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발정기 7
송림은 개발실로 들어섰다.
“어때요?”
송림은 개발실 팀장을 바라보았다.
“나일론을 7% 더 넣은 건데 신축력이나 촉감 차이가 상당한데.”
팀장이 원단을 잡아당겨 보았다.
“나 팀장 출신이 화학관가?”
“아니에요. 디자인 전공했잖아요.”
“그런데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연구 좀 했죠.”
“다 좋은 데 문제는 조직력이야.
실험을 더 해봐야 알겠지만 조직력이라는 건 입고 나서
벗었을 때 얼마나 원상태로 복원이 되느냐거든.
어쨌든 신축력과 촉감이 아주 월등해.
햄 원단처럼 봉제 없이 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개발실 팀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송림은 괜히 머쓱해졌다.
개발실 팀장의 말로 추리해 보면 ‘강쇠’라는 남자는
화학 쪽에 대단히 박식하거나 그쪽 개통의 일을 하는 사람인 듯했다.
“샘플 하나 만들었는데 직접 입어 보겠어?”
팀장이 송림의 아래 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실 샘플 나 팀장 몸매를 생각해서 만들었거든.”
송림은 안경 속에서 번득이는 개발실 팀장의 눈길을 외면했다.
평소에도 능글맞은 사람이었다.
휴게실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직원들의 엉덩이를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마주 선 여자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그럴게요.”
“우리가 지난번에 만든 섹시스타일 V5 모델이야.”
송림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샘플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연구실 직원들이 그와 송림을 바라보았다.
송림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송림은 그가 건넨 속옷을 나꿔채듯 들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런 송림의 뒷모습을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송림은 디자인실로 종종걸음을 쳤다.
디자인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막 꺾었을 때
강 실장과 사장이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송림은 그대로 멈춰섰다.
두 사람이 송림의 출현을 보곤 서로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섰다.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안녕하세요.”
“어, 나 팀장 연구실 다녀오는 모양이지?”
강 실장이 송림의 손에 들린 속옷을 바라보았다.
“아, 네.”
송림은 가능한 강 실장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요즘 나 팀장이 가장 열심이라는데….”
젊은 사장도 송림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친구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소문일 뿐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 그럼 일은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두 사람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서로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사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차 한잔 어때?”
송림은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송림은 속옷을 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요즘 어때?”
회사 맞은편 지하의 지하 카페에 송림과 강 실장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냥 그렇죠, 뭘.”
송림은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요즘 우리 집 사람이 궁금해하던데.”
그가 냉커피 속의 얼음을 건져 와드득 씹어먹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언니 얼굴을 못 보겠어요.”
송림은 차갑게 말했다.
“아직도 나한테 감정이 남아 있나?”
그 역시 차갑게 대꾸했다.
‘회사를 그만 둬야 하나?’
송림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 팀장 쿨한 줄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송림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미워야 하는데 밉지가 않았다. 그의 눈이 보였다.
차갑고 서늘하고 축축한 눈. 송림이 그에게 반한 건 그의 눈 때문이었다.
알몸으로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늘 송림의 등을 보고 끌어안기를 좋아했다.
그 자세로 한 몸이 되면 송림은 배에 통증을 느끼곤 했다.
그저 그에게 몸을 맡긴 채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그 대가로 팀장이 된 건지도 몰랐다. 송림은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자신의 몸이 주책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냉정해야 해. 그래야 살아남지.”
그는 잔을 들어 서서히 커피를 마셨다.
송림도 몸이 뜨거워 잔을 들었다.
차가운 커피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뜨거운 기운들이 잦아들었다.
“죄송해요.”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 네 자신한테 미안한 거니까.”
송림은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했나 싶었다.
왜 자신이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별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그만 일어날게요.”
“내가 옛 일이나 회상하자고 나 팀장을 여기까지 부른 거 아냐.
어쨌든 오랜만에 둘이만 있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고,
이번 주말에 영국에서 바이어들이 오는데 나 팀장이 좀 맡아 줬으면 해서.
사장님도 나 팀장이 맡아줬으면 하던데….”
송림은 의아했다.
“그런 일 기획실에서 담당하는 게 아닌가요?”
