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발정기 8
“그런 놈에겐 분명하게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일단 그 놈이 말한 팬티를 입고 지내세요.
전달은 제가 가서 직접 할게요.”
송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송림을 쳐다보는 중경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일론 함유량의 변화를 줘서 탄력이나 촉감이 달라진다는 건
사실 다른 곳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실험을 했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햄 원단과 7% 차이를 두었을 때 생긴
그런 변화들에 대한 논문이 외국 학술지에 이미 발표된 겁니다.
그리고 아직 누구 하나 완제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슨 로얄티나
지적재산권의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송림은 그 동안 마음 졸였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정말 그런 논문이 있습니까?”
신기하기도 했다.
“제가 아침에 논문 원본을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확실히 수석 입사라 뭔가 다르긴 달라.’
“다른 나라에서 7%를 더 함유한 제품이 만들어졌던 모양인데
조직력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복원력이 현저히 떨어졌던 모양이에요.”
송림은 그가 구세주 같았다.
“그런 건 어떻게 다 아신 거예요?”
“늘 깨어 있고 공부하다 보면…
그나 저나 그런 놈은 한번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계속 달라붙습니다.
설령 사실의 진위가 밝혀져도 말입니다.”
송림은 맥주와 과일 안주를 기분 좋게 시켰다.
“술 마시기에 너무 늦지 않았나요?”
“제가 고마운 걸 어떡해요.
이 정도로 내일 출근하는 데 지장이 있나요?”
“저야 괜찮지만 나 선배가…”
“나도 한 술 해요.”
송림이 테이블에 놓인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송림은 중경을 통해 직장동료로서의 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언제나 늘 그렇게 공부해요?”
“우리 업무에 관한 것만 그렇습니다.”
“이제 몇 달 지났는데 계속해서 딱딱하게 말할 거예요?
사실 중경씨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잖아요.”
“그런가요?”
중경은 별다른 표정 없이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중경씨는 아무튼 딱딱해. 그러니까 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하지.”
“나 선배 나도 부드러울 때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남잡니다.”
“내가 볼 땐 전혀 그렇지 않아요. 잠깐만요.”
송림은 화장실을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중경 앞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송림은 중경의 곁에 앉았다. 남자는 중경의 대학 시절 친구였다.
그는 술을 한잔 쳐 건배를 제안하더니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송림은 남자가 제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맞은편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냥 중경의 곁에 앉아 있고 싶었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생각했던 것이지만
중경은 강 실장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차가운 성격까지.
“정말로 내 속옷을 전달해줄 생각이에요?”
“난 그런 놈들의 행태에 대해 잘 알아요.
한때 나랑 같이 살았던 놈도 그런 부류였으니까.”
“나한테 왜 잘 해주죠?”
“동료니까.”
“오빠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여.”
송화가 욕실에서 나왔다.
수건으로 앞을 가린 채 물기를 뚝뚝 흘렸다.
“다를 거 없어.”
“사실 처음에 오빠도 그저 그런 늑대로만 생각했지.”
“늑대야.”
“그래도 오빠 같은 늑대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송화는 수건을 내던지고 알몸으로 봉수의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
봉수는 담배를 꺼내 물고 그런 송화를 바라보았다.
“오빤 원래 꿈이 뭐였어?”
송화는 봉수가 그린 그림을 이것저것 들춰보며 물었다.
봉수는 몸을 소파 깊이 묻었다.
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자정을 넘기니 제법 서늘했다.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을 거 같은데?”
송화가 한 여인의 초상화를 들고 봉수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초상화가 송화의 가슴과 아랫배를 가렸다.
‘꿈?’
봉수는 송화에게 대답하지 않고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꿈이 뭐였을까.’
봉수는 경주에서 올라와 대학을 다니던 시절들을 떠올렸다.
이중섭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속옷을 생산하는 ‘코지’의 디자인 파트의 일개 직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군 제대 후 복학한 동생, 고향의 낡은 한옥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
일을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현실과 꿈은 늘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꿈을 버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졸업 후 지금껏 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꿈이 뭔데?”
“멋진 시나리오를 쓰는 거.”
송화가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의자를 가져다 봉수 앞에 앉았다.
그녀의 몸이 형광등 불빛에 환했다.
거리낌 없는 그녀가 왠지 보기 좋았다.
“나 이대로 그려줘. 내 몸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거 보다 그림으로 그리는 게 더 낭만적인 거 같아.”
