로 하여금 인태를 보좌하도록 한 뒤 신라에 항복한 백제 신하들을 데리고

개선군의 위용을 자랑하며 금성으로 향했다.

소정방은 귀국하자마자 잡아간 포로를 앞세우고 대궐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다.

이치는 기쁜 낯으로 소정방의 노고를 크게 치하한 뒤,

“어찌하여 이내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소정방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와 장수들은 지극한 충성으로 임금을 받들었습니다.

또한 아랫사람은 윗사람 따르기를 마치 부형(父兄)을 섬기듯 하므로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나이다.”

나머지 장수들의 전언도 소정방과 거의 일치하자 이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무라고자 한 말이 아니고 그냥 궁금해 물어봤을 뿐이다.”

한편 당나라 수도 낙양으로 끌려간 백제 임금 의자는 자식보다도

어린 당주 이치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지난 일을 백배 사죄하여 가까스로 용서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받은 치욕과 수모는 사람으로서 견딜 만한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나라를 잃은 뒤로 그는 정신마저 약간 이상해져서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히죽히죽 웃거나 웃다 말고 돌아앉아 대성통곡을 했고,

누가 말을 시키면 엉뚱한 대답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왜 그렇지 않으랴.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낙양에 간 뒤로 의자는 곧 병이 들었다.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이었다.

오장육부가 새까맣게 타 들어가서 마침내 골수에까지 퍼진 그 병은 결국 의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막판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한 듯 약도 먹지 않고 의원의 진찰도 한사코 거부했다.

“내가 나라를 잃었구나! 이 한을 어찌할거나, 죽어서도 이 한을 다 어찌할거나……”

그 말을 끝으로 의자는 왕비 은고와 장자 융을 비롯한 자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맞은 서글픈 종말이었다.

당주 이치는 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에게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그를 따라온 백제의 옛 신하들이 조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울러 조서로써 북망산의 손호(孫皓:吳나라 손권의 손자)와 진숙보(陳叔寶:陳나라 後主)가 묻힌

묘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망자의 원혼을 위로했다.

의자의 장례는 맏이 부여융이 주관했다.

장례가 끝나자 이치는 부여융을 대궐로 불러들여 사가경(司稼卿) 벼슬을 제수하고

의자를 대신해 본국에서 데려온 백제인 들을 거느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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