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황산벌 7
달콤한 말로 눈앞에서 알짱거리던 만조의 신하들은 어디로들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몇몇 의로운 이들은 싸움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었다.
신하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자식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좌평에 식읍까지 하사한 41명이나 되는 서자 가운데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달려온 자는 부여궁 하나뿐이었다.
매사에 볼강스럽던 젊은 왕비 또한 정작 꾀가 필요한 대란을 만나자,
“아녀자가 국사를 어찌 압니까?
신첩은 그저 대왕과 중신들을 태산같이 의지할 따름입니다.”
하며 발을 빼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태자 자리에서 쫓아낸 장자 부여융의 태도는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려움을 당해봐야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했던가.
융은 소식을 듣자마자 허둥지둥 입궐해 태자 및 아우들과 함께 대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의자로선 융의 그런 태도가 여간 듬직하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무언가 우리에게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대국을 섬기는 번국(藩國)의 예로써 당나라 장수들을 대접하고 회유한다면
왕궁까지 침범을 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융은 그렇게 말한 뒤 문장에 뛰어난 좌평 각가에게 글을 짓도록 했다.
차후로는 황제의 명을 어기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한층 열성을 다해 당조를 섬기겠다는 맹세에 이어
부디 퇴병해줄 것을 애걸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정방은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융은 아우들과 의논 끝에 이번엔 온갖 진귀한 음식을 마련해 소정방을 달래려고 했다.
“음식이나 먹자고 만 리 뱃길을 힘들게 왔겠는가?
지금이라도 사죄를 하려거든 궁성의 포위를 풀고 순순히 궐문을 열어라.
의자가 목숨을 구하는 길은 그것뿐이다!”
소정방은 심부름을 온 자에게 호통을 쳤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융의 계교였다.
그는 다시 서제(庶弟)인 부여궁을 불러 말했다.
“나는 금일 밤중에 아바마마와 태자를 웅진성으로 피신시키려 한다.
그러니 너는 좌평들을 모두 거느리고 당나라 병영을 찾아가 죄를 빌며 시간을 벌어보라.
어떤가, 할 수 있겠느냐?”
궁은 효심이 깊고 의로운 인물이었다.
“형님의 말씀을 따르겠지만 좌평들이 말을 들으려고 할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의직공은 이미 죽었고 임자와 충상공은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어떤 좌평을 데리고 가야 할는지요?”
융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임금의 윤허를 얻어 당석에서
달솔과 은솔 신하 가운데 좌평을 새로 뽑았다.
대부분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부여궁은 이렇게 급선한 인물들을 거느리고 당나라 병영을 찾아가서 죄를 빌며 시간을 끌었다.
그사이 대궐에서는 융의 주도로 왕자와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임금과 태자를 웅진으로
대피시킬 계획에 골몰했다.
해만 떨어지면 좌평 정무가 대궐의 호위 군사들을 동원해 어가를 모실 계획이었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융이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항복해 당군과 신라군을 맞이한 뒤
굳은 맹세와 진심 어린 사죄로 양국의 분노를 달래볼 심산이었다.
그렇게 시일을 두고 회유하면 굳이 사직이야 멸하랴 싶었던 게 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당군은 물러가면 그뿐이었고, 수치와 굴욕이 문제였지 신라군도 화친의 맹약을 맺기만 하면
달랠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러니 어차피 당할 수치와 굴욕을 일개 왕자에 불과한 자신이 나서서
감수하겠다는 게 융의 갸륵한 마음이었다.
전고의 역사를 상고하건대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은 있었다.
고구려왕 담덕(광개토왕)이 웅진의 왕성을 점령했을 때도 임금을 죽이고
유진군을 두어서 그렇지 사직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일어나 사방의 번국들을 무수히 아울렀어도 왕가를 멸하거나
사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한 예는 없었다.
그것이 당시 이웃나라 간 전쟁의 관례요 상규였다.
소나기는 우선 피하랬다고,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융은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었다.
사직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기회는 틀림없이 다시 오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탐라, 왜를 설득할 시일만 번다면 오늘의 이 수모는 언제든 갚아줄 수 있을 터였다.
다행히 부여궁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늦여름의 길고 긴 해를 원망하고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던 융은 천지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하자
서둘러 좌평 정무에게 말했다.
“천년 사직이 오로지 장군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렸습니다. 어서 출발하십시오!”
그리고 융은 이렇게 덧붙였다.
“길은 멀어도 칠악(칠갑산)으로 돌아가는 편이 안전할 것입니다.
백강을 건너 계룡산으로 가면 십중팔구 신라군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자 정무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도 생각해둔 길이 있습니다.”
임금 내외와 태자가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고
나자 성정이 불과 같은 둘째 왕자 부여태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융에게 대들었다.
“대궐 문을 스스로 열어 항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융은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태를 쳐다보다가 조용한 말투로 타일렀다.
