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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황산벌 5

오늘의 쉼터 2014. 11. 20. 16:25

제31장 황산벌 5

 

 

 

사로잡힌 관창은 곧 계백에게 끌려갔다.

 

백량은 관창의 다리를 쳐서 무릎을 꿇게 하고 투구를 벗겼다.

 

그런데 투구 속에서 나타난 땀에 절은 얼굴은 짐작과는 달리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미소년이었다.

 

자신이 죽인 반굴보다도 훨씬 더 어린 듯한 관창을 보는 순간 계백은 잠시 기가 막혔다.

 

“이 녀석아, 너는 도대체 몇 살이나 먹었느냐?”

 

계백을 대신해 백량이 물었다.

 

어이가 없기로는 그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았다.

 

그러자 관창은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채로 대답했다.

 

“장수의 나이는 물어 무엇하느냐? 잔소리 말고 어서 죽여라!”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관창의 고함소리는 흡사 여자와 같았다.

 

목소리뿐 아니라 짐짓 거벽을 떠는 태도 역시 그랬다.

 

딴에는 어른인 척하려고 애를 쓰는 눈치였지만 정말 어른들이 보기엔

 

실소를 금치 못할 어설픈 흉내에 불과할 뿐이었다.

 

“돌려보내게.”

 

계백이 앉은 채로 백량을 올려다보았다.

 

“어린애를 해치기도 께름칙하지만 저런 풋내기를 죽여 봤자 적의 사기만 북돋아줄 뿐일세.”

 

백량은 계백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관창을 묶은 줄을 풀어준 뒤 말에 태워 다시 적진으로 돌려보냈다.

 

“관창이 돌아온다! 관창이 살아서 돌아온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관창을 보자 신라군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죽었으리라 믿었던 자식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니 품일은 반가움 못지않게 궁금증이 일었다.

 

“네가 적에게 붙잡혀갔다고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말에서 내린 관창에게 품일이 물었다.

 

“소자가 큰 수모를 당했으므로 차마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관창은 무슨 영문인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는 투구를 한 손에 든 채로 곧장 우물가에 가더니 손으로 물을 움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물을 마시고 나자 관창은 투구를 고쳐 쓰고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말 잔등에 훌쩍 올라탔다.

 

그는 주변으로 모여든 낭도와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적진에 들어가 그 장수를 베고 깃발을 꺾지 못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

 

이번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다시 기세를 올리며 적진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또 그 아이인가?”

 

계백은 달려 나오는 관창을 보고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백량의 대답에 성질 급한 진사가 버럭 화를 냈다.

 

“저놈이 죽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입니다!

 

살려준 은공도 모르고 또다시 불거져서 날뛰니 제가 베어버리고 오겠습니다!”

 

계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내가 하마.”

 

그는 비호처럼 담가라를 달려 벌판으로 나갔다.

 

눈에는 불빛이 이글거리고 표정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두 장수가 마주서자 계백은 성난 목소리로 관창을 꾸짖었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말귀는 알아들을 게 아니냐? 썩 돌아가지 못할까!”

 

“시끄럽다! 네 목을 취하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관창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이어 관창의 창끝이 계백의 가슴으로 파고들자

 

계백은 움찔 뒤로 물러나 다시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니 어서 돌아가라!”

 

어린애를 죽이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계백은 관창을 죽였을 때 일어날 일이 더 염려스러웠다.

 

김유신이 5만이라고 했으나 적군의 숫자는 대략 3만쯤 돼 보였고,

 

네 차례 교전에서 모두 이겼다지만 백제군의 희생도 1천 소수를 헤아렸다.

 

남은 군사는 4천여 명,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죽기를 각오하고 나온

 

장정들의 새파란 독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반굴에 이어 관창까지 죽여 놓으면 신라군 역시 만만찮은 독기를 품을 게 뻔했다.