“실무에 밝은 사람을 원해. 그리고 나 팀장 외국어 실력이야 다들 알잖아.”
송림은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뭐 특별하게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금요일에 옷이나 좀 섹시하게 입고 나오면 돼.”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이야기라면 회사에서 해도 될 일이었다.
송림은 그가 카페까지 끌고 온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얘긴가?’
송림은 반듯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군살이 한 점도 없는 남자였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남자라고 단념했는데
왜 아직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머잖아 영국에 우리 지사를 낼 거야. 염두에 두고 있어.”
그는 카페를 나설 때 송림을 잠깐 쳐다보며 말했다.
송림은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젠가 그에게 영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고마워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나 팀장 실력을 인정해서 그러는 거니까.”
“넌 뭐 좀 건졌어?”
봉수가 진국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건질 게 뭐 있냐?
다 거기서 거기지.
그건 그렇고 ‘비라’ 그 신상품 말이야.
우리 기획실에서 흘러나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봉수는 금시초문이었다.
‘동대문에선 이미 만들어서 파는 건데….’
봉수는 ‘가스나’에서 본 사실들에 대해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만들고 있는 기획서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회사의 방침과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뭔가 내야지.”
“나는 사실 ‘비라’의 그 신상품은 별로야.
여자들의 선호도가 더 중요한 거 아니냐?
다음 달부터 남자 속옷도 개발에 들어간다는 데 남자 속옷 역시 여자들의 선호도로
개발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 이제는 색으로 승부를 해야 돼.”
그 점은 봉수도 역시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몸을 허락한 듯 하면서도 강하게 거부하는 듯한 인상의 색상.
봉수는 그 색으로 능소화 꽃잎의 색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며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여기저기 원탁의 양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떠들어댔다.
봉수도 진국과 잔을 부딪히고 술을 털어 넣었다.
“양주 백날 먹어봐도 소주가 최고다.”
진국이 잔을 내려놓으며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여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봉수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그 쪽으로 향했다.
그들 중에 크림이 있었다.
“오빠!”
크림이 반갑게 다가왔다.
“어쩐 일이야?”
“그냥 친구들이랑 몸 보충하러 왔지.”
크림이 망설이지 않고 봉수의 곁에 앉았다.
진국의 얼굴이 환해졌다.
크림의 두 친구는 봉수와 진국의 눈치를 보며 주저했다.
“나랑 무지 친한 오빠야, 같이 앉자.”
크림이 두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세요. 뭐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거든요.”
진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닦네,
술잔을 챙겨 오네, 명함을 돌리네,
수선을 떨었다.
“저 이송화예요.”
봉수는 크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낯설었다.
나머지 두 여자도 인사를 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들이야. 애들아, 내가 말한 그 코지의 오빠야.”
“어머 안녕하세요.”
두 여자가 봉수를 보곤 눈웃음을 지었다.
봉수는 괜히 민망해졌다.
“마침 잘들 오셨습니다. 우리가 요즘 여자 속옷 때문에 죽을 맛입니다.”
“왜요?”
발랄하고 귀엽게 생긴 크림의 친구 하나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진국에게 물었다.
진국 역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다음 주 월요일까지 만들어야 하거든요.
안 그랬다간 월급이 깎일 판입니다.”
진국은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진국의 눈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오빠 나 어제 생리 끝났거든.”
크림이 봉수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그래….”
진국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재주 좋은 놈이야.’
봉수는 송화와 함께 자취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봉수는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진국이 오빠랑 어디로 갔을 거야.”
“진국이 그 놈 하여튼…”
“뭐 희진이랑 성미도 진국이 오빠 좋아하는 거 같던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오빠두 참, 우린 뭐 만난 지 얼마나 됐나?”
봉수는 걸음을 멈춰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속옷을 보여준 송화였다.
“진국이 오빤 좋겠다.”
송화가 봉수의 팔짱을 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실 개네들 중성애자거든.”
“중성애자는 또 뭐야?”
“정말 몰라서 그래?”
“알지만 정말 그런 애들이 있어?”
“그럼, 여자랑 할 때도 좋지만 남자랑 할 때도 싫지 않은 애들이 얼마나 많다고.
아마 진국이 오빠 지금 희진이랑 성미랑 천국에 가 있는 기분일걸.”
