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1장 발정기 11

오늘의 쉼터 2014. 11. 20. 15:31

제1장 발정기 11

 

 

 

송림이 회사 기획실장실에 도착해 보니 중경도 나와 있었다.

 

중경도 의아한 눈으로 송림을 바라보았다.

 

강 실장은 직접 커피를 타서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그리곤 그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 가이아 프리젠테이션 진행해 보겠어?”

 

강 실장이 중경을 바라보았다.

 

중경은 그의 말에 놀라면서도 송림의 눈치를 봤다.

 

“기획실에서 진행을 하는 게 아니던가요?”

 

“자네도 디자인 팀에서 기획을 담당했잖아.”

 

“그야 그렇지만…”

 

중경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송림은 강 실장과 중경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디자인 1팀이나 2팀이나 디자이너 출신들이 얼마나 돼?

 

디자인 전공자 3명에 서양화 전공자 1명 나머지는 다른 전공자들이잖아.”

 

중경이나 송림 역시 그 점에 있어서 회사의 방침을 궁금해했다.

 

중경만 보더라도 일류대를 졸업하긴 했지만 그의 전공은 경영학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전공자들을 디자인 팀에 배속시킨 건 지 궁금하다는 표정들이군.

 

경영학과 출신이 한명 있고 국문학과 하나, 물리학과 하나, 사학과 출신이 하나 그렇지.”

 

강 실장이 커피포트를 들어 잔에 커피를 따랐다.

 

중경과 송림의 잔에도 커피를 채웠다.

 

“무엇을 어떻게 팔아먹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야. 그런 관점에서 직원들을 뽑은 거니까

 

전공은 상관없지. 이번 신입들 예년과 달리 좋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왔어.

 

불경기 탓이지만 경기가 호전되면 자네 같은 인재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올까?”

 

강 실장이 잠깐 송림을 바라보았다.

 

송림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래도 궁금했다.

 

위로 쟁쟁한 선배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송림 역시 궁금한 눈치였다.

 

“나 팀장하고 상의해서 잘 진행 시켜봐.

 

도대체 가이아 속을 모르겠단 말야.

 

속옷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전문 매장으로 한 층을 할애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중경은 가슴이 뜨끔했다.

 

해수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이미 ‘가이아’를 상대로 시작된 건 아니지만 ‘가이아’가 원하는 제품의 생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역시 중경이나 송림으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중저가 브랜드를 만드는 일, 젊은 사장은 반대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디자인도 송림이 있는 디자인 2팀에 맡겨졌다.

 

보통 디자인 1팀과 동시에 진행되던 때와는 다른 경우였다.

 

“가이아가 현재 전국에 몇 개나 있지?”

 

“이번에 오픈한 대구까지 합하면 모두 9갭니다.”

 

송림이 대답했다. 중경은 해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계약만 이루어지면 ‘비라’를 따돌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비라’는 속옷으로 출발해 지금은 건설업은 물론 금융업에도

 

그 사업 영역을 확장한 신흥 대기업이었다.

 

항간에는 정치인들의 후광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비라’와 상대를 해야 했다.

 

비록 한 백화점에 속옷을 납품하는 작은 프로젝트이지만

 

뭔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상이었다.

 

“굳이 오늘 내가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이건 회사 내부에서조차 비밀로 하기로 했거든.

 

내가 굳이 자네를 택한 건 학교 후배이기 때문만은 아냐.

 

그 기획력을 높이 산 거야.

 

그리고 나 팀장, 코지의 디자이너로 확실하게 발판을 한번 굳혀 봐.

 

나 실망시키는 일 없겠지? 대외적으로 우린 ‘가이아’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지 않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접대비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써.”

 

‘코지’의 신상품이 ‘비라’에서 나온 걸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코지’ 내부에 우습지만 ‘비라’의 스파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중경과 송림은 강 실장의 속내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중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인생에 세 번 온다는 기회 중에 그 첫 번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대? 생전 접대를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중경은 경복궁이라는 전통 한식집에 앉아 ‘가이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팀장은 어떻게 된 거야?”