 

어떻게든 관창을 살려 보내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관창은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엔 대꾸도 귀찮다는 듯이 눈앞에서 창을 휘둘러대는데

 

그 솜씨란 게 계백이 보기엔 제 녀석 나이만큼이나 젖비린내가 났다.

 

관창 하나를 죽이면 수만 적군이 벌 떼처럼 일어날 것이지만 기어이 죽겠다며

 

설쳐대는 철부지를 만류할 방법은 죽이는 것밖에 없으니 그것이 낭패였다.

 

계백은 관창의 서투른 창날을 몇 차례 막아내면서 김유신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형편을 보건대 어차피 백제 사직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백제 사람도 곧 신라의 제도와 문물에 편입되어 신라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공산이 컸다.

 

그 또한 수십 년 백제 장수로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면서 삼한이 솥발처럼 나뉜 형세가

 

안타깝다는 느낌은 여러 번 들었다.

 

무고한 사람을 끝도 없이 죽여야 하는 일이 뉘라서 흔쾌하랴.

 

장수가 3대를 내려가면 저절로 멸문(滅門)한다는 속설도 인간 세상의 지나친 살상을 염두에 둔

 

경구가 아니던가.

 

만일 이제라도 국경이 무너져 양국이 하나가 된다면 훗날의 백성들은

 

살벌한 전란의 참화(慘禍)로부터 벗어날 것이었고,

 

사람이 죽고 집과 살림이 불에 타는 전역(戰域)의 황폐함과 조잔(凋殘)함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국의 7백 년 역사에는 한 번도 없던 시절,

 

사람마다 천수를 누리는 꿈같은 세상이 마침내 도래할지도 몰랐다.

 

그 휘황하고 찬란한 대의명분 앞에서,

 

하필이면 왜 백제가 망해야 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유치한 푸념에 불과할 것이었다.

 

어차피 국경을 허물자면 한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요,

 

이기는 쪽이 어디든 진정으로 양국 백성을 애호하는 마음만 확고하다면

 

훗날에는 틀림없이 더 나은 세대가 펼쳐질 것이었다.

 

그러니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하필 백제가 망해야 하는 것은 비록 한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어이하랴.

 

그것은 김유신의 말처럼 다만 근년의 불우했던 운세와 일진 탓이리라.

 

신라가 내세우는 명분을 인정한다면 이런 싸움은 실상 무의미했다.

 

나머지 4천 결사로 마지막까지 투항을 거부하고 신라인 몇 명을 더 죽인들

 

이미 기울어진 대세에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아군도 적군도 모두가 다 불쌍하고 아까운 목숨들,

 

강물이 시원(始原)을 출발해 내닫기 시작했으면 그대로 흐르도록 두는 것이 순리 아니던가.

 

간과 뇌를 땅에 쏟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으면 몰라도 그게 아닐 바엔 차라리 순리에 따라주는 것이

 

또한 장부의 갈 길이 아니던가.

 

“네 이놈!”

 

한동안 관창의 칼끝을 피해 다니던 계백은 온갖 번뇌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매섭게 칼을 휘둘렀다.

 

순간 무서운 완력을 이기지 못한 관창의 창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계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달려 한 손으로 관창의 목덜미를 답삭 잡아챘다.

 

뒷덜미를 잡힌 관창은 기운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어 계백의 칼끝이 관창의 명줄을 겨누었다.

 

“살려주면 다시 나올 것이냐?”

 

계백이 묻자 관창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럼 할 수 없구나. 너의 투구를 벗겨본 것이 내 실수다.”

 

말을 마치자 계백은 가차 없이 칼을 휘둘러 단번에 관창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놓았다.

 

자신의 처자를 제 손으로 죽이려고 결심한 순간에 사직의 종말을 예감했던 그였다.

 

계백은 말에서 내려 한참이나 굴러간 관창의 머리를 찾아 손에 들었다.

 

“네 혈기가 나를 이겼다.

 

풋내기 어린애도 이러하니 무슨 수로 스러지는 내 나라의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랴!”