“싸우면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나라고 어찌 항복하고 싶겠느냐?
그러나 피를 흘리며 끝까지 결전한 뒤엔 무슨 말로 사직의 보존을 청한단 말이냐?
승산이 없을 때는 굽힐 줄 아는 것도 지혜요 계책이다.”
“나는 형과 뜻이 다릅니다!”
“다르다니?”
“아버지는 이미 임금 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오.
술에 찌들고 요부의 치마폭에 싸여서 정사를 잊은 지 오랩니다.
효란 놈도 마찬가지요.
걸핏하면 계집애처럼 얼굴이나 붉히고,
낮에 개 잡는 것만 봐도 밤에 오줌까지 싸는 놈이 무슨 태자란 말씀이오?
그렇게 흘러갈 사직을 구해봤자 장차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소?
아버지와 효는 대궐 문으로 달아나는 순간 이미 이 나라 사직을 버린 사람들이오!”
융은 태를 꾸짖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하면 너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
“계획이랄 게 무에 있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거지요.”
태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나 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융이 폐위된 뒤 자신을 제쳐두고 아우인 효가 태자가 되자
늘 이를 불만하던 태는 이번 기회에 자신이 공을 세워 임금이 되고자 했다.
비록 승산은 희박했지만 보위를 이을 방법은 그뿐이었다.
한번 그런 욕심을 품자 이런 난리가 일어난 것이 자신에겐 절호의 기회로만 보였다.
혼란의 와중이 아니라면 어떻게 태자도 장자도 아닌 자신이 임금이 될 수 있으랴.
“안 된다. 그래서는 좋지 않은 감정만 더 쌓일 뿐이다.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융이 점잖게 나무라자 태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시끄럽소! 이제부터 사비궁에선 내가 임금이오!
항복하자는 자는 누구든 내 손에 죽을 것이오!”
순간 융은 크게 놀랐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태의 기갈을 당할 수가 없었다.
태는 그 길로 바깥으로 뛰어나가 궐내에 남은 군사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기치를 늘여 세우고 북을 울리며
도성을 굳게 지키려고 했다.
항복을 기다리던 당군과 신라군은 결전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자
대오를 정비해 도성으로 진군했다.
그날 아침, 신라 태자 법민이 상주와 국원 근방에서 차출한 향군 2만을 이끌고
선군에 합류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태의 저항은 위태롭고 무모한 것이었다.
나당 연합군은 도성 안으로 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려대며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우박처럼 돌덩이가 쏟아지고 누각과 집이 불바다가 되자
거리로 뛰쳐나온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에 뇌성처럼 가득 찼다.
참변도 그런 참변이 없었고, 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었다.
향촌과는 달리 사방이 대문으로 둘러싸인 도성은 도망가거나 피할 곳마저 없었다.
평화로울 때는 도성에 사는 것이 큰 유세요
자랑이었으나 망국지변 앞에서는 도리어 빈틈없는 업보요 형벌이었다.
가옥이 운집한 곳일수록 피해가 컸다.
날아온 돌에 맞아 떼죽음을 당하는 일가가 부지기수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아이를 잃은 부모는 미친 듯이 거리를 떠돌거나 한길에 서서 무작정 울어댔다.
그 사이에서 우리를 뛰쳐나온 가축들마저 털과 꼬리에 불을 매단 채 고샅길을 무섭게 질주하였다.
아비규환이란 7월 13일 아침의 사비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참화를 피한 이들은 오로지 산으로, 산으로만 올라갔다.
이때 도성 안에는 왕가의 족친과 친지들이 다 모여 있었다.
태자 효의 장자인 부여문사(扶餘文思)도 어머니와 함께 그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문사는 민가가 불길에 휩싸이고 적의 포박이 점점 사위를 좁혀오자
안색이 상기되어 부여융을 찾아왔다.
“큰 백부께서는 이런 난리를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문사는 따지듯이 융에게 물었다.
“무고한 백성들이 다 죽습니다.
어서 성문과 대궐 문을 열어 항복하십시오!”
문사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아우 태를 의식한 융이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그는 사뭇 음성을 낮춰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궁을 비운 틈에 작은 백부가 마음대로 임금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태백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큰 백부께서 결단하지 못하신다면 차라리 저는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라도 이 난리를 피하겠습니다.”
그것은 문사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견이 아주 없는 바는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왕가 사람들과 중신의 식구들,
팔족 권문세가의 뜻이 문사와 같았다.
융을 설득한 문사는 백기를 높이 세우고 항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자 곧 수많은 이가 모여들어 삽시간에 대열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문사는 이들을 거느리고 성루로 가서 타고 내려갈 수십 개의 밧줄을 설치했다.
“멈춰라! 허락 없이 성을 나가려는 자는 먼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뒤늦게 소문을 들은 태가 칼을 뽑아 들고 달려왔다.
