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발정기 9
송림은 초조한 눈길로 창 밖을 내다봤다.
멀리 중경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경은 커피숍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송림에게 다가왔다.
“준비해 오셨습니까?”
송림은 두 사람의 만남이 꼭 스파이들의 접선처럼 여겨졌다.
“정말 괜찮을까요?”
송림은 걱정스럽게 말하며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쇼핑백 안엔 송림이 4일을 입은 속옷이 들어 있었다.
“그 놈이 말한 대로 틀림없이 입었던 거지요?”
“실은 4일 밖에 입지 않았어요. 한 속옷을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입고 지내요.”
송림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중경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뭐 그 정도면 괜찮겠죠.”
“정말 중경씨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 나 선배가 혼자 가겠습니까?”
중경이 쇼핑백을 챙겼다.
“직접 전달해 준다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가요?”
“한동안 대답이 없었어요.
그러다 흔쾌히 그런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어떤 차림으로 나온다고 했습니까?”
송림은 ‘강쇠’라는 아이디의 남자가 입고 나올 옷차림에 대해 설명했다.
“… 검정색 모자에 파란 셔츠 그리고 신발은 흰색 나이키 농구화를 신었다고…”
“제가 같이 갈까요?”
송림은 왠지 조바심이 났다.
이런 경험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깨끗이 끝날 수 있는 일을 괜히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요,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송림은 ‘강쇠’라는 아이디의 남자를 만나는 일도 일이지만
그 일을 중경과 상의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선배, 나 치사한 놈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영원히 묻고 갑니다.”
중경은 눈치가 빨랐다.
또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래도 분명한 건 ‘강쇠’가 보내준
나일론 함유량에 의해 만든 제품이 복원력에 있어 약간 떨어지는 감이 없진 않지만
촉감이나 부드러움이 기존의 햄원단보다 탁월했다.
송림은 중경의 뒤를 따랐다. 커피숍 앞에 세워놓았던 그의 차에 올라탔다.
소형 RV 차였다.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새차 냄새가 났다.
송림은 중경의 매끈한 옆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도 중경씨를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게요.”
“조만간에 정말 도움을 청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중경은 차를 경복궁으로 몰고 갔다.
경복궁 지하역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사람 참 취미가 별나죠?”
“다 외국 영화 때문입니다.
정신병자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요?”
“나 선배를 무척 흠모하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송림은 잠깐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피스텔의 젊은 수위, 오피스텔 앞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같은 층에 사는 머리 긴 남자….
하지만 도무지 ‘강쇠’라는 아이디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앞으론 사이버 상에서 사람을 함부로 만나지도 거래하지도 마세요.
모두 나쁜 놈은 아니지만…. 간혹 극악한 놈들도 있으니까요.”
송림은 안전벨트를 힘주어 잡았다.
송림은 쇼핑백을 들고 계단으로 내려섰다.
그녀는 계속해서 중경의 발걸음에 신경을 썼다.
‘강쇠’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적잖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5번 출구 쪽에 서 있는다고 했는데.’
송림은 5번 출구 쪽을 살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강쇠’가 말한 차림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송림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려면 5분이 남아 있었다.
송림이 쇼핑백을 가슴에 안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다가왔다.
“진짜로 나왔군.”
송림이 돌아보려 하자 남자의 거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생각보다 대범한데.”
송림이 다시 돌아서려 하자 그의 손이 완강하게 막았다.
“나를 가지고 놀리지 마. 네가 가르쳐 준 건 이미 논문으로 발표된 것들이니까.”
“허, 그걸 이제야 알았어?”
그때 중경이 다가와 남자의 팔을 꺾었다.
“변태 새끼!”
송림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짙은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중경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기려 하자 남자가 격렬하게 반항했다.
사람들도 하나 둘 지나가는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송림은 난처했다.
중경도 주춤한 사이 남자가 팔을 빼내고 계단 위로 달아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송림의 쇼핑백을 챙겨 도망갔다.
“모자 쓰고 선글라스를 썼지만 왠지 되게 낯이 익은데요.”
송림은 남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참 이상하네요. 저도 낯이 익은데…. 설마 우리 회사 사람?”
송림은 섬뜩했다.
“설마….”
“만약 그렇다면 이제 오히려 더 안심입니다.
저 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이런 짓 안할 테니까요.”
“정말 우리 회사 사람이라면 끔찍하네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경이 자연스럽게 송림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이끌었다.