 

영문도 모르는 부하들의 함성소리가 황산벌을 뜨겁게 뒤흔들었지만

 

계백은 혼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를 주인을 잃고 방황하는 관창의 말안장에 단단히 옭아맨 뒤

 

말의 엉덩이를 차서 신라군 진영으로 쫓았다.

 

그렇게 하면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용병과 지략에 밝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자청하여 둔 악수(惡手), 마지막까지 명예를 중히 여긴 계백으로선 모든 것을 체념하고

 

띄운 항서(降書)와도 같은 것이었다.

 

관창의 말이 주인의 머리를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자식의 머리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내 아이의 면목이 살아 있을 때와 꼭 같구나!

 

국사(國事)에 죽었으니 아무것도 후회될 것이 없다,

 

오히려 장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모습을 본 신라군들은 과연 불같이 일어났다.

 

한번 감동하여 의기를 투합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신라인의 기질이었다.

 

애당초 그것을 보자고 귀중한 자식까지 희생시킨 장수들이 아니던가.

 

연거푸 싸움에 져서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일시에 하늘을 찌를 태세로 돌변했다.

 

임전무퇴와 결사항전을 연호하는 3군의 함성이 황산벌을 일깨우자

 

신라 장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을 모아 진격을 명령했다.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질풍이 성난 물결처럼 떨쳐 일어나는 것 같았다.

 

반굴과 관창의 원한을 갚자는 구호가 북소리를 대신하고 백제군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결전의 의지를 뜨겁게 달구었다.

 

3군은 지난번과 똑같은 형태로 백제의 3영을 공격했지만 싸움의 양상은 판연히 달랐다.

 

그렇게 바짝 약이 오른 신라군 3만이 4천 적군을 흔적 없이 토벌하는 데는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계백은 교전이 시작되고 얼마 뒤 천존과 맞섰다.

 

두 장수는 30여 합 이상을 겨뤘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천존의 아우 천품이 합류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적군의 한복판을 들이쳐 제일 먼저 병영 하나를 완전히 멸한 흠순과 품일은

 

좌영에서 싸우는 계백을 발견했다.

 

아들의 원한을 갚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었다.

 

흠순과 품일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계백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들까지 싸움판에 합류해 무려 네 사람의 이름난 장수가 협공을 하고도

 

계백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힘찬 검법은 마침내 신라 장수들을 모두 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오죽했으면 흠순과 품일 마저도 자신들의 아들을 죽인 계백에게 몇 차례나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삼한의 큰 손실이오.”

 

천존도 싸우는 틈틈이 계백을 회유했으나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칼만 휘둘렀다.

 

그러다가 사람과 말이 다 같이 힘이 빠졌을 때쯤 먼저 흠순의 칼에 옆구리를 찔리고

 

품일의 칼에 목이 떨어져 죽으니 자신이 죽인 두 아이들의 끝과 비슷한 최후였다.

 

계백의 5천 결사를 멸하고 황산을 장악한 뒤 김유신은 군사를 풀어 계백의 시신을 거두도록 지시했다.

 

갈 길이 바빠 촌각도 아쉬운 그였지만 같은 장수로서 계백의 충절에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촉하는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제가 아무리 무도한 왕정에 시달린다곤 해도 천년 사직의 말미에 계백과 같은 장수가 어찌 없겠는가!

 

그가 관창의 목을 베어 우리 진중으로 보낸 것은 숭고한 뜻이 있어서다.

 

내 친히 그의 시신에 절하고 충신의 죽음을 애도할 것이며 훗날 백제를 평정한 뒤엔

 

반드시 그의 묻힌 곳을 찾아내고 제대로 예를 갖춰 유택을 지어줄 것이다.”

 

신라군은 수많은 전사자들 틈에서 가까스로 계백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하여 황산벌에 가묘를 만들어 묻은 뒤에야 다시 북소리를 울리며

 

당군과 약속 장소인 은진으로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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