그러나 태를 본 문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마찬가지요. 어디 죽이려면 죽여 보시오!”
“정말 내 손에 죽겠느냐?”
태는 무서운 얼굴로 문사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상황이 아니었다.
문사의 주위를 에워싼 왕가의 족친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한결같이 원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자 결국은 태도 칼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문사가 그런 태를 왈칵 밀치고 제일 먼저 밧줄에 매달려 내려가자 무리가 일제히 문사의 뒤를 따랐다.
사비성은 결국 이렇게 무너졌다.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성문 앞까지 진격한 소정방은
곧 군사들에게 성첩을 넘어가 당나라 깃발을 꽂도록 지시했다.
사비성 성루에 7백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펄럭이던 백제 기가 꺾이고 당나라 깃발이 대신 꽂혔다.
태도 일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는 더 저항할 수 없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을 청했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당군들이 제일 먼저 입성하고 뒤를 이어 신라군이 들어갔다.
신라군들은 백제 백성들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장수들의 엄명을 받은 터라
약탈과 노략질을 하지 않았지만 당군들의 사정은 달랐다.
장수들에게야 무공도 있고 보상도 따로 있었으나 종군한 군사들의 경우
승전의 대가는 흔히 약탈과 노략질이었다.
하물며 집을 떠난 지 수개월,
당나라 군사들은 고자만 빼고 거의가 여색에 한껏 굶주려 있었다.
“백제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도성을 정복하면 그 나라의 아녀자들은 모두 너희에게 나눠주겠다!”
소정방을 비롯한 당군 장수들은 틈틈이 그런 말로 여색에 굶주린 군사들을 독려해왔다.
재물보다도 더욱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여자들이었다.
이들이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사비성에 들어와 소문으로만 듣던 아리따운 백제 여인들을 보자
눈알과 창자가 뒤집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도성을 점령한 당군들은 마치 닭장에서 닭을 잡듯이 여자들을 쫓아다녔다.
창칼로 무장한 수만 명의 군사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여인들을 붙잡고 겁탈하느라
사비성은 또 한번 아수라장이 되었다.
처음엔 인물을 따지고 젊고 늙음을 가리던 사내들도 소문을 들은 여인들이 달아나거나 숨어버리자
이내 아무 여자나 눈에만 띄면 달려들어 젖을 주무르고 아랫도리를 탐했다.
패전의 참상은 본래 그처럼 무섭고 잔인한 것이었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그렇게들 군사를 기르고 온갖 지략과 계책을 짜내어 적과 싸워오지 않았던가. 살아서 봉변은 여자들이 당하고 죽어서 서러운 것은 남자들이었다.
노인은 자식을 잃었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었으며, 임금은 백성을 잃고, 백성들은 나라를 잃었다.
사비성 도처에서 필설로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참한 일들이 벌어지자
왕궁의 궁녀들 가운데는 무작정 뒷산으로 달아나는 이들이 많았다.
비단 끔찍한 소문이 아니더라도 임금마저 쫓겨 간 대궐에 적군이 쳐들어오면
어떤 수난을 당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나가 달아나기 시작하자 3, 4명이 뒤를 따랐고, 3, 4명을 보고는 10명, 20명이 쫓았다.
그렇게 험한 산길로 도망간 궁녀가 대략 2백 명쯤 되었다.
주로 젊은 여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물론 임금과 동침해 승은을 입은 궁녀도 있었으나
밥 짓고 빨래하던 아이와 비빈의 시중을 들던 나인들,
대전과 내전의 여시(女侍) 태반이 포함된 숫자였다.
코앞에 닥친 난리를 피해 무작정 달아나긴 했지만 대궐 뒤의 부산(扶山:부소산)은
고립무원의 기험한 절벽, 숨기에는 너무 얕은 산이요 길은 끊어져서 더 도망갈 곳도 없었다.
그때 산정에 다다른 궁녀들 가운데 하나가 임금이 가끔 산보 삼아 노닐던 북변 기슭의 정자를 떠올렸다. 그곳엔 서동 대왕이 세운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 있어 임금뿐 아니라
비빈들도 가끔 찾아가던 곳이었다.
“법당에 가서 기도를 하면 혹 살길이 보일지 누가 알어?”
이렇게 말한 궁녀가 앞장서서 정자로 달려가자
나머지 궁녀들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좇아갔다.
정자는 깎아지른 절벽 사잇길로 위태로운 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한 백마강(백강 상류),
오늘의 환난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강물은 그저 유유히 절벽 밑을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있으니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굉음과 함께 수백 척의 당선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궁녀들은 누가 볼세라 황급히 내불전으로 몸을 숨겼지만 천지를 진동하는 북소리와 나팔소리에는
울음이 절로 터졌다.
하나가 울자 모두가 따라 울었고, 하나가 그치면 모두가 함께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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