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2장 감성기 1

오늘의 쉼터 2014. 11. 21. 11:49

제2장 감성기 1

 

 

 

“네, 강 일환입니다.”


강 실장은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전화를 받았다.

 

“저는 S생명의 신수정입니다.”

 

목소리가 달콤했다.

 

“오성의 심 전무님께서 전화를 하셨다고 그러셨는데 혹시 전화 못 받으셨습니까?”

 

강 실장은 그제야 신수정이라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성의 심 전무가 소개할 여자가 있다며 전화를 했던 것이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 만나 뵙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저녁 약속이 늦지 않게 끝나신다면 제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끈질긴 면이 있네. 하긴 보험 하나 받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심 전무의 부탁이니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첫 부탁이기도 했다.

 

“아홉 시가 넘어야 끝날 거 같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강 실장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점점 더 매력을 느꼈다.

 

오성의 심 전무가 매력적인 여자라고 여러 차례 언급을 했다.

 

그의 말이 아니었어도 감미로운 목소리의 이 여자가 ‘과연 어떤 얼굴에 몸매를 지녔을까’

 

확인하고 싶은 유혹에 마른 침이 넘어가는 목젖이 울렁거렸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사는 삶은 사실 무료하다.

 

삶에 자잘한 변화가 없다 보니 어느 땐 허무하기도 했다.

 

런닝 머신 위에서 죽어라 달려도 그런 무료함이나 허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아무런 낙이 없었다. 집엔 아이도 없었다.

 

아내가 원하지 않았다.

 

강일환 역시 그다지 아이들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선함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만나는 게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낙이라면 낙이었다.

 

그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만나기. 스릴 만점이었다.

 

외국으로 출장을 나간다거나 접대를 하거나 접대를 받으며 가끔 다른 여자들 만나지만

 

그네들은 대부분 직업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럼, 주몽에서 뵙겠습니다.”

 

신사동에 있는 한 퓨전식 중식당이었다.

 

강일환이 가끔 다니는 곳이었다.

 

인테리어가 개방형이 아니어서 식당을 찾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강 실장은 디자인 1팀에서 가져온 신발 디자인 시안을 펼쳤다.

 

디자인 1팀은 이제 본격적으로 신발류와 의류, 액세서리 쪽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송림이 속해 있는 디자인 2팀은 전략기획부로 바뀌어 속옷을 담당하기로 내부 결정이 났다.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다는 사장의 생각이었다.

 

디자인 1팀의 신발 시안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안을 내려놓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송림이 찾아온 것이다.

 

“들여보내.”

 

송림이 문을 열고 강 실장의 방으로 들어왔다.

 

송림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했다.

 

주로 바지를 입고 회사를 다녔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짧은 청치마에 감빛의 긴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활동적으로 보였다.

 

다리는 맨살이었다.

 

“어제 수고했어.”

 

강 실장은 송림에게 자리를 권했다.

 

“모두 실장님 배려 때문이에요.”

 

“다 나 팀장이 잘 나서 그런 거니까 그런 말 하지마.”

 

강 실장은 비서에게 커피 두 잔을 부탁했다.

 

“그래 장 과장이랑 최 부장이랑 어때?”

 

“빈틈없는 사람들이었어요.”

 

비서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강 실장은 무릎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송림의 몸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자신과 연애를 할 때보다 몸이 더 성숙해 보였다.

 

강 실장은 커피 잔을 들면서 송림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할퀸 자국 같았다.


“목에 상처가 났네?”

 

“이, 이거, 장롱 모서리에 긁힌 거예요.”

 

송림이 조금 당황했다.

 

강 실장은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송림은 강 실장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했다.

 

“설마 장 과장이나 최 부장은 아닐 테고…”

 

강일환이 넘겨짚었다.

 

그게 강일환의 특기이기도 했다.

 

눈치가 빨랐고 그에 따른 대처 역시 빨랐다.

 

지금 ‘코지’의 실질적인 2인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다만 학벌이나 인맥의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맥이 좋고 학벌이 좋아도 우둔하고 눈치가 없으면 조직 생활이란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때론 우직한 성격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난 것이다.

 

조직도 빠르고 신선하고 쿨하게 움직여야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어머, 실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송림이 몸을 들썩이며 얼굴을 붉혔다.

 

“오해하지 마. 그 목에 상처를 낸 주인공이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강일환은 셔츠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여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 아주 가끔 담배를 폈다.

 

묘하게도 그 외에는 담배 맛이 별로였다.

 

강일환의 특이한 취향이었다.

 

담배연기가 느리게 피어 올랐다.

 

“제 목의 상처는 농에 긁힌 거라구요.”

 

송림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뭐라고 그랬어?”

 

강일환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막상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한 결정이야. 사내에서 불륜이라니. 하지만 나 팀장 매력은 여전해.’

 

강일환은 송림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송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중경은?”

 

“지금 생극의 공장에 내려가 있습니다.”

 

“내가 부른 건 박봉수라는 친구 때문이야.

 

그 친구가 사원들 중에 내게 가장 먼저 기획서를 올렸어.