 

중경은 조바심이 났다. ‘가이아’ 사람들보다는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의류 구매를 담당하는 장 과장은 그야말로 호걸이야,

 

뜻만 맞으면 간이라도 빼주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접대하기 더 까다로울 거야.

 

그리고 총괄 구매 담당인 최 부장은 원칙적인 사람이야.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지.

 

그래도 일을 처리할 때는 원칙을 먼저 내세우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말들은 안 하지만 다른 속옷 업체들도 이미 다들 만나고 갔을 거야.’

 

중경은 해수가 전해 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이아’는 9월을 기점으로 을지로에 예전의 두 배 크기에 가까운 백화점을 오픈한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가이아’ 백화점 모두의 한 층을 속옷 전문점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중경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림이었다.

 

“좀 늦었죠?”

 

중경은 송림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이 부셨다.

 

그녀는 자주 빛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허벅지 부근이 손바닥 길이만큼 터진 치마였다.

 

게다가 치마는 비단처럼 야들야들한 느낌을 주었다.

 

피부에 착 달라붙어 그녀의 몸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이리로 앉죠.”

 

중경은 문을 등지고 있는 자리를 그녀에게 권했다.

 

그녀는 회사에서 볼 때완 판이하게 달랐다.

 

늘 묶여 있던 머리도 풀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곁에 앉자 향긋한 냄새가 중경의 코를 파고들었다.

 

“미장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송림은 중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말했다.

 

그녀도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한 듯했다.

 

“나 팀장한테 이런 매력이 있다는 거 처음 알았습니다.”

 

중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 신경을 쓰긴 했는데 평소에도 이래요.”

 

송림이 중경을 잠깐 쳐다보곤 살짝 웃었다.

 

엷게 화장한 얼굴에 번진 미소가 중경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올릴 때 ‘가이아’의 장 과장과 최 부장이 들어왔다.

 

그들은 두 사람과 악수를 한 뒤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코지에 이렇게 미인이신 디자이너가 있다니 그 회사 남자 사원들이 즐겁겠습니다.”

 

장 과장이 중경을 바라보며 송림에 대해 칭찬을 했다.

 

“별 말씀을 다하세요. 코지 여사원 중에 제가 가장 못났어요.”

 

송림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 과장과 최 부장은 송림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오늘 송림은 수수하면서도 섹시하고 차분해 보이면서도 요염했다.

 

한정식이 나오고 반주로 국화주가 나왔다.

 

송림은 결심이라도 하고 나온 듯 장 과장과 최 부장에게 술을 따랐다.

 

그때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술을 따랐는데

 

살짝 살짝 그녀의 흰 허벅지가 방안의 전등불에 빛났다.

 

중경은 강 부장이 송림을 내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송림은 어느 자리든 휘어잡을 수 있는 매력을 타고났던 것이다.


“아시겠지만 ‘비라’는 물론 다른 업체 분들과도 이미 저녁 자리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들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건

 

우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일을 담당할 사람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송림은 최 부장과 장 과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일종의 면접인 셈이었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최 부장은 말하는 사이 사이에 송림을 의미있게 쳐다봤다.

 

“다른 업체가 어디 어디인지는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송림이 장 과장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실은 저희 쪽에선 두 분과 누가 만나는지 사장님도 모르십니다.

 

다른 업체들이야 누가 두 분을 만났을 지 알만하거든요.”

 

“뭐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나요?

 

속옷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장 과장이 잔을 들며 능글맞게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송림이 벽에 붙어 있는 벨을 눌렀다.

 

최 부장과 장 과장은 잠시 밥상을 둘러보았다.

 

전혀 부족한 게 없었다.

 

잠시 후 여종업원이 두 개의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그 쇼핑백을 보고 최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뭡니까?”

 

최 부장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반면 장 과장은 담담하게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우리 ‘가이아’는 이런 거 받지 않는다는 거 알고 계시겠지요?”

 

최 부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가득 찼다.