중경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남자들 열에 다섯쯤은 여자 속옷에 관심을 가져요.
실은 저도 사춘기 때 옆집 여대생의 속옷을 어떻게 한번 훔쳐볼까 했었으니까요.”
“정말이에요?”
송림이 중경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안 그럽니다. 사춘기 때 그랬다는 거니까.”
“남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여자들도 때론 알다가 모를 일입니다.”
중경은 해수 생각이 나서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여자들은 남자 속옷에 관심을 안 갖거든요.”
“그런 말이 아니라….”
중경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쨌든 이 일로 깨끗하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송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중경의 옆얼굴을 오랫동안 뜯어 봤다.
“사내 게시판에 평점 붙은 거 봤냐?”
진국이 봉수에게 자동판매기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내용도 다 봤어.”
“사내 인터넷에 올라 왔어?”
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머리 좋은 놈은 뭔가 달라도 달라 그렇지 않냐?”
진국의 말에 봉수는 시선을 창 밖으로 보냈다.
‘가스나’와 독점계약을 맺고 있는 공장에 대해 중경이 알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무 것도 아냐.”
“나 팀장도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머리도 폼으로 달린 건 아닌 모양이야.”
아이디어 기획안의 최고 평점은 중경이었고 그 다음이 송림이었다.
그 아이디어 평점으로 하반기 보너스의 금액이 정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달 보너스로 10만원이나 받을까 몰라.”
진국이 투덜댔다.
“나 선배가 발표한 아이디어 옛날에 네가 얘기했던 거 아니냐?”
“나, 나야. 뭐 그냥 막연하게 나일론이 조금 다르게 섞으면 어떨까 하는 정도였지.
나 팀장처럼 정확하게 몇 퍼센트를 섞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몰랐어.”
진국이 중간중간 말을 더듬거렸다.
봉수는 진국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때 중경이 기획실장과 함께 곁을 지나갔다.
진국은 뻣뻣하게 세웠던 허리를 굽혀 기획실장에게 인사를 했다.
“저 놈이 가장 먼저 대리를 달겠어.”
진국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중경이 마치 진국의 말이라도 들은 듯 잠깐 뒤돌아보았다.
진국이 입을 막았다.
하지만 봉수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 오후에 시간 있냐?”
“술 한잔 하게?”
“아니, 나 음성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같이 좀 가자.”
“음성?”
“거기 공장이 하나 있거든.”
“차 빌려줄게 그냥 혼자 다녀와라.
토요일 날 일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퇴근하고 거기까지 가야겠냐.”
진국이 투덜거렸다.
“너 자꾸 그럴래. 너 때문에 나 아직도 운전 못 하잖아.”
진국은 폭주 스타일이었다.
아무 곳에서나 유턴하고 중앙선 침범에 횡단보도 점유, 주차 위반 등등 벌점이 많았다.
결국 운전할 수 있는 벌점이 꽉 차 진국이 저지른 교통위반 벌점을 봉수가 대신 받아
아직도 무면허 기간이었다.
“아, 아직 안 끝났냐?”
“대신 지난번에 만났던 여대생들이랑 드라이브 삼아 다녀오자.”
봉수는 슬슬 진국을 달랬다.
여자가 있어야 온순하게 운전하는 때문이기도 했다.
“그 애들 말이지.”
“애들인가? 대학생인데.”
“좋지. 가자. 회사 앞으로 오기로 했냐?”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친구랑 같이 놀러온다고.”
“너 보기보다 재주 좋다.”
진국이 언제 주눅이 들었냐는 듯 히죽거렸다.
봉수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산과 들은 이제 한 여름의 녹음으로 푸르렀다.
“음성에 들렸다가 우리 동해로 빠지자.”
진국이 봉수와 송화 그리고 그녀의 친구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신명이 가득했다.
“좋아요.”
송화와 그녀의 친구는 박수까지 치며 깔깔거렸다.
봉수도 아이디어건만 빼놓으면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대학을 졸업한 뒤 사실상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명절 때나 경주에 내려가는 게 전부였는데
그때마다 사람들과 차에 치여 고향에 간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논 팔고 밭 팔아 대학을 보내 놓았는데 그림이나 그린다고 룸펜처럼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여행은 봉수에게 사치였던 것이다.
봉수에게 취직은 그러니까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었다.
“거기 가는 거죠?”
“알아?”