 

원단의 비용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라던가,

 

앞으로 경제동향에 따른 소비자의 구매 심리 같은 게 김중경이 낸 기획서와 유사해.

 

중경이 보다 허술한 구석이 많긴 하지만 말야.”

 

“매우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김중경씨 아이디어를 훔치거나 그럴 사람이 아닐 겁니다.”

 

송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경이는 디자인 1팀이지?”

 

“그러게요. 두 사람은 소속된 곳도 다르고.”

 

“앞으로 중경이도 디자인 2팀으로 갈 거야.

 

디자인 1팀은 신발과 의류 쪽에 전념하게 될 거거든.

 

혹시 사내에 ‘비라’ 쪽 스파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었나?”

 

“그럼, 설마 박봉수 씨가…”

 

“모르지. 그래서 두 사람한테 은밀하게 일을 시키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체 몰라야 돼.”

 

“박봉수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성 촌놈인데다 창의력도 뛰어난 편이거든.

 

내가 직접 뽑은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겠나.”

 

송림의 눈이 생각에 잠긴 듯 초점을 잃었다.

 

평일의 늦은 저녁인데도 ‘주몽’엔 사람들이 많았다.

 

강일환은 출입문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만졌다.

 

어느 모로 보나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다.

 

초저녁 신발의 주재료인 가죽 납품업자를 만나 저녁을 먹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도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지나 있었다.

 

‘내가 궁한 게 아니니까.’

 

강일환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앞이마 쪽으로 끌어내렸다.

 

거울 속의 강일환은 터프해 보였다.

 

“강일환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강일환이 카운터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예약이 되어 있군요. 다른 분께선 먼저 와 계시는군요. 저를 따라오시죠.”

 

허리까지 터진 중국식 복장을 입은 여 종업원이 강일환을 2층으로 안내했다.

 

두 시간 전에 신발에 쓰일 가죽 납품 업자와 더운 사케를 한 병 정도 마신 터라 적당히 흥겨웠다.

 

2층 내부는 미로처럼 꾸며져 있었다.

 

군데군데 룸이 있었다. 룸은 출입문이 없는 데도 지나가는 사람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

 

강일환이 ‘주몽’을 찾는 데엔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보리 빛의 캐쥬얼한 정장을 입은 신수정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강일환을 맞이했다.

 

“코지의 강일환입니다.”

 

신수정이 강일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강일환은 내숭 떠는 여자들은 질색을 했다.

 

그런 면에서 신수정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인 듯했다.

 

강일환이 자리에 앉자 신수정이 벨을 눌렀다.

 

“여기 조개요리가 일품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신수정의 목소리엔 아주 약하게 비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저도 가끔 여길 오는데 좋습니다.”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강일환은 신수정의 요모조모를 살폈다.

 

오성의 심 전무가 극찬할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다.

 

강일환의 눈에 짙은 눈썹, 약간 위로 들린 코, 적당히 올라온 광대뼈와 조금 벌어진 입이 보였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닌데 한군데 어울려 있다 보니 묘한 매력을 풍겼다.

 

키도 큰 편이었고 민 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팔뚝이 탄탄했다.

 

강일환은 그녀가 자신을 철저하게 가꾸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괜한 말씀이십니다.

 

심 전무님 덕에 미인이랑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어 되려 제가 영광입니다.”

 

강일환은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과찬이시군요.”

 

그녀도 미소로 답했다. 빼갈과 조개무침이라는 요리가 들어왔다.

 

‘보험을 팔고 다니기엔 너무 매력적인 여자다.’

 

강일환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수저를 놓는 폼이나 무심한 듯 강일환을 쳐다보는 눈빛이 매혹적이었다.

 

‘잘 엮어봐?’

 

강일환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긴장이 되었다.

 

갑자기 입안이 마르는 듯했다.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미남이시네요.”

 

그녀가 빼갈이 담긴 술주전자를 들며 말했다.

 

주전자를 든 그녀의 손가락이 길고 매끈했다.

 

강일환은 문득 그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한 술이라 그런지 네 잔을 연거푸 마시자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드셔보세요.”

 

신수정은 조개 껍질 속에서 조갯살을 떼어내 강일환의 접시에 옮겨주었다.

 

어떤 목적이 있어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진 않았다.

 

“왜 남자들은 여성의 성기를 조개로 표현하나 모르겠어요.”

 

술기운을 빌었겠지만 그녀는 아무 여자나 하기 힘든 농을 풀고 있었다.

 

강일환은 적극적이고 솔직한 여자를 좋아했다.

 

송림 역시 적극적이고 솔직한 편이었다.

 

“정말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강일환은 젓가락으로 조갯살을 집어 입에 넣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지 않고 강일환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당연히 알죠, 강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려던 겁니다.”

 

“제 생각이라고 해서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벌어지고 부드럽고 맛있고 뭐 그런 이유 때문에…”

 

그녀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보조개가 피었는데 보조개 주변이 홍조를 띄었다.

 

강일환은 가슴이 간질거렸다.