 

“그래서 제가 먼저 오해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이건 저희가 이번에 생산한 속옷입니다.

 

세 벌씩 들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는 장 과장님 사모님 싸이즈에 맞게 준비를 했고

 

또 하나는 최 부장님 사모님 싸이즈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희도 ‘가이아’가 일에 있어서 만큼은 원칙적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중경도 거들고 나섰다.

 

“제 말은 그러니까 일단 두 분 사모님들께서 먼저 입어 보셨으면 해서 드리는 겁니다.”

 

굳어졌던 최 부장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아니 우리 집 사람 싸이즈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 마누라는 좀 뚱뚱한데.”

 

“장 과장님도 참, 대학 시절 사모님께서 무용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두 아드님을 두시고도 처녀 시절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계시다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내부에 스파이가?”

 

장 과장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최 부장님 사모님도 한 몸매 하신다는 거 이미 파악이 됐습니다.”

 

최 부장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송림이 장 과장과 최 부장 뒤쪽으로 쇼핑백을 들고 갔다.

 

“바뀌시면 안됩니다. 조금씩 싸이즈가 다르니까요.”

 

장 과장과 최 부장이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송림을 바라보았다.

 

중경은 그런 송림을 보자 괜한 질투가 일었다.

 

두 남자가 송림의 자태를 훔쳐 보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두 사람에게 술을 따랐다.

 

“저희가 이번에 개발한 속옷에 대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분 사모님들께서 입어보시고 만약 불만족스럽다면

 

저희는 이번 공개 프리젠테이션에서 빠지겠습니다.”


중경이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계산이 되어 있었다.


“나 선배가 했어요?”

 

중경은 뒤에 서 있는 송림을 바라보았다.

 

장 과장과 최 부장은 이미 출입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

 

“아뇨.”

 

“우리 계산 누가 했습니까?”

 

중경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먼저 나가신 분이 하셨는데요.”

 

중경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계산은 저희가 해야 도리인데요.”

 

“아닙니다.

 

저희가 즐겁게 먹고 저희가 즐겁게 놀았는데 어떻게 계산을 그 쪽에서 하시게 합니까.”

 

최 부장이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는 못 보내 드립니다.”

 

중경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송림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다른 업체들과의 저녁 식사 약속에서도 우리가 모두 계산을 했으니

 

괜한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장 과장이 엉거주춤 서있는 중경을 바라보았다.

 

“저는 예의 없이 자란 놈이 아닙니다.

 

제가 사회의 선배님들에게 밥과 술을 얻어 먹었으니

 

제가 2차 대접을 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돌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1차면 됩니다.”

 

장 과장이 손사래를 쳤다.

 

“안됩니다.

 

일하고는 관계없이 제가 두 분을 존경하게 되었으니 꼭 술을 사야겠습니다.”

 

“허어, 참. 미스터 김의 뜻을 충분히 알았다니까요?”

 

송림이 중경에게 다가가려 하자

 

중경이 손을 들어 송림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저를 그냥 후배로 생각하시고 제게 술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접대하는 차원에서 술을 사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회사 돈을 쓸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제 사비를 들여 두 분 선배님께 술을 한잔 사고 싶을 뿐입니다.”

 

최 부장이 장 과장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두 분을 만나러 나올 때부터 법인 카드 같은 건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하고 더 이상 여자 속옷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술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장 과장이 송림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김을 뜻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마신 걸로 하겠습니다.”

 

최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 우리 한잔 더해요, 네?”

 

송림은 장 과장과 최 부장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팔짱을 꼈다.

 

“허어, 참.”

 

최 부장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저희가 술을 한잔 사야 공평한 게 되잖아요.”

 

송림은 목소리에 비음을 섞으며 애교를 부렸다.

 

누구라도 그 애교에 넘어갈 듯 그녀의 목소리는 간드러졌다.

 

“그래, 까짓 거 우리가 코지의 미인계에 넘어간 거다. 단 일과는 무관!”

 

최 부장이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 엑센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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