송화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설마 오빠도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냐?”
송화가 눈을 흘겼다.
“말도 하지 마라. 난 두 여자 감당 못한다.”
봉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포르노에서나 봤지.’
사실 송화를 만난 뒤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 역시 봉수에겐 현실감이 없었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사랑이니 슬픔이니 이별이니 순수니 하는 것들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원래 그러니?”
“다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취향이지 뭐.”
봉수는 대학 때 한 학기를 남겨놓고 군대를 갔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 보이지 않아 학교 마치기가 두려웠다.
뒷바라지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힘겨워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경주에서 한동안 노동 일을 했다.
겨우겨우 학비와 1년치 생활비를 벌어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마저 졸업했다.
그랬는데 그 3년 사이 세상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술집에 가면 전문 직업 여성보다 여대생들이 더 많다는 거 아냐?’
진국이 했던 말이 귀속에 맴돌았다.
하루 자고 나면 모든 전자제품이 구형이 되어버리는 세상,
여자도 남자도 하루가 지나면 낡은 게 되어버리는 세상인 듯했다.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지만 뚜렷하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봉수가 자취방으로 들어서며 방안의 불을 켰다.
“오빠 방 정말 근사하다.”
송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면 전체를 채운 유명 화가들의 모조 그림, 맞은편 벽은 화집과 책들로 가득했다.
그 뒤로 봉수의 작업실이 따로 있었다.
이젤과 그리다만 그림이 널려 있었다.
‘너 사기꾼이야.’
송림이 아이디어 기획안을 최종적으로 수정하고 있을 때 채팅 창이 떴다.
강쇠였다.
‘사기꾼이라뇨? 당신이 말한 팬티를 분명히 보내줬잖아요.’
송림은 화가 났다.
‘화를 낼 처지가 아닐텐데…’
‘나일론의 함유량? 그 정도는 누구라도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거야.’
‘원래 남이 해 놓은 걸 보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인간은 남이 하니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
송림은 더 이상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 아냐?’
‘난 분명히 보냈어. 못 받았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냐.’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냐. 난 분명히 일주일 입은 팬티를 보내달라고 말했어.
그런데 네가 보낸 건 그냥 새 거잖아.’
그제야 송림은 ‘강쇠’가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송림은 채팅 창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다시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어.
난 적어도 이틀 정도는 입고 보내줄 거라고는 생각했었지.
새 거라면 내가 그냥 가게 가서 사면 되는 거야.
굳이 너한테 내가 실험한 사실들을 알려줘 가면서 그러지 않아.’
송림은 더 이상 상대하기 싫었다.
채팅 창을 삭제시키려할 때 다시 문자가 올라왔다.
‘너 참 둔하다. 너 몇 살이니?
너와 내가 말한 기록들 내 컴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 거 몰라?
팬티 한 장에 목숨 걸지 마라.
괜한 일에 휘말려서 직장 잃지 말고. 나를 변태라고 생각하는 거 니 마음인데….
나는 그저 여자의 속옷을 수집할 뿐야.’
‘강쇠’가 채팅 방에서 사라졌다.
송림은 괜한 거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었던 팬티로 뭘하려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자 송림은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고 채연말고는 이 문제를 상의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놈 정말 이상한 놈이네. 그냥 그 놈 뜻대로 해줘.”
채연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송림은 지금 스토커를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번 ‘강쇠’의 뜻을 들어주면 어쩌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 다닐 것만 같았다.
문득 중경이 떠올랐다. 그라면 의지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선배가 이 시각에 어쩐 일입니까?”
목소리가 밝았다. 늘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던 그라 의아했다.
“나 좀 만나줄 수 있겠어요?”
“내일 회사에서 보면 안 되는 일인가 보죠?”
송림은 할말이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게 자신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 이유가 있겠죠? 어디서 뵐까요?”
송림은 중경을 ‘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푸른색 반바지에 연두색 라운드 티를 입고 나왔다.
늘 세미 정장을 하고 다니던 그를 보았던 터라 신선하고 생소했다.
“전혀 다른 느낌이네요.”
“그건 나 선배도 마찬가집니다.”
송림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민소매 셔츠에 몸에 달라붙는 7부 스판 바지 차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