 

간혹 후배나 동창들의 부탁으로 생활설계사를 하는 여자들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무적인 관계 이상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네들은 만나자마자 보험 얘기부터 먼저 꺼냈는데 신수정은 달랐다.

 

“다른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 거 모르시죠?”

 

“그게 뭐죠?”

 

“조개는 익혀야 벌어진다는 거죠.”

 

강일환의 얼굴이 후끈거렸다.

 

분위기를 잘 맞추어주면 다리를 벌리겠다는 말처럼 들린 때문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신수정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뭐가 우스워요?”

 

“이상한 쪽으로만 상상하시니까 얼굴이 붉어지죠.”

 

그녀의 말이 그녀의 모습보다 더 강일환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상상을 하도록 유도 하시는군요.”

 

강일환은 메추리알 만한 빼갈 잔을 들어 술을 털어 넣었다.

 

빼갈은 ?은 시간 빨리 취해 좋지만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서 올라오는 독기가

 

가끔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신수정도 보조를 맞추어 잔을 들고는 고개를 돌려 마셨다.

 

“정말 술을 잘 하시는군요.”

 

“전에는 전혀 술을 못했어요.

 

먹고 살려가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데 술을 배운 뒤로 알게 된 건데

 

제가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인 줄 늦게 알았다는 겁니다.”

 

그녀가 웃었다. 붉어진 입술이 천장에서 내려온 조명 빛에 번들거렸다.

 

그녀는 열심히 강일환의 접시에 조갯살을 올려놓았다.

 

같이 들어오는 짬뽕 국물도 국자로 떠서 강일환이 먹기 좋게 놓아주었다.

 

그녀는 아내처럼 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나요?”

 

강일환은 순간 그녀가 많은 남자를 만나고 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 실장님, 저 아무 남자에게나 친절하지 않습니다.

 

실장님도 아무 여자에게나 친절하지 않잖습니까?”

 

신수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황진이는 눈을 찡그리는 것까지 예쁘다고 했는데 신수정이 그랬다.

 

여러모로 아내와도 비교가 되었다.

 

아내는 편하고 익숙하면서도 농염하다면 신수정은 신선하면서 농염했다.

 

그녀가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묘하긴 하지만 강일환은 이렇게 신선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술 주전자가 새로 들어왔다.

 

신수정은 안주로 맵게 요리한 닭을 주문했다.

 

음식을 먹는 취향도 강일환과 비슷했다.


“취향이 저랑 비슷합니다.”

 

강일환은 긴장이 많이 풀어져 그녀 대하기가 편했다.

 

“혹시 면 종류 좋아하지 않으세요? 라면 말고 국수나 냉면, 메밀 같은 거.”

 

“수정씨도 면류를 좋아합니까?”

 

강일환이 반갑게 말했다.

 

“저 정말 면 종류를 좋아해요.

 

실장님 저랑 비슷한 체질이신가 봐요.”

 

강일환은 문득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는 면 종류라면 기겁을 했다.

 

같이 면 종류의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공통점이 있다는 건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이 집도 면 종류를 잘하지만 저희 회사 쪽에 냉면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거기서 만나 뵙고 싶군요.”

 

강일환은 괜히 신명이 났다.

 

송림과 헤어진 뒤 오랜만에 신선한 미인을 만난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로 취향도 비슷했다.

 

독한 술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강일환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언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낼 건가?’

 

강일환은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실은 실장님 만나서 무슨 얘기부터 꺼낼까 고민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편하네요.”

 

“저 역시 편합니다.”

 

강일환은 그녀와 줄을 잡은 채 밀고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쪽도 강하게 그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실은 실장님께 보험 부탁하러 왔지만 그만둘래요.”

 

‘목적을 버리겠다?’

 

강일환은 그녀의 마음이 짐작가지 않았다.

 

“실장님을 안 것만으로도 전 충분해요.”

 

“그럼 심 전무에게 뭐하러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셨습니까?”

 

“실장님 같은 분을 만나면서 일 때문이라는 게 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네요.”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뒤에 가려진 그늘이 서서히 강일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씩 그녀에게 쏠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쿨하게, 쿨하게……’

 

“실은 코지에 계신 분하고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강일환은 그녀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나갈 것만 같아 조바심이 일었다.

 

“코지에 대학 동창이 있거든요. 매우 친하게 지냈어요,”

 

강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상하는 게 싫다는 말이었다.

 

“박봉수라고 하는데 1년 조금 지났을 텐데 아실 지 모르겠어요.”

 

“잘 압니다. 그럼 신수정 씨도 미대를 졸업했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삶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미대를 졸업해서 보험을 팔러 다닌다.’

 

강일환은 심 전무가 입버릇처럼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을 만날 때 정으로 배팅을 하면 안돼.

 

십중팔구 풍파가 일어나기 마련이지.

 

반드시 돈으로 배팅을 해야 돼. 그래야 후환이 없는 법이야. 후환이.’

 

강일환은 송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쿨했다.

 

뒤끝이 없었으니까.

 

왠지 모르게 수렁 속으로 한발 빠진 거 같아 강일환은 마음이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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