송화가 다리를 꼬곤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림 손 놓은 지 오래 됐어.”
봉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 가락이 어디 가나.”
송화가 억지로 봉수의 손에 붓을 쥐어주었다.
유화물감에 타서 쓰는 테라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가까이 작업실엔 발길도 하지 않았고
‘코지’에 입사한 뒤론 붓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봉수는 송화가 쥐어준 붓을 잡았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저 초상화의 여자는 누구야?”
송화가 이젤 위에 올려놓은 초상화를 가리켰다.
“옛날 여자.”
“옛날 여자? 멋있다. 저 여잔 지금 뭐해?”
봉수가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초상화 속의 여자.
한때 열병을 앓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무척 사랑했던 여자 같아.”
송화의 이야기가 귓전을 맴돌았다.
봉수는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한동안 잊혀졌던 열정이 다시 살아난 게 신기했다.
붓을 내려놓고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30호 크기의 캔버스 안에 송화의 벗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선은 거칠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배어 나왔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다리 사이의 의자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빠, 이게 나야?”
봉수가 슬쩍 송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제 나보다 더 요염한 거 같은데…”
“넌 원래 애가 요염했잖아.”
“음, 내 욕망까지 그려낼 줄 아는 작가라. 대단한 걸.”
송화가 캔버스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였다.
“이리 와.”
송화가 봉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봉수를 욕실로 데려갔다.
욕실이래야 거울과 샤워 꼭지가 하나 달려 있을 뿐이었다.
“벗어!”
송화가 명령하듯 말했다.
“내 몸을 그려준 보답으로 내가 비누칠해서 땀을 씻어줄게.”
“그럴 필요 없어. 나도 너한테 도움을 받았는데 뭘.”
“그래서 내가 비누칠 해주는 게 싫단 말야?”
송화는 거품 타월에 비누칠을 하고 있었다.
“얼른 벗어!”
봉수는 마지못해 반바지와 런링셔츠를 벗었다.
봉수의 몸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뭔가를 오빠처럼 열심히 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
송화가 거품타월로 봉수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붓 놀릴 때보니까 꼭 신들린 사람 같았어.”
송화의 손이 사타구니에 이르렀다.
그녀는 봉수의 물건을 쥐고 부드럽고 세밀하게 타월로 문질렀다.
“그런 사람이 왜 회사 같은 델 다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송화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우울한 얘기네.”
송화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수의 물건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누가 묻은 송화의 손과 봉수의 물건이 서로 미끈거렸다.
“내가 아는 선배 중에 꽤 괜찮은 직장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 두고
소설 쓴다며 시골의 폐교를 빌려서 들어간 사람이 있어. 무모해 보이긴 한데.
한번쯤 그런 도박도 필요한 거 같아.”
“그래, 그건 그야말로 도박이야.”
송화가 이번엔 자신의 몸에 비누칠을 했다.
그리곤 봉수에게 달라붙었다.
서로의 몸이 미끈거렸다. 봉수에게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송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거품속에 담겨 있는 참을 수 없는 욕망에 몸을 맡기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 그래도 먹고 살 쌀 값은 있었던 모양이지.”
“와이프가 뭘 한다고 그랬는데…”
“우리 가족은 내가 아니면 여러 사람 굶어 죽어.”
봉수의 말에 송화가 그를 힘있게 끌어 앉았다.
“내가 한번 희생해볼까?”
“넌 아직…. 앞으로 남자도 많이 만나야 하고…”
“어리긴 옛날 같으면 애 둘은 낳았겠다.”
송화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얼굴 앞에서 봉수의 물건이 대롱거렸다.
'원가를 내린다?’
중경은 모니터에 올라온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간 뒤라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저가 공세라? 사장의 경영 방침과는 상반되는데…’
중경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는 봉수의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동대문 속옷 업체랑 전략적 제휴? 웃기는군.’
중경은 순간 번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봉수의 파일을 자신의 컴퓨터로 전송시킨 후 의자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중경은 디자인 2팀의 사무실로 들어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브랜드를 하나 더 만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코지’ 상품이지만 저가 브랜드 디자인을 단순화 시켜서…’
중경은 봉수의 파일에서 중요 항목들만 남겨두고 나머지 것들은 삭제시켰다.
‘문제는 원단을 제공하는 공장이라는 말이네.
그 공장을 가스나에서 독점으로 계약을 맺고 있고….
단가를 더 처 준다면 가스나와 손을 끊고 코지와 손을 잡겠지.