송화는 봉수가 가려는 곳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래 봬도 눈치가 백단입니다.”
송화가 더없이 순수해 보였다.
그녀는 봉수가 불러준 별명 그대로 크림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나이에 요염하기까지 했다.
‘저 순수함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봉수는 괜히 걱정이 되었다.
더 깊이 알게 되고 혹시라도 사랑하게 되고 후에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봉수의 집안에 대해 실망을 할 것이다.
전셋집조차 마련해 주지 못하는 집안에 시집올 여자가 몇이나 될까 싶었다.
‘송화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3년 반. 서울에서 전셋집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했다.
그녀와 결혼은커녕 사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송화의 친구와 진국은 속옷에 관해 이야기하며 서로 낄낄거렸다.
“만나면 만날수록 도통 속을 모르겠어.”
“누구?”
“누군 누구야, 오빠 말야.”
송화가 봉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짧은치마에 민 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나도 널 모르겠다.”
“내 속을 다 봐놓고 나를 모르겠다구요?”
진국과 송화의 친구는 자기들 얘기를 하느라 뒷좌석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너도 나를 다 보구서 모르겠단 말야?”
“피장파장이네.”
송화가 봉수의 팔짱을 꼈다.
당돌하고 순수하고 요염한 아이.
봉수는 그 당돌함과 순수함과 요염함을 지켜주기에 자신이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일죽 I.C로 접어들었다.
“생극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가면 돼.”
“생극? 동네 이름이 정말 재밌네요.”
송화의 친구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래도 생극이라는 동네는 명당 많기로 이름난 곳이야.”
“명당이라… 내 명당은…”
송화의 손이 슬금슬금 기어 봉수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진국과 송화의 친구는 그런 송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됐어?”
공장 정문 밖에서 기다리던 진국이 차에서 나오며 물었다.
“다녀간 사람에 대해 말해줄 수 없대.”
봉수는 공장을 돌아다보았다. 제법 규모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중경이 그 놈이 다녀갔을까?”
“그랬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 ‘가스나’ 얘기를 꺼내니까 할 말이 없다고 하더라.”
“중경이 놈 아이디어엔 가스나랑 이 공장이 독점계약을 파기했을 때
발생할 배상금까지 계산에 넣었을 거야.”
진국도 공장을 바라보았다.
“작은 업체들 갈아먹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뭘.
돈 된다면 콩나물이며 두부 장사도 하는 게 대 기업들이잖아.”
진국이 툴툴거릴 때 송화와 그녀의 친구도 차에서 나왔다.
“코지도 의류업계에선 대기업 아닌가요?”
“대기업이지. 신발에다가 구두, 정장, 액세서리 안 하는 게 없으니까.
코지도 돈만 되면 작은 의류업체들 파리채로 파리 잡듯 죽이는 회사지.”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그렇게 말해요?”
송화의 친구가 빈정대듯 말했다.
“뭐가 어때서? ‘코지’도 욕먹을 땐 먹어야지. 그리고 평생 다닐 데도 아닌데.”
“오빤 애사심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 같아.”
송화의 친구가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애사심? 사원들을 기계 부속쯤으로 아는 회사에 무슨 애사심.”
“전부다 그런 생각을 하나요?”
봉수와 송화는 두 사람의 무의미한 논쟁을 듣기만 했다.
“전부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어 있어.
우리 같은 놈들 잘해야 이사쯤 할 수 있겠지.
그래봐야 월급쟁이고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그 고비가 얼마나 많겠어.
우리 회산 벌써 5년만 넘으면 정리해고 대상에 올라가.”
“정말이에요?”
“너희들은 아직 학생이라 잘 모를 거다. 사회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진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만하고 동해나 가자.”
봉수가 두 사람을 차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왜 우리 오빠만 운전을 해요?”
송화의 친구가 봉수를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그, 그건 말야.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야.”
진국이 서둘러 무마하려고 했다.
“설마 아직 운전면허가 없는 건 아닐 테고….”
봉수는 그저 듣고 웃기만 했다.
차가 출발했다.
봉수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중경이 다녀간 듯한데 중경뿐만 아니라 회사의 고위 간부도 다녀간 인상이었다.
그런데 봉수가 ‘가스나’를 통해 공장을 소개받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겠지.
가스나 주인이 나 모르게 회사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공장 독점계약을 포기하기로? 얼마를 받았을까?’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오빠, 계속해서 딴 생각할래?”
송화의 손이 봉수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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