과연 사장이 새로운 브랜드를 하나 만들어 낸다는 데 동의를 할까.’
중경은 괜히 신바람이 났다.
그 동안 자신이 아이디어로 만들어 놓은 것은
‘비라’에서 만든 신상품과의 착용감에 있어 차별화를 두어야 한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야말로 속옷은 그 착용감이 비슷했다.
어쨌든 ‘비라’의 신상품 역시 그 원단으로 햄 원단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디자인 2팀 김 중경입니다.”
“나야, 해수.”
중경은 말문이 탁 막혔다.
중경의 첫 사랑, 첫 여자.
먼저 전화를 걸어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 어쩐 일이야?”
“나 너네 회사 앞 카페야.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전화했어. 나올래?”
2시에 팀별 회의가 있으니 한 시간 반은 여유가 있었다.
“꼭 이 주일만에 다시 보네.”
해수가 중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전과 달리 따스했다.
중경은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난 네가 좀 더 큰 기업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코지가 어때서. 나는 용의 꼬리 보단 뱀의 머리가 좋아.”
“소문에 들으니까 코지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며,
역대 입사 성적 중에서도 최고라던데.”
“내 소문이 거기까지 갔어?”
“그냥 관심이 가서 알아 봤지.”
“아직도 나한테 관심이 있어?”
중경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손을 떨지 않으려고 해수가 느끼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나의 첫사랑인데 관심이 없다면 그게 정상인가?”
차가운 냉녹차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중경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까탈스럽고 늘 자기 중심적이던 그녀가 아니었다.
먼저 사랑을 고백하고 먼저 이별을 선언했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실은 나 2년 전에 이혼했어.”
중경은 가슴이 서늘했다.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넌, 결혼 안 했지?”
중경은 다리의 힘이 모두 빠져버린 듯했다.
“추억이나 되짚어 보자고 나를 부른 거야?”
중경은 마음과 달리 말이 차갑게 나왔다.
“아니, 언젠가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 기회가 이제 온 거구.”
중경을 보고 내내 밝은 모습을 짓던 해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상처 같은 거 잊을 만큼 세월이 지났잖아.”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 안 해도 된다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너랑 나랑 예전처럼 지낼 순 없지만
그냥 친구로라도 서로 연락하고 지냈으면 좋겠어.”
“친구?”
중경은 서글펐다. 해수가 떠날 때 친구로라도 남아 있게 해달라고
자존심 구겨가며 매달렸던 기억 때문이었다.
“너는 참 편하다.
옛일은 하나도 기억 못하는 것처럼 말하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때 난 너무 철이 없었어.
원래 동갑이면 여자가 더 빨리 철이 든다고 그러던데 난 아니었나 봐.”
중경은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너 편한 대로 떠나고 너 편한 대로 사과하는 거니?”
중경은 가능한 차갑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럼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면 사과를 받아줄 수 있는 거지?”
“어떤 식으로 사과를 한다고 해도 상처는 남아.”
“상처도 아물잖아.”
“그래도 흉터는 남아.”
중경은 마음과 달리 말이 자꾸 빗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중경의 자존심으로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너하고 결혼을 했어도 아마 헤어졌을 거야.
만약에 그랬다면 지금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겠지.
결혼하지 않았기에 친구로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네가 그렇게 싫다면 나도 이쯤에서 그만둘게.”
해수는 고개를 떨구고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중경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외모가 신경 쓰였다.
예전의 모습보다 초라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우리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
나한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중경이 한발 물러섰다.
“그래,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제안을 했지. 그리고 이거….”
해수가 핸드백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뭐야?”
“우리 백화점에서 이번에 한층 전체를 속옷 매장으로 꾸미려고 기획하고 있어.”
중경이 해수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중에 메인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 디스플레이 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질이나 디자인이 떨어지지 않는 속옷이 필요해.
현재 코지의 속옷으론 부적합하다는 거지. 코너 자리를 차지할 순 있지만 말야.”
중경은 귀가 번쩍 열렸다.
봉수의 기획안과 ‘가이아’의 운영 방침이 맞아떨어진 때문이었다.
중경이 해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만하면 사과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다, 다른 업체들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일이야?”
“이거 우리 회사의 대외비야.
조만간에 공개 프리젠테이션이 있을 거야.
코지가 요즘 ‘비라’한테 맥을 못 춘다며.
백화점에서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지?”
중경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